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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n Seeing

[현대시 해설]기항지 1 - 황동규 -

by 휴리스틱31 2022.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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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항지 1
                                                         - 황동규 -

 

걸어서 항구(港口)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 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현대문학>(1967)-

 

 

해            설

 

[ 개관 정리 ]

 성격 : 묘사적, 시각적, 주지적, 감각적, 상징적, 사색적

 표현

* 대상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며, 이 묘사를 통해 화자의 내면을 표출함.

* '한지(寒地), 지전(紙錢), 용골(龍骨), 수삼개(數三個)' 등의 한자어가 색다른 분위기를 만듦.

* 시간의 흐름과 시선의 이동에 따라 시상을 전개함.

 

 시어 및 시구 풀이

* 기항지 → 항해 중의 배가 잠시 들를 수 있는 항구

                  방랑과 정착 사이에서 갈등하는 공간

*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 이 시가 여행 중에 씌어졌음을 알 수 있다.

* 길게 부는 한지의 바람 → 객지에서의 고독감이 나타남.

 

 

*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 화자의 불안한 내면

* 긴 눈 내릴 듯 /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 하강 이미지를 통해 쓸쓸한 분위기를 나타냄.

* 구겨넣고, 꺼 버리고 → 소멸의 이미지로, 화자의 막막하고 우울한 내면을 나타냄.

* 용골

    → 이물에서 고물에 걸쳐 선체를 떠받치도록 큰 배의 밑바닥 한가운데에 만든 길고 큰 재목

        정착에 대한 화자의 소망이 이입된 객관적 상관물

*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 정착을 소망하는 시적자아의 무의식을 드러낸 표현

*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 개의 눈송이

   → 어두운 하늘의 눈송이는 고독한 시적자아의 내면과 상응함.(부유, 방랑, 차가움, 막연함, 덧없음)

* 하늘의 새들 → 그동안의 하강의 이미지를 상승의 이미지로 변환시켜줌으로써, 화자의 암울했던 의식이 하늘의 새를 통해 정화되고 오랜 방황을 끝낼 수 있게 될 것임을 암시한 표현으로도 볼 수 있음. 또한 자유롭게 떠도는 삶이 투영된 객관적 상관물로도 볼 수 있음.

 

 제목 : '항해 중 배가 잠시 들르는 항구'라는 의미로, '잠시 들르는 곳'을 가리킴.

              상징성 → 화자의 방랑과 안주가 접합된 이중적 의미의 장소 

 주제  여행지(항구)의 쓸쓸한 밤풍경과 방랑의 삶

             방황하는 젊은 영혼의 자기 성찰

 

 

[시상의 전개 과정]

■   1 ∼ 5행 : 바람불고 눈이 내릴 듯한 항구에 도착함.(을씨년스럽고 스산한 분위기)

■  6 ∼10행 : 돈을 구기고 담배를 꺼면서 배를 향하여 감.(막막하고 우울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 11∼13행 : 항구의 안을 향해 있는 배의 모습.(항해를 마치고 안식을 취하는 배들)

■ 14∼15행 : 밤하늘에 흩날리는 눈송이와 새의 모습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여행지의 한 포구에서 본 풍경들과 시적 자아의 내밀한 정서를 그린 여행시다. 여행은 그에게 세계를 인식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계기이며 영혼의 확장으로 비유될 수 있다.

화자는 여행 중이다. 여행의 끝에 어느 항구에 도착했다. '항구'란 떠나는 배와 도착하는 배가 임시로 머무는 곳이다. 여행 중인 화자에게 있어서는 여행의 끝인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장소이다. 즉, 화자의 방랑과 안주가 접합된 장소로서의 역할을 항구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항구의 분위기는 못내 을씨년스럽고 음산한 느낌을 자아낸다.   방랑을 끝내고 안주하고 싶은 화자는 정박해 있는 배가 있는 곳으로 간다. 모든 배들이 항구의 안을 향하여 정박해 있음이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 어두운 하늘에는 눈송이와 더불어 새가 날고 있다.  마지막 2행은 마치 소설의 배경묘사와도 같은 효과를 느끼게 하는데, 이 시를 쓸 무렵, 시인은 눈송이라는 비유를 즐겨 썼다 한다. 그에게 있어 눈송이는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부유(浮遊)하는 속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이 소재(눈송이)는 막연함, 차가움, 덧없음 등과 관련되어 있어서 그의 시의 핵심적 감정 전달 매체로 기여했다.

결국, 이 시는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차가운 겨울날의 항구 모습과 눈송이를 통해 차분하게 묘사해 낸 작품이다. 화자의 감정이나 사상은 배제되어 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로만 일관하고 있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 일반적으로 황동규의 시는 꿈과 현실 사이의 갈등 구조로 되어 있다고 평가된다.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현실은 추하다. 그는 현실을 비극적으로 인식한다. 그에게 수식어처럼 따라디니는 '비극적 세계관'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의 지향성 때문이다.

황동규에게 여행은 시의 소재를 제공하고 시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힘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존재의 초월적 가능성을 탐구하고 일상적 삶의 충동을 뛰어넘기 위한 행위이다. 그의 여행은 가출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를 떠난다는 의미뿐 아니라 새로운 세계와 부딪치려는 자세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는 "우리는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보아야 한다. 여의치 않으면 정신적 가출이라도 해야 한다. 좋은 시와 좋은 소설이 왕복표를 준다. 집에 남아 있기만 하면 가축이 될 뿐이다. 아니면 길들여진 사람이 되고 만다."라는 요지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여행은 그의 시의 테마이면서 문법이다.  

 *출처: 김윤식의 <고교생과 함께 하는 시특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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