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저가 명품 시장의 트레이딩 업, 그 이후
¶ 2003년 상반기를 강타한 명품족 열풍
필자 나름대로는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브랜드가 위세를 떨친 것이 1980년대 초반부터라고 생각한다. 그 중심에는 2만 원에 조금 못 미치는 ‘나이키 운동화’ 신드롬이 있었다. 바로 그 즈음 검정색 중고등학교 교복에 자율화 조치가 행해졌다. 당시로서는 신발 전문점도 흔하지 않았고, 고작 4-5천 원 가량의 평범한 운동화로도 만족하고 다녔다. 아니 브랜드라는 개념조차 없어서 그저 ‘새 것’이냐 ‘헌 운동화 ’냐가 우열의 기준이었다. 그런데 나이키 열풍을 시작으로 한국 소비자들에게 브랜드의 영향력이 드세지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크게 2가지 소비 흐름이 시장을 대변해준다. 초반의 흐름이 ‘명품족’이라면 후반 이후 지금까지는 ‘웰빙족’이 주도했다. 명품족은 다분히 한국적 소비 특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단순히 유명 브랜드 제품 선호 이상의 소비자군을 의미한다. 나이키는 브랜드란 개념이 거의 없던 시장에 ‘브랜드’를 부여하는 것으로 튈 수 있었다. 이제 명품 브랜드는 기본적으로 브랜드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시장 환경에서 ‘고가 프리미엄’이라는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명품족은 영향력은 막강했다. 유행에 민감한 20~30대 소비층을 중심으로 시장의 주류 소비 트렌드로 자리잡아갔다. 단순히 좋은 제품이 아니라 1등 제품이 아니면, 그것을 통해 나의 가치가 차별화되지 않으면 싫다는 것이다. 더구나 시장이 불황인 상황에서 명품족의 소비 행태는 언뜻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더 흥미로워 앞다투어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내렸다.
이후의 웰빙 트렌드가 본연의 개념과는 달리 지나치게 고급화 소비색을 띠게 된 데도 명품 소비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 초기 명품 시장의 퇴조가 보인다
명품이 제대로 된 의미를 가지려면 대중적이어서는 곤란하다. 명품을 구성하는 요건에는 탁월한 제품의 품질, 세련된 디자인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명품족에게 어필하는 궁극적인 포인트는 소비의 희소성에 있다. 아무나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제품으로는 ‘남들과 차별된 소비 만족’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기업 중에서는 적극적으로 희소성을 유지해 브랜드 명성을 유지하기도 한다. 루이비통의 경우 파리 본점에서 여행객이 제품을 구입하면 여권 번호를 컴퓨터에 입력함으로써 1년에 한 품목만 구입하도록 하는 ‘한정 판매’ 방식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번져갔던 명품족 현상은 본래의 명품 개념과 배치되는 현상임에 틀림없다. 명품의 대중화는 크게 2단계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처음 단계가 ‘짝퉁’으로 설명되는 이미테이션의 명품 대체 소비다. 소비자들의 명품 소비 심리를 이용해 진품과 거의 흡사한 가짜 제품들이 시중에 판을 치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다. 브랜드라면 눈에 불을 켜는 한국소비자들에게 진품과 모조품의 구분은 이제 식은 죽 먹기이기도 한 까닭이다.
다음 단계가 바로 중저가 명품이 득세하는 트레이딩 업 단계다. 공급자들이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시기다. 트레이딩 업은 중산층 소비자가 품질이나 감성적 만족을 얻기 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새로운 고급 브랜드를 선호하는 현상이다. 다양한 산업에서 동류 제품군 및 산업 특성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 이들 모두 시장의 변화에 민감하고 소비자의 고급 소비 선호 현상에 부합하는 새로운 가치를 제공했다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소비자들은 상향 시장의 제품을 원하고 경제적인 자금 여유도 올라간다. 자연스럽게 명품 제조 기업들은 기존의 브랜드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대중의 명품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제품, 매스티지를 무시하기 어렵게 된다.
