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1957)
-김성한-
● 줄거리
그믐밤이었다. 흐려서 더구나 캄캄한 밤이었다. 53고지 전면을 끼고 돌아간 강에 얼어붙은 얼음판을 따라 일렬 종대로 모래를 뿌리면서 조심성 있게 전진하는 제2분대원들은 온 신경을 두 발에 쏟으면서 숨을 죽였다.
53고지를 공격해서 포로를 잡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한 제1 소대의 제1분대와 제3분대는 이 나지막한 고지의 측면으로 돌고, 제2분대는 정면으로 접근하는 길이었다. 이따금씩 찬바람이 귀를 에이고 지나갔다. 부분대장 9번 김경석 일등병은 척후로 선두를 전진하였다. 전투모에 담은 모래가 자꾸만 줄어가는데 고지 전면 비탈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앞을 응시하고 가끔 뒤로 분대장에게 신호를 보내면서 나가던 경석은 주춤하고 엎드렸으나 사람이 아니라 바위였다. 바위에 기대어 분대장에게 신호를 보내고 다시 일어섰다.
무심코 첫발을 내딛었으나 모래를 뿌리지 않아 뒷골을 빙판에 찧으면서 자빠졌다. 자빠지는 순간, 소총이 얼음판에 뒹굴고 옆구리에 찼던 물통이 땡그랑 소리를 내고 말았다. 빙판에서 몸을 돌리고 상반신을 내밀어 얼른 소총을 잡았다. 바위 밑으로 다가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 가만 있으라는 신호가 연달아 왔다. 고지 위에서 기침소리가 단 한 번 들렸다. 모든 것은 이제 실패라고 생각하며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초조한 가운데 분대장의 신호만 기다렸다.
부산 광복동 네거리, 에덴 다방 앞에서 담배장수를 하다가 천막에 돌아온 혜란은 곤히 들었던 잠이 깨었다. 꿈에 경석을 보았다. 한 달 전에 편지가 온 후로 깜깜 소식이 없는 그였다. 대대 본부에서 서무를 보라는 것을 거절하고 그냥 소총소대에 남아 있노라는 사연이었다. 꿈에 보는 경석은 곧 대장이 되노라고 전에 없이 싱글벙글하였다. 꿈은 반대라는데 무슨 불행이 일어난 것이 아닌지 혜란은 걱정하며 돌아누웠다.
능선 30미터 전방에 분대원 9명은 딱 엎드렸다. 고지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분대장의 명령으로 경석과 교대하여 능선에 올라갔던 6번 이명룡 일등병이 돌아와 교통호와 산병호까지 보았으나 아무도 없더라는 보고를 하였다. 입을 꼭 다문 20남짓한 분대장은 잠자코 있다가 무전으로 오피에 연락하고 전진 신호를 내렸다.
대형을 바꾸어 일렬 횡대로 침묵의 전진은 계속되었다. 교통호와 산병호는 비어 있었다. 분대장은 계속 전진을 신호 등으로 명령하였다. 20미터도 못 가서 전방에서는 모든 화기가 불을 토하였다. 아홉 명은 자동적으로 푹 엎드렸다. 측면으로 돈 옆의 분대원의 비명이 들려왔다. 엎드렸던 분대장은 후퇴를 명령하였다. 이번에는 뒤에서도 일제 사격이 왔다. 아홉 명은 분대장의 옆으로 머리를 모았다. 무전으로 지원을 요청한 분대장은 말이 없었다. 우군의 야포 사격이 시작되자 분대장은 얼굴을 번쩍 들고 빠져나갈 사람은 나가고 자신의 뒤를 따를 사람은 일렬 종대로 따라오라고 한 뒤 앞장서서 전방의 적진을 향해 포복을 시작하였다. 사실 그런 상황을 빠져나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여덟 명은 말없이 분대장을 따랐다. 부분대장 경석은 맨 뒤를 맡았다.
