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도(修羅道)()
-김정한-
● 줄거리
분이는 가야부인의 손녀이다. 분이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 보면서 할머니의 젊은 시절의 일들을 회상하고 있다.
가야부인은 한일합방이 있은 다음 해 허진사댁으로 시집을 온다. 시할아버지 허진사는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고, 시아버지 오봉 선생은 곧은 선비로서 대쪽같은 성품을 가지고 살아간다. 오봉선생은 왜놈 앞잡이들의 비위에 맞을 리 없다. 그는 낙동강 일대의 갈밭이 동척의 손에 들어가 논밭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툭하면 어디론지 떠난다. 가야부인은 집안을 세우기 위해 농사꾼의 마누라처럼 부지런히 일한다.
그녀가 시집 온 지 만 칠 년째 되던 해 서간도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던 시할아버지가 유골이 되어 돌아온다. 다음 해 3.1운동에 가담한 시숙 밀양양반이 왜놈들의 총칼에 생죽음을 당한다. 자식을 잃은 시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다가 종신 속병을 얻게 된다. 오봉 선생은 차츰 외출하는 횟수가 잦아지고 그럴수록 집안은 어두워만 간다. 시어머니도 둘째 자식을 잃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되어 시나브로 말라 간다.
허진사의 입젯날 제삿장을 보아 오다가 가야 부인은 우연히 땅에 묻힌 돌부처를 발견하다. 그곳에 조그만 절을 짓고 부처님을 모시기로 작정을 하지만 엄격한 유교 집안이어서 마음에 병만 생긴다. 가야 부인이 자꾸만 시름시름 말라만 가는 까닭을 아는 시어머니는 죽을 셈치고 남편 오봉 선생을 생전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사랑방으로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한다. 오봉선생은 호통을 쳐서 부인을 사랑방에서 내쫓는다.
가야부인은 시집간 고명 딸이 괴질로 죽었다고 하여 솔밭 속에 체봉(가매장)해 놓은 것을 원통해 한다. 집안 몰래 그녀는 사위를 시켜 불가의 방식으로 화장을 한다. 그리고 뼈가루를 돌부처가 있는 곳으로 가지고 가서 불공을 드리고 강에 뿌린다.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꿈이 꺾이는 것 같아서 가야부인은 절을 짓지 못하면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사위가 대신 절을 짓겠다고 한다. 사위 집에서 같이 묵으면서 일을 서둘러 절을 거의 마무리 해 갈 무렵 오봉 선생이 일경에 붙잡혀 구금된다. 불온한 시를 지었다는 죄명이다.
가야부인은 이와모도 참봉을 찾아간다. 그는 창씨개명을 하고 아들이 고등계 형사로 있어서 유생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사는 사람이다. 가야부인의 부탁을 받고 함께 아들을 찾아간다. 그러나 아들의 거절로 오봉선생을 면회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오봉선생은 집행유예 삼 년이란 억울한 판결을 언도받고 풀려나지만,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죽는다. 가야 부인은 효성껏 발인제를 치른다. 발인제에 참례한 이와모도 참봉은 늙은 선비 김진사로부터 봉변을 당한다. 그후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병이 악화되어 무당을 찾아가 큰 굿을 하지만 죽는다.
대동아전쟁은 얼른 끝나지 않고 공출과 징용만 늘어간다. 친정에서 데려다가 식모라기보다는 양딸처럼 길러온 옥이에게 정신대 징용 영장이 나온다. 옥이는 이를 비관하여 자살을 기도한다. 절을 지으면서 정이 들었던 가야 부인의 사위 박서방은 옥이가 배에 오르려던 순간에 나타나 자기의 처로 호적에 실은 호적등본을 보여주고 옥이를 구출한다. 두 사람은 신분의 벽을 뛰어 넘어 결혼한다.
