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시가/가사 해설]누항사(陋巷詞) - 박인로 -

누항사(陋巷詞)                  -   박인로 -

 

 

<현대어 풀이>

어리석고 세상 물정에 어둡기는 이 내 몸보다 더한 이가 없도다. / 길흉화복을 하늘에 맡겨두고 / 누추하고 깊은 곳에다 초가집을 지어놓고 / 바람부는 아침과 비내리는 저녁에 썩은 짚이 땔감이 되어 / 서 홉 밥과 닷 홉 죽을 끓이는데 연기가 많기도 많구나. / 덜 데운 숭늉으로 빈 배를 속일 뿐이로다(지은이의 궁핍한 삶). / 내 생활이 이러하다 하여 대장부의 뜻을 바꿀 수 있겠는가? / 가난에 처해서도 평안한 마음을 적게나마 지니고서 / 옳은 뜻대로 살고자 하니 날이 갈수록 모든 일이 어긋나는구나(현실과 신념 사이의 갈등). / 가을철에도 부족한데 봄이라고 여유가 있겠으며(식량의 부족함) / 주머니가 비었는데 술병인들 담겨 있으랴? / 빈곤한 사람이 이 세상에 나뿐이로구나.

 

 

 

<현대어 풀이>

굶주리고 헐벗음이 몸을 괴롭힌다 한들 일편단심을 잊을 것인가? / 의에 분발하여 내 몸을 잊고, 죽어서야 말겠노라고 마음 먹어 / 전대와 망태에 한줌 한줌 모아 넣고 / 전쟁 오 년 동안에 감히 죽고 말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 주검을 밟고 피를 건너 몇 백 전을 치루었던가?(전란을 치루면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일을 회상함) / 내 한 몸이 겨를이 있어서 집안을 돌보겠는가? / 늙은 종은 하인과 주인의 분수를 잊어 버렸는데(종이 도망을 간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전기 엄격했던 신분제가 붕괴되기 시작하는 조짐이 반영) / 나에게 봄이 왔다고 일러줄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 농사짓는 일은 마땅히 머슴에게 물어야 하는데 누구에게 물어볼 것인가? / 몸소 농사를 짓는 것이 나의 분수인 줄을 알겠도다.

 

 

 

<현대어 풀이>

잡초가 난 들에서 밭을 갈던 늙은이와 밭둑 위에서 밭 갈던 늙은이를 / 천하다고 할 사람이 없지만 아무리 갈고자 한들 어느 소로 갈 것인가? / 가뭄이 이미 크게 심하여 농사짓기에 좋은 철이 다 늦은 때에 / 서쪽 언덕 높은 논에 잠깐 지나가는 비에 / 길 위에 흘러내리는 근원 없는 물을 반쯤만 대어두고 / 소를 한 번 빌려주겠다고 엉성히(탐탁지 않게) 하는 말씀을 친절하다고 생각한 집에 / 달도 없는 황혼에 허둥지둥 달려가서 / 굳게 닫은 문 밖에 멀리 혼자 서서 / 큰 기침 '에헴' 소리를 꽤 오래도록 한 뒤에 / "어, 그 누구신가?" 하고 묻는 말에, "염치없는 저올시다."하고 대답하니 / "초경도 거의 지났는데 그대가 어찌 와 계신가?"하기에, / "해마다 염치없는 줄 알지마는 / 소 없는 가난한 집에 헤아림(걱정)이 많아서 왔습니다."고 하니 / "거저로나 값을 치거나 빌려줄 만도 하지만 / 다만 어젯밤에 건넛집 저 사람이 / 목이 붉은 수꿩을 구슬같은 기름이 끓어 오르게 구워내고 / 갓 익은 삼해주를 취하도록 권해 왔으니 / 이러한 고마움을 어찌 아니 갚겠는가? / 내일 (소를) 빌려주마 하고 큰 언약을 하였는데 / 약속을 어겨서 미안하니 말씀드리기 어렵구료."라고 한다. / 사실이 그렇다면 설마 어찌하겠는가? / 헌 갓을 눌러 쓰고 축이 없는 짚신에 맥없이 물러나오니 / 풍신조차 보잘것없는 모습을 향해 개만이 짖을 뿐이로다.

 

 

<현대어 풀이>

작고 누추한 집에 들어간들 잠이 와서 누워 있겠는가? / 북쪽 창문에 기대고 앉아 새벽을 기다리니 / 무정한 오디새는 이 나의 한을 깊게 만드는구나. / 아침이 마칠 때가지 슬퍼하며 먼 들을 바라보니 / 즐기는 농부들의 노래도 흥이 없이 들려 오는구나. / 세상의 인심을 모르는 한숨은 그칠 줄을 모르는구나. / 아까운 저 쟁기는 볏의 빔(보습 위에 대는 쇳조각)도 좋구나. / 가시가 엉긴 묵은 밭도 쉽게 갈 듯 싶은데 / 텅빈 집의 벽에 쓸데없이 걸려 있구나. / 봄갈이도 거의 끝나간다, 팽개쳐 던져 두자.

