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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소설 줄거리/해설]소문의 벽(1971)-이청준-

휴리스틱31 2021. 11. 1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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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벽(1971)

-이청준- 

 

● 줄거리

 

잡지사 편집장인 '나'는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중, 누구에겐가 쫓기고 있다며 도와 달라는 한 사내를 만난다. 엉겁결에 그를 하숙방으로 데려와 함께 잠이 들었던 '나'는 아침에 깨어나서 사내가 사라져 버린 것을 발견한다.

 

이상한 생각이 든 '나'는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정신 병원을 찾아갔다가 그 사내가 병원에서 도망친 환자 박준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다. 담당 의사인 김 박사는 박준이 심한 히스테리의 일종인 진술 공포증에 걸려 있다고 말한다. 환자는 무엇인가로부터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있다고 공포를 느끼고 진술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박준의 본명은 박준일로, 1 · 2년 전만 해도 정력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던 소설가이다. '나'는 박준이 쓴 <괴상한 버릇>, <벌거벗은 사장님>, 그리고 제목이 붙어 있지 않은 중편소설 등을 읽게 된다. 그 소설 중에 박준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전짓불의 실체가 나타난다. 남해안의 조그만 포구가 고향인 박준은 6 · 25가 일어났던 해 가을, 밤중에 밀어닥쳐 전짓불을 들이대고 좌익이냐 우익이냐를 묻는 정체모를 사내들에게 공포감을 느꼈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깨달은 '나'는 김 박사에게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지만, 김 박사는 박준의 진술을 끌어내기 위한 방법을 포기하지 않는다. 끝내 김 박사는 박준의 병실 불을 끄고 전짓불을 들이대는 수단을 택하고 만다. 그날 밤 박준은 병실을 도망쳐 나가 버린다.

'나'는 박준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날 것인가 회의하면서 길을 걷다가 김 박사나 내가 박준의 병세를 악화시켰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한다.

 

 

● 인물의 성격

 

  → 잡지사 편집장. 이 글의 관찰자이자 서술자이다. 우연한 기회에 정신 병원을 탈출한 소설가 박준을 만나 그의 정신병의 근원에 호기심을 갖는다. 드디어 작가인 그가 '왜 글을 못 쓰는가'에 대한 해답을 발견한다.

 박 준 → 전쟁 때 겪은 전짓불의 공포와 현재의 불안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정신 병원에 자청해 들어간 소설가로 본명은 박준일이다. 그러나 거기서도 담당 의사의 고정된 질문과 전짓불의 충격으로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는 정말 미쳐서 병원을 뛰쳐 나간다.

 김 박사 → 박준의 담당 의사. 환자의 안위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잘못된 치료 방법을 고집한다. 고통의 근원을 외면하는 권위적 인물이다.

 

● 구성 단계

 

 발단 : 골목길에서 박준을 만남.

◆ 전개 : 박준에 대한 관심, 정신병원을 찾아감.

◆ 위기 : 박준의 치료 방법에 대하여 나와 김 박사의 의견이 대립됨.

◆ 절정 : 전짓불의 공포로 박준이 병원을 탈출함.

◆ 결말 : 박준의 행방 불명

 

 

● 이해와 감상

 

벽을 본 순간 무엇을 느끼는가? '답답함'과 '격리'라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그 벽이 실체의 벽이 아닌 무형의 소문의 벽일 때 더욱더 두려운 존재로 다가올 것이다. 유형의 벽은 쉽게 부숴 버릴 수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벽은 그렇게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편견과 억압으로 가득찬 '소문의 벽'이 숨통을 죄어 오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소설가 박준이 경험한 전짓불과 그의 세 편의 소설을 통해서, 진실의 숨통을 조이는, 보이지 않는 벽의 공포를 고발하고 있다.

 

잡지 편집 행위에 대한 회의에 빠진 작중 화자인 '나'는 자기의 문제에 대한 원인 규명에 힘쓴다. 그때 소설가 박준의 고통의 해명에 개입하게 된다. 여기서 박준의 세 편으 소설은 각기 주제를 받쳐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첫 번째 소설은 가사(假死) 상태의 주인공 이야기인데, 이는 자기에 대한 의미를 상실한 주인공의 허탈한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다. 두 번째 소설은 벌거벗은 사장님의 이야기로서, 어떤 진실을 알고도 주위의 간섭이나 이목 때문에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더욱 큰 비극을 맞게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세 번째 소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 즉 심문관이 등장한다. 그 자의 정체는 시대적 통념, 정치적 억압, 문학의 허위성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그가 심문관인 동시에 '소문의 벽'인 것이다.

