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별곡(靑山別曲)
[현대어 풀이]
- 살으리 살으리로다. 청산에서 살으리로다. / 머루와 다래를 먹으며 청산에서 살으리로다.
- 우는구나 우는구나, 새여! 자고 일어나서 우는구나, 새여 / 너보다 근심이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 울며 지내노라.
- 갈던 사래, 갈던 사래를 보고 있도다. 물 아래(속세)에서 갈던 사래(밭이랑)를 보고 있도다. / 이끼 묻은 쟁기를 가지고 물 아래에서 갈던 밭이랑을 바라보노라.
- 이럭저럭하여 낮은 지내왔지만 /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밤은 또 어찌하리오.
- 어디에 던지던 돌인가? 누구를 맞히려던 돌인가? /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없이 (돌에) 맞아서 울며 지내노라.
- 살으리 살으리로다. 바다에서 살으리로다. / 해초와 굴과 조개를 먹으면서 바다에서 살으리로다.
- 가다가 가다가 듣노라. 에졍지(외딴 부엌)를 지나다가 듣노라. / 사슴으로 분장한 광대가 장대에 올라가서 해금을 연주하는 것을 듣노라.
- 가다 보니 불룩한 술독에 독한 술을 빚고 있구나 / 조롱박꽃 같은 누룩이 매워(술이 독해) 나를 붙잡으니 낸들 어찌하리오.
[이해와 감상]
작자와 연대 미상의 고려 속요로, 고려인의 소극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생활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체가 8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음보율과 정제된 후렴구가 반복되어 있는 것이 형식상 특징이기도 하다. <악장가사>에는 전문이 실려있고, <시용향악보>에는 첫째 연만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 속요 중<서경별곡>과 더불어 비유성이 뛰어나서 문학성이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어지기도 한다. 극단적인 현실도피와 현실 부정의 사상이 나타나 있어 평민문학, 도피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려시가에 공통적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체념과 인생한탄, 술의 구가를 단적으로 찾아 볼 수 있으며, 고려인의 생활관을 또한 엿볼 수가 있다. 체념적 애조에서 생에 대한 강한 집념을 느끼게 하면서도, 청산을 동경하는 것은 그들의 이상세계를 소박하게 표현한 측면과 현실도피적인 면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렴구인 '얄리 얄리 얄량셩 얄라리 얄라'는 음악적인 리듬을 살리면서, 번뇌의 심정을 운율적으로 표출하고 있어서 절묘하다.
시어의 이미지에 있어서 관용적인 것이 없으며, 구문에 있어서 동적이면서 논리성을 일관하고 있고, 고도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무결한 한편의 창작시로 볼 수 있다. 특히 제2연의 감정이입수법과 제4연의 고독, 5연의 운명철학, 7연의 공상적 상념, 8연의 체념과 낙관 등이 뛰어나게 표현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이 작품은 애달픈 가운데 해학이, 우수가 일면서도 낙천적이고 명랑한 정조가 느껴지는 노래이며, 밝고 유려한 여음과 같은 생각을 거듭 다짐하는 반복법을 통해 단순히 인생고를 노래하는데 그치지 않고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고려인의 정신을 담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해설 및 정리]
■ 성격 : 고려속요, 현실도피적, 애상적, 감상적
■ 표현 및 형식상 특징
① 어구의 반복을 통해 의미를 강조함.
② 'ㄹ'과 'ㅇ' 음운의 사용으로 음악성을 살림
③ 8연의 분절체, 후렴구, 3.3.2조의 3음보, aaba형의 율격
④ 반복법, 의인법, 상징적 시어의 사용으로 주제의식을 강조함.
⑤ 후렴구의 특성 : 가사와는 상반된 분위기('괴로움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정서적 지향'을 표현)
반복의 효과를 바탕으로 시 전체가 통일감을 갖도록 함.
