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라(修羅)
- 백 석 -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 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 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 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조선일보>(1935)-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 표현 : 일인칭 독백체와 극적인 상황
일상적이고 산문적인 어투의 사용
비유를 배제한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표현
점층적으로 반복되는 구조(반복과 확장)
거미 가족의 모습을 통해 1930년대 당시 우리 민족의 아픔을 보여줌.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수라 → '아수라'의 준말
* 차디찬 밤이다. → 일제 강점기의 냉혹한 현실을 상징함.
*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 나의 행위로 인해 거미 가족이 이별하게 되었음을 깨달음.
* 싹기도 → 흥분이 가라앉기도, 진정되기도
* 가제 → 방금, 막
*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 화자의 이러한 슬픔은 거미 가족의 모습에서 당시 우리 민족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 슬퍼한다.
→ 거미 가족을 통해 일제 강점기의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이산의 아픔을 겪는 우리 민족을 떠올리고 슬퍼함.
◆ 제재 : 거미 가족
◆ 화자 : 거미를 상대로 특별한 감정이 없는 상태였다가 동정을 하게 되고, 서러움과 슬픔을 느끼게 됨.
◆ 주제 : 거미 가족의 뜻하지 않은 이별과 이를 통해 느끼는 우리 민족의 이산의 아픔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무심코 거미 새끼를 문 밖으로 쓸어 버림.
◆ 2연 : 큰 거미를 새끼 거미가 있는 데로 가라며 쓸어 버림.
◆ 3연 : 작은 새끼 거미를 문 밖으로 쓸어 버리며 거미 가족이 재회하기를 바람.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수라>는 한밤중 방바닥에 내려온 거미를 밖으로 쓸어내 버린 일을 중심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나의 사물로서 거미 그 자체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거미를 대상으로 한 화자의 어떤 행위를 그려서 보여준다. 그리고 그 행위는 한정된 상황 속에서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이 작품은 시간(한밤중), 공간(방안), 행위(거미를 쓸어 문 밖으로 버린다)가 한정 및 통일되어 있다. 사건이 연속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상황 속에서 완결되어 있다. 그것은 이 작품에 사건 혹은 인물의 행위가 묘사되긴 하지만 그것이 소설적이라기보다 극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시의 사건이 보다 극적일 수 있는 것은 반복되는 사건의 우연성 때문이다. 이 시에는 방에 내린 거미를 쓸어내는 사건이 세 번 반복된다. 첫 번째는 새끼거미, 두 번째는 어미거미, 세 번째는 앞에서 갓 깨인 거미이다. 그런데 만일 방에 내린 거미를 밖으로 쓸어내 버린 행위가 단 한 번으로 끝났다면 적어도 행위의 내용을 문제 삼지 않을 경우 우리는 이 자체를 극적이라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 시에서 거미가 한정된 시간에서 세 번이나 방에 내리고, 화자는 역시 그것을 세 번 똑같은 방법으로 쓸어내어 버린다. 이와 같은 우연의 연속은 일상적이라거나 범상한 일이 아니다. 하물며 두 번째 세 번째의 거미가 내린 장소가 첫 번째 거미가 내린 장소와 꼭 같은 곳임에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에 이르면 우리는 이 작품의 구도가 1인 단막극, 즉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 <마지막 테이프>와 같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실제로 <수라>는 이상 설명한 바와 같이 극적인 상황을 시의 형식을 빌려 보여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수라>에서 시인이 만난 '거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혹은 생물학적으로 체험한 거미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 의미를 띤다. 즉 이 시의 인식 대상이라 할 거미는 주관의 개입이 없는 사물 그 자체로 있는 거미가 아니라 시인의 주관화된 거미이다. 그런 까닭에 시인은 이 거미들을 마치 인간의 부모형제와 같은 존재로 인식했던 것이다. 가령 끝 행에서 '이것(거미)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시인이 '거미'라는 생명체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것인데, 거미에서는 여러 가지 측면을 읽을 수 있다. 가령, 나비나 잠자리를 잡아 먹는 거미에서 잔인성이나 탐욕을 발견할 수도 있고, 허공에다 정교하게 집을 짜는 행위에서 어떤 창조성이나 예술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구석에 숨어서 끈질기게 먹이를 기다리는 습성에서 집요함이나 인내심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미가 지닌 그 여러 가지 측면의 의미들 가운데서 시인이 관심을 갖는 부분은 유독 존재론적인 연민이다. 유한한 존재 혹은 허무의 존재로서 살아가는 이 생의 슬픔 바로 그것이었다.
