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승(女僧)
- 백 석 -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사슴>(1936)-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서사적, 애상적, 회상적, 감각적, 사실적
◆ 표현 : 소설의 플롯처럼 역순행적 구성을 취함.(시간 순서에 따른 재구성 : 2연→3연→4연→1연)
1인칭 관찰자 시점의 형식을 취함.
적절한 비유와 압축으로 시에서의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보여줌.
토속적 소재 및 감각적 어휘 구사
차가운 청색의 색채 이미지 (파리한 여인, 가을밤같이 차게, 도라지꽃)
담시(이야기시)적 특성을 보임.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가지취 → 취나물(산나물)의 일종.
*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 속세를 떠난 지가 오래 되었음을 나타냄.(후각적 심상)
* 옛날같이 늙었다 → 지난날의 고생과 번민을 회상해보며, 지친 삶 속에 찌들린 처절한 모습을 현재의
늙음으로 유추해서 표현하고 있다.
*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 불가에 귀의한 여인이건만, 아직도 번뇌와 고민으로 얼룩져 있는 모습을
보고 시적 자아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지 서럽게 여겨진다고 말함.
* 금점판 → 금광
* 여인은 ~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 여인의 슬픈 한을 표현함.
*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 섶벌(재래종 일벌)같이 일터를 찾아나간 남편
* 도라지 꽃이 좋아 → 도라지 꽃은 청색(청보라색)으로, 죽음의 차가운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한 것.
*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 → 여인이 서럽게 운 슬픈 날.
'산꿩'은 여인의 감정 이입의 대상임.
*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같이 떨어진 날 → 삭발을 하며 서럽고 한많은 삶을 처절하게 느꼈을 날.
* 산꿩의 울음, 머리오리가 떨어짐 → 여인의 울음과 눈물을 이와 같이 객관화시킴으로써, 한과 슬픔의
초월을 나타냄.
* 머리오리 → 머리카락의 가늘고 긴 가락
◆ 주제 : 여승의 비극적인 삶의 사실적 표현
(일제의 수탈과 가족 공동체의 붕괴)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여승과 자아의 재회
◆ 2연 : 여인과 자아의 첫 만남
◆ 3연 : 지아비의 가출과 어린 딸의 죽음(여인의 비극적인 삶)
◆ 4연 : 여인이 출가하던 날(머리를 삭발하던 날)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일제 강점기 어려운 삶을 살았던 한 여인의 일생을 축약하여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특히 시이면서도 소설적 구성, 인물의 전형성, 상황의 전형성을 확보함으로써 시에서의 리얼리즘(사실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시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 시는 한 여자의 일생을 제시하는데 즉, 지아비와 지어미 그리고 딸아이로 구성된 한 가족이 있었다.
그들은 원래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농삿일로 생계를 꾸릴 수 없어서 지아비는 집을 나가 광부가 되고, 아내는 십년을 기다리다가 남편을 찾아 집을 떠나서는 금점판 등을 떠돌며 옥수수 행상을 하면서 남편을 찾았을 것이다. 이런 고생을 못이겨 딸은 투정을 부리고, 그 어미는 마음 속으로 울면서 어린 딸을 때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딸이 죽어 돌무덤에 묻히자, 그 여인은 삭발을 하고 가지취와 불경을 만지면서 여생을 보내는 여승이 된 것이다.
이렇게 재구성할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 시는 농촌의 몰락을 중심으로 하는 일제 강점기의 민족 현실을 전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섶벌같이 훌쩍 떠나갈 수밖에 없는 민족의 현실', 그리고 그를 찾아 금점판을 헤맬 수밖에 없는 또다른 우리 민족의 삶, 배고파 투정하는 어린 아이를 때릴 수밖에 없는 어미의 모습, 끝내 도라지꽃을 좋아하여 돌무덤으로 간 딸의 죽음, 눈물방울같이 떨어지는 머리오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여인의 서러움, 이러한 형상화를 통해서 그 당시의 사회 현실을 사실적으로 반영하는 리얼리즘시의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가족 공동체마저 철저히 파괴해 버린 식민지 현실과 민중들의 고난은 백석의 시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유년의 체험과 공동체적 향수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 가족 사이의 유대와 사람과 사물 사이의 친화 관계가 완전히 해체된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해체는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의 경과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힘, 즉 일제의 식민지 지배라는 파행적 역사 과정의 소산이다.