 

 

 

<현대어 풀이>

자연을 벗삼아 살겠다는 꿈을 꾼 지도 오래더니 / 먹고 사는 일이 거리낌이 되어, 아! 슬프게도 잊었도다(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자탄) / 저 냇가를 보건대 푸른 대나무가 많기도 많구나. / 교양있는 선비들아, 낚싯대 하나 빌려라. / 갈대꽃 깊은 곳에서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의 벗이 되어 / 임자가 없는 자연 속에 절로절로 늙어가리라. / 무심한 갈매기야, 나더러 오라고 하며 또 말라고 하랴? / 다툴 이가 없는 것은 다만 이것뿐인가 생각하노라.

 

 

 

<현대어 풀이>

아무 공적도 없는 못생긴 이 몸이 무슨 갸륵한 뜻이나 취미가 있으랴마는 / 두세 이랑의 밭과 논을 다 묵혀서 던져두고 / 있으면 죽이요, 없으면 굶을망정 / 남의 집 남의 것은 전혀 부러워하지 않으려고 하노라. / 나의 가난하고 천함을 싫게 여겨 손을 내저어 쫓아 보낸다고 물러갈 리 있겠으며, / 남의 부유함을 부럽게 여겨 손을 쳐서 부른다고 나올 리가 있겠는가? / 인간의 어느 일이 목숨의 밖에서 생겨났겠는가?(가난하다고 금방 죽으며, 부유하다고 백 년을 살겠는가) / 가난하여도 원망하지 않는 게 어렵다고 하지만 / 내 생활이 이러하되 서러운 뜻도 없노라. / 한 도시락 밥과 한 표주박의 물(가난한 생활)도 만족하게 여기노라. / 평생의 한 뜻이 따뜻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는 데에는 없노라(내가 가진 삶의 뜻은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니다) / 태평스런 세상에 충성과 효도를 일삼아 / 형제간에 화목하고 벗끼리 신의 있게 사귀는 일을 그르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 그 밖의 나머지 일이야 타고난 대로 살아가려 하노라.

 

 

 -<노계집>-

 

[ 이해와 감상 ]

 

이 작품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광해군 3년 봄, 박인로가 고향인 경기도 용진에서 한가히 지내고 있을 때, 한음 이덕형이 찾아와 누항 생활의 어려움을 묻자, 이에 대한 답으로 지은 가사이다. 누항 깊은 곳에 초막을 지어 비록 가난하게 생활하는 어려움이 크지만, 그래도 자연을 벗삼아서 안빈낙도하고 충효와 형제간의 우애, 친구간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의 어려운 현실생활이 생생히 표현되어 있으며, 지은이의 곤궁한 생활상과 안빈낙도하는 삶을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으로 잘 형상화해 놓은 작품이다.

 

누항(陋巷)이란 것은 우선 노계가 있는 곳을 가리킨다. 이곳은 세속적인 장소, 즉 세상의 생활을 영위하는 곳에서 안빈낙도를 하려 하는 곳이기에 갈등이 나타나 이중의 어려움을 제시하는 곳이다. 그러나 누항에서이 작가의 최종 귀착지는 안빈일념으로 빈이무원, 단사표음에 만족하는 오륜의 세계이다. 곧 충, 효, 화형제, 신붕우의 세계를 지향한다.

 

이 작품에서 지은이는 유학자로서의 당위와 궁핍한 현실 사이에서 깊이 고심하고 있는데, '안빈낙도'하는 이상적 삶을 노래하면서도 궁핍하고 누추한 현실에서 오는 갈등과 괴로움을 솔직하게 그리고 있다. 작품 곳곳에 노계 가사의 특징인 관념적인 한문구가 보이고 있지만, 지금까지 가사에 등장하지 않았던 일상 생활의 언어를 대폭 받아들여 생동감과 구체성을 획득하는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전기 가사와의 비교 → 조선전기의 양반가사는 자연에 묻혀 은일생활을 하더라도 여유있는 생활 태도와 자연 경관에 대한 찬미를 주내용으로 하고 있으나, 이 작품은 자연에 은일하면서도 현실 생활의 어려움을 직시하고 그것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점이 드러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은 조선 전기 양반가사의 맥을 잇고 있으면서도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임진왜란 후의 어려운 현실을 여유와 달관의 태도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시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 형식면에서도 비정격이 많은 것으로 보아, 전·후기 가사의 과도기적 위치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요점정리 ]

 

◆ 연대 및 작자 : 광해군 3년(1611), 박인로

◆ 갈래 및 성격 : 조선후기 가사, 강호한정가, 은일(隱逸)가사

◆ 시적 상황 :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곤궁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음.

