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귀(志鬼) 설화 - 대동운부군옥-
본 문
신라 선덕 여왕 때에 지귀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지귀는 활리역(活里驛, 신라의 지명) 사람인데, 하루는 서라벌에 나왔다가 지나가는 선덕여왕을 보았다. 그런데 여왕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단순호치) 그는 단번에 여왕을 사모하게 되었다.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맏딸로 그 성품이 인자하고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용모가 아르다워서 모든 백성들로부터 칭송과 찬사를 다 받았다.(선덕여왕의 용모와 품성을 직접적으로 서술함.)
그래서 여왕이 한 번 행차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여왕을 보려고 거리를 온통 메꾸었다. 지귀도 그러한 사람들 틈에서 여왕을 한 번 본 뒤에는 여왕이 너무 아름다워서 혼자 여왕을 사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선덕여왕을 부르다가 그만 미쳐 버리고 말았다.(현실적 신분 한계에 부딪혀 미쳐 버림)
" 아름다운 여왕이여, 나의 사랑하는 선덕여왕이여 !"
지귀는 거리로 뛰어다니며 이렇게 외쳐 댔다. 이를 본 관리들은 지귀가 지껄이는 소리를 여왕이 들을까봐 걱정이었다.(천한 신분에 여왕을 사모한다는 불경한 말을 하므로) 그래서 관리들은 지귀를 붙잡아다가 매질을 하며 야단을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지귀의 열정적 사랑)
* 선덕 여왕을 사모하는 지귀(발단)
어느날 여왕이 행차를 하게 되었다. 그때 어느 골목에서 지귀가 선덕 여왕을 부르면서 나오다가 사람들에게 붙들렸다. 이를 본 여왕은 뒤에 있는 관리에게 물었다. / "대체 무슨 일이냐?" / " 미친 사람이 여왕님 앞으로 뛰어나오다가 다른 사람들한테 붙들려서 그럽니다." / " 왜 나한테 온다는데 붙잡았느냐? " / " 아뢰옵기 황송합니다만, 저 사람은 지귀라고 하는 미친 사람인데 여왕님을 사모하고 있다고 합니다."
관리는 큰 죄나 진 사람처럼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 고마운 일이로구나!" (지귀의 사랑을 이해하고 너그럽게 받아주는 여왕의 넉넉한 덕성이 엿보임.)
여왕은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하고는, 지귀에게 자기를 따라오도록 관리에게 말한 다음,(포용과 이해-선덕 영왕의 왕으로서의 면모 및 덕성을 드러냄) 절을 향하여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한편 여왕의 명령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지귀는 너무도 기뻐서 춤을 덩실덩실 추며 여왕의 행렬을 뒤따랐다.
선덕여왕은 절에 이르러 부처님에게 불공을 올렸다. 그러는 동안 지귀는 절 앞에 있는 탑 아래에 앉아서 여왕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여왕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지귀는 지루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안타깝고 초조했다. 그러다가 심신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지귀는 그 자리에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 선덕 여왕의 포용과 이해(전개)
여왕은 불공을 마치고 나오다가 탑 아래에 잠들어 있는 지귀를 보았다. 여왕은 그가 가엾다는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팔목에 감았던 금팔찌(지귀의 사랑에 대한 여왕의 연민의 징표)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 위에 놓은 다음 발길을 옮기었다.
