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 김수영 -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 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문학예술>(1956)-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의지적, 비판적, 주지적, 상징적, 감각적, 참여적
● 표현
* 모든 연에서 첫 행을 구체화시키는 내용으로 한 연이 이루어지는 구조임.(점층적 전개)
* '눈은 살아있다'와 '기침을 하자'라는 문장의 변형된 되풀이로 이어짐.(시구의 반복과 확대)
* 행동 권유 내지는 명령의 문장이 골격을 형성함.
* 단호하고 남성적인 어조와 선명한 이미지
* '눈'과 '기침'의 이미지가 대립 구조를 보임.
● 중요 시어 및 시구
* 눈 → 순결한 생명력(영원성, 순수성, 가치성)
* 기침 → 불순한 일상성(비굴함, 소시민성, 무가치성)
속되고 지저분한 일상의 삶에서 어쩔 수 없이 엉어리가 져서 품고 있었던 것.
* 눈 위에 기침을 하자
→ 불순하고 부정적인 요소들을 떨쳐 버리자는 단호한 목소리
일상적이고 비굴하며 속물적인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진정한 영혼과 육체를 되찾는 행위.
끝까지 지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리고 있었던 양심과 정의를 회복하는 일.
* 눈 위에, 눈더러 보라고, 눈을 바라보며
→ 눈이 지닌 생명력이 기침을 마음껏 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기침을 하되 '눈'을 바라보며, 눈을 향해서, 눈을 의식하고 기침을 하자고 하는 것이다.
* 죽음을 잊어 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순수하고 가치 있는 것에 대한 갈망을 지닌 사람을 위하여(곧, 눈은 아무에게나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
* 젊은 시인 → 화자 자신을 객관화한 대상
순수한 비판의식과 정의감, 순수한 영혼을 갖추어야 할 존재
*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
→ 그동안 마음껏 기침을 할 수 없어서 고여 있던 더러운 것(속물성, 소시민성, 불순한 일상성 등)
어두운 시대 상황에서 내면화되어 버린 부정 의식 · 비양심 따위
젊은 시인을 괴롭히는 어두운 요소
● 주제 ⇒ 순수한 생명(삶)에의 갈망과 회복 의지
(눈이 지닌 순수성, 비속물성, 영원성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더러운 일상을 씻어 내라고 권유하고 있다. 이 시에는 눈과 기침(가래)의 대비를 통한 고도의 상징적 수법과 날카로운 비판 정신이 돋보인다. 이 시는 눈을 제재로 하여 순수한 삶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주지시이다.)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떨어져 살아있는 눈 (눈이 지닌 생명력)
● 2연 : 눈을 향한 기침 (순수한 생명력의 회복 의지)
● 3연 :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는 눈 (끈질긴 눈의 생명력)
● 4연 : 눈을 향해 가슴 속의 가래를 뱉음. (순수한 삶의 추구)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시인 김수영은1948년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함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 출발했다. 초기에는 모더니스트의 일반적 경향인 현대 문명과 도시 생활을 비판적으로 노래했다. 그러나 1959년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냄으로써 문학에 있어 안이한 서정성의 배격과 사회 정의를 위한 시의 현실 참여를 부르짖게 되었다. 암울했던 1960년대에 '시'를 통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 시인이다. 그는 시를 통해 억압된 자유와 불의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 주었다.
우리 나라에서 참여문학은 1950년대 중 · 후반 이후 문학의 사회 참여적 역할과 의의에 대한 작가들의 자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우리 나라는 6 · 25 전쟁으로 이난 전후의 피폐함 속에서 극단적인 궁핍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으로 이어져 실존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 본격적으로 진행된 참여 문학은 4 · 19 혁명으로 인해 더욱 불붙기 시작했으며, 1960년대 김수영, 신동엽 등의 시인들에 의하여 현실 문제, 예를 들면 분단과 통일, 민족 민중 의식 등을 시적 제재로 취급하면서 세 차례의 격렬한 순수 - 참여 문학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1970년대부터는 우리 민족과 민중들을 문학적 형상화의 주체로 삼는 시민 문학론, 노동자 농민 문학론 등으로 발전하였다.