■ 주제 : 삶의 고뇌와 비애, 현실에의 체념, 삶의 터전을 잃은 유랑인의 슬픔
■ 구성(짜임)
[1] : 청산에의 동경과 귀의 (소재:청산→삶의 현장과 대비되는 자연)
[2] : 고독과 비애 (소재:새→화자의 유일한 벗으로 감정이입된 소재)
[3] : 속세에 대한 미련 (소재:새,쟁기)
[4] : 고독에의 몸부림 (소재:밤→절망적인 고독)
[5] : 운명적 삶에의 체념 (소재:돌→피할 수 없는 운명)
[6] : 바다에의 동경과 귀의 (소재:바다→삶의 현장의 또 다른 대칭으로서의 자연)
[7] : 기적이 일어나기를 희망함 (소재:사슴→비애의 감정을 이완시킴)
[8] : 술을 통한 고뇌의 일시적 해소 (소재:술→비애의 초극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
■ 시적 화자
⑴ 유랑민이라는 견해 → 청산에 들어가 머루나 다래를 따먹고 살아야 하는 민중의 괴로운 삶, 특히 유랑민의 처지를 나타낸 민요이다 ( 근거:몽고 침략, 척신의 횡포, 무신의 난 등 내우외환 속에서 삶의 뿌리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당대의 사회상 )
⑵ 실연한 사람이라는 견해 → 실연의 슬픔을 잊기 위해 청산으로 도피하고 싶어하는 노래이다.
⑶ 당대 지식인이라는 견해 → 속세의 번뇌를 해소하기 위해 청산을 찾았고, 기적과 위안을 구하면서도 삶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지식인 술노래이다. 이 경우라면 민요였으리라는 가정은 부정되고, 고도의 상징성을 지닌 표현으로 보아 창작 가요의 성격을 띠게 된다.
[ 참고 자료 ]
◆ 문학과 어학의 만남 그리고 갈등 - 정재찬 평설 위원-
1. <청산별곡> 읽기의 즐거움과 괴로움
<청산별곡>을 읽는 것은 즐겁고도 괴로운 일이다. 이토록 맛깔스러운 고전 시가도 드물지만, 구절 해석에서 주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난관과 이설(異說)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얄라" 라는 후렴구를 보자. 여러분은 문학 시간에, 이 구절이 유음 'ㄹ'과 비음 'ㅇ'이라는 유성음이 이어져 밝고 경쾌한 리듬감을 준다고 배웠다. 하지만 시 전체의 느낌은 결코 밝지 않으니,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먼저, 각 연은 우울한 정조를 띠지만, 그 사이의 후렴을 밝게 처리해 분위기의 전환을 꾀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후렴구의 '가벼운' 경쾌함 탓에 화자의 '무거운' 슬픔이 옅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역시 유성음의 연속이지만, <아리랑>의 주제는 슬픈 이별 아니던가. 그것이 우리 시가의 멋이자 고유한 미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로써 시비가 완전히 가려진 것은 아니다. <정선 아리랑>은 슬프지만 <밀양 아리랑>은 밝고 경쾌하다. 그렇다면 <청산별곡> 역시 후렴구와 작품 전체가 다 밝거나, 다 구슬플 수 있지 않을까? 궁중 연희에서 불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밝은 분위기 쪽이 그럴 듯해진다. 한편 구슬픈 노래라고 보는 경우, 후렴구가 여느 고려 가요처럼 악기 소리를 구음(口音)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얄리 얄리 얄라셩'은 어떤 악기를 흉내 낸 걸까? 아마도 '날라리'라고도 불리는 피리가 아니었을까?
제법 자명해 보였던 후렴구마저 막상 따져보니 의문투성이거늘, <청산별곡>의 실체는 타임머신을 타고 고려 시대로 가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후렴구를 뺀 전문(全文)을 살펴보며, <청산별곡> 읽기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맛보기로 하자.
2. <청산별곡> 다시 읽기
1연에서 화자는 현재 청산에 없으며, 있다 하더라도 거기서 살아 본 적이 없다. 단지 청산에 사는 편이 현재보다 나을 거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청산이 좋아서라기보다 현실이 싫어서 청산으로 간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청산'이 무릉도원처럼 절대적이고 완벽한 이상향이라면, 나중에(1연 이후에) 화자가 청산을 떠나 바다로 갈 이유가 없다. 시가 전개되면서 청산은 점차 불완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밝고 희망찬 이미지 또한 설움으로 변해 간다.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라는 구절에서 보듯, 청색은 가장 희망적인 색이자 가장 서글픈 색이다.
