손무덤
-박노해-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 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 주질 못하였다.
훤한 대낮에 산동네 구멍가게 주저앉아 쇠주병을 비우고
정형이 부탁한 산재 관계 책을 찾아
종로의 크다는 책방을 둘러봐도
엠병할, 산데미 같은 책들 중에
노동자가 읽을 책은 두 눈 까뒤집어도 없고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 거리엔
세련된 남녀들이 화사한 봄빛으로 흘러가고
영화에서 본 미국 상가처럼
외국 상표 찍힌 왼갖 좋은 것들이 휘황하여
작업화를 신은 내가
마치 탈출한 죄수처럼 쫄드만
고층 사우나 빌딩 앞엔 자가용이 즐비하고
고급 요정 살롱 앞에도 승용차가 가득하고
거대한 백화점이 넘쳐 흐르고
프로 야구장엔 함성이 일고
노동자들이 칼처럼 곤두세워 좆빠져라 일할 시간에
느긋하게 즐기는 년놈들이 왜 이리 많은지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
선진 조국의 종로 거리를 나는 ET가 되어
얼나간 미친 놈처럼 헤매이다
일당 4,800원짜리 노동자로 돌아와
연장 노동 도장을 찍는다.
내 품 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 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노동의 새벽>(1984)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사실적, 저항적, 현실비판적, 참여적
◆ 표현 :
* 반어적 표현을 통해 의미를 강조함.
* 구체적인 사물의 이름과 비속어를 사용하여 현실감을 높임.
* '손'의 대조적 기법 : 자본가(부유층)의 손 ⇔ 노동자(빈민층)의 손
흰색 푸른색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타이탄 짐칸 → 트럭의 짐 싣는 곳,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
* 36년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 열악한 노동 현실에 대한 울분과 분노
* 봉천동 산동네 → 도시 노동자들의 빈곤한 삶의 공간
* 엠병할 → 비속어의 사용으로 화자의 심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냄.
* 화창한 봄날 오후의 종로 거리 → 화자가 처한 현실과 상반되는 장면을 제시하여 극적인 효과를 거둠.
* 탈출한 죄수 → 화자 자신의 처지와 너무도 다른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
삶의 현장인 '공장'에만 거의 갇혀지내다시피 하면서 지내는(죄수) 화자의 삶이 연상됨.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 현실과는 상반된 노래 가사의 일부임.(반어적 표현)
* ET → 화자의 처지와 너무도 다른 현실에 부적응하는 모습을 '외계인'에다 비유함.
* 일하는 손들이 /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올 때까지
◆ 제재 : 열악한 노동 현실로 잘려 나간 노동자의 손
◆ 주제 :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이고 열악한 노동 현실과 세상을 향한 그들의 염원
[시상의 흐름(짜임)]
◆ 1∼2연 : 절망스럽고 서글픈 노동 현실
◆ 3∼4연 : 비극적인 노동자의 삶
◆ 5∼6연 : 노동 현실을 외면하는 사회의 실상
◆ 7연 : 모순을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자세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고도 산업 사회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철저히 무시되고 소외되었던 노동자들의 인권과 처우, 36세 가장의 소박한 꿈과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산재의 희생양이 된 1980년대의 노동자의 현실이 자본가나 가진 자와의 대비를 통하여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프레스(재료에 힘을 가하여 변형시켜 가공하는 기계)에 손이 잘린 정형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나, 그러한 긴급한 상황에도 노동자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직설적으로 그려낸다. 또한 산재 관계 책을 구하러 나간 시내에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삶의 비참함을 절감한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고 그것에 좌절하기보다는 분노를 통해 투쟁 의지를 다지게 된다. 잘린 손을 공장 담벼락 밑에 묻으며, 자신들을 착취하는 손, 즉 노동자를 억압하는 사회를 변혁할 것임을 다짐한다. 부당한 노동 현실을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몸짓을 통해 이룩할 평등과 자유의 세상을 '기쁨의 손짓'이라는 시어에 압축시키고 있다.
[박노해의 작품 세계]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섬유 · 금속 · 정비 노동자로 일했던 시인 박노해는 유신 말기인 1978년부터 노동 운동에 뛰어들었다. 노동자의 삶을 다룬 시가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박노해의 노동시들은 바로 노동자 자신에 의한 시쓰기라는 점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노동 운동을 하던 1983년 '시다의 꿈'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간행한 이후, 진진하고 구체적인 노동 현장 경험을 토대로 한 사실주의의 정신으로 노동 해방이라는 현실적인 목표를 지향해 가고 있다.
['손'의 상징]
처음 등장하는 소재는 '정형의 날아가 버린 손', 즉 '노동자의 손'이다. 정형이라는 사람은 36세의 가난한 노동자로 그의 손은 아내와 아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밑천이었다. 그러한 손이 잘렸다는 것은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연결된다. 동료들은 정형의 보상 수급을 위해 산업 재해와 관련된 책을 찾아보나, 노동자들이 읽을 만한 책이 없음을 알게 된다. 바깥 세상에는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노동자들은 슬픔을 안고 공장으로 돌아와 연장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동료들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해진 정형의 손을 공장 담벼락에 묻으며, 자신들의 희생을 착취하며 놀고 먹는 하얀 손들에 대한 분노를 드러낸다. 그 하얀 손들을 잘라 내겠다는 것은 노동자들의 착취를 근절하여 노동자들이 정당하게 대우받고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한 것이다. 이 시에서는 '푸르뎅뎅해진 잘린 손'과 '일 안 하고 놀고 먹는 하얀 손들'의 대조를 통해 시인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Reading n See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시 해설]쌍봉낙타 - 김승희 - (0) | 2021.12.28 |
---|---|
[현대시 해설]그리움 -이용악- (0) | 2021.12.28 |
[현대시 해설]서울길 - 김지하 - (0) | 2021.12.28 |
[현대시 해설]살구꽃 핀 마을 - 이호우 - (0) | 2021.12.28 |
[현대시 해설]산유화 - 김소월 - (1) | 2021.12.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