김수영은 <눈>이라는 제목의 시를 세 편을 썼다. 두 번째 세 번째의 시는 1961년 1966년에 쓰여졌다. 이 시들의 구성이나 내용에는 많은 차이가 있으나, '눈'의 이미지만은 세 편을 통해 모두 비슷하다. '눈'은 시인이 접근할 수 없는 대상, 시인을 압도하는 그 무엇이다. 1961년의 시에서 그것은 '무용(無用)한 저항시를 쓰는 시인과 대비되는 민중의 상징체로서의 눈'이며, 1966년의 시에서는 '폐허에 내리는 눈'이다. 1956년의 이 시에서의 눈은 '살아있는 순결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이 시는 한마디로 더러움과 허위로 가득 찬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가, 살아 있는 눈처럼 순수하고 정의로운 삶을 영위하기를 갈망한 작품이다. '젊은 시인에게 눈 위에 대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자'라고 하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눈'과 '기침'은 이 작품에서 선명한 대조의 관계를 이룬다. 눈은 희고 순수한 것, 기침은 어떤 괴로움 또는 병적인 것을 암시하는 탁한 것이다. 그러므로 '눈 위에 기침을 하자'는 것은, 지금까지 기침조차 하지 못하고 비굴하게 억눌려 지내온 것을 떨쳐 버리고, 일상적 생활의 굴레 속에서 잃어 버린(더럽혀진) 자신의 진정한 영혼과 육체를 되찾으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눈을 보며 끝까지 살아남는 양심과 가치를 되살려 내기를 갈망한다. 눈이 살아 있는 의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양심의 발현을 촉구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시인더러 죽음을 무릅쓴 각오로 시대의 양심을 지켜 가자고 애타게 당부한다. 이 당부는 바로 시인인 자신에게 향한 질책이기도 하다.
< '눈'에 나타난 의미의 점층 구조 >
이 시는 단순한 두 문장 '눈은 살아 있다.'와 '기침을 하자.'를 변형하여 반복함으로써 의미를 점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즉, 같은 문장에 점차로 문장 요소들이 덧붙으면서 의미가 뚜렷해지는 점층적 전개를 이루는데, 이를 통해 리듬감을 강조하고 있으며, 시적 긴장감과 시적 의미를 선명히 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교과서 학습 활동 풀이]
1. 이 시를 낭송해 보고, 그것을 들은 사람과 시의 느낌이나 효과를 함께 이야기해 보자.
(1) 이 시를 읽으면서 리듬감이 느껴졌다면 그 리듬은 어디에서 형성되는 것일지 생각해 보자.
→ 이 작품은 '눈은 살아 있다.'와 '기침을 하자.'라는 두 시구가 지속적인 형태의 반복과 변형을 통해 시적인 운율을 형성하고 있다. 동일한 문장의 반복과 변형 및 첨가를 통한 점층적 진행으로 리듬감을 강조하는 것은 '눈'과 '기침하는 행위'라는 두 가지 개념에 대한 상징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2) 이 시에 쓰인 언어상의 특징은 무엇이며, 이것은 시 전체의 의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리해 보자.
→ 이 작품은 소박한 일상어를 반복적이고 점층적으로 구사함으로써 일상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뛰어넘고 있다. 또한 '눈'이라는 중의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시 전체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다.
2. 이 시의 구조가 시의 전체적 의미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하여 아래 제시된 활동을 해 보자.
(1) 이 시의 내용상 '눈'과 '기침'(혹은 가래)이 함축하고 있는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눈'은 '내리는 눈'과 '사람의 눈'의 중의적인 표현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내리는 눈'은 순수에 대한 지향을 의미하며, '사람의 눈'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기침'은 가슴에 고인 가래를 뱉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속물성, 비굴성, 무가치성을 깨끗하게 씻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눈을 향하여 기침을 하는 행위는, 비굴하고 속물적인 일상 속에서 잃어 버린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되찾는 행위이다. 또한 이것은 눈의 순수함, 차가움, 신선함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더러움과 속됨을 씻어 내자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2) 이 시는 '눈은 살아 있다.' 혹은 '기침을 하자.'라는 문장을 반복하여 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왜 이런 방식이 사용되었는지 시의 의미상 효과라는 면에서 생각해 보자.