그러면 대체 화자는 현실의 어떤 점이 싫어서 청산을 향해 가는 걸까? 1연만 놓고 본다면, '궁핍한 현실보다는 머루나 다래라도 먹을 수 있는 청산이 낫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2연 이후까지 고려한다면 두 번째 해석이 더 타당하다. '이끼 묻은 쟁기'로 풍요를 누릴 수는 없으며, 그가 '청산' 대신 '바다'를 택한 사연 역시 가난과는 무관해 보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화자는 현실의 정신적 고통 때문에 청산을 갈망하고 있다.
2연 역시 해석이 무난한 편이지만, 평론가 이어령(1934~ )의 지적처럼 '울어라, 새야.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운다.'라는 해석은 모순이다. 그것은 "서울대에 가라. 너보다 똑똑한 나도 지원했다."라는 예와 마찬가지로 의미상 비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어령은 '노래하라, 새여.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노래하노라.'라고 풀이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새에게 해당되는 논리이므로, 화자의 울음을 '노래'라 볼 수는 없다. 결국 '노래하라 새여.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운다.'라고 해석해야 하는데, 이 경우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문제는 '자고 니러'를 '자나 깨나' 정도로만 이해하거나, 2연의 시간적 배경을 '아침'으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된다. 화자는 새에게 울라고 명령하면서, '자고 니러'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나) 울 것이지 지금은(밤에는) 울지 말라.'는 부정 명령이 된다. 다시 말해 화자는 울지 않고 있는 새에게 '울어라.'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울고 있는 새에게 '지금은 울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다.
시적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화자는 청산에서 밤을 보내고 있는데, 새가 운다. 그 울음소리는 현실을 떠나 청산에서 밤을 맞는 화자의 수심을 돋우어, 잠 못 들게 한다. 밤이란 의식이 깨어 있을 때 겪는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식의 시간이다. 그런데 자신보다 시름도 적은 새가 울어 대니까, 화자는 밤에는 제발 참아 달라며 애원하는 것이다. 이렇듯 속뜻을 '울지 말라.'라고 보면, 화자가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애써 눈물을 참는 상황이 연상된다. 또 새더러 울지 말라고 해 놓고 자신이 따라 우는 상황을 떠올리면, 더욱 극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다. 더구나 밤에 새가 우는 정황은 이조년(1269~1343)의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에서 보듯, 전통 시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서 표현 방식이다.
3연의 해석에서 가장 큰 쟁점은 '가던'을 '가던(行)'으로 볼 것인가, '갈던(耕)'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새'가 '새(鳥)'를 가리키느냐, '사래'를 가리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데 아무리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해도, '가던 새'가 '갈던 사래'로 해석된다는 주장은 수용하기 어렵다. 2연에 이어 3연을 읽으면 자연스레 '날아가던 새'로 이해하게 마련인데도, 3연 후반부에 '이끼 묻은 쟁기'가 나오니까 '갈던 사래'라고 풀이해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발상이다. 더구나 <청산별곡>은 노래로 불렸던 시간 예술이지, 글자로 읽혔던 공간 예술이 아니었으며, '사래'를 '새'로 표기한 다른 예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
요컨대 3연의 '새'는 2연에 등장한 그 '새'임에 틀림없다. 밤새 화자를 잠 못 들 게 하던 그 새는 정작 자고 일어나서 울기는커녕 '저 믈 아래'로 날아간다. 자신과 새의 처지를 동일시한 것은 그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새에게는 날개가 있지 않은가. 화자로서는 구슬픈 새소리 때문에 밤이 힘들거니와, 낮에도 외로움과 허탈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러한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 바로 '이끼 묻은 쟁기'다. 이끼 묻은 쟁기를 손에 들고 새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해 있을 화자의 모습을 연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4연은 3연의 해석을 고려하면, 4연에서 왜 화자가 '이링공 뎌링공' 낮을 보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때 '또 엇디 호리라'의 '또'를 무심히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이 단어는 낮뿐 아니라 밤도 '또' 그러할 것이며, 지난밤과 마찬가지로 오늘밤도 '또' 그러하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2연에서처럼 그는 '또' 잠 못 이룰 것이고, '또' 울거나 울음을 참아야 할 것이다. '새'가 다시 돌아와 '또' 밤에 울어 댈 것이기 때문이다. 아침이 되면 정작 그 '새'는 '또' 날아가 버릴 것이 분명하다. 부럽고도 얄미운 새와의 동거는 어딘가 불편하다. 농담이 아니라, 그가 청산을 떠난다면 그것은 불면증 때문이다.
