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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의 <미지(未知)의 걸작>

by 휴리스틱31 2021.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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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의 <미지(未知)의 걸작>

 

작가 연구

 

1799년 투르에서 태어난 오노레 드 발자크는 17세에 파리에 올라와 소르본느에서 법학 강의를 들었으나 공부 보다는 파리 시내를 쏘다니며 놀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고리오 영감>의 젊은 법학도 라스티냑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일찍이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가명으로 싸구려 대중 소설을 많이 썼고, 출판업에 손을 대었다가 망하여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27세때인데 이후 죽는날 까지 그는 빚을 갚기 위해 밤낮으로 소설을 썼습니다. 진한 커피를 쉴새 없이 마셔대며 하루 15시간에서 18시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소설을 써내어, 90여편이 넘는 <인간희극> 말고도 3백편이 넘는 잡문과 10권에 이르는 서간집을 남겼습니다. 한 시대 프랑스의 사회사를 그려낸 그의 엄청난 소설은 빚 덕분에 빛을 보게된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발자크의 '철학 연구'

 

<미지의 걸작>'철학연구'에 분류된 작품입니다. 발자크가 말하는 '철학'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철학과 조금 달리, 비교적 단순한 것입니다. 즉 그가 필생의 주제로 선택한 "생각은 인간을 파괴한다"라는 명제의 탐구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이 도가 지나치면 완전히 인생을 망치게 한다는것입니다(les ravages de la pensee quand elle passe ses limites). 발자크의 '생각'(pensee)'집념'이나 '강박관념' 혹은 '필사적인 야망의 추구''절대의 추구'와 동의어라고 할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소설중 하나는 <절대의 탐구>라는 제목을 갖고 있습니다. <루이 랑베르><절대의 탐구>'철학연구'에 분류된 작품들은 집념에 사로잡혀 자기 인생을 파멸로 이끌고 가는 주인공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절대의 탐구>는 다이아몬드의 합성을 가능케하는 원소를 얻으려는 집념에서 가정을 파괴하고 마침내 자신도 죽음에 이르는 화학자의 비극이고, <루이 랑베르>는 우주의 근원을 밝혀줄 절대적인 진리를 탐구하다가 끝내 미치고 마는 천재적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초인을 지향하는 루이 랑베르의 꿈은 결국 광기, 죄악, 죽음에 이르렀고, 모든 철학을 예견하고 요약했다는 그의 저서 '의지론'은 미완성인채로 출판되지 못합니다.

 

발자크와 미술

 

<미지의 걸작>의 주인공 프레노페르도 비극적인 절대의 탐구자입니다. 그는 절대적인 미()를 추구하다가 결국 자신의 그림을 불살라 버리고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광기의 화가입니다. 루이 랑베르의 명저 '의지론'이 사라져 없어져 버렸듯이 프레노페르의 완벽한 그림 La Belle Noiseuse도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를 파들어 가는 생각의 폐해"라는 발자크 자신의 주제설정과는 달리 이 작품은 현대에 와서 예술의 측면으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습니다. "예술가의 신화, 예술의 한계, 또는 예술과 광기 사이의 무너지기 쉬운 경계"(Albert Beguin, Balzac lu et relu, Seuil, 1965, p.229). 를 그리고 있으며, 예술 이론에 대한 성찰과 회화에서의 완벽성 추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지의 걸작>말고도 그의 소설 중에서 미술을 주제로 다룬것에는 <강바라>, <마시밀라 도니>, <집안간의 복수>, <피에르 그라수>등이 있습니다.

 

비록 금융계나 공증인의 세계만큼 예술가의 세계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발자크 자신이 그림을 아주 좋아했던 미술 애호가였습니다. 돈이 없어 많이 사지는 못했고, 또 그다지 탁월한 감식안을 가진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했습니다. 미술에 대한 취미는 그의 소설 자체가 매우 회화적이라는데서도 알수 있습니다.

