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 -권호문-
[현대어 풀이]
- 평생에 원하는 것이 충과 효뿐이로다. / 이 두 일 아니하면 짐승과 다르겠는가? / 마음에 하고자 하여 십년을 허둥대노라.
- 견줌이 이렇다가 공명이 늦었어라. / 스승을 찾아 사방을 헤매어도 이루지 못할까 하는 뜻을 / 세월이 물 흐르듯 하니 못 이룰까 하여라.
- 비록 못 이루어도 자연이 좋으니라. / 무심한 새와 물고기는 절로 한가하였으니 / 머지않아 세상의 일을 잊고 너(물고기와 새)를 좇으려 하노라.
- 자연에 놀려 하니 임금을 저버리겠고 / 임금을 섬기나 하니 즐기는 바에 어긋나구나. / 홀로 갈림길에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 어쩌랴 이러구러 이 몸이 어찌할꼬. / 도를 행하는 것도 어렵고 은둔처도 정하지 못했구나. / 언제나 이 뜻 결단하여 내가 즐거워하는 바를 좇을 것인가.
- 하려하려 하되 이 뜻을 못 하였네. / 이 뜻을 하면 지극한 즐거움이 있느니라. / 우습다! 엊그제 아니 하던 일을 누가 옳다 하던고.
- 그만두려 하되 이 일 그만두기 어렵다. / 이 일 그만두면 내 몸이 한가하다. / 어쩌랴! 엊그제 하던 일이 다 그른 줄 알았네.
- 나아가면 임금 섬겨 백성에 은덕 미치고 들어오면 달빛 아래 고기 낚고 밭을 가네. / 총명하고 밝은 군자는 이것(은둔생활)을 즐기나니 / 하물며 부귀는 위태하니 가난한 삶을 살아가리.
- 청산이 시냇가에 있고 시내 위에 내(안개) 낀 마을이라. / 초당의 마음을 백구(흰 갈매기)인들 제 알겠는가? / 대살 창문 고요한 밤 달 밝은데 한 대의 거문고가 있느니라.
- 빈궁과 영달(신분이 높고 귀하게 됨)이 뜬구름처럼 보여 세상사 잊어 두고 / 좋은 산 아름다운 물에 노는 뜻을 / 원숭이와 학(풍요롭과 부귀한 생활을 상징)이 내 벗 아니거늘 어느 분이 알아줄꼬?
- 바람은 절로 맑고 달은 절로 밝다. / 대나무 정원 솔기둥에 한 점 먼지 없으니 / 거문고 만 권이나 되는 많은 책이 더욱 맑고 깨끗하여라.
- 비에 씻긴 달이 구름을 뚫고 소나무 끝에 날아올라 / 충분한(가득찬) 맑은 빛이 푸른 시냇물에 드리워 있거늘 / 어디선가 무리 잃은 갈매기는 나를 좇아 오는가?
- 날이 저물거늘 도무지 할 일이 없어 / 소나무 문 걸어 닫고 달빛 아래에 누었으니 / 세상에 티끌 같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다.
- 달빛과 냇물 소리 뒤섞여 빈 정자로 오거늘 / 달빛은 두 눈으로 보고 물소리는 두 귀로 들어 / 들으며 보며 하니 모두가 깨끗하고 밝구나.
- 주색을 좇자 하니 문사(글 공부하는 선비)의 일이 아니고 / 부귀를 구하고자 하니 뜻이 가지 않네. / 두어라 어부 목동이 되어 적막한 물가에 놀자.
-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감에도 도가 있으니 버리면 구태여 구하랴. / 산 남쪽 물 북쪽(서울)에 병들고 늙은 나를 / 뉘라서 나라 구할 보물 가졌다고 오라 말라 하느냐?
- 성현이 가신 길이 만고에 한 가지라. / 숨거나 나아가거나 도가 어찌 다르리. / 한 가지 도(道)이오 다르지 않으니 아무 덴들 어떠하리.
- 자갈 깔린 물가(낚시터)에 비 개거늘 푸른 이끼를 돛을 삼아 / 고기를 헤아리며 낚을 뜻을 어이하리. / 초승달이 은낚시 되어 푸른 물(푸른 산)에 잠겼구나.