5연은, 이러한 생활의 반복은 신세타령으로 이어지고, 화자는 결국 '운명의 돌'에 맞아 울음을 터뜨린다. 예컨대, 입시 정책이 갑자기 바뀌거나, 난데없이 금융 위기가 닥쳐서 억울해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교육 정책이나 세계 경제가 특정인을 겨냥해서 그에게만 불리한 방향으로 움직일 리 없다. 하지만 그 피해는 당사자의 몫이므로, 운명을 탓할 수밖에. 그런 점에서 화자는 꽤 성숙해 보인다. 장난삼아 돌을 던진 누군가를 원망한들 무엇 하랴. 운명의 장난은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 그 운명의 돌이 '무신의 난'인지, '몽골의 침략'인지, 아니면 '어느 낭군님의 희롱'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청산'에서의 삶은 눈물과 허탈함의 연속이다. 화자는 정녕 속세가 그리워서 울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속세로 돌아가면 그만이지 '바다'로 떠날 리 없다. 그는 '청산'에 대한 기대마저 무너졌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 것이다. '청산'조차 '시름'을 치유해 주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그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하지만 '청산'이 그에게 삶의 의욕을 북돋워 주지 못하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정된 결과였다. 상실감을 안고 사는 주체에게 환경의 변화란 언제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6연에서 화자가 '청산'의 삶을 청산(과거의 부정적 요소를 말끔히 씻어 버림)하고, '바다'로 향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화자가 '청산'이 더 이상 이상향일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이상향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과 대비되는 '상대적 이상향'이라는 점에서 '바다'는 '청산'과 일치한다. 하지만 처음 '청산'으로 갈 때와 달리 화자는 '청산'에서의 삶을 경험해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는 '청산'보다 이상향에 가깝긴 해도, 화자에게 더 큰 만족을 줄 수 있을까? 그러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화자의 취향이 아니므로 이 질문은 무의미하다.
질문을 바꿔 보자. 화자는 '청산'에 실망하고 난 뒤, 더 큰 기대와 희망을 품고 '바다'로 향하는 걸까?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그는 굳이 '바다'에 갈 필요가 없었다. 바다에 간들 슬픔과 외로움, 허무가 극복될 리 없기 때문이다. '청산 대 바다'의 대립 구조로 이 작품을 분석하는 것이 일반적임을 고려할 때, 5연까지는 '청산에서의 삶'을 노래하지만, 6~8연은 '바다에 이르다 만 삶'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화자는 바다를 향해 떠났지만, 바다에 도착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7연. 1연에서 '청산'을 향해 갈 때는 그나마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7연에서 '바다'에 대한 희망의 크기는 '청산'에 대한 실망만큼이나 줄어들었다. 따라서 화자의 발걸음은 거침없이 내닫는 것이라기보다는 흔들리고 주저하는 쪽에 가깝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바로 '가다가 가다가'다. 더욱이 속세에서는 바로 청산에 갈 수 있었지만, 청산에서 바다로 가려면 다시 속세를 거쳐야 했다. 도중에 그는 '사슴이 장대에 올아셔 해금을 혀'는 소리를 듣게 된다. 7연이 산대잡희와 연관이 있다면, 그는 청산으로 떠나기 전에 속세에서도 이 소리를 들었음 직하다. 그렇다면 왜 새삼스레 귀를 기울였을까? 그는 과연 놀이판에 어울리고 있거나, 흥에 겨워 놀이판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사실, 화자가 슬픔에서 벗어났다는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해금 소리가 말 그대로 '심금을 울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그는 놀이판에서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구경꾼들은 즐거워하는데, 화자만 홀로 서러워한다. 그러나 그전에도 심금을 울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청산'에서의 새소리가 그것이다. 이는 현악기 소리가 주로 '우는' 소리에 비유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8연. 속세가 살 만하지 않고 청산과 바다도 이상향이 아닐 때,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고 비애와 허무에서 헤어나기 힘든 바로 그때, 술이 등장한다. 유토피아는 없다. 어디로 간들 비애와 허무뿐이고, 슬픔을 잊게 하는 것은 술뿐이다. 더구나 여전히 그는 정처가 없다. 이곳 또한 마침 술이 익어서 잠시 들른 곳일 뿐이다. 술이 깨면 허무는 이내 다가들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 또 취하더라도 허무를 자각하는 일이 중요하지, 향락이 그의 관심사는 아니다. 작품의 무게 중심은 술에 탐닉한 결과가 아니라 술에 빠지게 된 조건, 곧 '삶의 허무'에 놓여 있다.
