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가 -김소운-
이해와 감상
수필 갈래의 글들이 관심의 대상으로 하는 문제의 폭은 실로 넓다. 크게는 삶의 의미, 국가 경영의 문제같이 중량감이 있는 문제로부터 작게는 자신의 취미를 토로하는 사소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이 작품에서 대상으로 하는 문제는 돈의 지출에 대한 문제로, 이것은 생활의 지혜, 또는 생활 속에서의 방향과 태도의 선택 문제의 일부가 된다. 수필 갈래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이런 유형의 글이다.
이 글의 첫머리는 ‘돈의 더러움’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하여, 그 더러운 돈을 점잖은 신사와 아름다운 아가씨가 소중히 지니고 다니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으로 발전시킨다. 그러나 일인(日人) 전당포 주인의 돈에 대한 태도를 통해 그러한 상황을 반전시키고, 그것과는 또 다른, 자신의 돈에 대한 생각을 전개시켜 나간다. 즉, 자신의 별명이 ‘낭비가’이지만 결코 부당하게 돈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낭비’는 곧 ‘돈을 함부로 쓰는 것’이라는 독자들의 통념을 뒤집어 놓는다. 즐거움이 따르는 곳에서는 철저하게 인색해야 한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이다. 이로써 자신의 별명인 ‘낭비가’라는 말은 ‘쓸 곳에 제대로, 즐겁게 쓰는 사람’이며, 그리하여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누구보다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부자임을 강조하여 독자들에게 돈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설법하고 있다.
요점 정리
◆ 성격 : 경수필. 신변잡기적 수필
◆ 표현 : 일화와 예시를 통해 친근감을 전해줌.
◆ 주제 : 돈이란 아낄 때 아끼고 쓸 때에는 즐겁게 써야 한다.
◆ 출전 : 수필집 <목근통신>
작품 읽기
지폐 한 장에 몇 천만(千萬)인가, 몇 억(億)인가 하는 세균(細菌)이 우굴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실증해 보인 분이 있었다. 연전(年前)에 일본 후생성(厚生省)이 밝힌 바로는 동경(東京)의 음식점에서 내는 소독저(消毒箸) 한 벌에서 자그만치 5, 6백만의 미균이 검출되었다는 얘기다. 종이로 하나하나씩 싼 소독저도 그렇거던, 하물며 서울 거리의 버스간에서 거슬러주는 쓰레기 지폐리요.
미균이 모두 유독(有毒)이라고 단정할 것은 아니지만, 점잔을 빼무는 노신사(老紳士)에서 아이새도우, 매니큐어로 몸단장을 한 아가씨까지, 돈지갑 속에 몇 억, 몇 십 억의 미균 무더기를 간직하고 다닌다는 것은 유머러스한 만화(漫畵) 자료가 아닐까 보냐. 그렇다고는 하나 그 쓰레기 지폐를 행여 소홀히는 대접 못 한다. 비록 미균의 배양기(培養基)일망정 그것이 십만 원, 백만 원에 연(連)하는 ‘돈’이기 때문이다.
조개껍질이며, 두세 아람되는 돌덩이(石貨)가 돈으로 통용되던 그 옛날부터 ‘돈’의 조화는 과연 무궁 무진이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신파(新派) 연극의 이 캐치프레이즈야말로 인생을 그냥 상징(象徵)한 만고의 명언(名言)이 아닐 수 없다.
* 돈이 갖는 다양한 속성
해방 십여 년 전, 종로 큰길에서 서린동으로 빠지는 뒷골목, 지금 N비어홀 자리에 ‘미야나가(官永)’라는 일인(日人) 전당포가 있었다. 주인 사내는 아직 삼십대의 절반밖에 안 된 나인데다 영화 스타 못지 않은 미끈한 미남(美男)이었다. 점원 하나가 있기는 있어도 돈을 만지는 것은 언제고 주인 사내였다. 물건을 잡고 돈을 내줄 때, 이 주인은 지전 한 장 한 장을 가로 세로, 모로 세고 그리고 나서 양쪽 손가락으로 소리가 나도록 부비면서 한 장씩을 천천히 두 손으로 손님 앞에 내놓았다. 마치 절친한 친구와 작별이나 하듯이…… 비록 5원(圓) 10원의 작은 돈일 경우에도 이 수속 절차가 생략되는 법은 없었다. 돈과의 결별에 그토록 신중하고 경건한 주인 사내의 그 태도에는 수전노(守錢奴)의 냄새보다 차라리 경의(敬意)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어느 종교가가 그렇게도 신(神)을 공경하며, 어느 학자(學者) 예술가(藝術家)가 그렇게도 진리를 사랑하랴. 이만치 극진한 정성 앞에서야 돈인들 어찌 무심하리. ‘이자’라는 졸개를 거느리고 하루바삐 되돌아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경의를 표하는 것과 나 자신이 돈을 신앙(信仰)하지 않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나는 영구 불변(永久不變), 확고 부동(確固不動)의 가난뱅이――지금도 남들은 나를 가리켜 돈을 모르는 천치요, 낭비가라고 한다. 낭비를 하도록 큰 부자 노릇을 한적은 없었건마는 그것이 세상에 등록된 정평(定評)이다. 친구에게 떳떳이 술 한잔을 대접 못 하는 주제로 낭비가란 소문을 누린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요, 송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함부로 남에게 물려줄 수 없는, 이 허명(虛名)도 필경은 천복의 하나이리라.
