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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 여운형

by 휴리스틱31 2021.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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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운형 >

 

1886(고종 23)1947. 독립운동가?정치가.

 

가계

본관은 함양(咸陽). 아호는 몽양(夢陽). 경기도 양평 출생.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그뒤 충주의 진씨(陳氏)와 재혼하였다.

 

활동사항

15세에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사립흥화학교(私立興化學校)를 거쳐 1903년 다시 관립우체학교(官立郵遞學校)로 옮겼으나 중퇴하였다. 그뒤 1907년부터 시작한 성경공부를 통해 기독교를 믿게 되었고, 1908년경에는 미국인 선교사 곽안련(郭安連)목사의 도움을 받아 1909년 사립기독광동학교(私立基督光東學校)를 세웠다. 1911년 평양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18년 상해에서 청년 동포들을 규합하여 민단(民團)을 조직, 광복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여 총무간사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193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가담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였으며, 그해 12월 일본이 우리나라의 자치문제를 타진해오자 동경으로 건너가 일련의 회담에 참석하였다. 1920년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근로자대회(遠東民族勤勞者大會)에 참석하였고, 상해에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였다. 1922년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하였으며, 1924년 중국국민당에 가입, 남방혁명군(南方革命軍)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29년 영국의 식민정책을 비난하였다가 영국경찰에 체포된 후 일본으로 인도되어 3년간 복역하고 1932년 출옥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해 항일투쟁 하였으며, 1936년 손기정(孫基禎)선수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되자 사장직을 물러났다. 19449월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의 지하조직을 전국적으로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여 광복에 대비하였으며, 10월에는 양평 용문산에서 농민동맹(農民同盟)을 조직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으며, 9월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스스로 부주석에 취임하였다. 10월에는 인민당(人民黨)을 결성하여 당수직에 앉았다. 인민당은 인민공화국 선포,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미소공동위원회 등에 대한 노선에서 공산당과 보조를 같이하였고, 또한 19465월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났을 때 좌익을 대표하여 중간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좌우합작운동이 우익의 강력한 반탁운동과 공산당의 반대에 부딪히자 북한공산당의 지령을 받은 조선인민당의 비여운형계는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을 결성하였다. 이에 여운형은 19461015일 신민당과 공산당과의 공동명의로 3당합동 결정서를 발표하고 1112일 사회노동당(社會勞動黨)을 조직하였다. 그후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 됨에 따라 1947524일 사회노동당을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으로 개편하고, 밖으로는 영국 노동당좌파의 노선을, 안으로는 좌우 중간노선을 모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선은 현실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강화시켜주기가 어려웠다.그는 19477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이라는 19세 소년의 권총사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여운형 연보

 

 

1886.5.25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서 출생. 소론 양반 가문의 9대 종손. 본관은 경남 함양

 

1891-1900 향리에서 한문 수학

 

1894 동학농민전쟁으로 단양으로 피난

 

1899 유세영의 장녀와 결혼

 

1900 족숙 呂炳鉉(미국유학, 배재학당 영어교사)의 영향으로 배재학당 입학

 

1901 흥화학교로 전학

1902 관립우체학교 입학

 

1903 상처, 조부별세

 

1905 을사보호조약에 자극되어 관립우체학교 자퇴. 모친별세. 재취.

 

1906 부친 별세. 향리에서 한학에 열중.

 

기독교 장로회 클라크목사를 만남.

 

1907 향리에 클라크목사의 도움으로 기독교 광동학교를 세움

 

1908 부친 3년상을 마친후 단발하고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 노비를 해방. 상경, 클라크목사의 교회에서 조수로 일함(기독교 입교). 대한협회 주최 안창호 연설 [대한의 장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음, 자신도 안창호와 같은 웅변가가 되겠다고 결심.

 

1910 강릉 초당의숙의 교사로 초빙됨(관동학회 남궁억의 알선). 병합후 일본경찰에 의해 학교폐쇄.