'길 떠남'의 이미지가 작품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청산별곡>은 박목월의 <나그네>와 닮았다. '청산'과 '강나루 밀밭', '정처 없는 방랑'과 '길은 외길 남도 삼백 리'라는 이미지는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술'로 끝맺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허무와 술은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거니와, 한잔 술이 주는 황홀함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이 나그네의 운명이다. 술에 주저앉듯 기나긴 여로를 통해 결국 현실로 되돌아온 듯 보이지만, 그 여로에 종착역은 없다. 현실이 여전히 부정적임을 알면서도 '청산'과 '바다'의 세계에서 되돌아온다는 점에서 그것은 슬픈 여로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닫힌 회로 속에서 끝없이 방황하는 화자의 모습에서 삶의 숙명적 비애와 허무를 깨닫게 된다.
3. 국어학의 도전 그리고 반전
결론적으로 <청산별곡>은 지적인 남자가 속세의 괴로움을 잊기 위해 청산에 이르지만, 거기서 평안을 구하지 못하고 다시 바다로 가다가 끝내 술에 빠지고 마는, '허무주의적 세계'를 그리고 있다. "속세든, 청산이든, 바다든, 어디에 간들 괴로움이 없으랴. 그저 술 마시고 잊는 수밖에. 그것만이 위로가 되니 어찌 하리."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에 대해 어학 쪽에서 날카로운 공격이 시작된다. 국어학자 김완진은 8연의 '잡사와니'에 주목한다. 이 단어의 형태소를 분석하면 '잡+삽+아니'인데, 이때 '-삽-'이라는 형태소를 포함하는 타동사는 그 목적어로 '나'를 취할 수 없다. '-삽-'은 객체 높임에 쓰이므로, 객체(목적어)가 '나'라면 자신을 높이는 꼴이 되어 높임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잡사와니'의 목적어로는 '임'이 적합하다. 그렇다면 8연의 2행은 "A('술')가 B('임')를 붙잡으니 난들 어찌하랴."로 풀이해야 한다. 이때 B가 남성이라면 화자는 여성(예컨대 '기녀')이 되어, "술이 임을 붙잡아 임께서 아니 가시니 내 탓이 아닙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쯤 되면 우리가 그동안 쌓아올린 해석의 금자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영화 <식스 센스>에 버금가는 반전이다. '기녀의 노래'라는 관점에서 다시 해석해도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지니, 오싹하고 허탈한 기분마저 든다. 사랑을 잃은 여인이 속세를 떠나 청산으로 간다. 그녀는 밤새 시름에 겨워 잠 못 이루다가 새에게 말을 건넨다. "새야 새야, 부디 내일 울어라."라는 애원은 여성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새는 떠나고, 여인은 이끼 묻은 쟁기를 들고 새가 날아간 쪽만 바라본다. 쟁기에 이끼가 묻은 것은 노동을 하지 않은 탓이다. 이 또한 화자가 여성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이럭저럭 낮은 보냈지만 오고 갈 사람 하나 없는 밤은 어찌할꼬."라는 대목에서 황진이가 떠오르지는 않는가? 게다가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돌에 맞아 울고 또 울다니, 이 시에는 눈물이 왜 이리 많이 나오는 걸까.
바다를 향해 떠난 뒤에도 다를 바 없다. '에졍지'의 해석을 놓고 이견(異見)이 분분하지만, 그 단어가 정말 '부엌'을 가리킨다면 이 또한 여성 화자에게 더 잘 어울린다. 그런가 하면 '빚+오+라'의 '-오-'는 중세 국어에서 주어가 1인칭일 때만 쓸 수 있는 형태소이므로, 술을 빚은 것은 화자(기녀)다. 그래서 "잡사와니 내 엇디 하리잇고."는 기녀의 애교 내지 권주가로 들린다. 원래 이 노래는 궁중의 잔치에 쓰였다지 않은가. 무엇인 진실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진실을 찾아가는 괴로움조차 즐겁지 아니한가.◈
*출처 : 고교 독서평설 10월호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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