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 해설]단 념 -김기림-
단 념 -김기림-
이해와 감상
이 짤막한 수필에는 크게 보면 두 가지 삶의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하나는 '영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속인의 길'이다. 지은이는 여기서 영웅의 삶의 모습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것은 일체의 욕망하는 삶과 일체를 단념하는 삶이다. 이 두 삶의 모습은 서로 극단을 달리고 있지만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라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 치열하게 욕망하거나 치열하게 단념하는 삶이란 게 그리 쉽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우리들의 삶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지적한다. 젊었을 때는 나름대로 자기 건설을 위해 꿈의 좌표를 향해 달려가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하나씩 그 꿈을 접고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에 대한 필자의 이런 개괄적인 이야기는 끝에 가서 예술과 학문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약간은 단념하고 약간은 욕망하고 하는 것이 제일 안전한 일인지는 몰라도 예술이나 학문에 있어 권할 만한 태도는 아니라고 말한다. 끝에 가서 나타난 필자의 독백조의 질문에 이 글의 주제 의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일체(一切)냐 그렇지 않으면 무(無)냐?'라는 독백조의 질문 속에는 예술과 학문을 위해서는 일체를 해야 하고, 무(無)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적 성취나 학문적 업적을 위해서는 올인을 하든지 아니면, 올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각오가 없다면 '탄탄대로의 속인의 길을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필자는 말한다.
요점 정리
◆ 갈래 및 성격 : 경수필(교훈적, 비판적)
◆ 특성
* 특정한 태도에 대한 글쓴이의 평가가 드러남.
* 세속적인 삶의 전형을 열거함.
* 설의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의미를 부각시킴.
* 경계해야 할 삶의 태도를 언급함.
* 구체적인 사례를 활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함.
* 비유를 통해 글쓴이가 지향하는 삶을 보여줌.
*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글쓴이의 생각을 나타냄.
* 다른 태도와 비교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냄.
◆ 주제 : 진정한 삶의 자세, 예술 또는 학문에 임하는 진정한 자세
작품 읽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별 게 아니었다. 끝없이 단념해 가는 것. 그것뿐인 것 같다.
* 살아가는 것은 끝없는 단념
산 너머 저 산 너머는 행복이 있다. 언제고 그 산을 넘어 넓은 들로 나가 본다는 것이 산골 젊은이들의 꿈이었다. 그러나 이윽고는 산 너머 생각도 잊어 버리고 '아르네'(감성적이며 먼 곳을 동경하는 순진한 젊은이를 상징하는 소설 속의 인물. 노르웨이의 작가 비에르손이 쓴 소설 「아르네」의 주인공)는 결혼을 한다. 머지 않아서 아르네는 사오 남매의 복(福) 가진 아버지가 될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수많은 아르네들은 그만 나폴레옹을 단념하고 셰익스피어를 단념하고 토머스 아퀴나스를 단념하고 렘브란트를 단념하고 자못 풍정낭식(風定浪息. 들떠서 어수선하던 것이 가라앉음을 이르는 말)한 생애를 이웃 농부들의 질소(質素. 꾸밈이 없고 수수함.)한 관장(觀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르는 장례) 속에 마치는 것이다.(대유법)
그러나 모든 것을 아주 단념해 버리는 것은 용기를 요하는 일이다. 가계를 버리고 처자를 버리고 지위를 버리고 드디어 온갖 욕망의 불덩이인 육체를 몹쓸 고행으로써 벌하는 수행승의 생애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무(無)에 접하는 것이다.
* 용기를 요하는 단념
그런데 이와는 아주 반대로 끝없이 새로운 것을 욕망하고 추구하고 돌진하고 대립하고 깨뜨리고 불타다가 생명의 마지막 불꽃마저 꺼진 뒤에야 끊어지는 생활 태도가 있다. 돈 후안이 그랬고 베토벤이 그랬고 '장 크리스토프'의 주인공이 그랬고 랭보가 그랬고 로렌츠가 그랬고 고갱이 그랬다.
* 단념과 반대되는 욕망하는 삶
이 두 길은 한 가지로 영웅의 길이다. 다만 그 하나는 영구한 적멸(寂滅)로 가고 하나는 그 부단한 건설로 향한다. 이 두 나무의 과실로 한편에 인도의 오늘이 있고 다른 한편에 서양 문명이 있다.(앞서 제시한 대조적인 두 가지 삶의 태도를 모두 높이 평가함.)
이러한 두 가지 극단 사이에 있는 가장 참한 조행(操行. 태도와 행실을 아울러 이르는 말) 갑(甲)에 속하는 태도가 있다. 그저 얼마간 욕망하다가 얼마간 단념하고……. 아주 단념도 못 하고 아주 쫓아가지도 않고 그러는 사이에 분에 맞는 정도의 지위와 명예와 부동산과 자녀를 거느리고 영양도 갑을 보전하고 때로는 표창(表彰)도 되고 해서 한 편(篇) 아담한 통속소설 주인공의 표본이 된다. 말하자면 속인(俗人) 처세의 극치다.
이십 대에는 성히 욕망하고 추구하다가도 삼십 대만 잡아 서면 사람들은 더욱 성하게 단념해야 하나 보다. 학문을 단념하고 연애를 단념하고 새로운 것을 단념하고 발명을 단념하고 드디어는 착한 사람이고자 하던 일까지 단념해야 한다. 삼십이 넘어 가지고도 시인이라는 것은 망나니라는 말과 같다고 한 누구의 말은 어쩌면 그렇게도 찬란한 명구냐.
* 속인의 처세
약간은 단념하고 약간은 욕망하고 하는 것이 제일 안전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단념은 또한 처량한 단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에 있어서도 학문에 있어서도 나는 나 자신과 친한 벗에게는 이 고상한 섭생법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반어적인 표현으로 극단을 절충하는 모습을 비판함.)
'일체(一切)냐, 그렇지 않으면 무(無)냐.'
예술도 학문도 늘 이 두 단애(斷崖.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의 절정을 가는 것 같다. 평온을 바라는 시민은 마땅히 기어 내려가서 저 골짜기 밑바닥의 탄탄대로를 감이 좋을 것이다.(비유적인 표현으로 여운을 주어 독자들의 성찰을 유도함.)
* 두 단애의 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