 

1911 다시 서울로 올라와 클라크목사의 일을 도움. 클라크목사의 권유로 평양 장로교신학교에 입학(2년간 수학)

 

1913 서간도 신흥무관학교를 방문했으나 낙담하고 귀국. (동생 여운홍 도미)

 

1914 중국 남경 금릉대학 영문과에 입학, 3년간 공부

 

1917 상해로 가서 미국인 핏취가 경영하는 협화서국 위탁판매부주임으로 취직(2년간). 상해에 교민들의 자제교육을 위한 仁成學校를 세움. 미국등지로 가는 한인유학생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

 

1917

 

2仁成學校 창립(조서1, 263) 이후 중국혁명에 관여하기까지 9년간 교장을 맡음. 1920년 여운홍이 상해에 오자 운홍에게 교장자리를 넘겼다.

 

1918

 

8월 여운형, 장덕수, 조동우, 김철, 선우혁, 한신교 등 6인 신한청년당 조직에 착수

 

11월 미국대통령 특사 크레인을 상해에서 만나 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보라는 말을 들음. 장덕수와 함께 윌슨과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를 작성하여 크레인에게 전달을 부탁.

 

11월 하순 신한청년당 조직

 

1919

 

1월 북경에 있던 김규식을 상해로 불러 장덕수, 신석우 등과 협의하여 김규식을 평화회의에 조선대표로 보내기로 결정함

 

1월 신한청년당 간부 조직 마침. 여운형, 해산시까지 총무를 맡음

 

1월 여운형은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이동녕, 박은식, 문창범, 조완구 등을 만아 독립운동에 진력을 다하기로 협의하고 3월 하르빈을 거쳐 상해에 귀환하면서 국내 3.1운동의 소식을 들음

 

4월 상해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 임시의정원 경기도 대표로 참석. 외무부위원장에 취임

 

9월 상해고려교민친목회; 단장을 맡음. 1912월 대한교민단으로 개칭

 

8월 중국 강서성 고령(서양인 피서지)에 가서 서양인에 대하여 조선독립운동을 선전 중 상해 중국인 기독교청년회 총무 미국인 아이치로부터 일본정부로부터 초청이 왔다는 전보를 받았으나 갈 생각이 없다고 답전함. 9월 상해에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일본인 木村淸次라는 목사를 만남. 목촌은 척식장관 古賀박사가 군을 동경에 초청하여 조선문제에 대하여 토의하고자 한다고 말함. 여운형, 개인으로서는 찬성하나 동지들과 의논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임시정부 당국과 협의. 이동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찬성. 10월 중국기독교 청년회에서 목촌목사와 義田 일본기독교청년회 총무, 서양인 신문기자 3, 중국인 기독교청년회 총무 曺雪庚, 이광수 등과 회합하고 동경행을 논의, 모두가 찬성. 프랑스총영사도 권유. 목촌, 고하에게 전보를 쳐서 신변보장의 회전을 받음. 11월초순(20일경?) 崔謹愚, 申尙琓, 義田, 木村과 동행하여 일본으로 출발. 門司에서 장덕수와 합류. 도중 神戶에서 田中대장과 면회. 동경에 도착 제국호텔에 투숙.

 

동경에 약 3주간 체류하면서 고하와 4회 회견, 田中대장과 2회 회견, 水野정무총감과 1, 床次內相1, 野田遞相1, 수상과 1, 吉野박사와는 수회, 永井柳太郞1회 회견. 신문통신 기자 100여명을 제국호텔에 초대하여 연설. 조선유학생의 환영회 및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에서도 강연. 12월 중순 상해에 귀환. 1213일 민단사무소에서 보고연설.

 

1920

 

116일 여운형, 안창호를 방문하고 러시아 과격파와 연락할 의견을 진술, 자신이 직접 갈 것을 희망. 직후 로시아장군 포타프를 만남, 포타프로부터 여운형은 일제의 응견이 아니냐는 말을 들음, 여운형 이를 이동휘쪽의 고자질로 봄.

