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깊은 집(1988)
-김원일-
● 줄거리
고향 진영에서 남의 집에 얹혀 지내던 '나(길수)'는 누나(선례)를 따라 대구로 와서 장관동 '마당 깊은 집'에 세들어 살고 있던 남은 가족들(어머니, 누이, 두 남동생 길중과 길수)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 그 '마당 깊은 집'에는 위채로 불리는 주인집(여덟 식구)을 포함하여 피난민 네 가구가 함께 살고 있었다.
그 네 가구는, 경기도 연백에서 피난 온 경기댁 식구 셋, 퇴역한 상이 군인 가족인 준호네 식구 넷, 평양에서 피난 온 평양댁 식구 넷, 대구에서 가까운 김천에서 내려온 김천댁 식구 둘이었다. 주인집은 방직 공장과 금은방을 운영하며 남부러울 것 없이 호화롭게 살면서도 세들어 사는 사람들의 어려움보다는 자기네의 이익과 편의를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집안이다. 이러한 태도는 한여름 장마로 인해 '마당 깊은 집'에 홍수가 났을 때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대에 위치한 위채는 마당에 물이 차 올라도 잠길 염려가 없었지만, 아래채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은 한밤중에 모두 일어나 차오르는 물을 마당 바깥으로 퍼내기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 일하는데도 위채 사람들은 팔짱끼고 구경만 하곤 한다.
'나'의 가족은 어머니가 바느질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경기댁 가족은 치과 기공사인 아들과 미군 부대 PX에 근무하는 딸이 벌어오는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준호네 가족은 과일 · 고구마 · 풀빵 등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평양댁 가족은 양키 시장에서 군복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마당 깊은 집'의 다섯 식구는 모두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에 따라 전쟁 이후의 험난한 세파와 싸우며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다가 주인집이 '마당 깊은 집'을 허물어 새 집을 짓는다는 통보를 하자, 다섯 가구는 제각각 살 집을 찾아 뿔뿔이 헤어지게 된다.
● 가옥 구조와 세대별 거주자
◆ 위채 → 주인집. '여러 대에 걸쳐 경북 의성군에서 알려진 토호 집안으로, 주인아저씨 증조부되는 이는 조선말 대구부 도사(都事)를 지낸 문벌'. 여덟 식구
- 주인아저씨 : 출근 때나 그 얼굴을 잠깐 볼 수 있을 만큼 늘 바쁜 사람, 외박이 잦았고 허구한 날 밤이 깊어서야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옴. 집안일에 무신경하고, 대구 변두리 침산동에 면방적기 열 몇 대를 차려 놓은 공장(오성직물)을 운영함.
- 주인아주머니 : 모란꽃처럼 얼굴이 훤하고 몸이 피둥하고, 집안 살림살이보다 바깥으로 나도는 활동가, 대구시 번화가 송죽극장 입구에 귀금속과 시계 파는 점포를 열었고, 유한층 부녀자를 상대로 계주 노릇을 함. 금목걸이에 금팔찌를 자랑하며 구슬백을 팔에 걸치고 다님.
- 노마님 : 안살림을 맡아서 함, 칠순에 이른 연세였으나 아직 허리가 꼿꼿할 정도여서 장을 보러갈 때도 식모 안씨를 거느리고 나서서 장사치에게 셈을 손수 치름, 아래채 사람들에게 며느리 흉으로 하루를 보냄.
- 성준형 : 다른 학생들과 달리 머리칼에 포마드를 발라 빗고 넥타이 맨 정장 차림으로 학교를 다니고, 공부는 뒷전이고 집에 있을 때면 늘 전축을 크게 틀어놓고 대청에서 혼자 춤 연습을 함, 별명이 연애대장이고 시내 사립학교 법대를 보결로 들어감.