→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말은 '눈은 살아 있다.'와 '기침을 하자.'이다. 여기에서 '기침을 하자.'는 마지막 연에서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반복과 변형은 시적인 운율을 형성함과 동시에, 살아 있는 '눈'을 통해 순수하고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갈망과 일상적인 삶에 대한 고뇌를 노래한 작자의 주제 의식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
[교과서 활동 다지기]
1. 다음 시구의 함축적 의미를 파악해 보자.
젊은 시인 | 순수하고 정의로운 존재 |
죽음을 잊어 버린 영혼과 육체 | 부정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지사의 태도 |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 | 진실의 토로를 가로막는 내적 고뇌, 소시민성 |
2. 이 시에서 '눈'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순결한 양심
3. 이 시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상 특징이 나타나는 부분을 찾아보고, 이러한 표현이 지니는 효과를 정리해 보자.
표현상 특징 | 시구 | 표현의 효과 |
동일한 문장의 반복 |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의 반복 | 리듬감 형성, 의미의 강조 |
문장 변형 및 첨가를 통한 점층적 진행 | '~눈은 살아 있다'와 '~기침을 하자'의 문장 변형을 통한 점층적 구성 | 시적 긴장감 형성, 의미의 강조 |
상징적 시어의 사용 | 눈, 기침, 가래 등. | 시어의 대립적인 이미지를 통해 의미를 효과적으로 표현 |
4. 다음은 이 시가 발표될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이다. 이를 참고하여 화자가 '젊은 시인'에게 '기침을 하자'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이승만지지파로 결성된 자유당은 전쟁 중이던 1952년에 개헌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을 협박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과시켰다. 발췌 개헌에 따라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이승만은 대통력에 재선되었다. 대통령을 연임한 이승만은 더 이상 선거에 나올 수 없었다. 그러자 정부 여당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연임 횟수 제한을 없앤다는 내용의 개헌안을 제출하였지만 1표 차로 부결되었다(1954). 그러자 다음날 자유당은 사사오입 논리를 내세워 개헌안이 통과되었다고 번복하였다(사사오입 개헌). 무리한 개헌으로 국민 여론이 나빠지자 이승만 정부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반공을 내세워 반대 세력을 탄압하였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에 맞섰던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사형시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진보당 사건). |
→ 순수한 지식인을 상징하는 '젊은 시인'에게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저항의 행위에 동참하도록 요구하기 위한 것이다.
5. 현실 참여 의식이 잘 드러나는 1960년대의 문학 작품을 찾아 발표해 보자.
신동엽 - 껍데기는 가라 | 김수영 - 풀 |
[참고 자료]
■ 김수영 시의 창작 방법
김수영은 사고의 흐름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그 흐름을 연쇄적으로 표현하는 시작 방법을 사용한다. 김수영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시의 다양한 형태를 실험한다. 이 방식은 개념과 개념으로 표현하기 힘든 영역의 긴장을 통해 시를 이루어 간다. 김수영은 이미 주어진 의미나 심상을 배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를 쓰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시를 쓴다. 사고의 흐름은 주로 반복과 비약을 통해 역동성을 지닌다. 연상을 통해 여러 장면을 접목하는 콜라주 방식이 아니라 사고의 흐름을 연쇄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의미를 사고의 흐름에 따라 의미 사이에 돌발적인 요설을 삽입하는 유형의 시와 의식의 운동을 사물의 운동에 투사함으로써 관념을 심상과 운율로 형상화하는 유형의 시를 만든다. 또한 김수영은 사고의 흐름에 따라 심상을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실제로 사고 흐름의 속도나 자의식으로 분화되는 의식의 모습까지 사실적으로 그린다. 김수영은 사고의 흐름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그대로 기술하는 시 정신을 바탕으로 사고의 흐름에 따라 반복과 비약을 기법으로 한 연쇄적 진술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주어진 의미나 심상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시작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노철, 「한국 현대시 창작 방법 연구」
■ 시인다운 얼굴 김수영
많은 시인들의 얼굴 중 김수영은 특히 시인다운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의 사진을 처음 들여다보면 그저 한눈에 '아, 이 사람은 시인이구나, 시인일 수밖에 없겠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그의 얼굴은 온통 모난 구석으로 가득 차 있다. 푹 꺼진 볼따구니에 길고 깡마른 얼굴하며, 불규칙하게 듬성듬성 난 턱수염과 콧수염 등 전체적으로 지저분한 느낌을 준다. 마치 얼굴 모양에서 풍기는 날카로움을 지저분함으로 얼버물려는 듯이.
