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광택 -이어령-
■ 이해와 감상
정성을 들이고 세월을 함께 하는 물건은 광택이 난다. 오래 문지른 책상과 무쇠솥과 장롱과 그릇들의 세간는 윤이 자르르 흐른다. 생활 속에서 끄집어내는 광택들이다. 이런 광택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루 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어령은 이것을 일컬어 <삶의 광택>이라 부른다. 투박한 나무에서, 거친 쇠에서 이런 광택을 솟아나게 할 수 있는 자라야 종교와 예술의 희열을 알 것이라 했다. 역시 이어령다운 예리한 통찰이다.
현대는 인공 광택의 시대이다. 호마이카를 지나 하이그로시 시대의 가구는 도대체 윤기를 위해 닦을 필요가 없다. 각종의 강력한 연마제와 도장술의 발달로 모든 물건은 처음부터 변치않는 광택을 지닌다. 삶의 광택을 끄집어 낼 기회 자체가 없어졌다. 그만큼 현대 도시인의 삶은 정성과 시간을 바치는 일과는 멀어진 것이고 그만큼 경박해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구두닦이가 구두에 광택을 내는 직업적인 일조차 소중하게 바라볼 만큼 윤을 낸다는 것의 의미가 없어진 시대를 살고 있는 지은이의 심정의 헛헛함도 행간에 보인다.
'책상'이라는 일상적 사물을 소재로 하여 현대인의 생활을 비판적 관점으로 조명한 수필이다. 처음부터 인공적인 광택을 지니고 있는 물건처럼 현대의 많은 물건들은 편리성의 산물이지만, 이러한 경향에 부수되는 부정적인 면도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즉, 사람들이 어떤 대상에 대해 끈기있게 공을 들이고 애써 가꾸는 정성과 참을성이 부족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물질적, 현상적인 면에 기울어져 있는 현대적 문명 생활에 대한 글쓴이의 비판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 요점 정리
◆ 성격 : 경수필, 문명 비판적
◆ 주제 : 전통적 생활 방식의 사라짐에 대한 아쉬움과 현대의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
■ 작품 읽기
나는 후회한다. 너에게 포마이커 책상을 사 준 것을 지금 후회하고 있다. 그냥 나무 책상을 사 주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어렸을 적에 내가 쓰던 책상은 참나무로 만든 거친 것이었다. 심심할 때, 어려운 숙제가 풀리지 않을 때, 그리고 바깥에서 비가 내리고 있을 때, 나는 그 참나무 책상을 길들이기 위해서 마른 걸레질을 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문지른다. 그렇게 해서 길들여져 반질반질해진 그 책상의 광택 위에는 상기된 내 얼굴이 어른거린다.
너의 매끄러운 포마이커 책상은 처음부터 번쩍거리는 광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길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다만, 물걸레로 닦아 내는 수고만 하면 된다. 그러나 결코 너의 포마이커 책상은 옛날의 그 참나무 책상이 지니고 있던 심오한 광택, 나무의 목질 그 밑바닥으로부터 솟아 나온 그런 광택의 의미를 너에게 가르쳐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책상만이 아니었다. 옛날 사람들은 무엇이든 손으로 문지르고 닦아서 광택을 나게 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청동 화로나 놋그릇들은 그렇게 닦아서 길을 들였다. 마룻바닥을, 장롱을, 그리고 솥을 그들은 정성스럽게 문질러 윤택이 흐르게 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오랜 참을성으로 얻어진 이상한 만족감과 희열이란 것이 있다.
아들이여, 그러나 나는 네가 무엇을 닦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옛날 애들처럼 제복 단추나 배지를 윤이 나게 닦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테인리스 그릇이나 양은 솥은 너의 포마이커 책상처럼 처음부터 인공적인 광택을 지니고 있어 길들일 필요가 없고, 또 길들일 수도 없다.
아들이여, 무엇인가 요즈음 사람들이 참을성 있게 닦고 또 닦아서 사물로부터 광택을 내는 일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구두닦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카뮈라는 프랑스의 소설까는 구두닦이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무한한 희열을 느꼈다고 했다. 구두닦이 아이들이 부드러운 솔질을 하고 구두에 최종적인 광택을 낼 때, 사람들은 그 순간, 그 부드러운 작업이 끝났거니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 바로, 그 억척스러운 손이 다시, 반짝거리는 구두 표면에 구두약을 칠해 광을 죽이고, 또 문질러 가죽 뒷면까지 구두약이 배어 들 게 하고, 가죽 맨 깊은 곳에서 빚어지는, 이중의, 정말 최종적인 광택이 솟아나게 한다.
아들이여, 우리도 이 생활에서 그런 빛을 끄집어낼 수는 없는 것일까? 화공(化工) 약품으로는 도저히 그 영혼의 광택을 끄집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투박한 나무에서, 거친 쇠에서 그 내면의 빛을 솟아나게 하는 자는, 종교와 예술의 희열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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