- 짱구형 : 고등학교 이학년
- 똘똘이형 : 중학교 이학년
- 동희누나 : 주인아저씨 조카, 의성에서 대처로 유학 나옴, 고등학교 3학년
◆ 아래채 첫째 방 → 경기댁. 경기도 연백군에서 피난 옴. 세 식구
- 경기댁 : 나이는 쉰 초반, 그 나이로서는 드물게 개성에서 고녀까지 다닌 유식한 아주머니, 배운 만큼 아는 것도 많아 했던 말을 소 여물 씹듯 주절대는 것이 얄미워 어머니와 평양댁은 싫어하지만, 잔소리 많은 노마님에게는 누구보다도 잘 맞추어 줌. 얼굴이 검누렇게 뜬 데다 늘 부기가 있고, 위나 장이 좋지 않은지 시도 때도 없이 버들피리 소리내듯 빌릴리 방귀를 흘리고 다니며 변소 출입도 잦음.
- 흥규씨 : 육이오 전쟁 전 개성에서 살 시절 치과 병원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 때 군생활을 위생병으로 근무하여 익힌 기공 기술로 변두리 치과 병원 기공사로 일을 함. 키가 멀대 같은 노총각으로, 그는 키 큰 사람이 싱겁다는 말 그대로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늘 입에 달고 다님.
- 미선이 누나 : 미 8군 피엑스에서 판매원으로 근무. 야간 고등학교에 다님. 모양깨나 내는 멋쟁이 처녀지만 부지런하고 살뜰한 개성 처녀. 늘 껌을 씹고, 입안에서 소리내어 터뜨림. 한국이 싫어 무슨 수를 쓰든 이 땅을 떠나고 싶다며 미군과 결혼해 미국에 가서 살기를 갈망함.
◆ 아래채 둘째 방 → 준호네. 퇴역장교 상이군인 가족. 강원도 평강이 고향. 세 식구
- 준호아버지 : 사람을 볼 때 그 쏘아보는 눈초리가 전쟁터의 적군을 대하듯 적의를 품은 데다, 오른팔을 전쟁터에서 잃어 고무팔 달린 쇠갈고리 두 개가 손가락 구실을 하기 때문에 겉모습은 위협적이지만, 식견이 넓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 밤마다 잠결에 고함을 지르며 전장의 악몽에 쫓기지만 평소에는 말수 적은 조용한 사람임.
- 준호엄마 : 과일 행상을 함. 여읜 얼굴이 볕에 그을려 구리색이었고, 목과 팔이 가느다란 그네는 한번도 웃는 얼굴을 볼 수 없을 만큼 피곤에 찌들어 있음.
◆ 아래채 셋째 방 → 평약댁. 네 식구
- 평양댁 : 양키시장에서 헌 군복을 파는 장사를 함. 중공군 참전에 다른 일사 후퇴 피난길에 미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서방을 잃은 그네는 군복으로 만든 여자용 홀태바지 차림에 역시 헐렁한 군복 윗도리를 입고 허리에는 전대를 차고 다님. 목소리가 굵직했고 몸이 옆으로 퍼진 팡파짐한 그런 여자들의 시원한 성미 그대로 활달한 니북 여자.
- 순화누나 : 깜조록한 얼굴에 쌍꺼풀진 눈이 예쁜, 혼기찬 처녀. 오전에는 헌 군복을 세탁하고 오후에는 수선하는 일을 함.
- 정태씨 : 폐가 나빠 늘 하는 일 없이 집에 있음. 늘 화가 끓는 상판의 말라깽이로 좌익사상에 빠져 있음. 식구 외에는 김천댁과만 친하게 지냄.
- 민이형 : 여드름이 울긋불긋하고 정태씨와 달리 몸이 실했고 가까운 경북고등학교 졸업반 학생이며 공부를 잘함. 위채 짱구형과 똘똘이형의 가정교사.