*전당포 주인의 돈에 대한 태도와 지은이의 돈을 신앙하지 않는 태도
시인(詩人) J가 구정(舊正)에 나를 대접한다면서 부르러 왔다. 밤거리의 찬바람을 무릅쓰고 택시로 그가 사는 동리까지 갔다. 미터 90원――가진 잔돈이 없어 5백원 한 장을 내고 내렸다. 뒤따라내린 J가 운전사에게서 받은 거스름돈을 내 손에 건넨다. 3백 원이다.
‘어째서?’ 하고 물으니 백십 원은 팁으로 주었다고 한다. 남의 주머니 돈으로 백삼십 프로의 팁을 주다니 뱃장 좋은 친구다. 하물며 그 운전사는 도심(都心)과는 반대 방향이라고 탈 때부터 투덜댔고, 큰 길에서 멀어지는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에서 목적지까지는 채 못 가서 내려 2, 3백 미터나 밤길을 걸어야 했다.
초대를 받은 쪽이 택시값을 치른다는 것도 정상은 아니나 대한 민국에서는 족히 있을 수 있은 일이다. 그러나 그런 도도한 운전사에게 백삼십 프로의 팁을 준 것만은 ‘있을 수 있는 일’로 흘려 버릴 수가 없다. 멀어져 가는 택시의 테일램프를 바라다보면서 나는 몇 마디 귀 따가운 소리를 J에게 했다. 오십 고개를 넘은 사내에게 낭비가의 레테르가 붙은 내가 경제학의 설법을 하다니 희극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돈에 얽힌 일화
이발관에서나 레스토랑에서나 나는 팁을 잊은 적이 없다. 내가 짚은 스틱에도 팁이란 세금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즐거움이 따르지 않는 일원의 지출은 즐겨서 하는 만금(萬金)의 소비보다도 더 아깝다. 그 점에 있어서 나는 철두철미 구두쇠요, 노랭이다. 육십 평생을 두고 내가 몸소 체득(體得)한 이 ‘돈의 생리(生理)’로 해서 ‘영구 불변’의 가난뱅이 나는, 한편 장안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마음 부자’이기도 하다.
* 지은이의 돈에 관한 철학
# 후생성(厚生省) : 일본 행정 부서의 하나. 우리 나라의 보건 복지부에 해당함
# 미균(黴菌) : 세균(細菌)과 같은 뜻의 말.
# 점잔을 빼무는 ∼ 아닐까 보냐. : 깨끗함을 상징하는 신사와 아가씨가 세균이 우글거리는 돈을 소중하게 간직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만화 소재가 될 만하다. 더러운 돈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세상 사람들을 풍자함
# 배양기(培養基) : 미생물을 배양하는 데 쓰는 영양 물질.
# 경의를 표하는 ∼ 문제가 다르다. : 예컨대, 돈을 소중히 다루는 것이 일인 전당포 주인의 자세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지만 나 자신은 돈에 대해 맹목적으로 매달리지 않겠다는, 지은이의 돈에 대한 생각을 암시해 주는 구절이다.
# 정평(定評) : 세상에 널리 알려진 평판.
# 허명(虛名) : 실속 없는 헛된 명성.
# 천복(天福) : 하늘이 내려준 복.
# 테일램프(tail lamp) : 자동차의 뒤쪽에 있는 등. 미등(尾燈)
# 오십 ∼ 이만저만이 아니다. : 낭비가로 소문난 내가 친구에게 돈을 낭비했다고 비난을 했으니 너무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친구를 비난한 까닭은 그가 돈을 너무도 즐겁지 않은 곳에 소비했기 때문이다. 팁은 친절의 대가로 지불해야지, '도도한' 운전수에게 지불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 설법(說法) : 불교의 교의(敎義)를 풀어 밝힘.
# 스틱(stick) : 지팡이. 단장(短杖).
# 육십 평생을 ∼ 하다. : 평생의 경험을 통해서 돈이란 함부로 쓰거나 맹목적으로 모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쓰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앞으로도 영원히 모은 돈 없이 가난하겠지만, 돈을 즐겁게 쓸 줄 알기에 마음은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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