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하(1938)
-채만식-
● 줄거리
인력거를 타고 대문 앞에 당도한 윤 직원 영감은 "권연시리 그년의 디를 갔다가 그놈의 인력거꾼을 잘못 만나서 실갱이를 허구, 애맨 돈 5전을 더 쓰구 허였구나."하고 불평한다. 춘심이를 따라 명창 대회에 갔던 것이다. 사실 윤 직원은 명창 대회를 좋아했고, 춘심이를 앞세우고 갔었다. 구경을 잘 하고 돌아올 때, 춘심이더러 걸어가라 하고는 자신은 인력거를 타고 온 것이다.
대문이 열려 있자, 거지들 오라고 그러느냐면서 호통이다. 이 집의 사실상 주부인 며느리가 열어 놓은 것이라 듣고는 "짝 찢을 년!"이라고 욕한다. 윤 직원은 아무에게나 이렇게 욕을 하고는 다음 말을 한다.
윤직원의 선친 윤용규는 천하 놈팡이었는데 운이 트이려고 하니 일조에 출처를 모르는 돈 이백 냥이 생기자 노름방 출입을 삼가고 착실한 살림꾼으로 변했는데, 그 때부터 살림이 일어 삼천 석을 하는 부자가 되었다. 윤 직원은 어릴 때부터 취리에 밝았고, 물려받은 재산으로 이렇게 30년 동안 가산을 늘려 왔다. 그 때는 수령에게 뜯기기도 하고 화적에게 빼앗기기도 하는 재산이었다. 화적 떼에게 윤용규가 죽자 윤 직원은 "오냐, 우리만 빼고 다 망해라!"하고 절규했다. 그리고 돈을 더욱 모았다. 재산 더미에 올라앉아 이 태평한 시절을 생각하며 만족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그대로 부족한 것이 있었다. 문벌이 변변찮은 것이 마음에 걸린 그는, 족보에 도금을 칠하고 새로 만들었으며, 향교의 우두머리 직함인 '직원'을 억지로 했다. 그리고 자식들을 양반 혼인을 시켰다. 이제 그는 집안에서 군수 하나와 경찰 서장 하나, 이렇게 실속있는 양반을 하나 내놓자고 생각했는데, 마침 손자가 둘이다.
명창대회에서 돌아와 안방에 들어간 뒤 둘째 손자 며느리가 밥상을 날라 온다. 경찰서장감으로 동경에서 공부하는 손자 종학의 아내로 과부나 다름없다.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 맏손자 며느리다. 맏손자 종수가 시골에 가서 첩 살림을 하기에 역시 과부나 다름없는 신세다. 딸 하나는 진짜 과부로 친정에 와 있고, 윤 직원에 맞다대기를 할 양으로 버티고 있는 맏며느리도 과부다. 윤 직원은 태식이를 부른다. 태식은 증손자와 나이가 비슷한 윤 직원의 아들이다. 모자라는 아들을 윤 직원은 끔찍이 여긴다.
맏며느리는 맏아들 윤창식이 첩 살림을 하는 바람에 생과부로 31년을 늙은 사람이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자 살림의 전권이 그만 맏손자 며느리에게 넘어가자 윤 직원을 미워한다. 윤창식은 아버지 윤 직원과는 달랐다. 돈에 워낙 관심이 없고, 남의 빚보증을 서 주다 아버지의 재산을 축내기도 했다. 이런 점은 손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윤 직원은 돈 문제로 그들과 다투어야 했다.
맏며느리와 한 바탕 싸우고, 사랑방에 들어간다. 윤 직원의 재산으로 거간을 해 먹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거기서 윤 직원은 비싼 이자를 요구한다. 그 때 호외를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중일 전쟁 때문에 연일 호외가 도는 판국인데, 윤 직원은 중국이 아라사의 꾐에 빠져 사회주의를 하니 일본이 혼을 내는 것이라고 전쟁을 해석한다.
거간들을 보내고 나서 보료에 편안히 누워 춘심이를 기다린다. 대복이도 기다려진다. 대복이가 먼저 들어온다. 대복이는 윤 직원의 비서이자 지배인이다. 라디오를 만져 놓고 제 방으로 가는 대복이와 엇갈려 춘심이가 들어선다. 윤 직원이 늦었다고 하니, 춘심이는 자유 세상에 제 맘이라고 농을 하며 웃는다. 금년 봄 내리 다섯 번을 실연한 윤직원이 여섯 번째 얻은 애인이 춘심이다. 시방 방 안에서는 일흔두 살 증조할아버지가 열다섯 살 애인과 연애 흥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새날이 밝아온다. 오전에 춘심이에게 반지를 사 주고 온 윤직원 영감은 방금 계동 자택에서 점심을 받으려던 차이다. 이 때 아들 창식이 어려운 발걸음을 한다. 해가 동쪽에서 뜨겠다고 윤 직원은 말한다. 창식은 종학이 사상 관계로 동경 경시청에 피검되었다는 전보를 보여 준다. 윤 직원은 수천 길 밑으로 떨어지는 듯 정신이 아찔해진다. 옛날에 드세던 부랑배의 침노보다 사회주의를 한다는 그 한 가지 사실이 무서웠던 것이다. 이 태평천하에 그런 짓에 하다니 쳐 죽일 놈이라고 소리를 친다. 연해 부르짖는 죽일 놈 소리가 마치 장수의 주검을 만난 군졸들처럼 어쩔 줄 모르는 가운데 차차 사랑께로 사라진다.