◆ 아래채 넷째 방 → 길남이네 집. 어머니와 네 남매
- 어머니 : 요릿집 기생들의 조선옷을 삯바느질함. 큰 몸집만큼이나 그 목소리가 늘 컸음. 한번 뱉은 말은 늘 모질게 실천하는 강인함을 지녔으며, 누구보다 자식에게만은 엄격하고 냉정한 사람. 전쟁 중에 겪은 쓰라린 체험은 어머니를 그렇게 정 없이 메마른 여자로 바꾸어 놓았으며, 성품만은 정직하고 곧음.
- 선례누나 : 야무진 성격으로, 굶는 봉창이라도 하듯 누나는 공부에만 매달림. 사범학교에 진학하여 졸업과 더불어 복사꽃 피는 시골 마을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 희망임.
- 나 : 길남이
- 길중이 : 동무가 없어 놀러 다닐 줄을 몰랐고 애늙은이같이 늘 표정도 말도 없음. 시험지는 늘 백 점만 받아왔으나 결코 뛰어다니는 법이 없는 그는 걸핏하면 다리를 휘청하여 넘어져 푸릎을 깨곤 함.
- 길수 : 전쟁이 나던 해 4월에 태어나 젖은커녕 미음조차 제대로 먹지 못해 꼬치꼬치 말랐던 막내아우. 푸른 풀코를 인중에 달고 다님. 사팔뜨기에 팔다리가 앙상하게 마른 데다 앙가발이걸음으로 걸음. 그 나이 또래에 비해 말이 어눌한 만큼 생각 또한 아둔함.
◆ 바깥채 → 김천댁, 두 식구
- 김천댁 : 그네는 대문 왼켠 흙담을 헐고 골목길에 가게를 내어 사탕이나 건빵 따위의 아이들 주전부리와 드럼통을 엎어놓고 풀빵을 구워서 팖. 기미 잔뜩 앉은 얼굴이 늘 근심에 전 채 겁먹은 작은 눈을 빠꼼하게 뜨고 있음.
- 복술이 : 김천댁 아들
◆ 주변 인물
- 한주 : 황해도에서 피난 온 아이. 길남이 신문팔이를 하다 만난 신문배달 소년으로, 산격동 비탈 동네 판잣집에서 사글셋방살이를 함. 심장병으로 앓아 누운 엄마와 동생 명희를 돌보는 소년가장. 잘난 척하거나 영악스럽지 않고 말수 적은 차분한 아이였지만, 속은 차돌처럼 여물고 악착 같은 데가 있음. 겁 많은 나에게 용기를 주고 가난 속에서도 구김없이 씩씩하게 더러운 세상을 곧잘 뚫고 나감.
- 문자이모 : 어머니의 삯바느질 단골손님. '향원'이란 요릿집의 인기 있는 기생. 얼굴도 예뻤고 마음씨도 착한데, 재산을 길남이네에 남기고 자살함.
- 뺨에 칼자국 난 사내 : 김천댁을 찾아오던, '각진 얼굴에 광대뼈가 불거졌고 구레나룻이 시커먼' 의문의 남자.
- 강형사 : 팔초하게 생긴 외모에 뺨에 칼자국 난 사내를 쫓아다님.
- 주억술 : 털거지 사납게 생긴 황해도 출신으로 장작 패는 장정이다. 부지런하고 '황해도 수안군 삼정면 사람 못 봤습니까?'를 노래삼아 읊으며 고향 사람을 찾아다님. 주인집 식모 안씨와 가까워짐.
- 손씨 : 대구일보 보급소장. 합쭉뺨
- 정기사 : 보금당 보석 세공 기술자. 완전 서울내기이자 지독한 깍쟁이로, 길남어머니를 속여 몇 달 간 방세를 받아냄.