해방이 되자 가야부인의 자손들은 큰벼슬을 하고 가야부인도 큰 소리를 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떠들어 댄다. 그러나 친일파가 득세한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학병을 피해 도망다니던 가야부인의 막내아들은 이를 비관하여 반거충이가 된다. 가야부인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집에서는 시어머니처럼 천수나 치고 미륵당에 나가면 미륵불 앞에 나가서 가만히 눈을 감고 지낸다. 할머니 가야부인의 임종을 지켜보다가 스님의 나지막한 불경 소리에 색시가 다 된 분이는 줄곧 아기 소녀 시절을 회상한다. 미륵당에 가서 남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시종 이야기의 중심이 되던 가야부인을 생각한다. 가야부인은 막내 아들을 찾으면서 눈을 감는다. 멀리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훈련 포성 소리가 들려온다.
● 인물의 성격
◆ 가야부인 → 일제하의 민족적 수난을 강한 의지로 묵묵히 참고 이겨내는 인고와 의지의 여인으로, 불심이 두터운 인물임.
◆ 오봉 선생 → 가야부인의 시아버지. 독립운동가의 후예로 전통적인 선비의 과묵하고 서릿발같은 기상을 잃지 않고 살다가 죽음.
◆ 이와모도 참봉 → 일제에 협력하는 친일파로 가야부인과 대조적인 인간형
◆ 박서방 → 가야부인의 사위로, 죽은 아내를 위하여 종교를 초월하여 절을 짓고 불교의식으로 아내를 화장한다. 절을 지으면서 정이 든 가야부인의 몸종인 옥이를 구출하여 신분의 벽을 초월하여 결혼한다.
◆ 허진사, 명호 양반, 시숙, 옥이, 막내아들 → 가야 부인의 삶을 구성하고 그녀에게 한과 설움의 동기를 만들어주는 주변인들.
● 구성 단계
◆ 발단 : 분이의 회상 시작. 가야부인이 시집오던 일, 그 무렵 시조부의 고난과 가족 구성원의 이야기
◆ 전개 : 시할아버지의 운명, 손아래 시숙이 3.1운동에 연루되어 사망함. 집안이 흔들리고 가야부인은 불심에 의지하게 됨.
◆ 위기 : 시아버지 오봉 선생의 투옥과 사망
◆ 절정 : 박서방이 혼인 증명서를 만들어 옥이를 구함. 박서방과 옥이가 가야부인의 주선으로 결혼함.
◆ 결말 : 광복 후 가문의 피폐와 가야부인의 죽음
● 이해와 감상
◆ 작품의 제목인 <수라도>는 '아수라도(阿修羅道)'와 같은 말로서, 싸움을 일삼는 귀신인 아수라가 살며 늘 투쟁이 그치지 않는 세계를 지칭하는 범어이다. 생전에 교만심과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수라도는, 가야부인이 살아온 고통스런 현실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가야부인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수라도'를 헤치는 고통의 행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이 작품은 일제시대 · 해방 · 육이오를 잇는 민족의 수난의 역사를 바라보고 직접 그 가운데 위치했던 가야부인의 일대기로, 일종의 가족사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허씨 가문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제시하면서 동시에 우리 민족이 겪어온 수난은 동일한 국면으로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가야부인의 일대기를 그의 손녀인 분이가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함으로써, "역사를 과거의 일로만 묻어 버리지 않고 현재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보고 싶다"고 한 작가의 의도가 실현되고 있다. 즉, 가야부인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일대기가 아니라 분이 세대로 이어지는 역사의 포괄적 기록이며, 새 세대의 가치관에 의해서 걸러지며 동시에 의미가 부여되는 민족 모두의 기억이라는 점이다.
◆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어 간 가야부인의 시할아버지, 삼일 운동에서 일제의 총을 맞고 죽은 가야부인의 시숙, 유생들이 모여서 시회(詩會)를 하였는데 그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그녀의 시아버지를 죽게 한 소위 한산도 사건, 천민인 옥이와 혼인하여 옥이가 정신대로 가지 못하게 했던 가야부인의 양반사위 박서방, 징용을 피하여 도주하였다가 해방 후에 돌아와서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농민운동에만 전념하는 석이 등은 모두 가야 부인을 중심으로 살아갔던 비극적 인물들이었고, 결국 그들은 아수라장이었던 우리 역사 현장의 희생물들이었다.
