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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소설 줄거리/해설]명일(1936)-채만식-

by 휴리스틱31 2021.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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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일(1936)

-채만식-

 

● 줄거리

 

동경에 유학까지 다녀와 대학을 졸업한 범수와 여자 고보를 나온 영주는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한끼조차 해결하기 힘든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다. 명색이 지식인이라 잡스러운 일을 하고 싶어도 아내는 결사반대를 외치며 범수의 지식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한다.

 

이 날을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낮잠을 자고 있다가 일어나, 아내와 옥신각신 말다툼을 한다. 특히 자식의 교육문제에 대해 아내와 서로 다른 생각으로 갈등을 표출한다. 아내인 영주는 아이들에게 있어교육은 미래의 희망이지만, 남편인 범수는 아이들을 섣불리 가르치면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반거충이가 될 것이라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다툼 끝에 돈을 구하기 위해 범수는 외출 준비를 한다. 옷을 주섬주섬 입으면서 걸려 있는 추레한 양복 한 벌을 보고는 이것이라도 잡혀서 저녁거리라도 하라고 하지만, 영주는 그 양복만은 절대로 잡혀서는 안된다고 항변한다. 남편의 양복은 영주에게는 바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종로 거리에 있는 화신백화점으로 나온 범수는 배고픔에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전철역 앞에서는 차표 판 돈이 꽤나 될 것이라 상상하고, 지나가는 행원의 가방 속에는 돈이 꽤나 들었을 것으로 상상하면서 돈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넋을 잃고 있다가 교통순경에게 교통 흐름의 방해가 된다며 잔소리를 듣다가, 금은상 앞에 와서 '금비녀'에 시선을 빼앗긴다. '도적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망설이다가 들어가서는 '금비녀'를 훔치려 시도해 보지만 결국 그럴 만한 기술도 없고 대담성도 없음을 깨닫고 점원의 멸시하는 시선을 느끼며 금은상을 나오게 된다. 그러면서 도적질은 나쁘거나 악하기보다 더럽고 치사한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길을 걷다가 거지 아이를 만나 구걸하는 것을 돈이 없다고 뿌리치고, 양복쟁이가 피우다 버린 담배를 주우려고 머뭇거리다 지게꾼이 냉큼 집어가는 것을 지켜보기도 한다.

 

화신백화점 3층에 주임으로 있는 중학 동창생에게 가서는 동창생의 죽는 소리를 듣고는 돈 빌려 달라는 소리도 못하고, 4층 식당으로 올라가서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다가 잘 나가는 중학 동창생이자 동경 유학까지 같이 한  P를 만나게 된다. P가 잠시 윗도리를 벗어놓고 화장실을 간 사이, 돈이 든 주머니를 바라보며 훔치려고 하다가 결국 하지 못하고는 '도적질도 할 수 없는 인종'이라고 스스로를 저주한다.

 

P와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신 후 헤어져 N자동차 서비스에 잠시 들린다. 언젠가 큰아이 종석을 부탁했던 곳이라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아보기 위해 들러서는, 최씨가 흔쾌히 큰아이를 맡아주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고마움을 말하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범수가 외출한 사이에 집에 있는 영주는 싸전집 마누라가 와서 하는 돈 있는 자랑을 한껏 들어야 했고, 바느질감을 가지고 재봉틀 세주는 곳에 가서 바느질을 해오면서 재봉틀 하나를 구입하기 위해 돈을 빌려 달라고 하고는 돌아왔다. 그 사이에 종석(10세)과 종태(7세)는 같이 놀며 두부 장수의 두부를 훔쳐먹다가 들켰고, 두부장수는 영주에게 두부 두 모 값을 달라고 한다. 화가 난 영주는 두 아이를 회초리로 때리고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가하면서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 범수는 아이들의 도적질을 알게 되었고, 피가 끓는 것을 느끼지만 바로 '너희들이 나보다 낫구나(승어부는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결국 이튿날 영주는 동생 종태(엄마를 닮음)만이라도 학교에 보내게 되고, 범수는 종석이(아버지를 닮음)를 서비스 공장에 보낸다. 그러면서 범수는 생각한다.   "두구 보자. 네 방침이 옳은지 내 방침이 옳은지."

 

●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식민지 현실을 살아가는 인텔리 계층의 무기력감을, '범수'라는 룸펜(실업자) 지식인의 현실에 대한 자조와 냉소를 통해 표출하고 있다. 작가는 주인공 '범수'가 현실은 물론 미래에 대한 전망마저 포기한 채 살아가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채만식의 또 다른 작품인 <레디메이드 인생>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작품으로, 강압적이고 노골적인 폭력을 구사하는 세계에 무사히 적응해야겠다는, 지식인의 절박한 자기고백인 동시에 자기선언인 셈이다. 실직에서 오는 곤궁과 암담함, 무기력, 이런 심각한 상황을 채만식은 두 내외의 농담 섞인 대화를 통해 처리하여 풍자의 성격을 드러낸다. 여기서 나타나는 풍자는 그 역할이 통렬하거나 강렬하지 못하고 오히려 여운으로 비애감 같은 것이 남게 된다.