- 옥이 : 주인아주머니가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이
● 이해와 감상
◆ 이 소설은 6 · 25소설이며 동시에 추억의 소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김원일의 다른 어떤 소설보다 자전적이며, 김원일로서는 이제쯤 자신의 얼굴로 되돌아볼 때쯤 되었다는 대가스러운 문학의식이 배어있는 작품이다. 대가스럽다는 표현은 작가가 6 · 25 이후 50년대 초의 현실을 놀라운 기억으로 재생해내면서 치밀한 객관성을 확보해가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추억을 통한 소년의 시점을 시종 유지해나감으로써 풍성한 서정성을 얻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말하자면 서정성과 객관성을 함께 획득하는 서정적 리얼리즘의 경지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으로, 이 같은 생각은 물론 이들 작품에 대한 현실감을 동반하는 나의 감동으로부터 비롯된다. (해설 / 김주연)
◆ 작가 김원일의 말
전쟁이 막 끝난 1954년, 모두가 어렵게 살던 시절에 우리 가족 다섯 식구 역시 단칸 셋방에서 힘들게 그 세월을 넘겼다. 대구에서 실제로 마당이 깊은 집 아래채에 세들어 살며 어머니가 바느질 일로 우리 형제 넷을 길렀다. 전쟁으로 과수댁이 된 어머니는 강직했던 여장부였는데 장자였던 나는 어머니의 엄한 훈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많은 부분이 자전적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피난민 여러 가구는 다 함께 살지 않았다. 대구 중심가 동네에서 대여섯 차례 셋방을 옮겨 다닐 동안 만났던 피난민 가족들을 한 집에 우겨 넣었다. 당시 이 나라 백성 모두가 하루 세끼 밥 먹기도 힘들었던 때였지만 지금 와서 '마당 깊은 집' 시절을 돌이켜보면, 우리 식구는 물론이고 가난한 이웃들이 이른 봄 들녘의 엄동을 넘긴 보리처럼 안쓰럽고 풋풋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그 이웃들을 떠올리며 가난은 절망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희망으로 가는 길로, 마당 깊었던 집의 남루한 삶은 언젠가 언덕 위의 집처럼 푸른 하늘과 더 가까이 살고 싶은 사람들의 꿈이 서렸던 집으로 그리고 싶었다. 세월이 변한 지금도 집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런 꿈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기에 오늘의 슬픔과 고단을 힘겹게 이겨내며 열심히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 작품은 가족 서사와 사회 역사적 서사를 교묘하게 결합시킨 작품이다. 문제적 개인사 내지 가족사가 테두리 안에서 의미의 마당을 효율적으로 마련한다. 이 소설이 단순한 가정소설이나 세태 풍속 소설을 넘어설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서 찾아진다. 김원일 문학의 핵심적 기저 구조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난세의 성장소설이다. (해설 / 우찬제)
● 핵심사항 정리
◆ 갈래 : 전후소설, 자전적 소설, 성장소설, 회고소설, 사실주의 소설
◆ 배경 :
* 시간적 → 한국 전쟁 이후
* 공간적 → 대구 마당 깊은 집(한국 전쟁 이후의 험난했던 삶의 축소판을 보여주는 곳으로, 출신과 구성, 직업이 서로 다른 다섯 가구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삶의 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하나의 작은 사회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상징적 공간)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경험하는 아이의 시점과 서술하는 어른의 시점이 혼용됨.)
◆ 특징
* 1950년대 당시의 생활 풍속을 생생히 재현하는 섬세한 시각이 돋보임.
* 어린 소년 화자인 '나'의 목소리로 서술하여 객관성을 확보함.