● 인물의 성격
◆ 윤 직원 → 일제치하를 태평천하로 인식하고 윤리의식이 거의 없는 비정상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이루어 놓은 재산을 지키고 그것을 늘려가기에 유리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안락에 방해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역사의식이 없이 안일하게 세상을 살아가며, 사회에 대한 불신과 피해의식이 강한 당대인들의 전형화된 인물이다.
◆ 윤종학 → 동경 유학을 하고 있고, 할아버지 윤 직원 영감이 장차 경찰 서장감으로 지목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당대의 열악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피검된다. 소설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 소설에 유일하게 나타난 긍정적인 인물이다.
◆ 윤종수 → 윤직원이 군수감으로 생각하는 인물로 고향에서 군서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매일같이 주색잡기나 하는 방탕한 인물이다. 할아버지 윤직원과 아버지 윤창식을 닮은 부정적 인물이다.
◆ 윤창식 → 개화기에 교육을 받은 세대로서, 윤 직원의 아들이다. 가치관을 상실하고 향락만을 추구하는 타락한 인물이다.
◆ 윤경손 → 윤종수의 아들로 증조부 윤직원의 애인인 춘심과 연애를 하고 할아버지뻘인 태식을 놀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 인물이다.
◆ 윤직원의 부인 오씨, 며느리 고씨, 딸 서울아씨, 큰 손자 며느리 박씨, 둘째 손자 며느리 조씨 → 윤씨 집안의 여인들로 과부 아닌 과부 생활을 하기도 하고, 진짜 과부이기도 한 비극적인 인물들이다.
◆ 대복이, 석서방, 춘심이, 병호, 옥화, 방물장수, 침모 전주댁, 행랑아범, 행랑어멈, 뚜쟁이 여인 → 윤씨 가문에 기생하여 비속한 짓을 하거나 몇 푼의 돈을 바라고 술수를 부리는 비윤리적인 인물들이다.
● 구성 단계
◆ 발단 : 인력거를 타고 와서 그 삯을 깎으려고 하는 윤직원 영감의 행태
◆ 전개 : 윤 직원 영감 집안의 내력과 치부 과정
◆ 위기 : 둘째 손자 종학에 대한 윤 직원 영감의 기대. 윤 직원 영감의 아들 창식과 큰 손자 종수의 타락하고 방탕한 생활
◆ 절정 · 결말 : 둘째 손자 종학이가 사상 관계로 일본 경시청에 피검되었다는 전보에 충격을 받는 윤 직원 영감
● 이해와 감상
◆ <태평천하>는 1938년 '조광'에 <태평천하춘>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소설이다. 이 작품은 윤직원 일가의 비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삶의 모습을 제시하여, 당대 사회의 모순과 중산층의 삶의 태도를 풍자적으로 그려놓고 있다. 윤 직원 일가의 사람들은 종학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부패한 지방 수령이나 일제의 식민지 체제에 안주하면서 자신들의 이윤추구나 주색잡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그러한 그들의 삶의 모습을 작가는 전면에 내세워 한바탕 추켜세우고는, 그들의 추악한 삶의 모습에 대한 희화화를 시도한다. 특히 윤직원 영감은 절대적인 궁핍 속에서 대다수의 민족이 고난을 겪는 지옥과 같은 시대를 '태평천하'라고 느끼는 도덕이나 양심이 전혀 없는 인물이다. 그는 오직 돈의 노예가 되어 있거나 식민 통치에 혜택을 입거나 식민 구조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인물이다. 그는 결국 철저한 이기주의자이며, 반사회적이고, 반민족적인 인물인 것이다. 작가 채만식은 이 작품을 통해 식민지하의 현실을 '태평천하'라고 믿는 주인공의 시국관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한다.
◆ 이 작품은 염상섭의 <삼대>, 김남천의 <대하>와 더불어 1930년대를 대표하는 가족사 소설로 볼 수 있으며, 인물의 성격 묘사를 통해서 당시 사회 전체의 실상을 암시하려는 성격소설의 특성을 지니기도 한다. 가족사 소설은 한 가족의 몰락상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보다 구체적이고 강렬하게 제시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이 소설은 5대에 걸친 가계의 관계가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서 제시된다. 중심인물은 윤직원 영감이며, 그의 아들, 두 손자, 그리고 부친에 이르는 여러 세대가 배경이 된다. 물론 윤직원의 부친과 둘째 손자 종학은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는 부친이 현재의 직전 세대를 대표하고, 앞으로 전개될 시대는 물론 종학이 대표한다. 따라서 윤직원의 현재는 그 시대의 실상이며, '윤직원-아들(윤창식)-큰손자(종수)'가 사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할 때, 그들의 모순과 결함은 곧 그 사회의 결함이 되는 것이다. 한편 이 소설은 염상섭의 <삼대>와 세팅이 유사하다. '윤직원-조의관', '윤창식-조상훈', '윤종학-조덕기'와 같이 대응되면서 가족의 붕괴상을 보이는데, 그 주제 또한 일치하는 것이 흥미롭다.
