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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잉여 소비를 넘어장기 디플레이션 시대로

by 휴리스틱31 2021.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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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 소비를 넘어

장기 디플레이션 시대로

 

 

지갑을 열지 않는 소비자

 

시장에는 매일 새로운 제품들이 등장한다. 시장 질서의 주체가 공급자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전환되는 공급 과잉에 이른 지 이미 오래다. <펑키 비즈니스>의 저자인 스톡홀름 경영대학원의 노오스트롬 교수는 이러한 시장 질서를 잉여 경제로 설명한다. 미국의 예를 보면 매년 새롭게 출시되는 식료품의 수가 198127백 개에서 1996년에 이미 2만개를 넘어섰다고 한다. 월트 디즈니는 영화, 만화책, CD 등으로 5분마다 하나의 신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물론 공급 측면의 설명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수요 측면에서 구매력이 축소되는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가늠하는 대표적인 지표는 실업률이다. 우리의 경우 4%대에 이르는 전체 실업률은 물론이거니와 9%선에 이르는 20~30대의 청년 실업률이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구매력 위축이 두드러진다.

점차 기지개를 켜는 미국 경제도 높은 실업률을 난제로 남겨두고 있다. 2003년 최고치인 6.3%보다는 낮은 수준이지만 본격적인 회복기에 접어들 연말에도 5.7% 수준으로 고용없는 절름발이 성장이라는 기현상이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연방준비위원회가 미국의 경기 회복에도 불구하고 40여 년 만의 최저 수준인 연방기금금리 1%를 그대로 유지시킨 이유도 고용 시장이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물가 상승을 우려한 탓이다. 서구 유럽의 경우 높은 실업률은 이미 민성이 된 일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의 실업률은 10%에 육박해 미국과 영국의 실업률 5%대에 비해 두 배에 달한다.

가계 소비 지출에서 차지하는 식료품 비중을 의미하는 엥겔지수를 통해서도 구매력 저하를 볼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엥겔 지수가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상승했다. 경기 침체로 소득 수준이 저하되면서 기본적인 지출인 먹거리 외에 다른 지출에 대한 여력이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케팅의 시대, 광고의 범람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일들이 있다. PC를 켜고 이메일을 확인하며, 우르르 쏟아지는 광고성 스팸 메일들을 청소하는 일이다. ‘이건 내게 필요한 메일이니 그대로 두고, 이 메일은 삭제하고’, 차분히 광고 메일을 선별하다가는 오전 업무 시간을 제대로 건져내기도 어렵다. ‘Delete, Delete···’ 혹여 낯 뜨거운 장면의 사이트로 자동 연결되는 음란성 메일이 곤란한 상황에서 열리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즉 소비자와 고아고의 쫓고 쫓기는 극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더욱 두드러졌지만 상업성 광고의 범람은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 전직 야후의 마케팅 담당 부사장이자 [퍼미션 마케팅]의 저자 세스 고든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평균적으로 연간 약 100만 개, 하루 약 3천 개의 광고를 접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다. 대략 1시간의 TV 시청을 하면서 40, 신문 한부를 보는 동안에도 최대 100가지 광고에 노출된다고 한다.

최근의 새로운 광고 채널들은 이러한 경향을 최고조로 올려놓았다. 앞에서 예로 든 이메일이 대표적이다 심심치 않게 ‘5천만 개의 이메일 주소를 3만원에류의 스팸 메일을 목격할 수 있다. 손쉽게 거의 무제한의 소비자들 바로 눈앞에, 거의 제로의 비용으로 게릴라성 광고 폭우를 쏟아 부을 수 있는 상황이다.

 

 

장기 디플레이션은 전 세계적 현상

 

통화 팽창에 따른 물가 상승을 의미하는 인플레이션은 경제가 성장하면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와는 반대로 통화 축소로 인한 디플레이션은 경제 성장이 멈칫하면서 물가 상승 정도가 심각하게 둔화되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장기에 걸친 디플레이션 현상은 최근 전세계적으로 관찰된다. 미국이나 유로권 국가들은 물론이고, 가까운 일본의 경우도 부동산 자산가치 하락으로 시작된 버블 붕괴 이후 잃어버린 10동안 지독한 디플레이션 현상은 연일 두 자릿수 성장의 고공행진을 하는 중국도 예외가 아니다. 벌써부터 내부에서조차 과잉 생산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중국의 권위 있는 경제 월간지 <중국기업가>20042월호에서 ‘2008년까지 전면적인 생산 과잉의 위기가 도래할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등 과도한 설비 투자와 토지 가격의 급등 등 버블 징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는 공급 초과의 잉여 경제, 빠른 속도의 생산 기술 진보, 세계의 공장인 중국산 저가격 제품 등을 설명 변수로 들 수 있다. 시장에서는 경쟁 제품들이 위축된 소비 심리에 대응하기 위해 전에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수준으로 가격을 인하하기 시작한다. 경제 원론 시간에 배운 수요-공급 간 불균형 아래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전형적인 경로다.