* '어머니'라는 기호의 복합성
→ 남편의 부재 속에서 모성성보다 부성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철저한 현실주의자
남편의 부재 속에서 장남에게서 남편의 모습과 역할을 기대하려는 모습
전쟁의 상황 속에서 진짜 어머니가 아닌 가짜 어머니의 모습만을 느끼는 주인공의 심리적 갈등과 억압 의식의 형상화
◆ 주제 ⇒ 한국 전쟁 이후의 지난(至難)한 삶의 현실에 대한 추억
● 더 읽을거리
◆ 전후(戰後) 세상살이의 섬세한 풍속도 -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문학이 다른 학문과 뚜렷이 구별되는 차이점은 과연 무엇일까? 여러 가지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다른 학문과 달리 문학은 연구 대상을 단순화시키지 않는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특정 인물이 살았던 사회나 시대를 규명할 때, 사회학 · 경제학 · 역사학 · 철학 등은 몇 가지 전제와 논리로 그 시대 전체를 정의한다. 하지만 문학은 아예 그 시대와 사회 전체를 송두리째 재구성하여 독자들의 눈앞에 펼쳐 보인다. 세세한 풍경과 분위기까지 정밀하게 복원해 내어, 그 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풍속도를 생동감 있게 드러내는 것이다. 문학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오늘 살펴볼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은 이런 문학의 매력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1960년대 이후 현대 소설은 우리 사회의 발전에 대응하여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시기부터는 광복 이후의 새로운 젊은 세대에 속하는 김승옥, 이청준, 홍성원, 김원일, 전상국, 최인호 등이 문단에 등장하여 세련된 언어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소설 문체의 변혁을 꾀하였고, 소설적 주제의 폭을 더욱 넓혀 놓았으며, 새로운 기법도 실험하고 있다. (문학(하) 교과서 P.203에서)
1. 문학이 그려내는 풍속도
문학 작품을 읽다 보면, 작가가 유년 시절로 되돌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 보이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비단 우리 나라 작가들 뿐 아니라, 전 세계 작가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소설의 제재로 삼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소설들은 몇 가지 특성을 지닌다.
우선 작가는 삶의 여정 중에서 자신에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하는 시점을 선택하여 형상화한다. 현재의 자신이 비롯된 뿌리, 자신의 개인사에서 가장 큰 몫을 담당했던 시절에 대한 탐색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의 실존을 밝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는 문학의 가장 중요한 화두(풀기 어려워 붙잡고 씨름해야 하는 관념이나 사물 등의 대상)인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하는 문제를 풀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또 한 가지, 과거의 어떤 시대를 표현할 때는 작가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다. 따라서 작품은 대부분 회상적이고 고백적인 어조를 띤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이라고 믿는 것은 과거의 사실 그 자체라기보다는 '현재의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 사실에 가깝다. 때때로 과거의 사실이 턱없이 미화되거나 부정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기억의 불완전함을 극복하기 위해 때때로 어린이의 '순진한 눈'을 빌린다. 어린이의 시각은 미숙하고 단편적이기 때문에, 어떤 시대나 상황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작가는 어린이를 화자로 내세움으로써, 과거을 재현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실수나 한계에 대한 비난을 어느 정도 무마시키려 하는 것이다. 특히 1970년대에 분단 문제를 다룬 소설들에서 이런 '어린이 시점'이 자주 발견되는데, 그것은 좌익과 우익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어른과 달리, 어린이의 순수한 시선을 이용하면 양쪽을 모두 포괄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소설을 통해 작가가 고백하는 유년의 기억은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독자들에게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섬세한 풍속도를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작가가 직접 경험한 삶의 생생한 풍경을 바탕으로 그 시대를 재구성해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들은 사람들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삶의 모습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 또한 작가의 어린 시절은 작가 혼자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기억으로 확대되게 마련이다. 그가 몸으로 부대끼며 겪어 온 여러 일들은 대부분 우리 민족 전체가 공통적으로 경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삶을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전쟁이나 가난 등의 현실은 더더욱 그렇다. 이동하의 <장난감 도시(1982)>, 임철우의 <그 섬에 가고 싶다(1991)>,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1988)> 등은 이처럼 작가 개인의 삶과 우리 민족의 공통적 경험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작품들이다. 또한 이 작품들은 굶주린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6 · 25 전쟁 전후의 사람 사는 모습을 빼어나게 형상화한 소설들이기도 하다.