 

그의 소설은 언제나 세심하고 끈질긴 풍경 묘사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그 풍경의 묘사가 마치 그림을 그려놓은것 같습니다. 회화적인 주변 환경의 묘사가 다 끝나면 인물이 등장합니다. 마치 정지 화면에서 갑자기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영화의 첫 장면처럼 풍경의 정적(靜的)인 장면에서부터 갑자기 인물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평면의 그림 속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롤랑 바르트가 <S/Z>에서 발자크의 묘사를 de-peindre라고 해체해서 쓴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묘사라는 뜻의 depeindre에서 de('빼낸다'는 접두사)peindre('그리다'라는 동사)를 분리시켜 보면 '그림에서 빼낸다'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에 착안하여 롤랑 바르트는 발자크의 회화적 기법을 한 마디로 압축시키는 언어의 유희를 벌인것입니다.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작가는 '실재'를 우선 그림으로 변형시킨다. 그런 후에 거기서 자기 대상을 끌어내어 그림에서 빼낸다. 다시 말하면 그를 묘사(d -peindre)한다"(Roland Barthe, S/Z, Edition du Seuil, collection Tel Quel, 1970. p.61)

 

보들레르와 마찬가지로 발자크도 들라크르와의 근대성(modernit )을 알아 보았고, 그와 친교를 맺었으며, <황금눈의 처녀>를 그에게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들라크르와도 발자크의 <루이 랑베르>를 찬양하는 편지를 보낸적이 있습니다. 들라크르와가 <미지의 걸작>의 주인공 프레노페르의 모델이라는 설도 그럴뜻 합니다.

 

프레노페르의 그림이 채색의 균형을 이루고 있고, 터치가 자유분방하며, 두텁게 덧칠이 되어있다는 묘사는 그대로 들라크르와를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예술의 사명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다"(la mission de l'art nest pas de copier la nature mais de l'exprimer, p,43)라는 구절도 "새로움은 창조하는 정신 속에 있는것이지 그려진 자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la nouveaut est dans l'esprit qui cr e, et non pas dans la nature qui est peinte)라는 들라크르와의 말(Eug ne Delacroix, Journal, 14 mai 1824)과 그대로 대응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들라크르와가 프레노페르를 모방하기도 합니다. "구불구불한 선이건 곧은 선이건간에 오로지 선()에서만 아름다움을 발견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창밖으로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경치에서 나는 전혀 선의 개념을 떠올릴수 없다".(1849715일자 일기)는 들라크르와의 말은 "모든것에 부피가 있는 자연에 선()이란 없다"(il n'y a pas de lignes dans la nature ou tout est plein. p.52)라는 프레노페르의 말과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미지의 걸작>1832년에 나왔으므로 들라크르와의 일기는 이 작품을 읽고난 후의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렘브란트(Rembrandt)나 후기 티치아노(Tiziano)를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컨대 "가까이서 보면 이 작품은 구름처럼 희미하게 보이고, 정확함이 결여된 듯이 보일수 있다. 그러나 두 걸음만 물러서면 모든 것이 확고해지면서 분명하게 윤곽이 드러난다"(De pres, ce travail semble cotonneux et parait manquer de precision, mais a deux pas, tout se raffermit, s'arrete et se detache. p.52)라는 부분이 그것입니다.

 

미지(未知)의 걸작은...

 

이 소설의 집필 연도는 들라크르와와 동시대인 1832이지만 소설 속의 시대 배경은 렘브란트, 니콜라 푸생, 루벤스등이 살았던 17세기입니다. 그러나 소설 속 화가들이 참조하고 있는 그림 기법은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소설의 회화사는 세 시대를 아우르며 서로 포개지고 있습니다.

 

소설은 포르뷔스의 화실에 시골에서 갓 올라온 젊은 화가 지망생 푸생이 찾아 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포르뷔스는 앙리 4세의 궁정화가였다가 마리 드 메디치 여왕에 의해 해임되어 궁정화가의 자리를 루벤스에게 빼앗긴 중견화가입니다. 역사상 실제 인물인 푸르뷔스가 그 모델입니다. 한편 니콜라 푸생(1594-1665)은 베니스에서 티치아노의 작품을 공부한 후 형태(forme)와 데생(dessin), 그리고 색채(couleur)와 빛(lumiere)의 관계에 대해 깊이 성찰한 17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고전주의 화가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감, 그리고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차 있는 여린 감수성의 청년 화가로 나옵니다.

