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신화(金鰲神話) -김시습-
줄거리
●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전라도 남원에서 홀로 외롭게 살아가던 노총각 양생(梁生)은 만복사의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하여 이긴 후 만복사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난다. 두 사람은 조촐한 상을 차리고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주고받는다. 날이 시려 하자 그 여인은 양생을 자신의 거처로 데려간다. 그곳은 매우 궁벽한 곳에 있는 집이었는데, 기물이나 차림새가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닌 듯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3일 동안 머물면서 즐거움을 맛보지만, 여인은 양생에게 이별의 시간이 되었다고 알리고, 이웃 여인들을 초대하여 간단한 잔치를 베풀어 전송한다. 그런 뒤 양생에게 은그릇을 주면서 절로 가는 길목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한다. 양생은 그녀가 가르쳐 준 대로 다음 날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여인의 부모를 만나게 되고, 그 부모를 통해 여인이 왜구들의 난리 때 죽은 처녀의 환신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양생은 여인과 약속한 시간에 절에서 만나 함께 잿밥을 먹고 서로 영영 이별하게 된다. 양생은 여인의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모두 팔아 여인의 명복을 빌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는데,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송도에 사는 선비 이생(李生)이 어느 날 최랑(崔浪)이라는 처녀를 만나 사랑을 싹틔운다. 귀가도 하지 않고 최씨 집 별당에서 그 처녀와 즐거운 며칠을 보낸다.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로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는 결혼을 해서 몇 년 동안 행복하게 살았다. 그 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피난 통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아내는 죽고 말았다. 난이 평정되어 집으로 돌아온 이생은 가족의 생사를 몰라 상심하고 있는데, 그의 앞에 죽은 아내가 환생하여 나타나 생시와 같이 동안 즐겁게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아내는 이별을 고하며 사라지고, 이생은 아내의 유언을 좇아 양가 부모의 유골을 찾아 장사를 지냈다. 그 후 이생도 오래 살지 못하고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이웃들은 그들의 절개를 칭찬해 마지 않았다 한다.
●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고려 때 한씨(韓氏) 성을 가진 서생이 글재주가 좋아 조정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그렇지만 그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꿈에 박연(朴淵)의 용궁에 초대되어 재능을 마음껏 자랑하고, 용궁의 여러 곳을 구경하는 등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받은 선물이 그대로 있었다. 그 후 현실세계의 명리(名利)에 뜻을 두지 않고 명산에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경주에 사는 박생(朴生)은 일찍이 불교, 무당, 귀신 등에 대해 의혹을 품었다. 어느 날 박생은 주역을 읽다가 조는 사이에 염라국으로 들어갔다. 지옥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놀란 박생은 수문장의 안내를 받아 염라대왕 앞에 가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거기서 염라대왕과 염라, 귀신, 천당, 지옥, 윤회설 등에 대해 문답하다가 염왕을 탄복시켜 후에 염왕의 자리를 물려받기로 하고 꿈을 깼다. 그가 꿈을 깬 지 두어 달 후에 병이 들어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가 죽던 날 이웃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고하기를 '그대 이웃이 장차 염라왕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송도 부호의 아들 홍생(洪生)이 평양을 찾아가 친구집 잔치에 가서 취해 놀다가 배를 저어 부벽정으로 갔다. 거기서 여러 수의 시를 읊조리고 있었다. 어느새 밤이 깊어 돌아오려 하자 환상 중에 여인이 나타났다. 아름다운 그 여인은 다름아닌 죽은 지 오래 된 옛 조선 때의 기자(箕子)의 딸이었다. 그녀와 노래를 주고 받으며 나라가 망한 사연을 듣고 울분과 감회를 함께 나누었다. 그런데 날이 새자 그 여인은 시를 남겨두고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 버렸고, 시마저 회오리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그 이후로 홍생은 그 여인을 잊지 못하여 상사병을 얻어 백약도 소용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체는 며칠이 지나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는데, 이는 기자왕의 딸을 만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감상 및 해설
매월당 김시습이 1465년 중년의 나이에 경주 금오산에 은거하면서 지은 작품으로, 기이한 사실을 전하는 전기적(傳奇的) 한문소설로 독립된 단편을 묶어 놓은 단편소설집이다.
이 작품들의 공통된 특징은 주인공들이 한결같이 가인적(佳人的)인물이라는 점, 사물을 미화시켜 표현한 점, 초현실적인 기괴한 내용을 그린 전기적 소설이라는 점 등이다.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剪燈神話)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지만 향토적 주인공을 내세워 창작한 점이나, 현실과 초현실 사이의 갈등과 개연성이 잘 나타나 있다는 점에서 모방의 수준을 넘어선 독창성이 인정되고 있다.
