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 광장
- 김규동 -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 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한 작은 심장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진공의 해안에서처럼 과묵(寡默)한 묘지 사이사이
숨가쁜 Z기의 백선과 이동하는 계절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燐光)의 조수에 밀려
이제 흰나비는 말없이 이지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아름다운 영토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
화려한 희망은 피고 있는 것일까.
신도 기적도 이미
승천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
그 어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흰나비는
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대결하여 본다.
- <연합신문>(1952) -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상징적, 문명비판적, 주지적
◆ 표현 : 백색의 색채 이미지
이미지의 조형과 시의 구조적 측면에 대한 세심한 배려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현기증 나는 활주로, 피묻은 육체의 파편, 숨가쁜 Z기,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
→ 전쟁의 처참함, 현대 문명이 낳은 파괴성, 삭막함과 건조성을 나타내주는 시구들임
* 흰나비 → 현대 문명의 상징과 대립되는, 순결성과 순수성을 대표하는 존재
현대문명의 가혹함 앞에서 방향을 상실하고, 고군분투하며, 근원에 대한 향수를 지닌 존재
* 투명한 광선의 바다, 진공의 해안 → '현기증 나는 활주로'에 대한 비유적 표현.
문명비판적 관점에서 표현된 시구들임.
*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 그 어느 마지막 종점 → 불확실한 미지의 시간과 장소를 제시함으로써, 화자의
염원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은 다소 불안정하다고 할 수 있음.
* 아름다운 영토 → 나비에게 안정과 휴식을 주는 공간
* 푸르른 활주로 → '현기증 나는 활주로'와의 극명한 대조를 통해 현실(현기증 나는~)과
내면(푸르른~)의 대조를 잘 나타내주는 시구임
* 신도 기적도 이미 / 승천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 → 구원에 대한 절망감 표출.
* 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대결하여 본다
→ 허황된 몸짓일지언정 포기하지 않고 냉혹한 현대문명 과 대결하여, 전쟁이 없는 인간성이 회복된 세계에 대한 소망을 표현한 부분임. 매우 장엄하고 극적인 장면으로 시인의 희망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음.
◆ 주제 : 전쟁으로 피폐된 인간성 회복에 대한 염원
냉혹한 현대 문명을 향한 대결의식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극한적인 전쟁 상황에서 방향을 잃어 버린 흰나비의 모습
◆ 2연 : 작열한 심장과 투명한 광선에 차단당한 나비의 각막
◆ 3연 : 말없이 파닥거리는 나비의 날개
◆ 4연~5연 : 전쟁이 없는 미래에의 희망과 염원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시인 김규동은 전후 모더니즘의 대표 주자 중의 한 사람으로, 비판적이고 지성적인 시선으로 현대 문명 비판의 논리를 형상화하려고 노력한 시인이다. 현대 문명을 비판하려는 시적 의도를 현대 도시 문명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나타내고자 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현기증 나는 활주로, 허망한 광장, Z기의 백선, 기계처럼 작열한, 인광의 조수' 등이 그것에 해당한다. 이러한 시어들은 도시 문명의 건조성, 비인간성, 삭막함 등을 표출시키는데 기여하며, 시인의 비판적 의도에 합당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이고 철학적 성찰을 결여한 채 현대문명과 관련된 언어만을 사용해 문명 비판의 잣대로 삼겠다는 의도는 그다지 타당한 논리는 되지 못한다. 1950년대 모더니즘 시인들의 실패 요인이 있었다면 이것도 한몫 했을 것으로 본다.
'나비'와 '광장'은 제목부터가 하나의 대립쌍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제를 암시하는 기호로 작용하고 있다. '(흰)나비'는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화자의 정서와 주제를 표출하기 위한 객관적 상관물이라 할 수 있다. 즉, 흰나비는 시적 화자의 전쟁에 대한 감각적 체험 또는 현대 도시 문명에 대한 체험을 구체적이고 실감있게 표현하기 위한 감각적 등가물로서, 화자의 사상과 정서는 곧 흰나비의 묘사에 스며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상황은 동원된 몇 가지 소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활주로'와 '제트기', '피묻은 육체'와 '묘지'와 같은 것은 전쟁의 상황을 말하기 위해 쓰인 것이다. 그리고 돌진하는 나비와 그를 가로막은 투명한 광선, 번지는 불꽃 등의 상황을 통해서 전쟁의 숨막히는 극한 상황을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시는 전쟁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일상적 인식을 초월한 그 비정한 상황적 분위기를 비판적으로 그려내려 한 것이다. 4연에서는 바로 이러한 화자의 전쟁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비극적 현실을 벗어나려는 염원으로 표현되어 있다.
결국 이 시는 전쟁으로 인해 비인간화된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질서와 평화를 회복하려는 휴머니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전후의 시대상황과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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