¶ 중저가 명품, 매스티지의 확산
얼마 전 경영전문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서는 미국 소비 시장에서 매스티지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고 소개한 바 있다. 매스티지는 전체 소비재 시장 규모의 19% 정도를 차지하며, 연간 10~15%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증가 제품을 주로 구입하던 미국 중산층 소비자가 품질이나 감성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 매스티지를 소비하는 추세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매스티지는 가방, 의류와 같은 패션잡화뿐만 아니라 식품, 가구, 생활용품, 가전제품 등과 같은 산업 전반ㅇ로 널리 확장되고 있다고 한다.
국내의 경우 프리미엄 커피, 원통형 세탁기 이외에도 유사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유통업체 상반기 매출 현황 분석에 따르면 진 캐주얼, 아웃도어룩 등에 있어서 중고가 제품의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최저 12%에서 최고 50% 정도로 증가했다고 한다. 또한 디지털 카메라의 성장세가 지속되는 가운데 최근 관련 업체들이 전문가용 일안반사식 디지털카메라를 100만 원대의 보급형 제품으로 잇따라 출시함으로써 ‘사진 전문가’를 자처하는 국내 일반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다. 또한 백화점에서는 미우미우(Miu Miu) 가방, 디젤(Disel) 청바지 등과 같은 준(quasi) 명품 브랜드를 대폭 확대해 판매하는 ‘매스티지존’의 수익이 늘고 있다.
해외의 경우에는 이미 많은 사례가 존재한다. 월풀은 기존의 드럼세탁기를 업그레이드한 감성 제품인 듀엣을 출시, 일반 세탁기의 2배가 넘는 고가임에도 판매에 성공해 미국 세탁기 시장의 고급화를 주도했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기존 시장이 간과한 여성 니즈를 간파해 합리적 가격과 섹시한 디자인의 ‘보디 바이 빅토리아’로 고급 속옷 브랜드의 대중화를 선도하고 있다.
¶ 제로 베이스의 트레이딩 업은 없다
소비자들의 명품 선호는 곧 이어 매스티지로 옮아갔다. 급격하게 불거진 명품 소비 수요의 증가에 고급 제품의 ‘희소성 고삐’를 해제하는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트레이딩 업은 자체 개념이 가지는 속성상 부모뻘 되는 모(母)브랜드 제품을 전제로 한다. 그저 그런 중저가 브랜드를 완전히 새롭게 탄생시키면서 트레이딩 업을 진행할 수는 없다. 소비자들은 명품의 대체재로서 매스티지의 요건에 차별화된 ‘프리미엄 브랜드 가치 + 높은 가격 이미지’라는 2가지 ‘과거형’ 조건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루이비통의 매스티지 제품은 루이비통의 명품 제품이 선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조금은 다른 측면으로 우리나라의 트롬 세탁기가 매스티지로 분류되는 이유는 과거 드럼 세탁기의 ‘명품 이미지 + 고가격’의 기억이 선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매스티지와 차별되는 다음 단계의 주류 소비 트렌드는 무엇일까?
¶ 트레이딩 업, 그 이후가 진행 중이다
방향은 명확하다. 소비자들에게 어떠한 새로운 감성 가치를 제언해주는 일이 하나고, 가격 하락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는 일이 또 다른 하나다.
그렇다면 새로운 감성 가치 제언은 대체할 수 있는 것인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새로운 감성 가치 제언은 제로 베이스에서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 부분은 이후 시장의 전개를 전망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명품족과 매스티지의 핵심은 차별화된 감성 가치다. 브랜드 가치여도 좋고, 남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고가격이어도 좋다. 이 조건을 만족하면 굳이 긴 역사를 가진 고전적 명품 브랜드가 아니어도 소비자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
아르마니 브랜드가 조르지오, 엠포리오 아르마니 등의 중저가 브랜드로 확장하면서도 여전히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신규 브랜드들 역시 차별화 된 가치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제로 베이스의 새로운 브랜드는 가격 인하 폭에서 상당한 자유도를 갖는다. 사실 기성 명품들은 고유 브랜드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함부로 가격을 낮추기 어렵다. 생각하기도 어려운 저렴한 가격 조건이라면 뿌리 없는 새로운 감성 브랜드도 얼마든지 승산이 있다.