이 작품은 작가 김시습이 처한 불우하고 기구했던 그 시대의 사회상을 극명하게 부각시켜 주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또한 소설의 발전 과정에서 이 작품이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해서, 설화문학 이후 창작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금오신화'는 초현실적인 요소를 지닌 전기 소설로, 현세에 살고 있는 인물이 직접 천상계나 저승으로 가거나 용궁의 신, 죽은 여인의 환신이나 여귀(女鬼)와 만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금오신화'에 나오는 5편 모두 현실의 인간 세계와 초현실의 세계가 상호 출입한다는 설정하에 사건이 전개된다. 이것은 내부 이야기와 외부 이야기의 사건이 독립적으로 전개되는 액자 구성과는 구별된다. '금오신화'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현실 (불행) |
⇒ | 초현실 (행복) |
⇒ | 현실 (절망) |
⇒ | 초현실 (상승) |
요점정리
■ 갈래 : 한문소설, 단편소설, 전기(傳奇)소설, 명혼(冥魂)소설
■ 성격 : 전기적, 낭만적, 비극적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사상적 배경 : 불교사상(인연설, 윤회설), 유교사상, 도교사상, 인본사상
■ 인물 및 성격 제시 방법
* 등장인물은 고전소설의 전형인 재자가인이며, 유형적이고 정적인물들임.
* 성격 제시 방법 : 직접 제시 방법을 주로 사용하며, 시와 대화를 통한 간접 제시 방법도 돋보임.
■ 주제
* 만복사저포기 ⇒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남녀의 애틋한 사랑과 세속적 삶의 초월
* 이생규장전 ⇒ 여인의 정절과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소망과 사랑
* 용궁부연록 ⇒ 화려한 용궁의 체험과 세상적 삶의 무상함
* 남염부주지 ⇒ 천리(天理)문답과 패도의 비판(세조)과 왕도의 추구
* 취유부벽정기 ⇒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남녀간의 기구한 사랑
■ 특징
①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함.
② 많은 사건이 역사적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
③ 현실적인 주제와 비현실적인 소재가 특이한 조화를 이룸.
④ 시를 적절히 삽입하여 서정성과 인물의 심리를 적절히 드러냄.
⑤ 결말의 행복보다 그릇된 세계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임.
■ 문학사적 의의
현존 최고의 (한문)소설로, 작자 자신의 인생관, 종교관은 물론이고, 당대의 역사적 현실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직접 비판하고 고발하기보다는 우의적 방법을 주로 사용했기에, 현실의 세계보다는 꿈이나 비현실의 세계를 즐겨 다룸.
■ 비교할 만한 작품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 우리나라 부전 설화집 <수이전>, <조신몽>, <최치원전>,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설화와 비교할 만함.
■ 만복사저포기
<만복사 저포기>는 생사를 초월한 사랑을 다룬 전기(傳奇) 소설로, 전래하는 '인귀 교환 설화', '시애설화', '명혼설화' 등이 사건 전개의 바탕이 되어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띤다.
이 작품은 '이승 사람과 저승 영혼의 만남 ― 사랑 ― 이별 ― 이승 사람의 탈속'의 구조로 되어 있고, 그 밑바탕에는 불교 사상이 깔려 있다. 즉,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한탄하며 배필을 점지해 달라고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발원 사상, 죽은 이의 명복을 빌며 재를 올리는 의식 죽은 여인이 남자로 환생한다는 윤회 사상 등이 담겨 있다.
한편, 이 작품을 작가의 삶과 관련지어 해석하기도 하는데, 김시습이 조실부모하여 외가에서 자란 것이나, 불도에 심취하여 금오산에 칩거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승려가 된 것은 양생의 삶과 흡사하다. 그리고 여인이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정조를 지키려고 했던 것은,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게 지조를 팔지 않고 단종에게 충성을 바치려고 한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양생과 여인의 생사를 초월한 사랑은 부당한 세계의 횡포에 맞서고 이를 고발하고자 하는 작가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시습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 속에서 일생을 살았으며, 이러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낭만적 환상을 통해 사회적 모순을 제기하면서 자신의 이상을 문학적으로 구현하려고 했다. '만복사저포기'에는 이러한 작가의 사상과 가치관이 담겨 있다. 즉, 죽은 여인과 산 사람과의 사랑을 통해 남녀 간의 애정이 생사를 초월할 수도 있다는 애정 지상주의를, 저승과 이승의 남녀 주인공의 애정 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는 것을 통해서는 운명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여인을 통해 주인공들의 애정을 방해하는 요소로 전란을 설정함으로써 사회적 모순을 드러내는 작가의 사회관도 엿볼 수 있다.
