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여행(아가의 방·5)
- 정한모 -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江)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記憶)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나르다가
깜깜한 절벽(絶壁)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치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表紙)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阿鼻叫喚)하는 화약(火藥) 냄새 소용돌이
전쟁(戰爭)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恐怖)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焦燥)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이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사상계>(1965)-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주지적, 상징적, 감각적, 현실 고발적, 동화적
◆ 표현 : 대립적 구도(감상의 길잡이 참조)
◆ 중요 시구
* 아가 → 순수한 인간의 전형
* 수면의 강 → 잠
*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 꿈을 꾼다는 의미
* 깜깜한 절벽, 미로, 까무라쳐 돌아옴 → 어두운 인류의 미래(비극성)
* 아비규환, 화약 냄새, 연자색 안개, 파란 공포의 강물 → 전쟁의 참상
* '아가야' → 악몽에서 깬 아가를 달래는 자애로운 모습(휴머니즘)의 시적 화자
◆ 주제 ⇒ 아가의 천진성을 통한 전쟁의 현실 비판,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순수의지
[시상의 전개(짜임)]
◆ 1연 : 나비(아가)의 여행(꿈)과 좌절
◆ 2연 : 나비의 여행에서 경험한 비극(전쟁의 참상, 현대문명의 반인간적 상황)
◆ 3연 : 돌아온 아가에 대한 위로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 김태형, 정희성 엮음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에서
이 시는 몇 가지의 대립적 구조를 파악하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명암(明暗)의 대립이다.
'밤, 어둠, 깜깜한 절벽, 미로, 검은 표지, 화약 냄새, 공포, 초조, 독수리' 등으로 표상된 부정적 이미지와 '아가, 빛 뿌리는 기억의 들판, 사랑, 파랑새, 그리움, 꿈길' 등으로 그리고 있는 긍정적 이미지의 대립이다. 이 작품의 저변(底邊)에는 전쟁의 잔영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물론, 어두운 이미지들이 반드시 전쟁만을 표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반문명적, 비인간적, 부도덕적 현상들에 대한 은유임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대립항에 나비(아가)를 배치한 까닭은 무엇일까? 순수 의지만이 세계를 구하고 가치를 재창조할 수 있다는 의지의 표상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둘째는 '떠남'과 '돌아옴'의 대립이다.
꿈길에로의 여행을 통해서 얻은 것은 상처뿐이다. 전쟁의 아비규환과 화약 냄새와 공포의 강으로의 부단한 떠남의 운명 속에 우리는 던져져 있다. 그러나 떠남 끝에 돌아올 수 있는 품속이 있기에 세계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 이와 같은 구도(構圖)를 오세영은 '탕자의 비유'로 설명하면서, '가출→시련→귀향'의 모티프와 일치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의 구원뿐만 아니라, 이 시에서는 '그 양이 살고 있는 세계의 구원'에도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대립적 구조는 아가의 순진무구한 꿈길의 여행과 현대 문명의 야수적 포악성인 전쟁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작품의 주제 의식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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