2. 굶주림 속에서 의지한 이웃
<마당 깊은 집>은 6 · 25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가족, 3남 1녀 중 장남인 '길남'이 고향인 진영의 주막에서 심부름꾼 노릇을 하다가 대구의 가족과 합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길남의 가족은 '대구에서도 중심부에 해당되는 역전 골목과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던 종로통을 끼고 있는 장관동의 한옥에 세들어 산다. 마당이 유난히 깊어 '마당 깊은 집'이라 불리는 이 집은 주인 가족이 사는 '위채'와 세입자들이 사는 '아래채'로 나누어져 있다. 세입자들은 아래채의 네 가족, 문간의 한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전후의 피폐한 현실을 어떻게든 헤치며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친다. ···
이 작품에서 위채와 아래채는 단순히 지리적으로 구분된 공간이 아니다. 위채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영화를 누리는 부자들의 공간이며, 아래채는 전쟁으로 갈기갈기 찢겨진 육체와 정신을 힘겹게 추스르며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공간이다. 위채는 지방 토호(세력과 재산을 지닌 지방 토착민)이자 동양척식 주식회사(1908년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착취 기관)의 요직을 거친 높은 친척들이 있는 부잣집이다. 그들은 호화로운 파티를 즐기고, 전쟁의 참담한 분위기와는 아무 상관없이 거들먹거리며 생활한다. 여기에 비해 아래채에서는 풀빵 장사를 하는 김천댁 가족, 상이 군인 가족, 경기도에서 피난 온 경기댁 가족, 이북에서 피난 온 평양댁 가족, 주인공 길남이 가족 등 다섯 가족이 처절한 생존 경쟁을 벌인다. 그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과거를 지니고 있다. 김천댁은 사회주의자인 남편을 쫓는 형사의 괴롭힘에 시달리며, 밤마다 전쟁의 악몽을 꾸는 상이 군인 준호 아버지는 거리를 헤매며 싸구려 물건을 팔아 생계를 잇는다. 경기댁과 평양댁은 고향을 잃고 타지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처지이며, 길남의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네 자녀를 힘들게 부양하고 있다. '위채'와 '아래채'의 이 같은 상반된 모습은 우리 현대사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대립 양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 준다. 따라서 마당 깊은 집의 구조는 그 당시 사회 구조의 축소판이며, 다양한 직업을 지닌 아래채 사람들은 궁핍하게 살아가던 그 당시 민중을 상징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주인공 길남을 괴롭히는 것은 지독한 배고픔이다. 전후의 빈궁한 현실은 여러모로 이 작품과 닮은 점이 많은 이동하의 <장난감 도시>에서도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두 소설의 주인공 소년들은 배고픔 때문에 가혹한 육체적 ·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배고픔은 육체만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정신조차 황폐화시키기 때문이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길남은 '어느 부잣집 마나님이 종으로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가족의 정(情)도, 자존심도 배고픔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처절할 정도의 배고픔은 김원일의 소설 대부분에서 나타나는데, 이 작품에서는 특히 길남의 막내 동생 '길수'를 통해 잘 드러난다. 죽이 묻어 있는 걸레를 빨아먹기도 하고, '주린 강아지처럼 쪼그리고' 입맛을 다시며 위채의 식사 장면을 지켜보던 길수는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굶주림에 시달리다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이러한 길남의 배고픔을 조금이라도 잊게 하는 것은 길남과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훈훈한 인정이다. 길남이 신문팔이를 하다가 만난 소년 '한주'는 길남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 주는 소중한 친구이다.
손씨는 한주를 보고, "니가 야를 보장할 수 있나?"하고 윽박지르듯 물었다.
"보장하구 말구요. 제 말만 듣고 길남이를 한번 믿어 보세요." 한주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는 우리 집에 와 본 적도 없었고, 사실 나에 대해 아는 것이 별 없었다. 그런데 무엇을 믿고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그 말은 마치 따뜻한 물처럼 내 마음을 덥혀 주었다.