■ 취유부벽정기
남녀간의 사랑을 제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등과 동일하나, 정신적인 사랑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구별된다. 불의와 폭력에 의하여 정당한 삶과 역사가 좌절되는 아픔을 표현한 작품이어서 짙은 우수가 서려 있다. 귀가한 홍생이 기씨녀를 그리워하다가 죽는 것으로 되어 있어 작품이 비극적 성격을 지니나, 죽어서 신선이 되었다고 함으로써 그러한 성격이 다소는 약화되어 있다.
이 작품의 해석과 평가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엇갈려 있다. 작품에 나타난 사건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역사적 사건의 우의(寓意)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선녀와의 연애 및 선계로의 승화를 현실 도피로 보고 그것은 작가의 현실주의적 사상과 모순되는 것이기에 작품은 결국 작가의 정신적 갈등을 반영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모순에 찬 세계를 개조해서 세계와 화합하려는 자아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세계의 대결을 통하여 소설적 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견해도 있고, 작품을 도가적 문화의식의 투영으로 해석하여 작품에 나타난 갈등을 동이족의 문화적 우월감과 함께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극렬한 반존화적 민족 저항의 분한(憤恨)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고려 사람인 홍생과 기씨녀의 만남은 지상과 선계의 연결이고, 과거와 현재의 접맥을 의미한다. 이로 보건대, 작자는 민족사의 정통성을 '단군 왕검→기자조선→고구려→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고려의 역사적 정통성에 바탕을 둔 작가의 의식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불만이 조선 왕조에 대한 불신으로 진전되면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한편, 홍생과 기씨녀와의 만남에서 애정이나 육체적 관계는 없었지만, 수천 년 전에 죽은 여인의 혼령과 살아 있는 사람이 어울려 기쁨을 누렸고, 이별한 뒤에 홍생이 여인을 연모하다가 죽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명혼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뜻이 맞는 사람을 만나 시로써 문답하면서 속 마음을 마음껏 토로하던 그 정황이 마치 꿈 속의 일처럼 전개된 점에서 보면 몽유소설에 가깝다.
■ 매월당 김시습(1435∼1493)
강릉 태생. 생육신의 한 사람. 생후 8개월에 글자를 터득하였으며, 3세에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한시를 지었다고 함. 신동으로 세종에게 칭찬을 받기도 한 천재였으며, 5세 때 세종으로부터 단종이 너희 임금이 될 것이다는 말을 듣고난 뒤, 그는 평생 단종을 정신적 지주로 생각했다. 21세 때 삼각산에 들어가 학문을 닦다가 단종 폐위 후 3일간 통곡을 하였다 함. 만년에는 설악산 오세암에서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한 때 환속하여 재혼하기도 했으나 방랑을 계속하다가, 부여 '무량사'에서 세상을 마침.
■ '이생규장전'에서 초현실적인 배경이 갖는 의미
「금오신화」는 전체적으로 보아 불우하거나 현실에 뜻을 얻지 못한 주인공들이 비현실적 존재나 비현실적 사건을 통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을 달성하거나 혹은 현실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신의 이념의 정당성을 확인한 후, 다시 현실로 돌아와 죽음을 맞이하거나 세상으로부터 자취를 감추는 구성을 취한다. 작자는 죽은 여자 귀신과의 사랑과 이별을 다루거나 용궁과 염라국의 공산을 설정하는 등, 작가는독자들에게 다양한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현실 속에서 겪는 우수와 불우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죽은 여자 귀신이나 선녀와 사랑을 나누지만 그 두 사람의 애정과 화합은 영원한 이별을 고하기 전에 일시적으로 실현되었을 뿐이며, 염라국과 용궁을 여행하여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인정을 받지만 그것 역시 꿈 속에서 잠시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의 사랑과 여행이 끝났을 때 그들이 겪는 고뇌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며, 더 이상의 전망과 출구가 보이지 않기에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린 채 죽음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인공이 체험하게 되는 기이한 만남과 헤어짐의 공간은 현실에서의 소외를 정신적으로 보상받는 가상의 세계인 것이다.