[더 읽을거리] : 하희정, <여승>의 주제에 대하여
이 시는 1936년 발표된 시집 『사슴』에 수록된 작품이다. 발표 당시에도 여러 평자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관심이 집중된 시기는 아무래도 1980년대 중반 이후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백석은 해방 이후 고향인 북한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른바 재북시인인 셈이다. 한국 전쟁 이후 이런 사정 때문에 백석의 시는 이른바 월북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 이전까지는 이념적 억압에 따른 금기의 대상이었다. 그러다가 이용악, 오장환 등의 작품과 함께 해금 조치를 받게 되는 1980년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교적 자유롭게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면 <여승>의 주제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몇 가지 입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일제의 수탈과 이로 인한 가족 공동체의 파괴를 보여 준 민중적 리얼리즘 시의 전형으로 평가하는 관점이 있다. 그럴듯한 해석으로 보이지만, 실은 별 근거가 없다. 이런 주제 파악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을 민중(억압받는 계급)의 삶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인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인이 여인을 통해 당시 민중의 삶을 보여 주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여인이 고달픈 삶을 산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인의 의식이 민중적 정서로 발전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이르면 부정적인 견해가 제출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여인은 끝내 머리를 깎고 출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삶의 고뇌를 사회적 문제 해결 방식에 따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속세를 저버리는 방식으로 해결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여인의 의식과 민중 의식을 연결시키는 것은 대단히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또 이 작품에 일제의 지배를 암시하는 구절이 등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발표 시기를 감안할 때 이 작품이 일제하의 현실을 암시하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 여인에게 직접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른바 황금광과 관련된 것일 뿐이다. 여인의 남편은 당시의 유행에 혹하여 금점판으로 떠난 것이고, 그로 인해 여인의 삶은 우여곡절을 겪는 것일 뿐이다.
요컨대 시인은 한 여인의 비애 그 자체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지, 그 비애를 야기한 사회적 현실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일제하라고 하더라도 민족의 삶을 사회적 관점에서 조명한 작품만이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는 좁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예술이 포괄하는 영역은 그보다 훨씬 더 넓고 깊다.
다음으로 이 작품을 두고 종교적 승화 운운하는 입장이 있다. 작품 속의 여인이 불가에 귀의하는 것을 두고, 삶의 비애를 종교적으로 승화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역시 이 작품에 대한 오해의 하나일 뿐이다. 이 작품의 주제를 종교적 승화 쪽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라면, 종교에 귀의하는 과정에서 번민하는 여인의 내면이 시의 중심 내용을 이루거나, 종교에 입문한 결과로 심적인 평정심을 얻게 되었다는 정도의 내용이 시의 중심 내용이어야 한다. 그러나 시적 화자의 눈에 비친 여인의 모습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여승이 된 이후에도 그녀의 낯빛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쓸쓸함이 흐르고 있다. 시적 화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스님으로서의 여인이 아니라 여인의 고독한 내면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진정한 주제는 무엇인가? 생산적인 시 감상이란 소재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을 사회적 구조로 귀결시키는 환원적인 해석의 과정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면서 작품을 감상해야만 한다. 시인이 시적 대상으로부터 느낀 감정이 무엇인가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서정 문학 양식의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올바른 길이다. 시적 대상으로부터 받은 시인의 정서는 첫연에 집약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우선 제1행은 시적 감정을 유발하는 시적 대상의 제시에 해당한다. 합장을 하고 절을 하는 한 여인을 만난 것이다. 그 여인으로부터 어떤 감정이 유발되고 있는가? '가지취 내음새'가 시적인 답이다(참고로 백석의 시 세계에서 후각적 심상은 시적 대상을 형상화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이다). 그 이후에 서술되는 내용들은 이 지배적 인상에 대한 구체화 과정이면서 동시에 변주에 해당한다. 즉 제1∼2행의 내용을 변주하여 다시 제시한 것이 제3∼4행이다. 쓸쓸한 낯빛의늙은 여승을 만났는데, 시적 화자 역시 마음이 동하는 것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한 여인의 비애를 머금은 듯한 모습에서 느끼는 감정의 미묘한 파문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주제는 여기에서 찾아져야 마땅하다.
물론 이어지는 시의 내용들은 쓸쓸한 내면을 갖게 된 내력을 이야기 형식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시적 정서의 핵심은 일관성 있게 유지된다. 제2연에서는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로, 제4연에서도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로 이어지면서, 여인의 서러운 삶과 비애 어린 내면이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인 백석은 한 여인의 운명과 그로 인한 삶의 비애를 보여주고자 한 것인데, 이러한 시적 경향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매우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의 시의 주된 대상이 되는 여인상은 늘 내력이 있는 비애의 여인상이었고, 이 작품 역시 그 방향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저런 사회적 원인에 의한 고독이 아니라, 인간의 본원적인 고독을 노래하고자 한 것인데, 큰 틀에서 볼 때 이러한 시적 경향은 리얼리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모더니즘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시인] : 백 석(1912~?)
본명은 백기행. 1912년에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남. 오산 고보를 졸업하고 동경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함. 1934년에 귀국하여 조선일보에 입사했으며, 1935년 시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여 1936년 시집 <사슴>을 출간함. 1945년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문학 활동을 함.
백석은 평안도 사투리를 잘 활용하여 소박한 시골 풍경과 구수한 흙냄새가 나는 원초적 삶의 현장을 독특한 서정으로 표현했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당시의 평안도 농촌 풍경이 선연히 떠오르며, 그와 같은 풍경을 특유의 언어로 형상화한, 서사적 시의 각별한 성취를 확인할 수 있다.
<백석의 시세계>
- 토착어의 적절한 활용과 토속 풍경을 배경으로 한 원초적 삶의 조명
- 체험을 바탕으로 한 감각적, 구상적 표현
- 전통적 율격과 접목하여 산문시의 가능성을 보여준 점
- 삶의 리얼리티를 통한 민족 공동체적 연대감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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