사이사이 관목이 들어선 이 조그만 잡초 고원, 전방 후방, 그리고 공중에서 총포탄을 쏟아 붓는 가운데를 아홉 명의 젊은 생명은 적진을 향해 필사의 포복을 하였다. 이미 생도 없고 사도 없었다. 경석은 충실히 종대의 뒤를 따랐다. 백여 미터쯤 가서 분대장은 정지 신호를 내리고 우묵한 곳에 재빨리 내려서면서 얼른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빈 산병호에 내려선 아홉 명은 모두 무사하였다. 분대장은 상황을 설명하고 명령을 내렸다. 경석은 명룡과 함께 교통호를 따라 좌로 5미터 가량 떨어진 산병호로 다가가 앞을 향해서 무턱대고 쏘는 적의 잔등을 총검을 찔렀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니 다시 명령이 내려졌다. 조를 나누어 적들이 파놓은 굴을 따라 몰래 뒤로 접근하여 적을 죽이고 분대장과 합류하였다. 가는 도중 한 명이 쓰러졌다. 강으로 쓰러진 사람을 업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꿈자리가 사나운지라 혜란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기약 없이 기다리라는 것은 기다리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오늘밤같이 추운 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바람이었다. 입대를 지원하고 돌아온 경석을 혜란은 한사코 말렸다. 나라의 인재인 당신은 개죽음을 당하면 안 된다며 애원하고 가지 말라고 달려들기도 하였으나 경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혜란은 남편을 부둥켜안고 밤새도록 울었다. 경석은 일찍이 자기를 거역한 일이 없을뿐더러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은 도맡아 하여 주던 사람이었는데 남편이 변하였다. 남들은 배를 타네, 제주도로 가네 야단인데, 남편은 북을 향해 달리겠다고 끄떡없었다. 결국 혜란은 웃는 낯으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경석은 기다리라는 말도 없이 떠날 때에는 잘 있으라고만 하였었다. 혜란은 일어나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기도를 하였다.
부상당한 신병은 옆구리를 맞고 잔등에서 물을 달라고 졸랐으나 강에 이를 무렵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66고지를 공격하던 대대는 두 차례나 후퇴하였다가 12시까지는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 고지를 점령하라는 엄명을 받고 태세를 갖추어 다시 진격하였다. 총공격을 개시한 사단의 진격로에서 측면을 위협하는 66고지를 빼앗지 못하면 이 사단뿐만 아니라 전세 전반에 큰 지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적의 저항도 필사적이었다. 신병 하나가 주춤거리며 움직이질 못한다. 경석은 옆으로 가서 때리고 설득하며 움직이게 하였으나 동작이 느렸다. 그런 사람들이 쉽게 죽어가는 것을 경석은 보아왔다. 12시가 지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나 둘 고꾸라져 갔다. 달리던 경석은 옆구리에 충격을 느끼면서 쓰러져 뒹굴었다. 경석은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길가에서 담배를 파는 그에게 우연히 담배 사러 온 경석의 친구가 소개하여 준 무역회사에서 혜란은 타이피스트로 일하게 되었다. 혜란의 실수에도 전무는 너그러이 대하더니 갑자기 할 이야기가 있다고 열두 시 반에 에덴에서 보자고 하였다. 전무는 혜란에게 술을 권하며 혼자 사는 적적함을 위로하며 자신이 혜란을 책임지겠다고 하며 혜란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잠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 혜란이었으나 핸드백을 집어들고 층층대를 달려 내려왔다. 전무가 급히 뒤따라 달려나왔다.
다시 담배장사를 시작한 혜란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하여 담배 상자를 부둥켜 안았으나 상자는 차츰 사나이 편으로 끌려만 갔다. 혜란은 도망치려고 옆으로 빠졌으나 사나이가 주먹으로 가슴팍을 밀자 다방 출입문에 자빠지면서 상자를 놓쳐 버렸고 양담배, 껌, 성냥 등이 비내리는 진흙탕에 흩어졌다. 다방 종업원은 혜란에게 짜증을 냈다. 그런 수모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상자로 전진하려던 혜란은 가슴팍을 보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용두산 천막을 향하여 종종걸음을 쳤다.
