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명철학(命名哲學) - 김진섭 -
■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이름'을 제재로 하여 그 기능(機能)과 의미, 위력(威力)을 밝히고 있는 수필이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기 쉬운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을 소재로 삼아 지적인 사유(思惟)를 동원하여 관조적(觀照的)으로 성찰(省察)하고 있다.
작자는 우리가 이름을 가지며, 그 이름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대해 무심히 넘기지 않고, 이름과 우리 존재의 의미가 어떻게 드러나고 발휘되는지를 통찰하고 있다. 이는 곧 우리 삶의 의미를 작은 것에서부터 의미화하려는 지성적인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자는 또 우리가 이름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인식되고 기억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우리가 대상에 대한 이름을 안다면 그것은 곧 대상의 절반은 이해한 것이라는 생각을 드러낸다. 그만큼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름이라는 일상적인 소재가 지니는 심오한 의미를 사변적으로 풀어내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를 통하여 주제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수필 문학의 진정한 향기는 우리의 삶과 경험에 대한 관조적 성찰을 수반한다는 데 있다. 관조적 성찰이란 사물을 충동이나 감각에 의해서 보지 아니하고 지적인 사유를 통해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 수필은 통찰과 사유의 결론을 성급히 서두르지 않고 자유롭고 유연하게 열어 놓는다. 그것이 곧 독자에게는 새로운 사색의 제목을 마련해 주는 것이 됨을 알 수 있다. 호흡이 길고 세련된 수사의 문체적 특성에도 유의하면서 이 작품을 감상해 보면 수필을 읽는 맛이 훨씬 더할 것이다.
김진섭의 다른 수필에서도 그렇듯이 풍부한 지식에 의한 예시가 적절히 활용되고 있으며, 일상인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적절한 예로 내용을 풀어 나가, 설득력을 강화하고 있다. 제재에 대한 진지한 사유에 문체가 호응하고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1930년대 우리나라 수필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데 기여한 작품의 하나로 손꼽힌다
■ 요점 정리
◆ 성격 : 중수필, 비평적 수필
◆ 표현 : 지적이고 중후한 만연체, 관조적 성찰의 자세
현학적인 태도와 다소 어색한 번역투의 문장 구사
◆ 주제 : 이름의 중요성과 위력
◆ 출전 : <조선문학>(1936)
■ 생각해 보기
1. 이름은 삼각관계의 산물?
⇒ 우리가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주체, 즉 사람이 직접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름은 주체(사람)와 대상(사물)을 연결시켜주는 일종의 중매쟁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유명한 시 구절을 음미해 보자.
2. 이 작품의 성격을 생각해 보자.
⇒ 직감적이고 통찰력이 주가 되는 비평적인 글로 작자의 사고를 중심으로 한 중수필이다
■ 작품 읽기
'죽은 아이 나이 세기'란 말이 있다. 이미 가 버린 아이의 나이를 이제 새삼스레 헤아려 보면 무얼 하느냐, 지난 것에 대한 헛된 탄식을 버리라는 것의 좋은 율계(律戒)로써 보통 이 말은 사용되는 듯하다.
그것이 물론 철없는 탄식임을 모르는 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떤 기회에 부닥쳐 문득 죽은 아이의 나이를 헤어 봄도 또한, 사람의 부모 된 자의 어찌할 수 없는 깊은 애정에서 유래하는 눈물겨운 감상(感想)에 속한다.
"그 아이가 살았으면 올해 스물, 아 우리 현철이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애달픈 원한이, 그러나 이제는 없는 아이의 이름을 속삭일 때 부모의 자식에 대한 추억은 얼마나 영원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자식이 죽었더라도 그 이름을 통해 기억되는 한 그 자식에 과난 추억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름이 대상을 떠올리는 매체가 되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ㅡ 우리가 만일에 우리의 자질(子姪)들에게 한 개의 명명(命名)조차 실행치 못하고 그들을 잃고 말았을 때, 우리는 그 때 과연 무엇을 매체로 삼고 그들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슴 속에 품을 수 있을까?