 

이청준은 박준이란 인물과 그의 소설을 통하여 글쓰는 작업에 대한 작가 자신의 회의를 객관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박준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인 김 박사를 통하여 고통의 근원을 파악하지 못하는 권위주의적인 존재들을 비판한다.

 

 

◆ '소문의 벽'의 자기 완성을 위한 탐구

'소문의 벽'은 정말로 '미친 증세'가 아니라 '미쳐 보이고 싶은 증세'를 보이는 젊은 작가 박준의 작품과 행적을 추적하여, 오늘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의 정신적 궤적과 비밀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고 무의미한 혼란만 끝없이 계속되어 오던 잡지일에 대해서도 모종의 해답을 구해 보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잡지 편집장인 '나'가 지니게 된 '왜 글을 쓰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박준을 통해서 실마리가 풀리게 된다. 그것은 비단 박준이나 편집장에게 한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는 시대를 위기의 시대로 받아들인 정직한 지식인 모두에게 관계되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왜 글을 쓰지 못하는가'하는 물음은 여기서 한 사회가 처한 상황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염탐하는 절망적인 절규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박준은 작가란 '자기 진술'이란 임무를 지고 있다고 하며 '왜 쓰는가'에 대한 긍정적 대답을 고집하였다. '그런데 왜 쓰지 못하는가'라는 부정형 질문으로 그가 돌아서게 되는 것은 외부의 압력에 좌절된 광증에 의한 것이었음이 박준의 행적을 조사함으로써 밝혀진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소설을 쓴다는 자신의 의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계속 쓰기 위한 역설적인 자기 확인이다.

 

 1971년에 발표된 중편 소설이다. 삶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질문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소설가이고, 그는 억압된 상황과 작가의 사명 의식 사이에서 절망한 후,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는 의식의 병리 현상을 겪고 있는 인물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이 주인공의 정신적인 병리 현상을 분석해 들어가면서 그러한 현상의 요인을 찾아내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인물의 의식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 전쟁 당시의 충격에서 비롯된 공포증의 원인을 밝혀낸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이 같은 병리적 현상의 심층적인 요인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심층적인 요인에 의해 잠복되어 있던 증세가 왜 다시 나타나게 되었는가가 중요하다.

 

작가 이청준은 언어의 진실성이 거부되는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와 비슷한 상황적 위기의식을 바로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그 횡포에서 다시 발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진실이 거부되고 거짓된 언어가 인간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있는 당대적 상황, 말의 자유가 차단되고 있는 닫혀 있는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사회병리적 현상을 인간의식의 병리 현상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핵심사항 정리

 

◆ 갈래 : 현대 소설, 중편 소설, 액자 소설

◆ 배경 : 현대, 글쓰기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사회

◆ 시점 : 액자 밖 → 1인칭 관찰자 시점,  액자 속 → 전지적 작가 시점

◆ 표현 : 액자식 구성

바깥 이야기 서술자인 '나'가 박준을 관찰함.
안 이야기 첫 번째 소설
<괴상한 버릇>
* 은신처로써의 '잠'이 드러남.
* 주인공의 회피 심리가 드러남.
두 번째 소설
<벌거벗은 사장님>
* 억눌린 진술 욕망의 드러남.
* 작가적 양심과 현실의 갈등을 소설화함.
세 번째 소설
< - >
* 전짓불에 대한 두려움이 드러남.
* 인물의 과거 경험이 나타남.
인터뷰 기사 * 박준의 소설관이 드러남.
* '소문의 벽'의 무서움을 이야기함.

◆ 출전 : <문학과 지성>(1971)

◆ 주제

* 자기 진술의 욕망을 억압당한 한 인간의 정신적 상처

* 의사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한 한 인간의 정신적 상처

 

 

● 생각해 보기

 

1. 작가(소설가)에게 미치는 '전짓불'의 상징적 의미를 생각해 보자.

→ 한 작가가 지닌 진술(표현)의 욕망을 좌절시키는 외부의 압력(한 작가의 정직한 표현을 방해하는 상황적 요인).  작가의 전짓불에 대한 경험은 '이쪽에서 대답할 수 없는 것만 묻는 전짓불로 인한 공포감.  전짓불 뒤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정체 불명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2. 박준이 판단하고 있는 작가의 운명, 또는 의무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짓불의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끝끝내 자기의 진술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존재

3. '전짓불'과 '소문의 벽'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자.