한주는 길남을 <대구 일보> 배달원에 추천하여 취직시키려 하면서, 보급소장의 물음에 이같이 대답한다. 황해도에서 피난 온 한주는 아버지와 두 동생을 잃었고, 지금은 어머니마저 몸져누워 있는 열세 살의 소년 가장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거리의 아이들처럼 영악스럽지 않고, 구김살 없이 씩씩하게 살아가며 길남에게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한주는 이 소설에서 마당 깊은 집 식구들 외에 특히 자주 언급되는 인물로, 그의 존재는 어둡고 우울한 소설의 분위기에 훈기를 불어넣어 준다. 길남의 이웃들도 때때로 이기적이고 각박한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따뜻한 정을 지니고 열심히 살아간다.
장대비에 쫄딱 젖으며 모두들 열심히 일을 했다. 조를 짜서 물을 퍼내다 보니 누구나 중도에서 손을 놓고 쉴 참이 없었다. 한참 그렇게 물을 퍼낼 동안 위채 식구 두엇은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노마님을 비롯하여 나머지 식구들은 남의 일 구경하듯 먼발치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 내가 보아도 마당의 물은 그 사이 반 뼘 정도 줄어 있었다. 수돗간의 하수구를 통해서, 또는 개골창(수채 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으로 쉬엄쉬엄 물이 빠지기도 했겠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란 속담처럼 여러 사람의 합심에 따른 노력이 그렇게 얼마간의 보람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큰 장마가 지는 바람에 아래채의 마당이 물바다가 된다. 아래채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몰려들어 마당의 물을 퍼내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그렇게 풀이 죽어 있던 상이 군인 준호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휘 아래 사람들은 혼신의 힘을 다한다. 조를 나누어 물을 퍼내면서 아래채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이 의지할 사람은 같은 처지의 이웃들밖에 없음을 확인한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길남이 아래채가 헐리는 모습을 보고 '굶주림과 설움이 그렇게 묻혀 내 눈에 자취를 남기지 않게 된 것은 달가웠으나, 내 대구 생활 첫 일 년이 저렇게 묻히고 마는구나 하고 슬픔'을 느끼는 것도 결국 서로에 대한 믿음, 끈기과 근면이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는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3. 어머니가 가르친 냉혹한 세상의 원리
'가족을 버린 채 자신의 사상을 좇아 큰 세계로 나아간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가족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지키는 데 억척스러웠던 어머니'는 김원일의 소설을 구성하는 두 축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도 역시 예외가 아닌데, 여기서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삯바느질로 아이들을 키우는 억척스러운 여인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어머니는, 길남이 자신은 주워 온 아이가 아닐까 하고 의심할 정도로 지나치게 엄격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인다. 어머니는 길남을 대구로 데려와서도 곧바로 중학교에 입학시키지 않고 한 해를 쉬게 한다. 그리고는 몇 푼의 돈을 주고 신문팔이를 하도록 한다. 어머니는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로 인해 부단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열심히 가정을 이끌어 가지만, 한편으로는 장남인 길남에게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일깨우기 위해 혹독하게 채찍질한다. 이런 모습은 중편 <깨끗한 몸>(1987)에서도 드러난다. 아들의 몸을 살이 벗겨질 정도로 박박 문질러 목욕시키는 어머니의 모습은 아들을 강인한 남자이자 가장으로 키우겠다는 결심의 표현이다.
그러나 어린 길남은 이러한 어머니의 의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오히려 '애비 없는 집안의 장자'라는 어머니의 기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빨리 '늙은 노인이 되기'를 바란다. 노인이 되면 장남으로서의 의무도 벗고 죽을 날만 기다리며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불만은 처음 길남이 가족과 합류할 때 '내 신세가 팔려가는 망아지 꼴이었다. 왠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갈 앞으로의 생활이 암담하게만 느껴졌다.'고 언급하는 데에서 미리 암시되고 있다. 결국 길남은 가출을 하는 것으로 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하지만 굶주림을 참고 역에서 새우잠을 자던 길남은 이틀 만에 어머니에게 이끌려 집으로 돌아온다.