◆ 표현

① 열서식(列敍式) 구성, 3 · 4조의 기본 음수율, 대구법, 설의법, 과장법, 열거법 등

② 사실적 묘사를 통해 가난한 현실생활을 생생하게 표현함.(조선후기 가사의 특징)

③ 대화의 삽입을 통해 현실감, 현장감을 살림.

④ 안빈낙도의 이상적 삶과 궁핍한 현실생활 사이의 갈등이 잘 드러남.

⑤ 농촌의 일상 생활과 관련된 어휘와 어려운 한자어가 많이 쓰임.

 

◆ 주제 :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연을 즐기며 안분자족하려는 심정(安貧樂道)

◆ 출전 : <노계집>

 

 

◆ 구성

[1] 서사 : 길흉화복을 하늘에 맡기고 누항에서 안빈 일념으로 살려는 심정

[2] 본사1 : 임진왜란에 대한 회상과 빈궁한 삶 속에서 몸소 농사를 지음(궁경가색)

[3] 본사2 : 농사를 지을 농우가 없어, 빌리러 갔다가 수모만 당하고 돌아옴(궁경심려, 인인수모)

[4] 본사3 : 각박한 인정을 한탄하며, 춘경(밭갈이)할 생각을 그만 둠.

[5] 결사1 : 자연을 벗삼아 대자연 속에서 절로 늙어가기를 소망함.

[6] 결사2 : 안빈낙도하며, 인간의 도리(사충효(事忠孝), 화형제(和兄弟), 신붕우(信朋友))를 지키려 함.

 

◆ 의의

① 사대부로서의 지위를 보장받지도 못하고, 농민으로 살아가는 데 만족할 수 있는 여건도 갖추지 못하여 양쪽에서 소외되어 있는 괴로움을 노래한 작품

② 정 철에 이르러서 절정을 이룩한 미화된 표현을 버리는 대신 현실 인식의 실감을 확보하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사대부 가사의 한계를 탈피하고, 가사가 시조보다 개방적일 수 있음을 입증함.(조선후기 가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선구적 역할)

③ 전기 사대부 가사에서 후기 서민가사로 옮아가는 과도기적 상태에 놓여 있는 작품. 사대부가사는 자연에 숨어 살며 도를 찾는 '강호가도(江湖歌道)'가 주를 이루고 있으나, 이 작품은 자연에 은일하면서도 현실 생활의 어려움(임란 이후의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전기 가사와 다른 점을 보여주고 있다.

 

 [ 참고사항 ]

 

◆ 이 작품 속에 드러나고 있는 작가의 삶의 세계는 어떻게 변모되어 가는가?

 

① 세속적 삶에서의 패배 → 농사를 지으려 하나 농우가 없어서 남에게 빌리려다 모욕을 당하는, 궁핍한 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목이 나온다. 달없는 초저녁 밤에 허위허위 갔다가 개 짖어대는 속에 설피설피 물러 나왔다는 표현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달 없는 어둠과 같은 궁핍, 사납게 짖어대 배척하려는 세계를 두 개의 사물에 담고 있다. 그런 궁핍과 배척 속에서 무방비로 나설 수밖에 없는 무기력감이 표현되어 있다. 결국 작가는 농사짓기(세속적 삶)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패배자의 모습이 된 것이다. 서두에 자신을 가리켜 어리석고 우활하다고 말했던 진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② 강호에서의 삶 → 세속적인 삶을 포기하고는, 세속적인 삶의 고통도 없으며 '임자없는 풍월강산'에 찾아든다. 결국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는 삶을 자세인 것이다. 그러한 대자연 속에서 충효를 일삼고, 화형제, 신붕우하는 유교적 삶의 세계에 도달하고 있다.

 

◆ 조선 후기 가사의 특징

① 평민의식의 대두로 인한 산문정신의 영향으로, 서정적 내용에서 서사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② 전기 가사의 양반들의 강호 한정이나 연군 우세에서 벗어나 인생 전반에서 주제를 취함.

③ 전기에는 양반가사가 주종을 이루었으나, 후기에는 평민, 부녀자도 창작에 가담하여 평민가사, 내방가사(규방가사) 등이 생겨남.

④ 규방가사는 규중 부녀자들의 부덕과 애환을 담고 있으며, 섬세한 생활 감정이 국문으로 쓰여졌다.

 

◆ 박인로(1561-1642)

조선 시대 무신. 호는 노계 또는 무하옹. 임진왜란 때에는 수군에 종군하였고, 39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수군만호에 이르렀으나, 후에 벼슬을 사직하고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념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안빈낙도하는 도학사상, 우국지정이 넘치는 충효사상, 산수 명승을 즐기는 자연애 사상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송강과 함께 가사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며, 가사 7편과 <오륜가> 등 시조 72수가 <노계집>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