→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불안 요소(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

 

● 더 읽을거리

 

◆ 박준이 정신 병원에서 탈출한 이유

소설의 후반부에서 박준은 '나'에게 자신이 일부러 미친 사람인 척했음을 고백하며 정신 병원에서 나가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2년 전 박준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여겼으며, 세상 어떤 일로부터도 온통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 책임을 추궁당할 일도 없고 협박을 당하며 쫓겨 다닐 일도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정신 병원에 찾아간 것이다. 그러나 피난처라고 생각했던 정신 병원에서는 전짓불의 추궁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포를 견디지 못한 박준은 결국 탈출을 하고 사라진다.

 

◆ 박준이 쓴 세 편의 소설

이 작품에서 박준의 소설은 '안 이야기'에 위치하면서, '나'가 박준에 대해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박준의 자기 진술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의 삶과 불안한 내면 심리를 형상화하고 있다.

* 첫 번째 소설 : <괴상한 버릇> → 어릴 적부터 불안함을 느낄 때마다 죽은 체하며 가사(가사) 상태로 잠을 자는 버릇이 있던 그는 결혼 후 어느 날 자다가 진짜 죽음을 맞이함.

* 두 번째 소설 : <벌거벗은 사장님> → 운전수는 사장님의 비밀을 알게 되지만 해고를 염려해 말하지 못하고, 결국 신경과민 증세가 생겨 다른 운전수들처럼 회사에서 쫓겨나게 됨.

* 세 번째 소설 : < - > → 자전적 소설로, G는 퇴근할 때마다 환상 속에 나타나는 심문관에게 취조를 받는데, 그때마다 전짓불의 공포와 관련된 사건을 이야기함.

 

 

◆ '소문의 벽'의 의미

소문의 벽은 무형의 벽이다. 유형의 벽이라면 쉽게 부숴 버릴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벽은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주인공 박준은 억압된 상황과 작가의 사명 의식 사이에서 절망하고,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는 병리 현상을 겪는다. 작품 속에서 박준은 소문의 벽에 둘러싸인 상태이다. 시대의 요구를 배반했다며 박준의 첫 번째 소설을 발표하지 않고 서랍 속에 가두어 넣은 편집자 안 형이나, 두 번째 소설의 연재를 중단시킨 R사, 전짓불을 들이대며 진술을 강요하는 김 박사 등은 모두 박준에게 소문의 벽을 쌓은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입으로 건너다니는 소문은 박준의 자기 진술 욕구를 억압한다. / 소문의 벽은 전짓불의 공포와 간섭으로 이루어진 벽이며, 사람들을 억압하는 벽이기도 하다. 결국 소문의 벽은 정체를 밝히지 않고 소문에 숨어 있는 사회적 폭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 줄거리 : <네이버 지식 백과>에서

취중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 날 밤 박준을 나의 하숙방까지 끌어들인 데는 꼭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박준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했고, 기괴한 모습으로 나를 놀라게 하려 했다 해도 나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돌발적인 사건들을 만나고 있었다.

 

십 여 일 전쯤 일이었다. 밤 11시 50분 경, 술이 만취가 되어 나의 하숙방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어두운 골목에서 웬 사내가 나타나더니 자신을 구해 달라고 애원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을 겨를도 없이 그를 내 하숙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런데 그는 방안에 우뚝하게 서 있으면서 오히려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방에 들어가면 사연을 말해 주겠다던 그는 자신이 정신병자라며 나를 경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먼저 잠자리에 들면 따라 잠자겠지 생각하고 먼저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분명 형광등을 끄고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 보면 불이 켜져 있고, 또다시 끄고 자면 다시 켜져 있기를 반복했다. 분명 그 사내였을 것이다. 방안에는 그와 나뿐이었으니깐.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는 말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사내의 정체를 알아내기는커녕 궁금증만 잔뜩 더 늘어갔다. 그가 한 말 중에 자신이 정신병자라고 한 말이 기억이 났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깐 하숙방 뒤쪽에 하나의 정신병원에 있던 걸 본 것 같았다. 아침에 하숙방 뒤쪽에 있는 정신병원을 찾았다. 접수처에는 간호원으로부터 그가 박준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헌데 그 박준일이 바로 박준이었다. 그는 그의 소설에서 이름 석 자가 거추장스럽다며 두 자로 간소화시켰다. 박준은 그의 필명이었다.

 

나는 한 잡지사의 편집자였고, 박준은 언제고 그 잡지에 글을 쓰게 되거나 글을 써 주어야 할 필자의 입장이었다. 편집자와 필자가 뜻이 같아 일이 잘 이루어지기란 힘이 드는 작업이다. 그와 나 또한 상관관계에 있었다. 나는 병원의 의사를 만나 보았다. 김 박사라고 불리는 의사는 박준에 대해서 건성으로 말해 주었다. 박준 스스로 찾아와 자신을 진찰해 달라며 애원했다는 것이다. 김 박사가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였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임상심리 검사를 해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박준은 진술 거부를 하여, 김 박사가 진단을 내리기를 미친 척하는 노이로제의 일종이라고 말했다.