경석은 목이 타는 듯한 충격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경석은 누운 채로 간호원이 부어주는 물을 조금씩 조금씩 마셨다. 간호원이 수술 경과는 매우 좋다고 하였다.
이십 일만에 타이프라이터로 돌아온 혜란은 수치의 중압을 느꼈다. 여러 밤과 여러 낮을 두고 갈고 닦은 각오였다. 그랬던 각오가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시들기 시작했다. 전무의 능글맞은 웃음에 수치심이 더해 갔다. 목덜미가 아파와 그는 밖으로 나왔다. 우편배달부가 나왔다. 혜란은 편지를 잡아채다시피 받아들었다. 경석의 편지도 있다. 육군 병원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와 가슴이 철렁했지만 편지를 보냈으니 살아는 있으므로 긴 숨을 내쉬었다. 조그만 부상을 당하여 입원하여 있으나 경과는 좋으며 가능하면 면회오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그 길로 혜란은 사무실로 들어가 사장에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전무가 자신이 잘 말해놨는데 이러면 어떡하느냐고 당황한 낯으로 쫓아왔으나 혜란은 전무의 목덜미에 강한 시선을 던지고는 돌아서서 활기 있게 걸었다.
경석은 힐끗 곁눈으로 옆을 보았다. 새 환자가 침대에 오르는데 명룡이었다. 대원들의 생사를 전해주는 명룡도 매우 반가운 눈치였다. 아침 내내 두 팔을 베개로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던 이명룡은 경석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경석이 교수가 맞는지 물었다. 농으로 대답한 경석은 이명룡의 무표정 뒤에는 표정을 불허하는 간곡한 것이 있음을 깨닫고 농으로 받은 것을 뉘우쳤다.
명룡이 경석에게 왜 전쟁에 나왔는지 묻고 무표정한 얼굴은 입을 비스듬히 벌린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 같은 농군이야 아깝지 않은 목숨이지만 대학생들도 나라에 쓸 사람이라고 빼놓는데 대학교수인 경석이 나온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경석은 목숨이 아까운 사람, 아깝잖은 사람의 구별이 있다는 건 잘못된 것이라며 사람은 모두 형제라고 하였다. 명룡은 자신이 어떻게 부자들이나 똑똑하고 권력 있는 사람들과 형제가 될 수 있느냐고 어리둥절해 한다. 그러나 경석은 우리는 모두 형제라고 하며 제대하면 형제처럼 같이 살자고 제안했으나 명룡은 눈을 감고 죽는 날이 제대하는 날이라고 대꾸한다. 길은 그리로 트여 있었다.
혜란은 도강증을 내러 매일 내왕하였으나 결재가 나지 않았다는 계원의 말에 초조하였다.
경석은 간밤에 혜란의 꿈을 꾸었다. 한강 저쪽에서 건너오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혜란이었다. 자기를 보자 발을 동동 굴렀다.
원대로 복귀한다고 보따리를 들고 선 명룡이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경석은 맥없이 일어섰다. 요사이 며칠을 두고 몸이 가뿐치 못하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걸어서 정문 밖 한길까지 나왔다. 이제 그만 들어가라는 명룡을 경석은 힘껏 안아주고 나무 밑 돌등에 앉았다. 명룡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가며 이따금씩 주먹을 눈으로 가져갔다. 모퉁이를 돌면서 명룡은 잠깐 발을 멈추고 이쪽을 보다가 그냥 사라지고 말았다. 경석은 가슴이 싸늘해지면서 앞이 흐렸다.
개울 쪽으로 돌아앉은 그는 숨을 죽이고 흐느껴 울었다. 경석은 일어서서 정문을 들어서는데 옆구리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몇 걸음을 옮겨 놓다가 비틀거리던 끝에 쓰러지고야 말았다. 보초가 달려와서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상처에는 또 모진 충격이 왔고 경석은 축 늘어졌다.
천안을 떠난 기차 속에서 혜란은 도시락을 씹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감격에 가슴이 벅차 있었다. 액운은 여기서 걷히고 어쩌면 서울에서 그냥 살게 됨직도 하다고 생각하였다.