기술 진보에 따른 디플레이션의 영향은 첨단의 공산품에서 두드러진다. 10년 전만 해도 보편화되지 않았던 우리 주변의 첨단 기기들을 떠올려보자. 노트북 컴퓨터, 휴대폰, MP3 플레이어 등은 하루가 다르게 제품 가격이 떨어지고 있다. 상상 초월하는 낮은 생산비로 도무지 경쟁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중국산 제품들의 시장 잠식은 전세계 시장의 물가 수준 하락을 주도하고 있다.

 

 

게리 실링이 제시하는 디플레이션의 15가지 징후들

 

20여 년 전부터 한결같이 글로벌 디플레이션을 경고해온 게리 실링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게리 실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경제 전망으로 이름이 난 사람이다. 1969, 1973년의 대대적인 세계 경기 위축을 정확하게 전망했다. 또한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플레이션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의견 일치를 보인 1970년대 말에 미국 정치의 기조변화로 장기 디플레이션의 시작을 예견했다. 1998년에 펴낸 <디플레이션>에서 전세계적인 디플레이션 현상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디플레이션의 15가지 징후를 제시했다. 현상을 이보다 더 종합적으로 읽어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짜여진 예언서를 보는 느낌이다.

게리 실링이 제시하는 근거는 크게 2가지다. 소비자 측면에서 소비여력이 급격하게 위축되는 동시에 공급자 입장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져 가격 인하 릴레이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시장 균형에 대한 근거들을 보자.

소비자 측면에서 보면 인터넷이 몰고 온 정보화, G7 국가의 은퇴 인구 증가로 실질소득 감소, 소비자의 지축 성향 증가 등의 근거를 제시한다. 공급 측면에서의 근거는 한마디로 경쟁 심화와 기술 진보다. 기술 진보로 원가가 하락하고 한층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제품이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에 나온다. 소비재의 대량 유통, 규제 완화, 시장 경제의 확산, 세계화 등 공급자 간 치열한 경쟁을 부추기는 동기들이 즐비하다.

 

 

혼란스러운 시장 참여자들

 

디플레이션 시장에서 기업들이 겪는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연일 쏟아지는 무차별적인 경쟁 제품, 소비자들의 굳게 닫힌 지갑에 말도 안 되는 저가격의 중국산 제품이 함께 경쟁을 하자고 한다. 다양한 선택권을 가지게 된 소비자의 기호는 점점 까다로워지고 기업은 경쟁적으로 소비자를 잡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하게 된다. 최근 들어 기업 경영에서 마케팅의 비중이 높아진 여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능과 디자인이 유사한 제품 간의 경쟁 상황에서 다양한 마케팅 수단을 동원해봐도 소비자들의 반응은 그다지 신통치 않다.

생산 단가를 낮추기 위한 혁신적인 생산성 제고 노력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최근의 일본 경제 부활에 대해 이미 이전부터 일본의 경쟁력이 다시 진가를 발휘할 날이 올 것임을 전망한 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일본은 이미 10년이 넘도록 지독한 디플레이션을 거치면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생산성으로 무장한 기업군이 운집해 있다. 도요타, 닛산, 캐논 등 속칭 잘나가는 일본 기업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극심한 디플레이션 시장에서 생산성 제고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구체적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제조업 요소 비용을 비교해보자. 우리의 시간당 임금이 842원일 때 중국은 100원이다. 8명의 중국인이 할 일을 한국인은 혼자서 해내야 비로소 승산이 있다는 이야기다. 글로벌 차원에서 전개되는 디플레이션 현상은 기업들에게 현재 이후에도 계속될 골치 아픈 경영의 주제가 될 것이다. 그 현상의 원인과 구조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적절한 시장대응이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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