[여왕이 지나간 뒤에 비로소 잠이 깬 지귀는 가슴 위에 놓인 여왕의 금팔찌를 보고는 놀랐다. 그는 여왕의 금팔찌를 가슴에 꼭 껴안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러자 그 기쁨은 다시 불씨가 되어 가슴 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그러다가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는가 싶더니 이내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가슴 속에 있는 불길은 몸 밖으로 터져 나와 지귀를 어느새 새빨간 불덩어리로 만들고 말았다.(지귀의 여왕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여왕의 배려에 대한 감사, 또한 여왕을 기다리지 못하고 잠든 것에 대한 후회가 복합적으로 마음속에서 일어나 불귀신이 된 것임) 처음에는 가슴이 타더니 다음에는 머리와 팔다리로 옮겨져서 마치 기름이 묻은 솜뭉치처럼 활활 타올랐다. 지귀는 있는 힘을 다하여 탑을 잡고 일어서는데 불길은 탑으로 옮겨져서 이내 탑도 불기둥에 휩싸였다.(역사적 사실인 '영묘사 화재 사건'과 연관) 지귀는 꺼져가는 숨을 내쉬며 멀리 사라지고 있는 여왕을 따라가려고 허위적허위적 걸어가는데, 지귀 몸에 있던 불기운은 거리에까지 퍼져서 온 거리가 불바다를 이루었다.](점층적 전개(사랑과 기쁨→지귀를 불태움→탑을 불태움→온 거리를 불태움)로 나타난 이 화재는 역사적 사실인 '영묘사 화재 사건'과 연관됨)
* 불귀신이 된 지귀(절정)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지귀는 불귀신으로 변하여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불귀신을 두려워하게 되었는데, 이때 선덕여왕은 불귀신을 쫓는 주문을 지어 백성들에게 내놓았다.(화재 예방 풍속의 내력)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나, 志鬼心中火
몸이 불로 변하였다. 燒身變火神
바다에 멀리 쫓아서 流移滄海外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不見不相親 (주술적 성격)
백성들은 선덕여왕이 지어 준 주문을 써서 대문에 붙이었다. 그랬더니 비로소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여왕이 신이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 줌)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사람들은 불귀신을 물리치는 주문을 쓰게 되었는데,(화재를 막아 보려는 의식이 반영된 주술적 설화임을 알게 함) 이는 불귀신이 된 지귀가 선덕여왕의 뜻만 좇기 때문이다.(불귀신이 되어서도 선덕 여왕만을 좇ㄴ즌 지귀의 맹목적 사랑)
* 선덕 여왕의 주문을 이용한 화재 예방(결말)
작품 정리
◆ 해 설
이 이야기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화신(火神)의 내력과 그에 연유하는 화재를 예방하는 풍속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울러 지귀의 열정적 순애와, 그리고 그 고뇌를 받아들이는 여왕의 넉넉한 품성이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지귀는 미천한 사람이다. 이 미천한 신분의 사람이 아름다운 선덕 여왕의 용모에 반하여 상사병이 든다. 현격한 신분의 차이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알고, 그는 미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현격한 신분의 차이가 나는 관계 속의 사랑을 설정한 것은 신분을 뛰어넘는 인간적 가치를 추구한 의식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에 맹목적인 지귀가 왕에게 접근하려고 할 때, 그를 가로막는 사람들은 인위적인 질서인 신분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왕은 지귀의 마음 속에 간직한 고귀한 사랑을 알고, 자신을 따라오도록 한다. 여왕의 넉넉한 인품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인위적인 질서 또한 인간 관계 속에서 나타난 필연적인 산물이다. 그것이 깨뜨려질 때, 인간 관계 또한 혼돈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지순의 사랑을 인정하되, 인간적인 질서를 중시하는 의식이 '지귀의 잠'으로 표현되고 있다. 지귀가 잠들지 않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을 뛰어 넘은 곳에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비극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잠이 든 지귀의 가슴에 여왕은 팔찌를 놓고 간다. 그 팔찌는 지귀의 사랑에 순응하는 선덕 여왕의 신물(信物)이라고 할 수 있다. 신분의 차이를 뛰어 넘어 인간의 정이 오고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성의 확인이라는 사실 앞에서 지귀는 자신의 사랑을 마음껏 토로하였고,그것이 불로 형상화되었다.
◆ 요점 정리
1. 갈래 : 설화(서사), 민담
2. 성격 : 귀신 지괴 설화(鬼神志怪說話)
3. 구성 :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의 4단 구성
♠ 발단 - 지귀의 선덕여왕에 대한 사모
♠ 전개 - 선덕여왕과의 만남과 헤어짐
♠ 절정 - 화신으로의 변모
♠ 결말 - 주문에 의한 화재의 예방
4. 별칭 : 심화요탑(心火繞塔)
5. 특징
♠ 화신의 내력과 그에 관련된 풍속이 제시됨.
♠ 생과 사, 여왕과 평민, 여자와 남자, 물과 불의 대립 관계가 제시됨.
♠ 한을 소재로 하여 '맺힘'과 '풀림'이 제시됨.
♠ 신라 남성들의 자유분방한 애정 표현을 엿볼 수 있음.