시 <수라>는 하나의 우화적인 이야기로 쓰여졌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지 거미 그 자체나 거미와 인간과의 관계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거미를 '통해서' 인간의 어떤 삶의 국면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지적한 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의 이야기 자체나 거기에 등장하는 거미는 일동의 은유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알레고리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명확히 표현하자면 이 시의 거미는 우화적 은유에 해당한다.
이 시의 내용을 이렇듯 우화 내지 알레고리로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제목에서 비롯한다. 시인은 시에서 단순히 방에 든 거미를 밖으로 쓸어내 버리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제목은 엉뚱하게 이와 아무 관련이 없는 '수라'로 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엉뚱한 아펠레이션은 시의 내용이 그 자체를 떠나 무엇인가 다른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동원된 것임을 강력히 시사해준다. 그러므로 이 시의 내용이 된 이야기는 '무엇인가 다른 그 어떤 것'을 진술하기 위한 우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은유'라고 하지 않고 굳이 '우화'라 한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작품이 시의 정통적인 틀을 지키지 않고 그 안에 드라머적인 요소 즉 사건과 상황을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원관념이나 보조관념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하더라도 ――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은유적이기는 하나 ―― 그것이 사건이나 상황으로 제시된 것은 은유로 부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의 거미에 대한 이야기는 시인이 '수라'라고 부르는 바의 것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라(修羅)'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에서 '아수라(阿修羅, asura)의 줄인 말이다. 그것은 원래 용모의 누추함을 뜻하였으나 제석과 전투하는 신으로, 나중에는 무서운 귀신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으며, 또한 육도(六道)의 하나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하게 되었다. '육도'는 '육취(六趣)'라고도 하는 것인데,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여섯 세계를 일컫는 말이다. 이 여섯 가지 세계는 중생이 윤회전생하는 길이므로 육도라고도 하고 중생이 각각 인업(因業)을 타고 나감으로 육취라고도 한다. 법화경서품에 '육도는 중생의 생사가 모이는 곳'이라 하였다. 따라서 '수라'는 서열상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으로부터 네 번째 즉 인간계의 아래, 축생계의 윗단계에 놓여 있는 세계이다. 인간보다는 더 고통스럽고 축생보다는 나은 중생의 삶이 영위되는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이 시의 제목을 '수라'로 한 것은 바로 인간의 세속적인 삶을 거미에 대한 화자의 행위에 빗대어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그 세속적인 삶은 '아수라'와 같은 삶이며 동시에 시에서 보여주는 바 화자와 거미가 대면하는 상황과 같은 세계이다. 시에서 보여주는 상황이 시의 제목에서 암시되듯 '아수라'의 세계로 비유될 수 있음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첫째, 거미는 윤회의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다. 원래 중생의 윤회전생은 그들의 업, 즉 과보(果報)가 인연으로 얽힌 데 있다고 한다. 그것은 집착을 버리고 완전한 자유의 상태에서 깨달음에 이를 때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거미는 거미줄에 생존을 건다. 그는 거미줄로 집을 짓고 살며 거미줄로 먹이를 나포한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매단 줄 혹은 끈은 인연을 상징하는 사물이므로 거미는 윤회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둘째, 거미는 허공에 집을 짓고 살지만 가끔 지상에 내려와 활동을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허공과 지상의 왕래, 즉 허공으로의 상승과 지상으로의 하강은 육도의 세계를 전전하는 윤회전생의 상상력을 개진시킨다. <수라>에서도 거미는 허공에서 지상(방바닥)으로 내려와 밖으로 쓸리는 비운을 당한다.