그의 코는 참 잘 생겼다. 날렵하게 위로 솟아 높이 떠 있다. 그러나 약간 매부리코이다. 낚시바늘처럼 안으로 매듭지어져 있다. 거꾸로 보면 마치 물음표 같다. 하긴 시인이란 늘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고, 자꾸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의 몸에서 남에게 가장 잘 보이는 코가 아예 물음표로 정착할 수도 있으리라 싶다. 머리칼은 낫으로, 아니 어쩌면 작두로 자른 듯 들쑥날쑥하고 서캐가 득시글거리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것도 그의 시인다운 얼굴에 한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시인이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열려 있는 애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 애정이 서캐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그의 귀는 당나귀 귀이다. 위가 크고 아래는 갸름하게 빨리 끝나는 당나귀 귀. 옛날 임금이 생각난다. 그러나 김수영은 결코 귀를 가리는 법이 없다. 짧게 귀가 보이도록 머리를 늘 올려 두고 있다. 오히려 '내 귀도 당나귀 귀요. 그래, 어쩔테요.' 하며 그 옛날 임금을 윽박지르는 듯이 보인다. 사실 시인은 한 사회의 수치스러운 상처를 드러내는 일이 직업이다.
또 김수영의 이마엔 두서너 이랑의 골이 깊이 파여 있다. 그의 주름은 시를 처음 쓴 스물다섯 살 때부터 고랑져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깊고 넓다. 그의 입은 윗입술이 조금 앞으로 튕겨져 나와 있다. 금세 수다가 쏟아질 것처럼. 반면 아랫입술은 사내답게 무겁게 보인다. 그러나 결과는 윗입술과 마찬가지이다. 무거운 만큼 늘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땅 가까이 떨어져 있음은 당연하고, 그래서 항상 입이 벙긋하고 벌어지며 속사포처럼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할 듯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그의 얼굴을 시인다운 얼굴로 만드는 것은 짙은 눈썹 아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큰 눈이다. 잘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진실이 무엇인지를 아는 이들만이 지닐 수 있는 두려움에 가득 찬 큰 눈이다. 진실을 알고 있고, 그와 달리 허위가 인두겁을 쓴 양이 판을 치고 있는 이 마당에 두려움 없이 세상을 보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측은한 생각이 든다. 무릇 시인이란 그 사회의 상처와 아픔을 가장 깊이 보는 사람이고, 분노와 노여움에 앞서 가장 깊은 연민으로 어루만지는 사람이어야 함을 김수영의 눈은 한 치으 오차도 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가 있다는 옛말이 기억난다. 얼굴은 애초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길고 긴 삶의 과정에서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뜻이리라. 지금 그 나이가 몇 살인지는 잊었지만 김수영의 시는 그의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그의 얼굴을 당당하게 책임지고 있다. 그의 시와 그의 얼굴은 어쩔 수 없이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시는 자신의 눈처럼 진실을 드러내고자 하며, 코처럼 모든 권위와 상식에 의문부호를 제기하고, 입처럼 쉴새없이 수다를 늘어놓으며, 귀처럼 부끄러움을 모르고, 또 얼굴 전체처럼 날카롭게 시적 대상의 본질을 파고든다.
- 김상욱,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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