 

 

언젠가 박준이 내 앞으로 원고를 보내 왔다. 그리곤 일이 년 동안 통 작품을 내놓지 않고 그 뒤로 사라졌다. 나는 안 형에게 박준에 대해 물었다. 나의 질문을 수상쩍게 받은 그의 앞에서 박준의 일을 말하기 싫어졌다. 그는 자신만의 편집이 강한 편이었다. 그에게 박준의 원고와 원고료를 부탁했다. 원고료 핑계로 박준의 집으로 가 보려고 한 것이다.

 

'괴상한 버릇'의 소설에는 괴상한 버릇을 가진 사내가 숨을 참아가며 죽는 시늉을 하고 나중에는 그런 버릇으로 숨이 멈춰서 죽는다는 내용이었다. 읽고 나서 어리둥절했다. 박준의 소설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소설을 내보내지 않고 있는 안 형의 태도가 나를 더욱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그는 박준에 대해서 너무도 비판적이었다. 편집자와 필자는 서로 공동의 이념에 봉사하고 작업해야 했다. 서로 좀처럼 같은 지점에서 만나지지가 않았다.

 

박준은 끊임없이 자신을 소설 속에 진술해 놓았다. 그는 어머니와 누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박준은 그의 가족으로부터 멀리 떠나와 있었다. 집으로 가 보았지만 누이는 이제 와서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무심히 대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누이가 나를 찾아와 박준 자신이 정신병자가 되면 팔아 버리라는 원고를 들고 나왔다. 나는 그 원고가 욕심이 났다. 가지고 와서 읽고 난 뒤, 박준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 수가 있었다. 또한 예전에 실렸던 신문 스크랩을 통해서 박준의 정신 세계와 어릴 때 어둠 가운데 불빛으로 인한 공포감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6 · 25 전란으로 어두운 방안에 손전등의 불빛을 들이대며 어느 편이냐고 어머니를 추궁하던 모습이 박준에게 공포감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신문기사의 질문 중에 '지금도 그 전짓불의 간섭을 받고 있다고 말했는데, 소설 작업과 관련하여 지금 당신은 어느 곳에서 그것을 느끼고 있는지' 라는 질문이 있었다. 박준의 대답은 이러했다. '정체를 밝히지 않기 위해 소문의 옷을 입고 있는 것뿐일 것이다. 그래야 그것은 우리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복수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게다가 사람들은 원래 그런 소문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선 늘 두꺼운 소문의 벽을 쌓아 주고 있는 것이다.'

 

 

잡지사에서 쉽사리 거둬들일 수 있는 글이란 그 전짓불빛을 견디려 하지 않는 것뿐이어서 신통할 리 없었다. 나 또한 사표를 오랜 시간 동안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건 이미 나 자신의 진술의 길이 막혀 있었던 것이다. 나의 관심은 오로지 박준뿐이었다. 박준이 나를 다시 찾아왔을 때 나는 그를 병원으로 다시금 데려다 준 적이 있다. 나는 그의 소설과 김 박사를 통해 박준을 알아 갔다. 그런데 김 박사는 박준이 그의 소설 가운데 주인공 너가 심문관으로부터 추궁받는 장면 가운데 심문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나는 김 박사에게 더 이상 박준을 추궁하지 말기를 권했지만 그는 자신만의 방법을 고집하고 있었다. 처음에 받았던 인상보다 이제는 조금씩 밉살스럽기도 하였다.

 

박준은 전깃불과 불안한 소문들과 모든 세상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싶어서 병원을 찾아든 것이다. 그러나 그 병원이야말로 진짜 전짓불, 더욱 더 무서운 전짓불의 추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박준은 또 다시 병원을 탈출해 버리고 만다. 김 박사는 자신의 살인적인 사명감과 자신력으로 그를 끝내 미치게 만든 것이다. 전짓불을 두려워한 것을 안 김 박사는 마지막 방법으로 그에게 불빛을 들이대며 추궁했던 것이다. 박준을 미치게 한 건 김 박사뿐만 아니라 그를 김 박사에게 끌어다 맡긴 나의 책임도 컸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끝나 버리고 만 느낌이었다. 나는 주막에 들어가서는 정신없이 심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박준이 다시금 나를 찾아주길 바라지만 끝내 박준은 나타나지 않고 말았다. 행길을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들이 이따금 골목 이쪽까지 까만 정적을 깨뜨려오곤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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