 

푸생이 포르뷔스의 화실을 찾은 바로 같은 시간에 한 늙은 화가가 그 곳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흰 레이스의 가슴장식 같은 꼼꼼한 옷의 묘사에서 우리는 얼핏 렘브란트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가 이 소설의 주인공인 비극적이며 신비스러운 화가 프레노페르입니다. 그는 자신이 오래동안 그리던 그림이 완성되어 이제 완벽한 미()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림을 보여 달라는 두 사람의 간청을 그는 거절합니다.

 

걸작을 보고 싶다는 욕구가 너무나 강하여 푸생은 자신의 연인 질레트를 데리고 갑니다. 실제 인간의 아름다움과 그림 속의 아름다움을 비교해 보라는 구실이었으나, 결국 걸작을 보기 위해 자기 연인을 프레노페르에게 바친것입니다. 사랑과 예술 중에서 그는 예술을 택한것입니다. 마침내 프레노페르는 장막을 걷어 자신의 걸작을 두 사람에게 보여줍니다. 그림을 보여주는 그의 얼굴은 초자연적 흥분 상태로 불타는듯하고, 눈은 반짝거렸으며, 사랑에 도취된 젊은이처럼 가쁜 숨을 몰아 쉬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이런 완벽성을 생각조차 못했겠지! 앞에 있는 것이 여자인데, 그대들은 헛되이 그림을 찾는군. 이 그림 속의 깊이를 보게. 저 안의 공기는 진짜 공기와 같아서 우리가 숨쉬고 있는 실제의 공기와 거의 구별할수 없네. 예술은 어디에 있는가? 없어, 사라졌어! 젊은 여인의 형태 그 자체만 남았네. 내가 포착한 색체, 몸매를 완성시켜주고 있는 저 생생한 선()이 놀랍지 않은가? 마치 물속에 고기가 놀 듯 자연스럽지. 인물의 윤곽선이 배경과 얼마나 선명하게 구분이 되는지 잘 보게. 여인의 등 뒤로 손이라도 넣을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지난 7년간 나는 빛과 대상의 조화를 철저히 연구했네. 그리고 빛 속에 부드럽게 잠겨 있는 이 머리칼을 보게. 그녀는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이 가슴은? ! 그 누가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싶지 않겠는가? 살결이 파닥거리고, 그녀가 곧 일어나려 하네."(p.65)

 

그러나 두 사람의 눈에는 화폭 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완벽한 미인이 그려져 있기는커녕 온갖 색깔들만 어수선하게 칠해져 있을뿐입니다. 마침내 어린 푸생이 화폭 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경솔한 말을 내뱉었고, 이 말에 프레노페르는 문득 환상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필생의 작업이 허사로 돌아갔음을 깨닫습니다. 다음날 화실을 찾은 포르뷔스는 프레노페르가 자신의 그림을 불사른후 자살했음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미지의 걸작은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데생과 색채

 

데생 보다 색채를 중시하여(le primat de la couleur sur le dessin) 결국 모든 형태가 해체되고 색채만이 남는 그림은 인상파를 거쳐 바로 현대의 추상화가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엇습니다. 세잔느는 이 소설 이야기를 듣고 프레노페르가 "자신의 정신적 선구자이고 자신을 예견한 사람"이라며 눈물을 흘렸고(Emile Bernard, Souvenirs sur Paul Cezanne, Mercure de France, 1925), 피카소는 소설 속의 거리와 똑같은 그랑 조귀스탱 가()(rue des Grands-Augustins)에 살면서 발자크 작품집의 삽화를 위해 기꺼이 동판화와 목판화를 제작하였습니다.

 

데생과 색채를 대비시키는 것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17세기까지 이어지던 두 기법의 대립관계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인 15-16세기에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등이 대표하는 독일 유파는 데생과 선을 중시했으며,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1490-1576)와 지오르지오네(Giorgione, 1477-1510), 혹은 베로네즈(Paolo Veronese, 1528-1588)가 대표하는 베니스 유파는 빛과 색깔을 중시했습니다. 포르뷔스가 두 유파를 어정쩡하게 모방한 것을 비판하며 프레노페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이 두 체계, 즉 데생과 색채중에서 하나를 정하지 못한채 어정쩡한 상태에 있군. 독일 거장들의 꼼꼼한 냉정함, 정확한 반듯함과 이탈리아 화가들의 행복한 풍요로움과 눈부신 열정 사이에서 말이야. 당신은 한스 홀바인과 티치아노를, 또는 알브레히트 뒤러와 파올로 베로내즈를 동시에 모방하려 하고 있어. 물론 훌륭한 야심이지!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건조함의 냉혹한 매력도, 사람의 눈을 속이는 명암법의 마술도 얻지 못했어. 이 부분은 마치 허약한 거푸집을 망가뜨리는 뜨거운 청동액처럼 티치아노의 황금빛이 뒤러의 허약한 윤곽선을 지워 버렸군. 또 저기는 베니스 유파의 빛나는 색의 범람을 선()이 가두고 막아 버렸어. 당신 그림의 인물은 완벽하게 데생이 되지도 않았고, 완벽하게 채색되지도 않았어."(p.42)