 

 지식인으로서의 범수의 현실 대응 양상 → 범수는 안정된 생활을 꿈꾸며 대학까지 마쳤지만 실직자가 되어 빈곤하게 살아간다. 그의 현실은 암울하고 '오늘'은 물론이고 '명일'의 희망도 없다는 자조적이며 냉소적인 현실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1930년대에 미래에 대한 전망을 상실한 채 부유하는 무기력한 지식인의 삶을 풍자하고자 하였다.

 

 

 범수와 영주의 갈등 양상 → 지식의 효용성에 대한 신뢰 유무에 있어서 범수는 신뢰를 갖지 못하고 영주는 신뢰를 갖고 내일을 기다리는 데서 갈등을 빚는다. 범수는 대학을, 영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인텔리 지식인들이다. 그런데도 이 둘은 지식과 현실에 대한 생각에 차이를 나타낸다. 범수는 학문이 삶의 선택을 방해할 뿐이라고 여겨 자식들을 교육시킬 필요조차 없음을 강조하고, 영주는 그래도 배워야 명일에 대한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범수는 지식인에게 명일은 없다고 보는 데 반해, 영주는 인텔리로서 살아가는 데에 삶의 가치를 두고 있다. 이들의 갈등은 재봉틀 구입 문제, 양복 문제를 거쳐 자식 교육 문제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결국 영주는 종태를 학교에 보내고 범수는 종석을 자동차 서비스 공장에 보내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들의 갈등은 전혀 해소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말 부분에서 더욱 증폭되고 예각화된다.

 

 영주와 범수의 대립은, ‘지식의 효용성에 대한 신뢰’ ↔ ‘지식의 무가치성 인식’이라는 성격을 띠며, 범수와 종석의 대립은, ‘지식의 무가치성을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지식의 자장 아래 존속’ ↔ ‘지식을 지니지 않음’의 대립이다. 두 대립은 영주에 대한 범수의 승리, 범수에 대한 종석의 승리라는 위계질서를 조성하여, 지식의 무소유(종석) 〉지식의 무가치성 인식(범수) 〉지식의 효용성에 대한 신뢰(영주)라는 가치 질서를 만들어낸다.

 

 <명일>은 채만식이 <레디 메이드 인생> 이후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가 재개할 무렵 쓴 작품이다. 다시 활동을 재개하면서 <명일>과 같이 전작과 유사한 작품이 나왔다는 것은 활동 중단으로 그의 사회 비판적 시각이 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며, 지속적으로 인텔리의 문제에 심취하려는 의도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레디 메이드 인생>에서 주인공 P와는 달리 범수는 혼자가 아닌 처자를 둔 가장으로 변하였다. 이것은 범수의 실직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한 가족의 문제로 확대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를 좀더 심각하게 다루려는 작가의 의도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 "두구 보자, 네 방침이 옳은지 내 방침이 옳은지."라고 되묻고 있지만 정작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텔리를 무능하게 만들어 버린 교육 제도의 모순과 함께 한 부모 밑의 같은 자식들이 상반된 인생의 선택을 강요하는, 정신적 초점을 잃어 버린 나라 없는 지식인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핵심사항 정리

 

 갈래 : 단편, 풍자소설

 배경

* 시간적 → 1930년대 일제 강점기

* 공간적 → 서울 마포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특징 : 지식인의 고뇌와 현실 인식에 초점을 맞추어 사건을 전개함.

 주제  식민지 현실을 살아가는 지식인의 무기력한 삶에 대한 풍자

◆ 출전 : 『조광』12~14호(1936. 10~12)

 

● 더 읽을거리

 

◆ 작가 채만식에 대해

 

1902년 6월 전라북도 옥구군에서 7남 2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평야지대로 상당한 부농의 아들이었다. 그가 자라나던 시기에 우리나라는 일본의 토지 수탈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인 자본가들의 매점매석이 성행하였다. 채만식의 부친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본인 지주와 자본가들에게 토지를 몰수당해 그의 젊은 시절은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려야만 했다. 또한 채만식의 고향은 바다가 가까운 곡창지대로 교통도 편리하였기 때문에 물자의 교역이 성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수탈 행위가 더욱 심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학이 식민지의 모순을 질타하고 해방기의 부정적인 현실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 구한말로부터 식민지 시대와 해방을 거쳐 분단을 경험하는 근현대사의 격동기에 있는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채만식은 경성의 중앙고보를 마친 뒤에 곧이어 일본 유학길에 올라 1922년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 와세다 고등학원을 다녔다. 그러나 그는 군산 미두에 손을 댄 아버지의 경제적 몰락과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학업을 중단하고 이듬해인 1923년 귀국길에 오른다.

 

1924년 이광수의 추천으로 단편 <세 길로>를 『조선문단』12월호에 발표하며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며, 잠시 강화의 한 사립학교에서 교원으로 있다가 『동아일보』『개벽』『별건곤』『혜성』『신여성』『중앙일보』등의 신문과 잡지에서 기자로 지냈다. 기자의 경험은 훗날 소설 창작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시대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고뇌와 식민지 사회 경제에 대0한 날카로운 안목을 마련하는 바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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