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성의전(赤聖儀傳) -작자 미상-
줄거리
안평국은 산천이 수려하고 옥야천리에 백과 무르익는 살기 좋은 나라였다. 백성들은 강직한 기질과 후한 인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나라 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형의 이름은 항의이고 동생은 성의라고 불렀다. 왕은 재주가 비상하고 예절이 밝은 성의를 사랑하여 그를 태자로 봉하려 하였으나 조정 대신들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국가 관례에 따라 맏아들 항의를 세자로 삼아야 한다고 완강히 주장하므로 그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늘 성의를 시기하던 항의는 동생을 해할 뜻을 품었다.
성의가 여나문 살 되었을 때였다. 왕후가 알지 못할 병에 걸려 자리에 누우니 효성이 지극한 성의는 어머니의 병환이 하루 빨리 낫기를 빌고 또 빌었다. 성의의 효성이 그렇듯 지극하니 그 지성에 탄복한 도인이 궐문 밖에 와서 왕후를 한번 뵈옵게 해 달라고 하였다. 이에 왕은 그 도사를 불러들여 왕후의 병세를 보도록 하였다. 도사는 왕후를 한번 살펴보고 나서 서역만리 청룡사라는 절간에만 있다는 일영주를 얻어다 대접해야만 낫는다는 말을 하고 댓돌 아래에 내려가 절을 하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누가 서역 만리창파를 헤쳐 청룡사에 갔다 올 것인가, 왕은 근심이 많았다. 그것을 알게 된 성의는 청룡사에 갔다 올 것을 자진하여 나섰다. 왕과 왕후가 굳이 만류하였으나 성의는 끝내 수십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집을 떠났다. 그들은 갖은 고생을 무릅쓰며 노를 저어 만리 대양을 가고 또 갔다. 가는 도중에 괴물이 나타나 배를 던지려고 하면 용왕에게 빌어 위기를 모면하였고, 선관들도 만나 도움을 받았다. 일행은 선관들이 내어 준 파초잎을 올라타고 재빨리 달려 그 멀고 먼 서역에 가 닿을 수 있었다. 성의는 마침내 청룡사에 있는 일영주를 가지고 귀로에 들어섰다.
그럴 때 항의는 성의가 일영주를 구해 오면 온 나라 사람들이 동생의 효성을 칭찬하게 될 것이고 부왕도 그를 더 신임할 것만 같아서 어떻게 하든지 성의를 중도에서 없앨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왕후가 반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성의를 두고 몹시 걱정한다는 것을 구실로 동생의 생사를 알아보겠노라고 하며 수십 명의 무사를 앞세우고 서해에 배를 띄웠다. 배를 타고 나아가 십여 일만에 바다 가운데서 마주오는 성의 일행을 만난 항의는 그 자리에서 약을 빼앗고 큰 소리를 쳤다.
"네 거짓으로 일영주를 얻어오마 하면서 서천에 가는 척하고 병모를 버리고 집을 나갔지. 그리고는 불도에 깊이 빠져 빨리 돌아오지 아니하고 이제야 오니 이는 천하에 용서 못받을 불효이다. 이제 모후 너를 보시면 병이 더할 것이니 … 당장 저 물에 몸을 던져 그 죄를 스스로 씻으라."
성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 말을 듣고 이 약은 모후를 위하여 구해온 것인데 무슨 죄로 죽으라고 하느냐며, 자신의 몸이 죽는 건 두렵지 않으나 어머님을 다시 뵙지 못하는 것이 한이라고 했다. 그래도 항의는 주저하는 기색이 없이 데리고 온 무사들을 시켜 만경창파를 헤쳐 온 사람들을 다 죽인 다음 동생 성의마저 죽이려 들었다. 그 순간 한 무사가 앞을 막으며 동기간에 어찌 그런 끔찍한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니, 항의는 성의의 두 눈을 찔러 앞을 못보게 만들고 배를 뒤집어 엎어 버렸다.
동생을 바다 가운데 던지고 돌아온 향의는 부왕에게 일영주를 바쳤다. 그리고는 성의가 약을 구해 가지고 오던 중 마음이 변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한 선관이 일영주를 가져다 주면서 그 사연을 전하였다고 꾸며댔다. 왕후는 항의가 권하는 일영주를 먹고 완쾌하여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소식을 모르는 성의를 생각하며 늘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두 눈이 먼 성의는 다행히도 부서진 뱃조각을 붙잡고 무변대해로 흘러가다가 바다 기슭에 있는 바위에 가 닿았다. 더듬거리며 간신히 뭍으로 올라가니 거기에는 무성한 참대밭이 있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었다. 그는 대를 끊어 단저를 만들어 불었다. 그 단저에서는 참으로 처량한 곡조가 흘러나왔다. 이때 중국의 사신으로 안남국에 갔다가 귀로에 들어선 호승상이 가까운 곳에 배를 대고 쉬는 중이었다. 호승상은 문득 들려오는 그 구슬픈 단저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이상하게 생각되어 하리를 불러 누가 부는가를 알아보라고 분부하였다. 하리는 빨리 눈 먼 성의를 찾아내었다. 호승상은 성의의 가련한 모습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겨 중국으로 데리고 갔다.
