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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 해설]풍란(風蘭) -이병기-

휴리스틱31 2022. 4. 1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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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 란(風蘭)                      -이병기-

 

이해와 감상

 

이 글은 난의 일반적인 생태를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난은 모래와 물로 살며, 물, 거름, 햇빛이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모두를 적절하게 조화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의 아름다움, 방향을 가장 절실하게 느꼈던 순간을 기술함으로써 난과 자신의 생활을 관련시키고 있다. 그러다가 난을 미처 돌볼 수 없었던 자신의 개인사가 조선어학회 사건, 8.15해방, 6.25사변 등의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제대로 길러내지 못했던 일들을 전개하고 있다. 그 후 또 다시 난을 기르게 되었고, 병석에서 난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절감하였다는 내용이다.

난초를 기르는 담담한 이야기인데, 그 위로 우리 민족의 역사가 지닌 우여곡절이 주마등처럼 흐르고 있다. 해방 전후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시대를, 전쟁과 그 후의 궁핍을 난과 더불어 겪었고 난을 통해 그 어려움들을 뛰어 넘으려 하고 있다. 작자에게 있어 난초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다. 난은 가람의 정신세계의 한부분 그 자체이며, 따라서 난과 같이 고결한 작자의 인간적 면모를 느끼게 해주는 글이기도 하다. 곽란으로 고통받을 때 풍란이 하얗게 꽃을 피웠고 밤에 깨어 앉아 그 품과 향을 노래하는 시를 쓰는 모습은 가람에게 난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요점 정리

 

 갈래 : 경수필

 성격 : 관조적, 예찬적, 체험적

 표현 : 간결체

 주제 : 난초의 청초함과 고결한 기품 예찬

          고결한 인간의 정신적 세계의 소중함

 출전 : <원광문화>(1954)

 삽입 시조 : 난의 속성을 통해, 난이 지닌 기품과 향기는 비록 눈에 띠지 않는 곳에 있어도 동일한 정신적 깊이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안다는 것으로, 정신적 삶의 소중함을 노래함.

 

생각해 보기

 

 가람과 난초

가람 이병기는 그의 생활과 작품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가람이 그의 생애에 걸쳐 술과 난초와 책을 얼마나 사랑하였는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술이 그의 호방하고도 거리낌 없는 기절을, 책에 대한 학자로써의 열정을 나타낸 것이라면, 난초에 대한 사랑은 고아한 풍경 속에서 새로운 향기를 찾으려 했던 시조 시인으로써의 노력과 그 뜻을 같이 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난초가 가람의 작품 세계를 해명하는 상징물로서 등장한 것은 결코 범상한 인연이 아니다. 난초 이외에도 매화, 수선화는 가람의 대표적인 소재이다. 이것들은 어렵고 각박한 고난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꿋꿋한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이니, 가람의 삶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곧 가람 자신의 마음과 표상을 난초의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난초를 통해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난초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고결한 인간의 정신적 세계를 표상한다는 것이다.

 

 

작품 읽기

 

나는 난(蘭)을 기른 지 20여 년, 20여 종으로 30여 분(盆)까지 두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의 집을 화초집이라기도 하고, 난초 병원이라기도 한다. 화초 가운데 난이 가장 기르기 어렵다. 난을 달라는 이는 많으나, 잘 기르는 이는 드물다. 난을 나누어 가면 죽이지 않으면 병을 내는 것이다. 난은 모래와 물론 산다. 거름을 잘못하면 죽든지 병이 나든지 한다. 그리고 볕도 아침 저녁 외에는 아니 쬐어야 한다. 적어도 10년 이상 길러 보고야 그 미립이 난다 하는 건, 첫째 물 줄 줄을 알고, 둘째 거름 줄 줄을 알고, 셋째 위치를 막아 줄 줄을 알아야 한다. 조금만 촉랭(觸冷)해도 감기가 들고 뿌리가 얼면 바로 죽는다.  

이건 서울 계동(季冬) 홍술햇골에서 살 때 일이었다. 휘문 중학교의 교편을 잡고, 독서(讀書) 작시(作詩)도 하고, 고서도 사들이고, 그 틈으로 난을 길렀던 것이다. 한가롭고 자유로운 맛은 몹시 바쁜 가운데에서 깨닫는 것이다. 원고를 쓰다가 밤을 새우기도 왕왕 하였다.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난의 위안이 더 필요하였다. 그 푸른 잎을 보고 방렬(芳烈)한 향을 맡을 순간에. 문득 환희의 별유세계(別有世界)가 들어 무아무상(無我無想)의 경지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어 학회 사건에 피검되어 홍원, 함흥서 2년 만에 돌아와 보니, 난은 반수 이상이 죽었다. 그해 여산으로 돌아와서 십여 분을 간신히 살렸다. 갑자기 8.15 해방이 되자 나는 서울로 또 가 있었다. 한겨울을 지내고 와 보니 난은 모두 죽었고, 겨우 뿌리만 성한 것이 두어 개 있었다. 그걸 서울로 가지고 가 또 살려 잎이 돋아나게 하였다. 건란(建蘭)과 춘란(春蘭)이다. 춘란은 중국 춘란이 진기한 것이다. 꽃이나 보려하던 것이, 또 6.25사변으로 피난하였다가 그 다음해 여름에 가 보니, 장독대 옆 풀섶 속에 그 고해(枯骸)만 엉성하게 남아 있었다.  