 

위의 예문 첫째 줄의 '데생과 색채'le dessin et le couleur이며, 제일 마지막 문장은 Ta figure n'est ni parfaitement dessinee, ni parfaitement peinte입니다. 불어에서 dessiner'그리다'이고, peindre'그리다'이지만, 여기서는 dessiner'선으로 그리기', peindre'색깔을 칠하기'의 뜻으로 쓰여, 결국 데생을 중시하는 독일 유파와 빛과 색채를 중시하는 베니스 유파를 의미하게 됩니다.

 

완벽의 극단까지 밀고 가면 결국 소기의 목적이 파괴되고 마는 것이 사물의 변증법적인 이치입니다. 아름다운 여인을 그 실제의 모습과 가장 접근하도록 모방(미메시스)의 작업을 극단으로 밀고가자 마지막에 화폭 위에는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색깔과 색조와 채색의 농담(濃淡)과 형체 없는 안개만이 혼돈스럽게 있고"(ce chaos de couleurs, de tons, de nuances indecises, espece de brouillard sans forme; p.66) "마구 칠해 놓은 색깔들이 수많은 이상한 선()들 안에 들어있게"(des couleurs confusement amassees et contenues par une multitude de lignes bizarres, p.66)되었습니다.

 

발자크가 이처럼 형태가 사라지고 색채만 남은 그림을 실패라고 생각한 것은 어쩔수 없는 시대적 한계입니다. 데생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주제도 사라지고 아예 모든 재현의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현대 미술의 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발자크가 근대 미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해도 그것은 물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발자크 자신은 프레노페르가 지나친 추상적 사고에 의해 창작 행위의 불능 상태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이 작품을 단순한 '철학적 분석'의 범주 안에 집어 넣었습니다.

 

발자크가 보기에 프레노페르의 잘못은 자신의 예술을 구체적 사물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대신 창조 행위의 조건을 성찰하는 일에만 몰두한것입니다. 머리 속의 추상적 관념이 구체적 물질로 형상화된 것이 예술작품이라는 것은 헤겔의 '아름다운 가상(假象)'이라는 이론 속에 이미 요약되어 있습니다. 머리 속의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가시적 물체로 형상화되어야만 예술작품이 됩니다. 관념이 훌륭하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소설, 혹은 좋은 회화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관념이 승()하고 형상화의 작업이 약하면 오히려 작품은 보잘 것 없는 것이 되기 쉽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좋은 작품에 방해가 되기까지 합니다. 프레노페르가 토로했듯이 너무 많은 지식은 무지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의 부정에 이르기"(le trop de science, de meme que l'ignorance, arrive a une negation. p.52)때문입니다.

 

프레노페르의 실패는 이와같은 관념과 창조행위의 불일치, 즉 머리 속에서 상상된 작품과 실제 만들어진 작품 사이의 거리에서 기인합니다. 예술가는 창작이라는 작업을 통해 관념과 실행을 종합해야 하는데 그는 머리 속의 생각에만 골몰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화가이기 보다는 차라리 시인에 가까운"(Il est encore plus poete que peintre. p.67)것입니다. 화가는 명상 보다는 붓을 들고 화폭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발자크는 포르뷔스의 입을 빌어 말합니다. "작업을 하시오! 명상을 하더라도 화가는 붓을 손에 들고 해야 합니다."(Travaillez! les peintres ne doivent mediter que les brosses a la main. p.55), 프레노페르의 비극 앞에서 젊은 화가 지망생인 푸생에게 포르뷔스가 하는 충고의 말입니다.