*죽은 아이에 대한 추억을 영원케 하는 이름의 위력
법률의 명명(命名)하는 바에 의하면 출생계는 2주 이내에 출생아의 성명을 기입하여 해당 관서에 제출해야 할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어떠한 것이 여기 조그만 공간이라도 점령했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
고고의 성(呱呱의 聲, 아이가 막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우는 소리)을 발하며 비장히도 출현하는 이러한 조그마한 존재물(갓난아기)에 대하여 대체 이것을 무어라고 명명해야 될까 하고 머리를 갸우뚱거리지 않는 부모는 아마도 없을 터이지만, 그가 그의 존재를 작은 형식으로서라도 주장한 이상엔 그날로 그가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기 위해서는 한 개의 명목을 갖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독립된 존재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이름이 필요하다는 의미임. 이름의 필요성이 강조된 부분). 모든 것이 그 자신의 이름을 가지듯이 아이들도 또한 한 개의 이름을 가지지 않으면 아니 된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도록 하는 이름의 위력
만일에 그가 이름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는 실로 전연히 아무것도 아닌 생물임을 면할 수 없겠기 때문이니, 한 개의 이름을 가지고 그 이름을 자기의 이름으로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성장치 못한 아이의 불행한 죽음이, 한 개의 명명을 이미 받고 그 이름을 자기의 명의(名義)로서 알아들을 만큼 성장한, 말하자면 수일지장(數日之長, 며칠 안에 몰라보게 자람)이 있는 그러한 아이의 죽음에 비하여 오랫동안 추억될 수 없는 사실 - 이 속에 이름의 신비로운 영적 위력(어떤 대상이 이름이 있음으로써 의미를 가지고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다는 것, 이글의 주제에 해당함)은 누워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장차 나올 터인 자녀를 위하여 그 이름을 미리미리 생각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명명의 중요성
일찍이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마르코만 인(人)들과 싸우게 되었을 때, 그는 일군대를 적지에 파견함에 제(際)하여 그의 병사들에게 말하되,
"나는 너희에게 내 사자를 동반시키노라!"
라고 하였다. 이에 그들은 수중지대왕(獸中之大王, 동물 중의 왕인 사자를 일컬음)이 반드시 적지 않은 조력을 할 것임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자가 적군을 향하여 돌진하였을 때 마르코만 인들은 물었다.
"저것이 무슨 짐승인가?"하고. 적장이 그 질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개다, 로마의 개다!" 라고 하였다.(사자를 개로 명명함으로써 병사들이 개를 다루는 것처럼 사자를 쉽게 무찌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우리가 대상의 실체를 알기 전에 그 이름에 따라 판단을 내리게 됨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마르코만 인들은 미친 개를 두드려 잡듯이 사자를 쳐서 드디어 싸움에 이겼다.
마르코만 인들의 장군은 확실히 현명하였다. 그가 사자를 개라 하고 속였기 때문에 그의 졸병들은 외축(畏縮, 두려워서 몸을 움츠림)됨이 없이 용감히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그 실체를 알기 전에 그 이름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가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 대상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는 이름의 위력(예화 : 사물 자체보다 이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예화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 이름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의 내용은 물론 그 이름을 통하여 비로소 이해될 수가 있는 것이지만(인간은 이름을 통하여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이 그 이름으로서만 그치고 만다는 것은 너무나 애달픈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만일 그 이름조차 알 바가 없다면 그것은 더욱 애달픈 일이다.
가령 사람이 병상에 엎드려 알 수 없는 열 속에 신음할 때 그의 최대의 불안은 그 병이 과연 무슨 병이냐 하는 것에 있다. 의사의 진단에 의하여 그 병명이 지적될 때에 그 병의 반은 치료된 병이라 할 수 있다(어떤 병인지 모를 때는 무엇을 조치하거나 짐작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반면에 병명이 확인되면 치료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에 불안감이 극복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파리라는 도시를 잘 알 수 없는 것이지만, 파리라는 이름을 기억함으로 인하여 파리를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요, 사옹(沙翁, 세익스피어)이라는 인물을 그 내용에 있어서 전연히 이해치 못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 불후의 기호(이름)를 통하여 어느 정도까지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예술을 알고 있다고 오신(誤信)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인식을 결정짓는 이름의 중요성(이름과 존재의 관계)
나는 얼마나 많이 이름을 알고 있는가! 그러나 그 이름을 내가 잊을 때, 나는 무엇에 의하여 이 많은 것을 기억해야 될까? 모든 것은 그 자신의 이름을 가지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것의 태만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름이란 지극히도 신성한 기호다(이름이란 그 대상에 대한 기억을 좌우하는 것이며 대상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므로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곧 처음에 누가 지었든 그 이름에 의하여 그것의 존재를 인식하고 기억한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 반드시 가져야 할 것으로서의 이름의 신성성(신성한 기호인 이름)
'Reading n See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수필 해설]모송론 -김진섭- (0) | 2022.04.07 |
---|---|
[현대수필 해설]명사십리(明沙十里) -한용운- (0) | 2022.04.06 |
[현대수필 해설] 멋있는 사람들 -김태길- (0) | 2022.04.06 |
[현대수필 해설]멋 -조지훈- (0) | 2022.04.06 |
[현대수필 해설]먼 곳에의 그리움 -전혜린- (0) | 2022.04.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