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無所有) -법정-
■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난을 기르면서 느끼는 애착과 집착이 얼마나 자신에게 굴레가 되는지를 깨달아 체험한 내용으로 독자들을 잔잔한 공감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무소유라는 개념은 분명 관념적이고 종교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그의 깨달음에 동조할 수 있는 것은 이 글이 매우 진솔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작가는 개인의 소유욕을 버릴 때 비로소 온 세상을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가 허락됨을 일깨우고 있다. 소유의 집착에서 벗어날 때, 마음의 평온과 해방감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으로 인류 역사의 소유사와 자신이 개인적으로 체험한 소유에 대한 집착의 괴로움을 진솔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소유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 준다. "크게 버리는 자만이 크게 얻는다"란 진리는 세속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말일 수도 있지만, 작은 집착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깊이 있는 글이다.
자신이 느낀 생각을 개인적으로 피력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역사와 사회의 문제까지 연관지음으로써 보편적인 생각으로 발전시켜 독자의 공감을 얻어낸다.
■ 요점 정리
◆ 성격 : 경수필, -사색적 · 철학적 · 교훈적 · 체험적-
◆ 특징
* 고백적인 말하기로 자신의 체험을 서술함.
* 역설적 표현을 통해 진리를 전달함.
* 인용과 예시, 불교적 세계관, 역설적 어조
◆ 주제 : 무소유의 참된 의미와 정신적 자유함
◆ 출전 : <영혼의 모음(母音)>(1973)
■ 생각해 보기
1. 난초를 통해 작가가 얻어낸 사색은 어떤 것인가?
→ 대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괴로움을 낳는다.
2. 마지막 문장에 있는 '무소유의 역리'의 구체적 내용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자.
→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으며, 아무 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
◆ 글쓴이가 난초를 기르면서 얻은 깨달음의 과정
난초에 대한 애착 | ⇒ | 집착에 따른 괴로움 | ⇒ | 소유에 대한 깨달음 |
지난해 여름 선물 받은 난초 두 분(분)을 정성을 다해 기름. | 난초에 집착하다보니 일상 본연의 기쁨을 느끼지 못함. | 아끼던 난초를 친구에게 주고 매우 홀가분한 감정을 느낌. | ||
기쁨 | 괴로움 | 홀가분함 |
◆ 무소유의 의미
'무소유'는 산스크리트 어 시마티가(simatiga)를 번역한 말로, 무소득이라고도 한다. 보통 일반 용어로는 '가진 것 없는 상태'를 뜻하나 불교에서는 단순히 '소유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의 범위를 넘어서 모든 것이 존재하는 상태, 즉 가진 것 없이 모두 존재하는 상태, 또는 무지각인 것을 말하며, 무상(무상)과 동일한 뜻이다. 즉 인간의 소유욕이란 무한하며 자신이 필요한 것 이상 가지려 한다. 그러나 이런 욕심으로 인해 번뇌가 생겨나고 소유함으로써 그것에 얽매이게 된다. 이에 법정은 '무소유'란 가지려고만 하지 말고 모두에게 베풀 줄 아는 자비의 실천이며, 모든 욕망을 단절하며 더 큰 마음의 평정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서술하고 있다.
◆ 문학을 통한 삶의 고양
문학 작품에 담긴 다양한 삶의 모습은 독자가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되며, 타인과의 관계를 반성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계기가 된다. 우리는 작품에 나타난 인물과 작가의 시각에 공감하거나 비판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의 시각을 타인의 시각과 견주어 보는 객관화의 기회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 글은 현대인이 소유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교훈을 전달하고 있다.
■ 작품 읽기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 뿐이요."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 2차 원탁 회의(圓卓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이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語錄)]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 것도 갖고 오지 않았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 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긴요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 해 여름까지 이름 있는 난초(蘭草)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으로 옮겨 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 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슨가 하는 비료를 바다 건너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곤 했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茶來軒)을 찾아 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蘭)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 해 여름 장마가 개인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 노사(雲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 물소리에 어울려 숲 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우었다.(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음. 소유(난초)에 대한 집착을 느끼지 못한 상태)
아차! 이 때에야 문득 생각(연약한 난초를 햇볕 아래 두고 온 일)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 없었다.(소유에 대한 집착 때문에 괴로움에 빠짐.)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 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 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執着)이 괴로움인 것을.(소유→집착→부자유→괴로움)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 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蘭)을 가꾸면서도 산철(僧家의 遊行期)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하고 말았다.(모든 집착을 버려야 하는 불교도의 마음가짐을 가지지 못함) 밖에 볼 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 놓고 나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을 듯 홀가분한 해방감.(집착에서 벗어난 후 얻은 홀가분함) 삼 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 난초)'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애지중지 키운 난을 막상 다른 이에게 주니 아쉬움보다 해방감이 느껴졌다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무언가를 버렸을 때 진정한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됨을 깨닫게 된다) 이 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깨달음의 실천)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所有慾)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不辭)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한다.(소유에 대한 집착 때문에 인간관계나 사회 구조 속에서 모두 이득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제의 맹방(盟邦, 같은 목적을 가지고 서로 동맹한 국가)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사례(이익에 따라 달라지는 국가 간의 관계)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 관계 때문인 것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향(向)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결국 소유는 다른 이와 나누어야 할 몫을 혼자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자신의 능력, 처한 상황)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 손으로 돌아갈 것이다.(공수래공수거)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훌훌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죽음은 어떤 물질적인 것도 대신할 수 없음)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소유욕을 절제하고 가진 것을 버리면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서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얻게 된다는 글쓴이의 역설적 교훈이 담겨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 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라는 말은 소유에 대한 욕심을 모두 버린다는 뜻이다. 소유욕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 마음의 참된 자유와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 탁발승 - 시주승. 집집마다 시주를 얻으러 다니는 중
* 요포 - (인도나 아라비아 사람들의 복장에서) 허리에 띄는 넓은 띠.
* 산찰(승가의 유행기) - 안거(安居)를 끝내고 산사(山寺)를 떠나 세속을 다니면서 수행하는 기간
* 맹방 - 동맹국
* 역리 - 역설적인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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