늙은 군의관 대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치명상인데 지금까지 목숨이 붙어 온 것이 기적이라는 군의관의 말을 뒤로 경석은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무표정한 간호원은 손을 들어 눈을 감겨 주었다.
● 이해와 감상
◆ 이 소설은 6 · 25 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에 참가한 철학 교수 경석의 전투 체험과 그의 아내 혜란의 피난지 부산 생활을 다룬 작품이다. 소설의 전면을 채우는 것은 경석의 장렬한 전투 장면과 혜란이 고생하는 모습이다. 작가는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어가는 인간의 모습과 피난지 부산에서 부정 · 비리와 함께 개인적 향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대비하여 삶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서사 구조는 경석의 현재 모습(전장)과 혜란의 현재 모습(부산)을 대비하고,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던 시절에 대해 시간을 거슬러 이야기하다가 다시 병원으로 두 사람을 모이게 하는 방법으로 전개되고 있다.
◆ 이 소설은 전쟁에 참가한 철학교수 '김경석', 일등병이 싸우다 다쳐서 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죽는다는 이야기와 남편을 전장에 보낸 '혜란'이의 수난과 남편을 만나려는 그녀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전장에 있는 '경석'의 전투 광경과 후방에 있는 '혜란'의 이야기를 오버랩시키면서 전장과 전시의 후방의 삶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작품은 '경석'과 '혜란'에게 다가드는 절망의 그림자를 느끼게 한다.
타이피스트인 혜란의 몸을 요구하는 전무, 이를 거절하고 혜란이 다시 담배와 껌을 팔러 나서는 무렵에 경석은 부상을 당한다. 담배와 껌을 빼앗긴 혜란이 다시 회사로 출근하다가 부상당한 경석을 만나러 회사를 그만두고 한강을 도강하려 할 때 경석은 죽는다.
경석과 혜란으로 대변되는 전장과 후방에 찾아오는 비극 외에도 이 작품은 전쟁의 상황과 세태를 보여준다. 경석과 명룡의 대화 가운데는 분명히 소박한 휴머니즘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지금 읽으면서 작가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 김성한은 분명히 이 작품에서 작가 대인의 고민을 순화시키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가 세태의 묘사에 있어서 초연한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자기 소설의 주인공으로 융합되지 못하는 것이,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의도와 배반되는 느낌을 갖게 한다. 가령 '귀환'에서,
'경석은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뼈에 사무치게 아팠다. 자기도 과거에 봉사를 요구하는 족속이었다. 우월감, 부모의 덕분으로 근대 합리주의 건축의 한 조각을 훔쳐다가 그것을 번뜩이고 그것으로 온 세상을 재고, 잘났노라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한테 더 봉사해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인간의 고향을 떠나서 행패를 일삼는 탕아들.'
이라는 경석의 의식처럼 작가의 의식이 세태에 너무 초연한, 그리하여 세태에 대한 비난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메시아적 질책으로 끝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작가의 지식에서 나온 것일는지 모른다. 아마 그 때문에 김성한을 지적인 작가라고 일컫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작가적 감수성을 지적인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의 감수성의 여과기의 구멍이 경험의 실체를 극도로 통제할 만큼 작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작가가 세태를 그리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모든 현상을 자기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내적인 갈등 속에서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여주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작가가 모든 면에서 주인공보다 위에 있다고 느껴지지 않으면 않을수록 독자는 더욱 감동할 수 있을 테니까.
(김치수/'한국단편문학대계'(1969) 발췌)
● 핵심사항 정리
◆ 갈래 : 현대소설, 단편소설, 전후소설
◆ 배경 : 6.25 전쟁 당시, 전쟁터와 피난지 부산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표현상 특징
* '경석'과 '혜란'으로 대변되는 전장과 후방 피난지의 이야기가 병렬 전개되면서 두 사람에게 점점 다가오는 비극과 절망의 현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 동시 묘사법의 사용
◆ 주제 ⇒ 부조리한 현실과 전후 사회의 모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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