 

겨울 여운형, 한형권, 안공근 3, 임정 대표로 모스크바에 가기로 되었으나, 이동휘는 한형권만을 비밀리에 파견함

 

122일 임정 국무회의에서 러시아국에 외교원을 밀송할 것을 결정, - 여운형, 안공근을 보내기로. 123일 여운형, 이를 전달받음.

 

2월말-3월초 산동성에 가서 독일인들과 접촉함.

 

5월 남방에 가서 진형명군의 움직임을 살피고 옴

 

5월경 한형권, 이동휘의 지시로 모스크바행한 것이 문제가 됨(한형권 4월말쯤 모스크바행)

 

5월 보이틴스키, 상해에 옴

 

7월초 여운형, 김복, &#51324;프와 함께 진형명을 만나 레닌정부에 요구하여 시베리아의 지대를 얻어 한인으로 군영을 조직하여 6사단을 양성하여 장래 중국군인과 합동하여 북경정부를 전복하고 후에는 한국의 독립을 오나성케 하자는 약속을 하고 안창호를 책임자로 추천함.

 

여름(8월경?) 상해에서 김만겸을 통해 보이틴스키와 회견, 이동휘의 고려공산당(공산주의자그룹)에 참여, 번역부 위원을 맡음

 

816-20일 상해교민단장의 자격으로 북경에 가서 안창호 등과 함께 미국하원의원단을 만나 독립후원을 요청

 

9월 북경에서 러시아에서 처음 대표로 온 유린(Yurin)을 만남

 

10월 여운형은 이동녕, 이시영, 신익희 등의 후원 하에 안창호의 흥사단에 대응한 노동당을 창설(?)

 

11월 여운형의 발기하에 조선인의 문화향상과 독립기성을 목표로 한 新韓文化同盟黨을 조직(?)

 

12월 고려공산당 대표로 모스크바에 갔던 김립 상해에 귀환, 소련정부로부터 받은 돈에 대하여 허위보고. 여운형 등 사실을 추궁. 이에 이동휘, 김립, 玄鼎健 등 고려공산당으로부터 탈당.

 

12월 여운형, 상해민단장 사임

 

1921

 

1월 광동에 가서 광서회관에서 연설, 광동에 간 것은 남방정부를 축하하고 광동의 중국인자산가들과 접촉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얻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5월 이동휘 등 고려공산당 대표회의를 소집,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조직. 이에 반감을 품은 반이동휘파는 이르크츠크에서 대표를 소집,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을 결성. 그해 여름 안병찬은 상해에 돌아와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를 조직(책임 김만겸, 위원 여운형, 조동우, 당원 金柱, 임원근, 박헌영, 최창식, 김원경, 양헌, 안공근등), 1주일에 한번씩 김만겸의 집에 모여 임시정부 후원에 대하여 토의.

 

이르크츠크파는 자금이 없어 여운형이 중국주재 국제공산당 대표 보이친스키를 만나 사정을 호소하여 선전비로서 월 100식을 받게 됨. 이 돈으로 그들은 공산주의독본 등을 번역하여 만주, 조선등지에 배포함.

 

5월 연설회를 통해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대회를 제창. 안창호등, &#12391;국민대표회의 상해기성회&#12392;를 구성, 여운형 조직위원에 선출됨.

 

7월 상해, 북경, 천진의 국민대표회의 기성회, 국민대표회 주비회를 구성. 여운형, 집행위원에 선출됨.

 

여름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상해에서 사회주의연구소를 조직, 여운형은 이에 참여치 않음

 

가을 황흥 부인, 황종한, 주검추, 황경완(중국측)과 여운형, 조동우, 윤현진 등이 발기하여 中韓互助社를 창립, 25년 봄까지 회합(부의장에 여운형).

 

11월 하순 김규식, 나용규와 함께 상해를 떠나 장가구를 거쳐 몽고사막을 건너 서시베리아철도로 221월 중순 모스크바에 도착, 원동민족대회에 참가함.