서울에 올라가서 황제를 만난 호승상이, 단저 잘 부는 소경을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를 하니 황제는 곧 성의를 불러 단저를 불게 하였다. 성의가 부는 청아한 단저 소리는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성의는 후원 별당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무렵 채랑이라고 부르는 어여쁜 공주가 늘 완월루에 올라 거문고를 타곤 하였다. 어느 날 완월루에서 거문고를 타던 공주는 맑고 구슬픈 단저 소리를 듣고 시녀 병옥을 후원 별당으로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그날부터 공주는 성의를 완월루에 청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의는 공주에게 그럴 듯하게 자기의 과거사를 들려주었다. 성의는 황제 앞에서도 지난날 이야기를 늘 거짓말로 꾸며대곤 하였다. 공주와 성의가 알게 된 지 일 년이 지났다. 그 사이 그들은 서로 음악도 논하고 시도 화합하면서 퍽 가깝게 지내었다.
그럴 때 안평국의 왕후는 성의의 생사를 알 수 없어 슬픔을 금치 못해 하고 있던 중에 한번은 성의가 거처하던 방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문 앞에서는 이전에 성의가 애지중지 기르던 기러기 한 마리가 슬피 울고 있었다. 왕후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어 아들 성의를 그리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기러기 다리에 동여매어 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기러기는 갑자기 두 날개를 활짝 펼치고 서북쪽으로 날아갔다.
이보다 조금 앞서 중국의 공주는 방에 홀로 앉아 글을 읽다 말고 시녀 병옥에게 성의를 불러 오라고 하였다. 공주의 부름을 받아 간 성의는 잘 차려진 진수성찬을 먹으면서 공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데 홀연 동남쪽에서 외기러기가 날아오더니 성의의 곁에 내려앉았다. 공주는 이상하게 생각되어 기러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기러기 다리에는 그 무슨 글을 적은 쪽지가 동여매어져 있었다. 공주는 즉시 그것을 빼내어 거기에 적힌 글을 소리내어 읽었다.
"안평국 국모는 아들 성의에게 부치노라."
이렇게 시작된 그 편지에는 소식을 몰라 궁금하다는 것과 형이 너의 소식을 알아가지고 와서 하는 말을 들어보니 네가 머리 깎고 중이 되어 부모를 버리겠다고 한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형의 행실은 불효한데 너는 어찌하여 돌아오지 않느냐, 속히 화답을 보내라는 등의 사연이 적혀 있었다.
성의는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보니 반가움을 이길 수 없으면서도 앞 못보는 안타까움에 간장이 다 녹는 듯하여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순간 멀었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공주는 뜻밖에도 성의가 눈을 뜨고 외간 남자와 자주 만난 부끄러움으로 하여 몸둘 바를 몰라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슬쩍 자리를 떴다. 성의는 다음날 호승상을 만나 비로소 자기가 소경이 되었던 전후사를 이야기하였다. 호승상을 통하여 이 희한한 소식을 들은 황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 하면서 이제야 딸의 배필을 구했노라고 환성을 올렸다.
얼마 안 되어 성의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되니 황제는 그를 부마로 삼았다. 안평국에 있는 왕후도 기러기편에 부친 편지를 받고 성의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얼마 후 성의는 아내와 함께 본국으로 향하였다. 이 무렵 왕후가 성의의 소식을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항의는 동생이 돌아오면 자신의 비행이 드러날 것이 두려워 몇몇 심복들과 함께 귀국하는 길목을 지키다가 도적으로 모아 죽일 흉계를 꾸몄다. 그러나 향의는 그 계책을 실현하지 못하고 안평국의 이름 모를 무사의 손에 죽고 말았다.
성의는 안평국으로 공주와 함께 돌아와 혼례를 올리고 선정을 베풀면서 행복한 삶을 살았다.
* 발단 → 안평국 왕비가 병이 들어 성의가 병을 치유할 일영주를 구하러 서역으로 떠남.
* 전개 → 성의가 선관의 도움으로 서방 세계에 이르러 일영주를 구함.
* 위기 → 항의가 성의가 구한 일영주를 탈취한 후 성의의 눈을 멀게 함.
* 절정 → 항의가 천자의 사위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성의를 죽이려 하다 오히려 죽임을 당함.
* 결말 → 성의는 안평국의 왕이 되어 선정을 베풂.