그 같은 가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금오신화」의 작품 내 주인공들의 고뇌와 불우의 이면에는 당대 최고의 비판적 지식인이었던 작자의 삶의 이력이 깃들어 있다. 현실과의 일체의 타협을 거부한 채 20대에 방랑의 길을 떠나 고독과 방황 속에서 세상의 무질서와 혼란을 질타하였던 김시습은, 경주의 금오산에 일시 정착하여 「금오신화」를 지은 뒤,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석실에 감추어 두었다고 한다. 해소할 길이 없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부조화 속에서 작가가 겪어야 하는 갈등과 고뇌가 작품 내에 투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작품 내에 묘사되어 있는 현실 세계는 두 사람의 사랑을 물리적 폭력으로 가로막는 전쟁과 살인이 자행되고 있으며, 간신이 난리를 일으키고 간악한 무리가 횡행하고 있으며, 정직한 사람이 대우받지 못하는 공간이다. 혼란과 부정과 폭력으로 가득찬 인간 세계와 달리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주인공이 방문한 다른 세계는 질서와 원칙이 존재하며 화합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 공간에서 남녀 주인공은 시문을 주고 받으면서 서로간의 애정과 신의를 확인할 수 있으며, 때로는 군신간의 갈등과 반목이 없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즐거움과 영화를 향유할 수 있다.
그러한 이상적 공간에서의 기이한 만남은 비록 일시적인 것이지만, 주인공은 현실 세계의 모순과 폭력을 강렬하게 비판하기도 하며, 때로는 그것에 맞서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견지해 나가는 것으로 그려진다. 사랑을 갈구하는 주인공과 그것을 제지하는 적대자의 대결에서 주인공이 끝내 파멸하지만,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주체적 결단과 상호간의 신의를 통해 세상으로부터의 횡포에 굴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병이 들어 죽게 된다. 저승으로 가 버렸기에 끝이 났지만 그대로 주인공은 끝까지 괴로워하다가 파멸을 맞게 된다. 그것은 패배와 다르니, 자신의 결단과 의지에 따라 맞서 싸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주인공의 파멸을 강요하는 세계의 횡포를 고발하기도 하며, 부정과 폭력이 횡행하는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고, 운명과 죽음을 통해 삶의 유한성을 되돌아 보기도 하며, 정의와 질서가 지켜지는 이상을 꿈꾸기도 한다. 그 이면에는 세상을 등진 채 방랑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작가의 고뇌와 울분의 목소리가 잠재되어 있기에 작품의 호소력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금오신화」는 우리나라 소설사에서 획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전기 소설집이다. 한국 고전 소설의 발생에 관해서 논란은 있지만, 적어도 그 이전 시기까지의 서사적 전통을 이어받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뚜렷한 결정체라는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중국의 '전등신화'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평면적 관찰만으로 모방작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작품이 출현한 15세기 말은 중세적 사회 규범과 문화의 틀이 아직 완강하던 시대였다. 이념과 현실 사이의 모순 속에서 심각한 갈등과 고뇌를 겪어야만 했던 김시습은 현세적 삶의 욕망과 그 좌절 및 삶의 본질적 문제를 현실과 낭만적 환상의 절묘한 결합 방식을 통해 엮어냄으로써 우리 소설사의 지평을 확대하였다.
- 정우봉, '김시습의 「금오신화」'
■ '이생규장전'의 사상적 배경
「만복사저포기」가 불교적이라면 이 작품은 유교적이다. 남녀 간의 애정 문제가 중심이 되어 있지만, 남자 주인공의 자유 연애는 유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부모들이 쉽게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남자 주인공은 국학에 다니는 유생으로 부모 몰래 연애를 하면서도 늘 반성하면서 불안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은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수신(修身)하는 자세라 할 수 있다.
여기에다 또한 도교적인 숙명론을 삽입하여 사건을 전개하였다. 여주인공이 홍건적의 난으로 죽었지만 그 원혼이 환신으로 나타나 재결합을 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가가 결말에서 남녀 주인공의 재회가 허무하게 끝나도록 설정해 놓은 것은 불교적인 무상관(無常觀)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작가가 지니고 있던 유(儒) · 불(佛) · 선(仙)의 사상을 혼합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교과서 학습 활동 풀이 : 『 이생규장전 』
1. 서사문학에서 갈등은 인물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흔히 인물의 욕망 충족 과정에는 그것에 대응하는 장애가 발생한다. 서사 문학에서 이야기란 곧 등장인물이 이러한 장애와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이생'과 '최 처녀'의 욕망은 무엇인지 말해 보자.
⇒ 작품의 전반부에서 이생과 최 처녀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을 성취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이생과 최 처녀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에 거역하며 함께 사랑하고 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2) 두 사람의 애정 성취를 가로막는 요인이 무엇인지 말해 보자.
