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 천상병 -
해 설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외롭게 살다가 죽을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오고 새가 와서 울고 꽃잎이 필 때는 화자가 '죽는 날 / 그 다음 날'이라고 한다. '죽는 날'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단절되는 날이고, 따라서 그에게 세상의 모든 가치가 무화되는 날이므로 죽는 날의 '그 다음 날'은 이제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날이다. 그 때 새가 와서 운다.
그러므로 여기서 새는 화자가 살아 있는 현실의 존재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 관련이 되는 내세적 존재이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이 한창인 때에'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가 되어서 '살아서 / 좋은 일도 있었다고 / 나쁜 일도 있었다고 / 그렇게 우는' 것이다. 세상(현세)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공존하므로 어느 한쪽으로만 쏠리거나 강조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아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 즉 현실에서의 희노애락은 그 자체가 지상적 삶의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이 때 새의 울음은 이 모두를 아우르는 자세이다. 죽음 이후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벗어나서 거리를 두고 사물을 보게될 대 관조할 수 있는 자세 - 그것은 어쩌면 도가적 무위의식이나 불가적 무소유 혹은 기독교적 순명의 정신일 텐데, 시인은 그러한 정신으로 세상을 노래하는 것이다.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는 결국 아웃사이더적인 존재, 현실을 벗어나서 가치 초월적인 존재로 세상을 관망하는 자세인 것이며, 이는 젊은 날의 천상병이 이념적이고 동시에 감상적인 자세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천상병의 작품에서 흔히 보이는 감상의 노출은 시인의 시적 자아가 상처받고 있음을 암시한다. 일본에서 태어나 유소년 시절을 보내고 해방 이후 조국에 돌아와 6 · 25 전쟁을 겪고, 4 · 19와 5 · 16의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은 한마디로 상처받은 영혼이었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상처받은 영혼을 새에 투사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새'는 '나'의 죽음 이후에 '나'의 삶과 죽음을 아름답게 노래하는 영혼의 분신 같은 것이다. '새'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어 현실을 초탈하면서도 존재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시인 의식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소박하고도 관조적인 감각이, 순진무구한 하나의 서정적 세계를 이루어 내고 있는 것이다.
◆ 시집 <새>(1971)
이 책은 겉모습부터가 다른 시집하고 다르다. A4 용지만한 크기(4*6 배판 126면)에 자주색 하드커버를 하고 있다. 꽤 고급스런 양장본이다. 왜 이렇게 고급스럽게 시집을 만들었는지 후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971년 천상병은 알콜 중독과 함께 심한 병환으로 고향으로 내려간다. 아니, 스스로 내려간 게 아니라 친구들이 고속버스를 태워 억지로 내려 보낸다. 그런데 그 뒤, 천상병은 고향집에도 부산 그 어디에도 서울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급기야 벗들은 그가 죽었을 것이라 짐작하며 슬퍼하다가, 천재 시인이 시집 한 권 내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안타까이 여겨 그동안 그가 써온 시들을 모아 근사한 시집을 낸다. 그것이 바로 <새>다.
그런데 5개월만에 서울의 한 정신병원에 나타난다. 아니, 스스로 나타난 게 아니고 새처럼 날아왔는지 어찌된 것인지 아무도 모르게 자신도 왜 자기가 여기에 있는지 모른채 그렇게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새>는 산 사람의 유고 시집이었던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새>는 1971년판이 아니고 1992년 20년만에 같은 모양 그대로 다시 나온 번각판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유고시집을 내는 것도, 20년만에 초판본 그대로 번각본을 내는 것도 우리 문학사에 없던 일이라고 한다. 그 귀한 책이 내 손 안에 한 권 있다.
이 시집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잇는 천상병의 시 '귀천'을 비롯해 천상병 시인의 투명한 정신 세계를 느낄 수 있는 시들이 60여 편 실려 있다. 1949년부터 1971년까지. 그러니까 10대부터 불혹의 나이가 될 때까지 쓴 시들을 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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