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肝)
윤동주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우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려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1941. 11. 29.)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해 설
[ 개관정리 ]
■ 성격 : 우의적, 의지적, 상징적, 저항적
■ 표현 : 동서양의 설화와 신화의 차용 및 접목
두 자아의 대비를 통해 정신적 순격성을 강조함.
화자와 동일시되는 두 대상(토끼-항거의식, 프로메테우스-속죄양 의식)을 등장시킴.
■ 중요 시어 및 시구 풀이
* 간 → 인간의 생명(목숨), 자아의 양심과 존엄성 상징
* 습한 간 → 이미 용궁에 갔다 온 상태의 간
유혹에 빠져서 위기에 처했다가 간신히 벗어난 상태의 간
* 습한 간을 말리우자 → 인간 본연의 양심과 존엄성을 회복하고 수호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행위.
* 간을 지키자. → 양심을 지키려는 시적 화자의 자아 성찰
* 토끼 → 궁지에 몰려서도 슬기롭게 자신의 간(양심)을 지킨 존재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을 지키고자 했던 화자와 동일시되고 있음.
* 독수리(너) → 화자와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는 대상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자아를 반성케 하는,
비극적 자아성찰의 표상으로 또 다른 자아 즉, 내면적(정신적) 자아를 가리킴.
* 여윈 독수리 → 정신적 자아가 궁핍하고 피폐한 상태에 있음을 표현함.
* 와서 뜯어 먹어라 → 육체적 희생을 치루고라도 정신을 살찌우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
*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 자신의 육체를 희생시키더라도 정신의 올바름을 지키고자 함.
* 용궁 → 자아가 경계해야 할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
* 용궁의 유혹 → 현실 타협적이고 안정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
* 프로메테우스 → 죄 아닌 죄를 짓고서 속죄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존재
* 맷돌 → 속죄(대신 짊어진 죄)
* 끝없이 침전하는 → 고통을 숙명적으로 인내해야 하는 존재임을 나타냄.
■ 토끼의 '간'과 프로메테우스의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
⇒ 공통점 : 생물의 생명을 유지하는 주요 기관처럼,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
차이점 : 토끼의 '간'은 현실의 유혹에 넘어간 적이 있는 불완전한 존재의 표상인 반면,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철저한 자기 희생의 의지와 자아 단련의 인고가 결합된 존재를 표상한다.
■ 주제 : 현실적 고난 극복의 의지, 희생적이고 양심적인 삶의 회복 의지
[ 시상의 흐름 ]
■ 1~ 2연 : 양심과 자기 존엄성을 회복하여 지키려는 의지
■ 3 ~4연 : 고통 속에서 정신적 자아를 지키고자 하는 다짐
■ 5연 : 현실적 유혹에 대한 강한 거부
■ 6연 : 속죄양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연민과 동경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
동서양의 두 설화(동양의 구토지설과 서양의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접목시켜 인간의 양심과 존엄성을 회복하고 지키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으로, 두 설화를 접목시킬 수 있는 매개체는 바로 '간'이다. 순간의 유혹에 빠져 자신의 간을 잃을 뻔했다가 기지를 발휘하여 간을 지켜내는 토끼와,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주었다는 죄 아닌 죄를 짓고서 코카서스 산정의 바위에 매달려 독수리에게 끝없이 간을 먹히는 고통을 당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처지를 접목시켜, 시인 자신의 현실 대응자세를 형상화하고 있다. 구토지설은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항거 의식 및 위기를 기지로 모면하는 지혜를 주제로 하는 설화이며,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자기희생적 인물을 통한 속죄양 의식을 다룬 설화이다.
1연과 2연을 보면, '습한 간'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이미 용궁을 갔다 온, 즉 위기로부터 벗어난 상태가 제시된다. 그런데 여기서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해 온 토끼'라는 말이 언급됨으로써 두 설화는 하나로 결합된다. 시적 자아는 유혹에 빠져서 젖은 간을 말리면서 또 다른 적을 대비해 그것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3, 4연에 오면 시적 화자는 간을 자신이 기른 독수리에게 뜯어 먹게 한다. 여기서 독수리는 적대적인 대상이 아니라 시적 화자와 또 다른 표상으로서 정신적 자아를 의미한다. 정신 세계의 피폐함을 '여윈 독수리'로 나타내어 육체적 희생을 통해서라도 정신을 살찌우고자 하는 의지가 나타나 있다.
5연에서는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것에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결의를 보여 준다. 6연에 이르면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스러움에 대한 연민을 보인다. 고통을 숙명적으로 인내해야 하는 프로메테우스를 '끝없이 침전한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희생적 고난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려는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토끼'와 '프로메테우스'를,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생명과도 같은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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