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동 왕자 설화 - 삼국사기 권14 -
◆ 내 용
유리왕이 즉위 37년만에 돌아가자, 그 삼자(三子) 무휼(無恤)이 등극하였다. 이분이 대무신왕이다. 맏아들 해명은 장렬한 최후를 마치었고, 둘째 아들은 나루에서 물에 빠져 죽었기 때문이다.
대무신왕이 즉위한 지 15년째 되는 해 4월. 호협한 왕자 호동은 옥저 땅으로 유람을 나갔다. 호동은 첫눈에 보기에도 총명해 보였고, 미목이수려하여 마치 보름달이 중천에 뜬 듯이 환하였다. 왕자는 옥저의 국경지방을 유람하다가 다리가 아파 쉬고 있었다.
그 때, 요란한 행차가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 행차란 다름 아닌 낙랑 태수 최리(崔理)의 행차였다. 마침 그때 낙랑왕의 말이 날뜀으로 좌우의 신하도 어쩔 줄 몰랐다. 말은 흙먼지를 노랗게 일으키면서 날뛰었다. 신하들도 우왕좌왕하는 중에 번개처럼 달려와서 말고삐를 잡아 날뛰는 말을 진정시킨 무사풍의 호걸이 있었으니, 최리와 신하들은 그의 용맹함과 수려한 용모에 놀라며,
" 내 그대를 보건대 범인(凡人)이 아니란 것을 알겠노라. 혹시 북국 신왕(大武神王)의 왕자가 아닌가? " 하니, 호동은 첫 마디에 " 그러하옵니다. " 하고 대답하였다.
낙랑왕은 기꺼워하며 " 우리나라 도성에 가서 좀 쉬면서 풍광을 구경할 뜻이 없는고?" 하며 권하니, 호동도 기꺼이 그 말을 받아, " 본래 유람차 궁을 떠나 헤매는 몸이오이다. 그리 거두어 주시면 그 고마우신 뜻에 보답할 길을 가이 알지 못하겠나이다. " 하며, 낙랑궁으로 함께 오게 되었다.
낙랑궁에서 호동왕자는 매일같이 후대를 받았으며, 그 곳의 공주이 낙랑공주와는 백년가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호동은 공주와의 달콤하 사랑도 잠시 이별해야 할 때가 왔다.
" 공주. 내가 나라를 떠나온지 여러 달이 되었구려. 아바마마께서도 걱정하실 테니 그리 알고 조금만 기다려주오. 우리나라에 돌아간 다음에는 아바마마의 허락을 받아서 반드시 그대를 맞이해 가겠소. "
공주는 호동에게 매달려서 눈물을 흘렸다. 공주에게는 이 이별이 어쩐지 영원의 이별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호동왕자가 낙랑궁을 떠나 고구려로 돌아간 다음에 낙랑공주는 매일처럼 근심으로 나날을 보냈다. 자나깨나 그녀가 기다리는 것은 호동에게서의 소식이었다.
이윽고 호동에게서 사자(使者)가 왔다. 공주는 뛸 듯이 기뻐하며 사신을 맞이하였으나, 그 사자가 낙랑공주에게 넘겨준 것은 너무나도 뜻밖으 내용이 적힌 밀서(密書)였다.
" 공주, 낙랑의 무기고(武器庫)로 들어가서 고각(鼓角)을 찢어주오. 그리하면 정중한 예로써 그대를 맞이하겠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그대를 맞아들일 수가 없소. "
그 글에 씌어있는 북과 피리는 흔히 볼 수 있는 그러한 북과 피리가 아니라, 유서있는 물건이었다. 그 고각은 적(敵)의 내습(來襲)이 있을 때마다 저절로 운다. 누가 두드리지 않고, 누가 불지 않아도 적국의 군사가 쳐들어 올 때면 스스로 우는 보물인 것이다. 낙랑공주의 마음은 터질 것만 같았다.
나라를 버리느냐, 지아비를 따르지 않느냐. 둘 중에 어느 한 길을 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사랑에 지고 말았다. 드디어 결심하고 나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무기고로 스며들어가서 호국(護國)의 국보인 두 개의 악기를 자기의 손으로 부수고야 말았다. 공주는 곧 호동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반갑게 맞이해 갈 날을 고대했다. 그러나 일은 공주의 소망대로 되지 않았다.
호동은 대무신왕에게 낙랑의 소문난 북과 피리가 없어졌음을 말하고, 군비를 갖추어 낙랑을 쳐들어가 승리하였으며, 낙랑왕 최리는 고각을 부순 것이 딸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고는 분노가 대단하였다. 최리는 단칼에 공주를 베어 버리었다. 그리고 곧 고구려의 정병 앞에 항복하고 말았다. 왕자 호동의 공은 이 싸움에서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러나, 호동도 공주를 잃은 것이 슬프기 그지 없었다.
호동은 대무신왕의 차비(차비)의 소생이었다. 그래서 호동이 본시 잘났고, 게다가 뛰어난 공까지 세웠기에 원비(元妃)는 그를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원비는 궁리 끝에 호동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 말았다. 원비는 " 호동은 예를 잊고 소비를 냉대할 뿐만 아니라, 거의 어지럽게 하려 하옵니다. " 라고 하기도 하고, " 상감마마, 만약 소비의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 하시오면, 그 징조를 살펴보옵소서. 소비의 말이 거짓일진대는 스스로 죄를 입고 벌을 받겠나이다. " 라고 하였다. 왕비의 끈질긴 말에 왕도 의심하게 되어 호동에게 죄를 내리려 하였다. 그 사실을 안 호동의 근신(近臣)들이
" 어찌하여 그 억울함을 상감마마 앞에 밝히려 않나이까 ? " 하고 권하였으나 호동은,
" 그대들은 모르는 소리다. 만약 내 스스로 나아가 이 일의 진부를 가려내면 어마마마의 악덕함을 밝히는 바가 되고 따라서 아바마마에게 걱정거리를 드려서 그 마음을 괴롭게 만들 게 될 것이니, 이를 어찌 효도라 하겠느냐. "
하고 말한 뒤 칼을 물고 스스로 꽃다운 젊은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때가 11월, 공주의 사랑을 짓밟은 지 불과 몇 달 뒤의 일이었다.
◆ 해 설
고구려 대무신왕의 왕자 호동에 관한 이야기로, 인물전설의 하나이다. <삼국사기> 권14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조에 나오는 기록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그 하나는 "낙랑에 들어가 낙랑공주와 결혼을 하고 신기(神器)인 고각(鼓角)을 낙랑공주로 하여금 부수게 하여 낙랑을 쳐서 이겼으나 공주는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원비가 호동을 시기하여 왕에게 참소하여 호동이 자살"하고 마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본 설화는 극적인 구성으로 되어 있어 , 그것 자체가 훌륭한 문학작품이다. 특히 낙랑으로 대표되는 한족과 고구려족 간의 갈등을 신화, 전설에 나오는 신기 쟁탈의 화소(話素)의 원형에 넣어 형상화하였다는 것은 작품으로서도 빈틈없는 구성이다. 또한 호동의 비극적인 일생과 낙랑공주의 로맨스는 후대 문학 작품의 훌륭한 소재가 되었다. 현대에서도 희곡, 시나리오, 소설 등에서 이 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이 창작되고 있음은 앞에서 말한 사실을 충분히 대변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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