"가자, 집에 가자고."
어머니는 그 말만 하고는 앞장을 섰다. 손에 쥔 손수건으로 물 코를 팽 풀고는 눈언저리를 닦는 어머니를 뒤에서 보며, 나는 역 광장으로 따라나섰다. 어슴 새벽으로 건물 위 하늘이 희뿌옇게 트여 오고 있었다. 나는 팔려 가는 망아지 꼴이었고, 선례 누나를 따라 대구로 올 때의 마음이 그랬다. 어머니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 말없이 묵묵히 걷기만 했지 내가 따라오는가 어떤가 뒤돌아보지 않았다.
짧은 가출을 통해 길남은 자신이 어머니의 그늘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어쨌든 지금 자신은 어린아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힘을 키우는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길남은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이웃 어른들의 모습을 통해 어머니가 가르치려는 가장의 역할, 생존의 원리를 깨닫는다. 하지만 그것은 쓰라린 받아들임이며, 세상의 어두운 면에 대한 너무 이른 깨달음이기도 하다. 길남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출세하든지, 아니면 세상살이를 몸으로 겪어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신문팔이와 신문 배달을 통해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눈치로 터득했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얼마만큼 이기적이며 그 생존 경쟁에서 이기기가 힘드냐를 너무 일찍 알아 버린 셈이었다. 어머니의 말처럼 장차 내가 집안의 의지 기둥이 되려면 남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데, 그러자면 정직과 성실만으로는 어렵고 실력, 체력, 노력, 거기에다 탐욕, 교활, 언변 따위까지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마당 깊은 집의 아래채는 헐리고 이웃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하지만 위채는 나날이 번창한다. 그리고 길남의 어린 동생 길수는 추운 겨울날 약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죽은 뒤 이름 모를 골짜기에 묻힌다. 반면 천수를 누린 주인집 노마님의 시체는 수십 개의 만장(죽은 사람을 슬퍼하여 지은 글.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 기(箕)처럼 만들어 들고 앞서서 가면 상여가 뒤따름)과 화려한 영구 행렬과 함께 선산으로 향한다. 여기서 길남은 죽음조차 얼마나 불공평한가 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시체를 목격한 소년의 충격을 그린 초기 단편 <어둠의 혼>(1973)에서부터 장편 <겨울 골짜기>(1986), <늘 푸른 소나무>(1993)에 이르기까지 초지일관 분단 문제를 형상화해 온 김원일은 <마당 깊은 집>을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려냈다. 특히 이 소설은 어린 시절을 단순한 소재로 삼은 것이 아니라, 시대 상황, 가족 관계 등이 작가의 실제 경험과 거의 일치하는, 자서전적인 작품이다. 따라서 <마당 깊은 집>의 주인공 길남은 작가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1942년,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작가는 6 · 25 전쟁 중 아버지가 월북하는 바람에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리던 그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동안의 배고픔을 채우듯 미친 듯이 독서에 몰두했다고 한다. 길남이 제시한 두 가지 가능성, 곧 출세와 세상에 대한 다양한 경험 중 온몸으로 세상을 겪어내며 그것을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소설가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자신이 겪었던 가난과 배고픔에 대한 기억을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로 표현해 냈다.
사악하고 불가해한 현실적 세계에서는 비록 패배하지만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는, 내 열등의식과 불안과 외로움에 한줄기 빛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내가 앓고 있는, 남이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의 병을 현실적으로 치료하거나 그 현실과 대결하여 극복할 일이 아니라, 병든 영혼과 그 막막한 불안을 붙들고 있어야 하며 그 불안을 글로 써야 한다고 느꼈다. 비로소 나는 나의 갈 길을 어렴풋이 결정하게 되었다.
-2002년 11월 고교 독서 평설에서, 신성환 평설 위원 / 한양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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