6. 주제 : 지귀의 사랑과 선덕 여왕의 넉넉한 품성. 화신(火神)의 내력
7. 의의
① 우리나라 귀신 지괴 설화의 효시로서 화신의 내력과 그에 연유하는 풍속을 나타냄.
② 지귀의 뜨겁고 순수한 사랑과 그 고뇌를 받아들이는 여왕의 너그러운 품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냄.
③ 신라인의 적극적인 애정관과 함께 여왕의 모성적인 통치자로서의 능력이 잘 나타남.
8. 출전 : 박인량의 <수이전>에 수록되었으나, 지금은 <대동운부군옥>에 전재되어 전함.
◆ 상징적 의미의 소재
* 잠 → 지귀가 선덕 여왕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장애 요인. 지귀의 지순한 사랑은 인정하지만 신분적 질서를 중시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반영된 소재임.
* 금팔찌 → 지귀의 사랑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선덕 여왕의 신물(信物). 신분적 한계를 넘어 정이 오고가는 모습을 상징함.
* 불 → 지귀의 열정적 사랑을 의미. 인간의 고귀한 가치인 사랑이 부정적인 것으로 변하여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파괴할 수 있음을 보여줌.
◆ 한풀이 문학과 주술성
지귀설화, 즉 심화요탑은 선덕여왕이 주문을 지어 불귀신의 원한을 달래어 물리치게 된 연유를 지닌 풀이기능의 설화문학으로, 화신의 내력과 그에 연유하는 풍속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귀설화의 불귀신의 한에서 보여지듯 한(恨)을 소재로 하는 전통은 우리 문학사에서 신라시대를 비롯하여 고려와 조선조 시대를 거치면서 오늘에까지 이어져 왔으며, 여기에는 주술성을 동반한 풀이기능이 곁들여져 나타나고 있다. 신라 향가 중에서도 <혜성가>,<도솔가>,<처용가>를 보면 풀이의 기능이 적지 않게 내재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서사 무가인 <성조풀이>, <바리데기> 등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 '불과 사랑의 관계'
불이 사랑과 결합하고 성적인 환기 작용을 한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다. 불은 인간 생활에서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인류의 문화를 말살하는 부정적인 면도 있다. 사랑도 고귀한 가치로서의 사랑이 있는가 하면,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도 파멸시키는 사랑이 있다. 불은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었을 때에 긍정적인 의미를 붙일 수 있는 것처럼 소중한 사랑도 절제되었을 때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불과 사랑은 외연과 내포에서 동일한 목표를 향하고 있다. 절제된 불의 사용과 절제된 사랑, 화재와 무절제한 사랑의 방종, 그리고 자신을 태우며 연소하는 불과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고귀한 사랑을 성취하는 것과 같이 불과 사랑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이 설화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화재를 막기 위한 풍속을 사랑과 연관시켜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근원설화로서 <술파가 설화>와의 비교
<대지도론>이라는 불교 설화집에 '술파가 설화'가 전하는데 그 기본 구조가 '지귀 설화'와 유사하다. <대지도론>이 선덕 여왕 이전에 수입된 서적이므로 '지귀 설화'가 '술파가 설화'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술파가 설화 | 지귀 설화 |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 어부 술파가의 여왕에 대한 사랑 | 천한 지귀의 선덕 여왕에 대한 사랑 |
만남의 불발 | 만남의 순간 천신의 조화로 잠이 듦 | 만남의 순간 기다림에 지쳐 잠이 듦 |
여왕의 연민의 징표 | 잠든 술파가에게 목걸이를 남기고 감 | 잠든 지귀에게 금팔찌를 놓고 감 |
사랑과 원한으로 불이 됨. | 술파가가 몸에서 난 불에 타서 죽음 | 지귀가 화신이 됨 |
◆ 벽사설화
벽사란 사악한 기운을 막고 잡귀나 마귀 등을 쫓는 것으로 벽사 관념과 현세 복을 누리고자 하는 의식이다. 불교와 도교 등과 융합하여 독특한 민간 신앙을 형성했으며 이런 배경으로 조상들은 신령스런 힘이 있다고 생각되는 물건을 몸에 지니거나 부적을 써서 집안에 붙여 넣거나 벽사용 그림을 집안에 걸어 놓아 액을 막고 복을 누리길 바란다. 또 다른 벽사설화의 대표는 '처용 설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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