◆ 이 작품은 판소리 사설의 문체를 현대소설에 적용하여 문학의 전통성을 살리고, 주제를 강화하는 데 효과를 거두고 있다. '~입니다'식의 경어체 문장이나 '~겠다요'와 같은 경박한 어투를 빌어서, 판소리 창처럼 독자와 가까운 위치에 서서 작중 인물을 마음껏 조롱하고 있다. 이는 바로 방자나 말뚝이 같은 인물이 양반 사대부의 면전에서는 공경스러운 태도를 짓다가도 뒤에 가서 느닷없이 조롱하고 경멸하는 태도를 본뜬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판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독자와 작중 인물 사이에 서술자가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작중 인물을 평하면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의 서술자는 판소리의 창자(唱者)와 유사하다. 판소리 창자는 사건을 이끌어 가는 자이면서, 때로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가고, 서술자로서의 기능에 머무르지 않고 따로 평자의 입장에 서면서 그 위상을 다양화한다. 그런 자리 바꿈을 통해 적절한 풍자와 해학을 구사할 뿐 아니라, 다양한 언어 층위를 보여줌으로써 미적 성격을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서술자가 바로 판소리 창자와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 반어를 통한 희화화, 우스꽝스럽고 격이 낮은 언술을 통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는 수법 등은 판소리 사설의 수법과 유사한 것이다.
◆ '태평천하'의 작중 진행 시간 : '태평천하'의 이야기 시간은 하루 남짓이다. 윤 직원이 춘심이를 데리고 명창 대회 구경을 갔다가 돌아오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윤 직원의 집안 내력과 윤 직원의 아들과 손자가 벌이는 행동이 몇 장면 소개되는 데까지가 하루이다. 다음 날, 손자 종학이 동경 경시청에 체포되었다는 전보가 날아들면서 윤 직원의 모든 기대가 무너지고 마침내는 처절한 절규를 하는 데서 소설은 끝난다. 중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작중 시간이 짧다는 것은 그만큼 묘사가 세밀하고 사실적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 핵심사항 정리
◆ 갈래 : 중편소설, 풍자소설, 사실주의 소설, 가족사 소설
◆ 배경
* 시간적 → 1930년대 식민지 치하
* 공간적 → 서울, 평민 출신의 윤 직원 일가
* 사상적 → 민족주의 사상과 반자본주의 사상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특징
* 반어적 희화화를 통한 인물 풍자
* 경어체의 사용
* 서술자가 판소리 광대의 어조를 사용함.
* 판소리 사설을 연상케하는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문체
◆ 주제
* 일제 식민지 치하 윤 직원 일가의 타락한 삶과 몰락의 과정
* 부정적 인물을 통한 식민지 시대 타락한 삶의 비판
◆ 출전 : <조광 27~35>(1938. 1. ~ 1938. 9.)에 연재 발표됨.
● 생각해 볼 문제
1. 작가가 제목을 '태평천하'라 붙인 까닭은 무엇인가?
⇒ 결코 태평천하가 아닌 시대를 그렇게 보는 윤 직원 영감의 저열한 인식와 역사의식의 부재 반어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2. 비판과 풍자가 이 소설의 주제의식인데도 문면에 노골화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추리하여 말해 보자.
⇒ 이 작품의 풍자성은 그 서술에서 드러난다. 서술자가 윤 직원 영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 비판을 노골화하지 않고 우스개처럼 곯려주고 있어서 겉으로는 재미만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 재미있는 서술 속에 비판과 풍자가 도사리고 있는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3. 작가가 윤 직원의 부정적인 세계를 대체할 새로운 세계상을 제시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 종학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모습을 그린다. 그것은 윤직원 영감의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세계와는 다른, 더불어 사는 이타적 삶이라고 할 것이다.
4. '서술자-독자', '서술자-사건상황'의 거리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찾고, 그 양상을 말해 보자.
⇒ 이 작품의 서술자는 사건 상황과 매우 밀착된 거리를 보인다. 사건을 진술하는 자로서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그 사건을 요약하고 평가하면서 사건의 중심에 함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에게도 매우 가까운 거리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를 독자에게 하는 가운데 계속 독자 쪽을 힐끔거리며 일러바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판소리 기법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5. '윤 직원'과 '놀부'를 비교해 보자.
⇒ 두 인물의 공통점은 구두쇠, 반인륜적 · 반사회적 인물, 부당한 수단에 의해 부를 축적함, 신분 상승의 욕망을 지님. 풍자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두 인물의 차이점은 놀부가 봉건 사회의 서민형 지주의 모습이라면, 윤 직원은 근대 자본주의 식민지 시대의 친일 지주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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