 

여하튼 1830년대의 소설(소설의 시대배경은 루이 13세 시대의 17세기이지만)에서 추상화의 묘사를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데생과 색채의 싸움은 17세기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19세기초 이 소설이 탄생하던 시기, 소설 밖의 현실에서도 두 기법의 주도권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앵그르와 들라크루와의 대립이 그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앵그르를 데생화가(dessinateur), 들라크루와를 색채화가(coloriste)로 부르면서, 앵그르가 너무 "회색으로 그린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니까 앵그르는 독일 유파를 물려 받았고, 들라크루와는 베니스 유파를 물려 받은것입니다. 발자크는 이 두 유파의 화해를 꿈꾸었던 듯 합니다. 결국 프레노페르의 실패는 이 불가능한 종합의 결과인듯 합니다. 적어도 대상의 모방을 목적으로 하는 구상 회화에서는 불가능한것이지요. 이 소설을 재현의 포기라는 현대의 미학 개념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래서 설득력을 갖습니다. 프레노페르를 절망과 죽음으로 몰고간 그 혼돈스러운 색채의 그림은 20세기의 대표적 미국 화가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을 연상시킵니다. 20세기의 화가는 절망하여 죽기는커녕 오히려 모든 것을 해체하고, 혼돈스러운 색깔을 화폭 위에 덧칠하는 것으로 미학적인 쾌감을 느낍니다.

 

이미 <파시노 카느>에서 발자크는 예술가가 통찰력(don de seconde vue)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써 예술 작품을 자연의 재현으로 간주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사물의 표피적 현상만을 보는 것이 일차적 시각이라면 이차적 시각(seconde vue)은 겉모습의 뒤에 숨겨져 있는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술가는 자기가 관찰하는 외부의 대상을 모방하지 않고, 그것을 상상의 시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존재들의 외관을 포착해야 하지만 그것은 "삶의 우연한 결과들에 불과할뿐, 삶 그 자체는 아니다"(Les effets! les effets! mais ils sont les accidents de la vie, et non la vie. p.43)라고 프레노페르도 말하고 있습니다.

 

또 이 작품은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뇌 어린 성찰이기도 합니다. 다른 그림들은 그냥 노출되어 있는데 왜 <La Belle Noiseuse>앞에는 녹색 사지(serge) 커튼이 드리워져 있을까요? 그것은 예술의 신비를 드러내주는 상징적 장치입니다. 작가는 진정한 예술이란 현실의 세계를 뛰어넘는 '비밀과 몽환과 격정'(l'art avec ses secrets, ses fougues et ses reveries, p.53)이며, 인생은 덧없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것입니다. "사랑의 과실(果實)은 곧 없어지지만 예술의 과실은 영원하다."(Les fruits de l'amour passent vite, ceux de l'art sont immortels. p.63)라는 포르뷔스의 말도 그것입니다.

 

우리는 또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에서 불가능한 미()에 대한 예술가의 절망감(Je suis donc un imbecile, un fou! je n'ai donc ni talent, ni capacite, p.68)과 예술 작업의 구도적인 자세를 볼수 있습니다. "서너번의 붓질과 한 번의 푸르스름한 덧칠로 성녀의 머리 주위에 청량한 공기를 감돌게 하는"(vois-tu comme au moyen de trois ou quatre touches et d'un petit glacis bleuatre, on pouvait faire circuler l'air autour de la tete de cette pauvre sainte, p.47) 프레노페르의 끈질긴 작업은 어쩌면 끊임없이 원고를 수정하며 거기에 투명한 덧칠을 하는 발자크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요?

 

정통 왕당파의 보수적 세계관을 갖고 있으면서 실제로 작품은 신흥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그림으로써 진보적 역사 인식에 기여했듯이 발자크는 미학적인 면에서도 자기도 모르게 먼 앞날의 미래를 예고한 선구자였습니다.

 

이 소설은 발자크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또 가장 많이 연구되는 작품중의 하나입니다. 1960년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에 관해 미학적 논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중에는 Michel Leiris, Hubert Damisch, Michel Serres, Georges Didi-Huberman등이 있습니다. 1991년에는 자크 리베트 감독이 <La Belle Noiseuse>(도발적인 미녀)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하기도 했습니다. 질레트(영화에서는 마리안느) 역은 에마뉘엘 베아르가 맡았고, 프레노페르 역은 미셸 피콜리가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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