그 후 전주로 와 양사제에 있으매, 소공(素空)이 건란 한 분(盆)을 주었고, 고경선 군이 제주서 풍란 한 등걸을 가지고 왔다. 풍란에는 웅란(雄蘭), 자란(雌蘭) 두 가지가 있는데, 자란은 이왕 안서 집에서 보던 그것으로서 잎이 넓죽하고, 웅란은 잎이 좁고 빼어났다. 물을 자주 주고, 겨울에는 특히 옹호하여, 자란은 네 잎이 돋고 웅란은 다복다복하게 길었다. 벌써 네 해가 되었다.  

십여 일 전 나는 바닷게를 먹고 중독되어 곽란(藿亂)이 났다. 5, 6일 동안 미음만 마시고 인삼 몇 뿌리 다려 먹고 나왔으되, 그래도 병석에 누워 더 조리하였다. 책도 보고, 시도 생각해 보았다. 풍란은 곁에 두었다. 하이얀 꽃이 몇 송이 벌렸다. 방렬(芳烈) 청상(淸爽)한 향이 움직이고 있다. 나는 밤에도 자다가 깨었다. 그 향을 맡으며 이렇게 생각을 하여 등불을 켜고 노트에 적었다.

완당(阮堂) 선생 한묵연(翰墨緣)이 있다듯이 나는 난연(蘭緣)이 있고 난복(蘭福)이 있다. 당귀자, 계수나무도 있으나, 이 웅란에는 백중(伯仲)할 수 없다. 이 웅란은 난 가운데에도 가장 진귀하다.

'간죽향수문주인(看竹向須問主人)'이라 하는 시구가 있다. 그도 그럴 듯하다. 나는 어느 집에 가 난을 보면,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겠다. 고서(古書)도 없고, 난(蘭)도 없이 되잖은 서화(書畵)나 붙여 논 방은, 비록 화려 광활하다 하더라도 그건 한 요리집에 불과하다. 두실와옥(斗室蝸屋)이라도 고서 몇 권, 난 두어 분, 그리고 그 사이 술이나 한병을 두었다면 삼공(三公)을 바꾸지 않을 것 아닌가! 빵은 육체나 기를 따름이지만 난은 정신을 기르지 않는가!

 

 

# 미립 : 경험을 통해 얻은 묘한 이치, 요령.

# 적어도 10년 ∼ 미립이 난다. : 난초는 적어도 10년 이상 길러 봐야 경험에서 얻는 묘한 이치와 요령을 깨닫게 된다.

# 촉랭 : 찬 기운이 몸에 닿음.

# 독서, ∼ 길렀던 것이다. : 책도 읽고, 시도 짓고, 옛날 서적도 사들이고, 그러는 틈틈이 난초를 길렀다는 의미. 작가의 고결한 선비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 방렬 : 향기가 몹시 짙음

# 무아무상 : 자신을 잊고 일체의 상념이 없는 상태

# 고해 : 말라 죽은 형체.

# 자연 : 보랏빛 연기, 담배 연기

# 곽란 : 음식에 체하여 토하고 설사하는 급성 위장병의 일종

# 영롱 : 1. 광체가 찬란함. 2. 금욕이 울리는 소리가 맑고 산뜻함.

# 청량 : 날씨가 맑고 청량함.

# 잎이 ∼바람으로 사노니.: 초장은 풍란의 잎과 뿌리를, 중장은 풍란의 속성과 꽃을, 종장은 풍란의 성질과 향기를 노래하고 있다.

# 숲 속에 숨겨 ∼아노니.: 비록 난이 숲 속에 숨겨져 있더라도 높고 조촐한 난의 품과 향기로 인해 높은 인격자는 그것을 안다는 뜻으로 난초와의 친화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 작가의 마음자세를 시시하고 있다.

# 완당 선생 :

# 한묵연 : 문한과 필묵에 대한 인연

# 백중 : 엇비슷하여 우열을 가리기 힘듦

# 간죽 향수 문주인 : 대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고 모름지기 그 주인을 묻는다. 즉 주인의 지조를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 요릿집 : 허장 성세뿐이고 속물 근성을 가진 사람의 집을 비유한 말.

# 두실와옥 : 매우 작은 집을 가리키는 말로, 자신의 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 삼공 : 삼정승, 곧,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 삼공을 바꾸지 않을 것 : 작가는 고서, 난, 술을 삼공에 비견하고 있다. 이세가지를 갖추고 있으면 삼정승에 비할 바 없이 만족스러운 경지를 느낀다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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