⇒ 두 사람에게 애정의 성취가 욕망이라고 한다면 두 사람에게 장애가 되는 것은 작품의 전반부에서는 유교적인 관습에 얽매인 부모의 반대와 최 처녀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전쟁이다. 후반부에서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길이 갈려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이 장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3) 장애 요인에 대해 두 인물이 각각 어떻게 대응하는지 알아보자.
⇒ 작품의 전반부에서 이생은 최 처녀보다는 소극적이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최 처녀와 결혼하려 한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사회적 상황에서 이생은 가족을 데리고 궁벽한 산골에 숨어사는 대응을 한다. 후반부에서 이생은 죽은 최 처녀의 환신과 함께 살 것을 기꺼이 수용하는 대응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최 처녀의 대응은 이생보다는 좀 더 적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최 처녀는 이생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부모를 설득하며 결혼을 이루었다. 그리고 홍건적에게 잡혀 정조(貞操)를 잃을 뻔한 상황에서도 이생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쳐 반항하기도 한다. 또 죽음이라는 인간의 숙명을 거스르면서 귀신이 되어 나타나 이생과 함께 살기도 하였다.
(4) 작품에 등장하는 두 사람을 당대의 선비나 규수 유형과 비교하여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말해 보자.
⇒ 이생과 최 처녀는 당대의 선비와 규수의 전형적인 상과 달리, 사회적 질서와 이념에 순응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들의 사랑은 부모가 정해 준 배필을 자신의 상대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당시의 연애 관습에서 일탈적인 것이다. 이생과 최 처녀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인물로 자유로운 연애와 사랑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당대의 선비와 규수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5) 이러한 인물 유형을, 앞에서 배운 '조신몽'에 등장하는 인물과 비교하여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말해 보자.
⇒ '이생규장전'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세계와 맞선다. 이에 비해 '조신몽'의 인물은 꿈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주어진 상황을 적극적으로 타개해 나아가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조신은 사랑하는 여인과 애정을 성취하기 위하여 부처님 전에 빌었을 뿐, 현실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으며, 꿈속에서도 삶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다.
(6) 앞의 활동을 바탕으로 이 작품이 설화가 아니라 소설로 분류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 이 작품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는 작자 자신의 현실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세계관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두 사람의 애정 성취를 제약하는 장애물은 봉건 사회의 제도라든가 전쟁이나 운명과 같은 세계의 횡포이다. 두 사람은 이러한 세계의 횡포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한다. 이 작품이 설화가 아니라 소설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2. 이 소설은 전기 소설(傳奇小說)의 전형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이 소설을 전기적 구조에 따라 분석해 보자.
⇒ *현실 : 최 처녀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
*초현실 : 최 처녀의 환신과 재결합과 재이별
*현실 : 최 처녀를 장사지내 주고, 이생도 죽음
(2)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이야기로 엮은 동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현실에서 발생한 욕망을 현실에서 풀 방법이 없을 때 초현실적인 세계에서 해결을 도모하게 될 것이다. 자아와 세계의 치열한 갈등에 대한 해결책을 현실에서 마련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초현실로 사건을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당시의 사회적인 조건이 개인의 욕망을 현실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지 못하게 하였음을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3. 오늘날에도 이러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있는지 찾아보고, 이러한 문화적 현상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둠별로 조사한 다음 이를 정리하여 발표해 보자.
⇒ 오늘날 귀신 혹은 영혼과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는 가끔씩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사랑과 영혼', '천녀유혼'과 같은 외국영화나, '은행나무 침대'와 같은 한국 영화가 대표작이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사랑 이야기가 최첨단 문화를 자랑하는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먼저, 언제나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시공간을 초월한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라는 점이다. 현실은 인간의 욕망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쾌락이 현실에서 허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상상적으로라도 쾌락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실의 벽에 부딪쳐 사랑이 파국을 맞은 사람이 상상 속에서 사랑의 완성을 그려 보기도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는 어느 시대에도 몽상적인 기법을 활용한 문학 작품이나 예술이 존재하고 있었다느 점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런 류의 영화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이유를 인간의 인간다움을 억압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점점 더 타락해 가고 세상은 불순해져 간다. 그러나 인간은 이에 맞서서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게 된다. 세상이 불순해지는 한편으로는 순수함을 추구하게 되고 인간이 타락해 갈수록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순결함을 갈망하게 된다. 순수하지도 순결하지도 않은 사랑으로 인간관계를 맺는 현실 생활의 이면에서, 순수하고 순결한 사랑을 꿈꾸는 욕망이 이러한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영화들이 '이생규장전'과 같이 주로 사랑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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