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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해설]정념의 기(旗) - 김남조 -

by 휴리스틱31 2022.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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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의 기(旗)
                                                                              -  김남조  -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드린다.

 

                -<정념의 기>(1960)-

 

해        설

 

[개관정리]

 성격 : 낭만적, 애상적, 종교적, 기원적, 시각적

 표현

* '기'에 자신의 마음을 빗대어 순수한 삶을 기원함.

* 시행을 자유롭게 배열하면서도 유려한 리듬을 살림.

* '혼란'에서 '안정'으로 점차 시상이 전개됨.

* 반복과 직유 · 은유, 시각적 · 청각적 심상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정념 → 온갖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

* 기 → 이 시에서 '기'는 인간 세상에서 '절대자'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화자를 상징하고 있으며, 깃대에서 펄럭이는 깃발의 모습은 그러한 영원과 현실적 고뇌 속에서 갈등하고 있는 화자의 내면 세계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내 마음은 / 한 폭의 기(1연)

   → 깨달음을 얻기 전의 상태

       순수한 삶과 신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지닌 자아의 마음

* 보는 이 없는 시공에 → 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전의 고독한 상태

* 스스로의 / 혼란과 열기

   → 인간의 한계와 비애를 느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번민하는 화자의 모습

       '혼란'은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와 불안을, '열기'는 신에 대한 투명한 의식을 가로막는 인간적인 욕망을 암시함.

* 눈 오는 네거리 →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다스리기 위한 공간(눈='정화'의 의미), 깨달음의 공간

*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 → 마음의 평온을 되찾음.

* 눈의 음악 → 눈이 들려주는 순수하고 평온한 소리

* 마음의 기는 /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 내적 자아에게 던지는 질문

* 뉘우침 없는 일몰이 /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가는 / 그 일

   → 후회없는 순수한 삶과 평화와 안식의 고요한 내면세계를 추구하며 사는 삶

       혼란과 열기를 다스려 내면 세계의 평화로움을 추구하는 화자의 모습이 나타남.

* 황제의 항서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가 / 맑게 가라앉은 → 인간 존재가 지니는 무거운 비애를 초월한

*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 벗

   → 순수한 삶을 갈망하는 내가 진실로 믿고 의지할 만한 깨끗하고 순결하며 절대적인 벗(신)

* 내 마음은 / 한 폭의 기(6연)

   → 깨달음을 얻은 후의 상태

       마음 속의 번민, 갈등을 극복하고 내면 세계의 평화를 성취하는 경지로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

* 때로 울고 → 자기 존재의 미미함(자기 한계)에 대한 인식에서 오는 슬픔

* 때로 기도드린다 → 갈망을 이루기 위한 혼신의 노력

 

 

◆ 주제  순수한 삶에 대한 열망과 종교적 기원

             순수한 영혼과 삶의 인식 추구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고독한 존재로서의 자아

◆ 2연 : 고뇌하고 번민하는 자아

◆ 3연 : 평온과 안정을 되찾은 자아

◆ 4연 : 순수하게 살고 싶은 자아의 바램

◆ 5연 : 초월적 존재에 대한 희구

◆ 6연 : 깨달음을 얻은 자아

◆ 7연 : 울며 기도하는 자아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김남조가 자신의 시에서 추구하는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자 신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신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끝없는 자기 초월과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언제난 완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녀의 시는 언제나 신의 세계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자 하는 시인 자신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인간에게나 신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자 하는 시인 자신의 간절한 염원을 노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념의 기'라는 제목은 그와 같은 염원을 암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情)'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염(念)'은 신에 대한 염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시적자아는 자신이 바로 그와 같은 사랑과 염원을 품고 있는 '정념의 기'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시는 결국, 깃발이라는 구체적 사물에 마음을 비유하여 모든 욕망과 번뇌, 갈등을 극복하며 그와 같은 임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소망을 가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 '정념의 기'의 리듬감

이 시는 한 행을 '3음보' 내지 '4음보'를 기준으로 하고, 이를 변주함으로써 주제 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3음보 내지 4음보는 우리 시의 전통적 율격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된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한 행을 1음보나 2음보로 변형시키는 등 의미의 경중에 따라 자유롭게 배열하면서도 유연한 리듬감을 살리고 있다.

 

◆ '정념의 기'의 시적 화자의 정서

이 시에서 화자는 자신의 마음을 한 폭의 기(旗)에 비유하고 있다. 문맥으로 볼 때 화자인 '나'는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견딜 수 없어 차분히 눈길을 걸으며 뉘우침과 비애의 감정을 다스리고 있다. 그러나 끝내 벗어날 길 없는 숙명과도 같은 인간의 굴레 때문에 그는 아무도 보는 이 없는 시공 속에서 혼자 울고 때로 기도할 수밖에 없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다. 그러나 화자의 이 괴로움을 보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5연의 내용으로 보건대 화자의 심적 갈등은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 벗'이 없음에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벗이 많이 있어도 진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말할 만한 상대가 없을 때의 이 막막한 심정이 허공에 걸린 깃발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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