셋째,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업이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이 시에서 화자는 공동죄를 저지르고 있다. 일찍이 야스퍼스는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전자는 인간의 유한성과 불행의 원인을 '원죄'로 진단하여 이를 신의 구원으로 해결하고자 하는데 반해, 후자는 그것을 '공동죄'로 진단하여 '진리의 깨달음'에 의해서 해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하였다. 이때 공동죄란 중생이 생존을 위해 이 사바세계에서 저지를 수밖에 없는 죄를 의미한다. 즉 중생이란 공동죄를 저지르지 않고서는 생존을 영위할 수 없는 존재이다. 생존경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가령 내가 대학입시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탈락시키는 죄를 범하고 있으며, 내가 살기 위하여 쇠고기를 먹는 일은 소를 희생시키는 대가로 가능한 것이다. <수라>에서도 화자는 자신의 삶의 편안을 위해 궁극적으로 거미를 죽일 수도 있는 일을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저지른다. 차가운 밤에 밖으로 거미를 쓸어내 버리는 행위가 그것이다. 그 거미들은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걱정을 하며'의 시행에서 보듯 한 가족이기에 더 그렇다.
넷째,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집착과 거기서 연유된 번뇌에의 얽매임이다. <수라>에서 화자는 거미들의 부모 형제가 서로 헤어짐의 고통에 시달릴 것을 걱정한다. 이는 세속적 인연에 대한 중생들의 집착을 언급한 것이다. 불가에서는 이와 같은 집착을 버리고 절대 자유의 상태에 도달해야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가령 승려들이 출가하면서 속세를 버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수라>에서는 이와 같은 세속적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며 번뇌에 시달린다. 예컨대 화자는 여러 차례 자신이 당하는 슬픔에 관하여 '가슴이 짜릿하다',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서럽다', '슬프다', '걱정을 한다'고 술회하고 있다. 어미와 헤어진 새끼 거미 역시 슬픔과 분노와 공포에 시달린다.
마지막으로, 무명 혹은 미망 속에서 방황하는 삶이다. 시 속의 화자나 거미는 모두 벌레들이 무명 속에서 방황하는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우선 거미의 일족은 가족의 일원이 불행을 당한 것을 보면서도 같은 어리석음을 계속 범한다. 그가 진실로 진리를 깨달았다면 이와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화자 또한 마찬가지인데 그가 무명 속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은 제1행이 언급을 해준다.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공동죄가 바로 그것이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진리와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는 후회할 일(그가 서럽다고 표현한 일), 즉 거미를 잡아 찬 밖의 세계로 쓸어 버리는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상 살펴본 화자와 거미의 상황은 바로 육도의 하나인 아수라의 삶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인간의 이야기라고 해도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 즉 화자는 가치 있는 인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 차원의 생존을 영위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수라>는 거미에 대한 한 인간의 행위를 우화적으로 제시하면서 불교에서 말한 바 윤회전생의 삶을 이야기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부연할 것이 있다면 앞장에 분석한 바 이 시의 점층적 반복 구조가 윤회전생의 되풀이라는 이 시의 세계관과 상호조응함으로써 작품의 형상성을 보다 한 차원 높혔다는 점이다.
● 백석 : 시대적 상황 앞에 파란만장했던 생애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북방 정서를 통해 시화(詩化)했다. 본명은 기행(夔行).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 교육을 받았다.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동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 · 25 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시 <여승>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의 정조를 바탕으로 했다. <여우 난 곬족>, <고야>에서처럼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슴> 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 뒤 발표한 시로는 <통영>, <고향>,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 50여 편이 있다. 시집으로 1987년 창작사에서 <백석 시전집>과 1989년 고려원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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