감상 및 해설
작자 · 연대 미상의 고전 소설로, 효도와 우애 같은 유교적 가치관을 강조한 작품이다. 이 글을 도교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불교적인 소설로 보기도 한다. 적성의의 고난과 투쟁, 승리라는 측면에서 영웅 소설적 성격을 지니며, 채란 공주와의 애정담도 중심 내용이기 때문에 애정 소설적 성격도 지닌다. 환상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왕권을 둘러싼 암투, 형제간의 갈등과 같은 사실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이 글은 구약(救藥) 여행 모티프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구약 여행 모티프란 약을 구하기 위하여 길을 떠남과 동시에 갈등이 시작되어, 약을 얻으며 갈등이 해소되는 탐색의 모티프를 뜻한다. 한편, 이 글의 근원에 대하여, 중생을 도덕적으로 교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현우경>과 같은 불교의 위경(僞經, 정식 경전에 포함되지 않은 경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적성의전>은 도덕적으로 선하면서 영웅적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자신의 존재적 우월성을 인정받아, 악인에게 돌아간 세자의 소임을 되찾음으로써 기존 세력에 영예롭게 편입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전체 내용은 크게 성의가 일영주를 구하러 가는 과정, 공주와의 결혼 과정, 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적성의전>은 도덕적으로 선하면서 영웅적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악인의 음모를 극복하고, 악인의 권력을 대체하여 세상에 복을 끼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를 당대 현실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면, 장자 계승이라는 관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단순히 장자라는 이유로 왕위나 집안의 수장을 계승하는 관계는 불합리하며, 능력이 우월하고 도덕적인 인물이 권력을 승계해야 한다는 현실 인식을 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점 정리
● 갈래 : 고전 소설, 국문 소설, 윤리(도덕) 소설, 가정 소설, 영웅 소설, 애정 소설
● 성격 : 불교적, 유교적, 도교적, 교훈적, 전기적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인물
* 적성의 → 안평국의 둘째 왕자. 재주와 덕성을 겸비한 인물로, 형 항의에 의한 역경을 딛고 왕이 됨.
* 적항의 → 안평국의 첫째 왕자. 동생 성의를 시기하여 그 공을 가로채고 성의를 죽으로 몰아넣으려 하다가 결국 자신이 죽음에 이르게 됨.
* 채란 공주 → 중국의 공주이자 성의의 아내. 선견지명이 있으며 용의주도하고 씩씩한 기상을 지닌 여인임.
● 의의 : 고전 소설 <육미당기>와 <김태자전> 등에 영향을 미침.
● 주제 : 고난 극복과 승리의 쟁취,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 간의 우애
● 특징
* 선과 악의 대결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남.
* 구약 여행 모티프를 바탕으로 함.('바리데기'와 유사함.)
* 불교적인 인과응보와 유교적 가르침(효도와 우애)을 강조함.
* 현실비판적적 작가의식이 반영됨(능력이 있고 도덕적으로 선한 인물이 권력을 승계해야 함.)
* 탐색주지( '출가' → '고난과 시련의 봉착' → '고난에 대한 보상과 명예의 회복' , 집을 떠나서 모험과 고난 끝에 무엇을 찾고 돌아와 명예를 얻음)의 서사 구조를 지님.
생각해 보기
◆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식
(1) 윤리의식 → 형제 간의 갈등의 성격을 통하여
<적성의전>은 초월적 근거에 의해 마련된 형제 간의 갈등을 현세적으로 해결하며 악에 대한 징계를 인간이 내려 현세적인 징악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동복 형제 간의 갈등을 설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갈등의 깊이는 매우 깊게 나타난다. 형은 동생의 눈을 칼로 직접 찔러 실명시키며 동생은 형에 대하여 "사형이 불량하여", "불측한 형의 독슈를 맛나 …… 악형이여"하여 직설적인 증오와 원망을 표현한다. 그리고 귀국할 때 형의 죽음을 방관하며 왕위를 계승한 후에는 형을 죽인 무사에게는 '절의공'이라는 시호를 내려 향사하게 한다. 따라서 <적성의전>에서는 유가적 이념의 우애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2) 정치 · 사회의식 → 여성의 영웅담과 국가 질서 회복의 성격을 통하여
<적성의전>에는 여성 영웅담의 화소가 등장한다. <적성의전>에서는 성의가 귀국할 당시 항의 일당에 대하여 채란 공주가 적극적인 자세로 물리치고 있고 성의와 결연하는 과정에서도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적성의전>에서는 선제(善第)인 성의가 악형(惡兄) 항의를 제거하고 왕위를 계승하는 점에서 관습적 규범에 따라 적장자에게 자동으로 세습되는 제도는 불합리하며 도덕적 선과 능력적 우월성을 지닌 자에게 왕위가 계승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현실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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