- 강가에 누워서 저 강을 보는 뜻은 / 지나가는 것이 이와 같으니 백 년인들 길겠느냐 / 십 년 전 속세 집착이 얼음 녹듯 하는구나.
[이해와 감상]
조선 선조때의 학자인 권호문의 연시조(19수)로, 그의 문집 <송암별집>에 수록되어 있다. 각 연은 독자적인 주제를 개별적으로 노래한 것이 아니라, 의미상의 맥락을 가지고 구조적으로 짜여 있어 시상과 주제의 전개 및 흐름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벼슬길과 은거생활의 갈등에서부터 물외하인(物外閑人)으로서 강호의 풍류를 즐기며 살아가는 담담한 심회를 술회하고, 현실세계의 티끌을 초월한 자신의 모습을 마지막 1수에 덧보태어 끝맺었다. 작품 전체가 현실세계로부터 일탈하여 강호자연 속으로 침잠하기까지의 과정을 시간적 계기에 의하여 단계적 · 논리적으로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즉 1연에서는 작자의 마음이 현실세계에 이끌려 마음의 방황을 거듭하는 것으로 시작된 후, 제4 · 5연을 전후하여 현실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과 강호생활을 즐기자는 마음 사이의 갈등을 겪은 후, 제9~15연에 이르러서는 자연 속에서 안분자족하는 삶을 술회하였다. 이어서 자연 속의 삶의 가치관을 확고히 한 후, 마지막 제19연에서 첫 연에서의 현세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해소한 듯이 선언했지만, 이 작품이 현실과의 끈끈한 맥에서 출발하여 현실과의 관련성에서 끝맺는 구조를 취하고 있음은, 작자의 본심이 강호에 있음이 아니라 현세에 있음을 반증한다. 즉, 현실의 근심을 잊기 위하여 처사적 삶을 선택하지만, 무위자연의 노장적 삶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관념으로 허구화된 자연의 공간 속에서 현세의 불평과 시름을 치유하고자 할 뿐이다. 그것은 현실이 아무리 불만스러워도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사대부적 은일의 자세 때문이다. 제8연에 "출하면 치군택민 처하면 조월경운"이라 노래한 것에서도 이 점은 확인되며, 이러한 현세 긍정의 끈끈한 맥은 다음과 같은 심적 갈등의 내면표출이라는 문학성을 낳는다. "강호에 놀자 하니 성주를 바리겠고 / 성주를 섬기자 하니 소락에 어기어라 / 호온자 기로에 서서 갈 데 몰라 하노라."(제4연) 실제로 작자는 현실의 불평을 바탕으로 하여 노래를 지었음을 밝힌 바 있다.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처사로 살았지만 현실을 외면한 채 은둔하는 자세는 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노래는 강호가도의 후기 모습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서, 자연이라는 공간을 문학 속으로 끌어들여 작자의 실존적 모습을 제시한 작품으로 문학사적 의미를 가진다.
[정 리]
◆ 성격 : 유교적, 교훈적, 은일적, 전원적
◆ 제재 : 충효와 강호의 삶
◆ 구성
<1> 충효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
<2> 등용의 좌절과 안타까움
<3> 속세를 잊고 자연 속에 살아가고자 함.
<4> 벼슬에 대한 욕망과 자연 사이에서의 갈등
<5> 자신이 즐기는 일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
<6>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함에 대한 자조
<7> 세속적인 출세에 대한 내적 갈등
<8> 자연 속에 은거하는 즐거움
<9> 고요한 밤의 정취
<10> 세상사 잊고 자연 속에 사는 뜻
<11>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는 즐거움과 청빈한 삶
<12> 비 갠 밤에 자연과 즐기는 물아일체의 경지
<13> 속세를 잊고 살아가는 삶
<14> 정자에서 느낀 자연의 아름다움
<15> 주색과 부귀를 멀리하고 자연속에 노닒.
<16> 벼슬에서 물러나는 도
<17> 은둔하거나 벼슬길에 나아가거나 한 가지 도(道)임을 인식
<18> 낚시하며 바라 본 달밤의 정경
<19> 속세의 집착에서 벗어남.
◆ 주제
* 유교적 깨달음의 실천과 안빈낙도의 소망
* 유교적인 충효의 실천과 자연속의 삶 사이에서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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