● 핵심사항 정리
◆갈래 : 중편소설
◆배경
* 시간적 → 일제시대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 공간적 → 일제의 수탈이 가혹하면서도 보수적인 유림들이 몰려 사는 낙동강 유역 농촌마을.
* 사상적 → 유교와 불교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과 3인칭 관찰자 시점의 혼용
◆표현상 특징
* 당당하고 강건한 문체(지사의 혼과 여인의 덕행 찬양)
* 당당한 어조(친일파에 대한 적개심마저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는 숭고한 정신)
◆주제 ⇒ 선비의 애국 충절 정신, 그리고 현모양처의 인고의 미덕과 종교적 초월 의지
◆출전 : <월간문학>(1969)에 발표
● 더 읽을거리
'수라도'란 불교에서 아수라(阿修羅)라는 악마들이 살고 있는 곳을 말한다. 그것은 곧 어둠의 시대를 그리는 소설의 작품 세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생애의 폭이 넓고 깊었던' 가야 부인의 괴로운 과거와 의젓한 처신을 중심에 놓고 시댁인 허진사댁의 가족드이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겪는 수난사를 그리고 있다. 또한 중편인 이 작품은 한국 종교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 작품으로, 4대에 걸친 가족의 수난사에서 우리의 현대사를 읽을 수 있다. 죽음을 당하는 이와모도 구장의 묘사에서 외세에 기생한 친일 세력들의 말로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작가적 양심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도경 형사였던 이와모도의 장남의 출세에서, 비틀거리는 역사적 과제를 해결 못한 현대사의 파행을 묘사하고 있다. 아무튼 이 작품은 가족의 수난과 이에 대응하는 가야 부인과 오봉 선생의 인고, 지절, 초월의 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부처님의 세상살이를 고통의 바다, 곧 고해(苦海)라 했다. 욕망의 불길이 꺼지지 않는 인간의 육신을 법화경은 불난 절[화댁(火宅)]에 비유하였다. 세상살이의 한복판에는 여덟 가지 고통이 있다고 불가에서는 말한다. 태어나고 늙으며 병들어 죽는 '생노병사'에, 사랑하면서도 헤어져야 하는 고통, 미우면서도 만나야 하는 고통, 구하나 얻지 못하는 고통, 육체, 감각, 상상, 마음결, 의식의 작용이 빚어내는 고통을 합친 것이 팔고(八苦)이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으로 요조숙녀요 현모양처인 가야 부인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수라도'를 헤치는 고통의 행로이다. 김정한의 여느 작품은 승부를 건 투쟁 일변도의 선명한 노선을 밟는데, 이 작품은 그 같은 단계를 하나 더 뛰어넘고 있다. 오봉 선생의 서릿발 같은 기상과 지절 정신은 '송죽'으로 대표되는 우리 전통 유학의 혼을 당당히 이었고, 가야 부인의 효성 역시 그러하다. 게다가 가야 부인은 종교적 초월의 세계에로 발돋움하는 영적인 승리를 지향하므로 돋보인다. 가야 부인의 초월은 현실 도피가 아닌 그 극복이다. 그녀는 현실을 외면한 적이 없다. 가족을 위하여 살신성인에 가까운 헌신을 했고,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허드렛일까지 몸소 하며 모든 사람을 자애로이 대하였다. 이른바 부모 모시기, 손님 맞이하기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다. 불의한 세력이 고초를 받아 옥고를 마다 않는 시아버지를 깍듯이 공경하여 목놓아 울 줄도 알았다.
그런 가야 부인이 현실의 고통 앞에서는 높은 체념의 자세를 보인다. 가야 부인은 천수경 정도밖에 붉교의 진리는 잘 모르나, '마음이 부처님(心卽佛)'의 경지에 들고 있다. 시부의 뜻을 어겨서까지 미륵당을 세우는 가야 부인은 전통이 창조적으로 계승, 투영된 바람직한 한국 여인상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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