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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해설]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 오규원 -

by 휴리스틱31 2022.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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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 오규원 -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우의적, 냉소적, 비판적

 표현 : 추상적인 대상(죽음)에 인격을 부여한 우의적 수법의 사용

              자문자답하는 형식을 통해 냉소적인 느낌을 전해 줌.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죽음 →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상징

                  추상화된 이름으로, 현대인의 '의식의 죽음'을 풍자하기 위해 설정된 인물

    * 걷기가 귀찮아서 → 일시적인 편안함, 극도의 귀찮음에 젖어 사는 모습

    * 나는 할 일이 많아 → 죽음이 택시를 탄 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이유와 변명으로 둘러대는 말

    * '생각'과 '한 잔' 중에서 '한 잔'을 선택하는 죽음 → 현실적 어려움이나 고민을 피하려는 모습

    *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 생각하고 고민하기를 미룬 죽음이 둘러대는 핑계

    *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 그만두기로 했다.

                   → 생각 자체를 귀찮아하는 모습, 모든 일들을 귀찮아하는 모습

    * TV를 보다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함.

       신문에서 '건강이 제일이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수긍함.

               → 의식의 주체성을 망각한 현대인의 자화상

 

 제재 : 무기력한 현대인의 삶

 주제 무기력하고 개인주의적인 현대인의 삶에 대한 비판

 

 

[시상의 흐름(짜임)]

◆ 1~2연 : 몸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삶

◆ 3~5연 : 현실의 어려움을 회피하는 삶

◆     6연 :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는 삶

◆ 7~8연 : 개인주의에 빠져 사는 삶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에서 '죽음'은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설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처럼 행동과 생각을 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에게 죽음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장치는 먼저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되고 있다. 독자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시의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죽음'은 귀찮다는 이유로 몸이 편한 일만 하려 하고, 고민이나 생각조차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변명과 핑계만 늘어놓으며 하지 않는다. 여행을 하겠다는 계획조차도 스스로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이나 신문 같은 대중매체가 주입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로 제시된다. 이렇게 볼 때 '죽음'은 바로 '의식의 죽음'에 다름 아니다. 이 시는 이렇게 죽어 버린 의식으로 당장 편한 것만 찾으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있다.

 

 

우화란, 인간 이외의 동물 또는 식물에 인간의 생활 감정을 부여하여 사람과 꼭 같이 행동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빚는 유머 속에 교훈을 나타내려고 하는 이야기를 말한다. 그 의도하는 바는 이야기를 빌려 인간의 약점을 풍자하고 처세의 길을 암시하려는 데 있다. 이 시의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시인은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대상에 인격을 부여하여 그의 하루를 보여줌으로써 인간 사회, 즉 현대인의 부정적인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우화라는 양식이 독자에게 일정한 교훈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시인은 비판적 주체를 통해 죽음의 의미를 전달하려 한다. 이 시에서 주인공은 죽음이다. 그 죽음은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의 주체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자체가 이미 죽음과 같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죽음'은 사람의 이름이다. 과연 시시한 도시에서 시시한 생각을 하면서 시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썩 어울린다. 몸의 편안함을 쫓으며 못난 이유를 같은 방식으로 합리화하고, 책임을 미루고 결국 이를 잊고 마는 시시한 삶이나, 대중매체에 판단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불구적 삶의 모습을 시인은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걷기보다는 택시 타기를 즐기고, 일에 매달려 끙끙대기보다는 놀이의 유혹이 좋고, 이윽고 달콤한 안주(安住)의 목소리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에서 '죽음'이란 이름의 소유자가 보이는 이와 같은 행태는 우리들의 그것과 거의 같다. 짧은 순간의 안일과 평온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핑계를 생산해 내는 것인가. 언제나 더 큰 것에서 이유를 빌려오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이기심일 뿐이다.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젊은 날의 이상과 기개를 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세상은 맑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부단히 젊은 날의 꿈과 이상을 내려 놓기를 유혹하고 변명과 핑계와 합리화의 지침들을 주입한다. 원칙과 원리를 영원히 교과서 속에 감금하고 스스로 흔쾌히 편법과 야합의 전령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다름 아닌 '죽음'이다. 죽음이 아닌 진정한 삶의 세상을 꿈꾸기에는 너무 늦은 것일까. 아예 불가능한 것일까. 시인은 자신의 생각을 명쾌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 시적 인식의 예리함과 정연함, 그리고 냉철함을 기억하도록 하자.

 <해설:이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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