문제는 막대한 강성 가치 형성에 필요한 광고비, 세련된 인테리어 투자비 등을 감수하면서 저가의 제품 공급이 가능할 것인가에 있다. 현실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증거들이 속속 출현하고 있다. 미샤가 그랬고, 스타벅스의 뒤를 이은 다수의 국내 커피 브랜드들이 그랬다.
시장의 가치 체인이 바뀌면서 원가 절감의 여지가 커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과거의 복잡한 유통 단계를 ‘공급자-소비자’라는 직접 거래로 단축한 델의 사례가 그렇다. 이메일, 인터넷 홈페이지, 구전 마케팅 등으로 과거와는 비교가 안되게 저렴한 광고도 가능하다. 매스티지 이후의 시장은 바로 이런 돈키호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 가격 인하만으로는 저가 시장에서 성공하기 어렵다
매스티지 이후의 시장 대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새로운 감성 가치와 저렴한 가격’이다. 2가지 가치가 함께 공존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에 부록 있는 저가 시장 바람이나 귀족 마케팅에는 상당한 경계가 필요하다.
저가 시장은 일본의 100엔샵 인기와도 맞물린다. 100엔이면 우리 돈으로 1천원이다. 한시적인 가격 인하가 아니라 저렴한 가격이 사업의 핵심이 되는 상시적인 저가 시장 공략이다. 화장품, 온라인서점, 미용실, 가정용품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저가 시장이 뜨고 있다.
하지만 가격 인하만으로 지속적인 성공을 이어가기는 어려운 시대다. 새로운 감성 가치가 배제된 저가 사업 모델은 일시적인 인기는 얻을 수 있겠지만 근본이 변해버린 소비자들의 성향과는 배치되는 이야기다. 더불어 가격 인하를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사업 구조의 개선 없는 전략 수정은 얼마 가지 않아 한계에 봉착한다. 시내 백화점업계의 한 관계자는 “올해 초 벌인 최저가 행사에서 매출이 40% 가까이 늘어났지만 수익은 마이너스였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 귀족 마케팅의 일반화를 경계한다
저가 시장의 반대편 끝에 있는 귀족 마케팅은 시장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데 유념해야 한다. 흔히 20 대 80의 법칙을 들어 상위 고객 20%가 수익의 80%를 차지하는 현상이 귀족 마케팅의 주요 논리로 사용된다.
여기에는 3가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 귀족 마케팅은 모든 산업에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흔히 보는 동네의 슈퍼마켓, 누구나 이용하는 할인점, 국민 1인당 2~3장을 보유할 정도의 카드 산업 등에서 상위 우량 고객의 수익 기여도는 절대로 80%가 될 수 없다. 실제로 미국의 한 연구에서도 증명되는 사실이다. 의류업과 식료품업에서 상위 20% 고객의 수익 기여도는 각각 48%, 18%밖에 되지 않는다.
둘째 귀족의 범위로 20%는 지나치게 넓다.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좁은 범위다. 그렇다면 80% 수익도 어림없는 이야기다. 셋째로 소비자들의 안목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점을 놓치지 말자. 이제 초점을 두어야 할 소비자들은 상위 20%가 아닌 중상위 50% 이상일 확률이 높다. 분명 최상의 귀족 소비자보다는 중상위 일반 소비자들의 수익 기여도가 더 높다.
물론 내수 침체 상황에서 부자들의 소비 여력은 여전히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업의 장기적인 시장구조를 이해하는 데는 적절한 마케팅 방법이 아니다. 무엇보다 시장의 구조 변화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일시적인 현상이나 부분적인 한 면을 보고 장기적인 사업의 전체상을 끼워맞춰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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