 

1922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원동민족대회)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참가, 대회의장단에 선출됨. 레닌과 트로츠키 등을 만남.

 

410일 상해에 귀환, 신한청년당에 경과보고.

 

7월 국민대표회의측과 임정측의 의견 절충을 위해안창호와 함께 시사책진회를 열었으나 성과없이 끝남.

 

1028일 상해에서 이유필, 조상섭, 최석순, 김구, 조동우, 오영선 등과 함께 韓國勞兵會를 창립(이사장에 김구, 교육부장에 여운형)

 

겨울 한형권이 모스크바에서 보류금 20만원을 가지고 상해에 귀환, 여운형, 안창호 등 이를 설득 이 돈으로 국민대표대회 경비로 쓰기로 함

 

1923

 

1,2월경 고려공산당 해산. 이후 이르크츠크파 상해지부위원 가운데 여운형만이 상해에 남아있게 됨.

 

3월 국민대표대회 소집, 6월까지 계속. 여운형은 남경한인학우회 대표로 참석

 

4월 여운형, 국민대표회의에서 &#12391;댜독립당&#12392;결성안을 제출.

 

3,4월경 신한청년당 해산(1924년에 해산?)

 

5월 한국노병회 제9회 정기이사회, 장교 및 공병기술양성의 견을 축탁하기 위하여 낙양에 있는 吳佩부에 여운형을 대표로 파견할 것을 가결

 

1924

 

33일 상해교민단장으로 다시 선임됨(이유필의 후임)

 

8월 여운형, 여행을 위해 북중국으로 출발, 922일 상해 귀환

 

12월 인성학교장을 겸임함

 

1925

 

4월 국내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얻기 위해 국제공산당에 가는 조봉암의 국제공산당 파견대표 보이친스키에 조선공산당 승인을 국제공산당에 교섭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이를 실행하고, 부영사 윌데(Wilde)에게 소개하여 여권을 받도록 알선해 줌.- 여운형, 조선공산당 승인에 관하여 청탁한 적은 없다고 주장.

 

4월 국민정부 러시아인 고문 보로딘의 부인을 상해에서 만나 중국혁명에 적극 참여해줄 것을 권유받고 소개장을 받아 4월에 북경 대사관에 가서 카라한을 만나 중국혁명에 참여할 것을 약속, 대신 타스통신에서 근무하기로 함. 5월부터 상해에서 근무.

 

6월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중앙간부 瞿秋白과 만남, 중국공산당의 특별회원이 됨.

 

여름 상해 러시아부영사 웰테의 사무소에서 러시아에서 귀환중이던 일본공산당원 佐野學을 만나 의견교환.

 

7월 상해에서 중국인들이 발기한 피압박민족연합회에 참여.

 

8월 김규식, 최창식과 함께 상해 三一公學을 설립

 

10월 조선공산당 제1회 모스크바공산대학 파견유학생 권오직 등의 방문을 받고 이들을 부영사 윌테에게 소개하여 여권을 받아 블라디보스톡행 노농어용선에 승선하여 도항할 수 있게 함.

 

1926

 

1월 광동에 가서 국민당 제2회 대표대회에 참석, 이때 汪精衛, 보로딘과 보로딘의 집에서 회합을 갖고 국민당 지도책에 대하여 협의. 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연설.

 

2월 여운형,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임되었으나 사퇴.

 

6월 안공근등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촉진회를 조직(회장 안공근)

 

7월 안창호 등과 함께 곤경에 바진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조직

 

가을 조선 모플 책임자 金炯斗26년 가을과 27년 가을 두차례에 걸쳐 상해에서 만남

 

11월 국민당군, 武昌을 점령, 보로딘으로부터 무창으로 먼저 가라는 전보를 받고 무창에 가서 보로딘, 국민정부 위원이 참석한 20만군중의 환영회에 참석, 내빈 자격으로 축사

 

겨울 漢口에서 보로딘을 만나 한인독립운동자를 상해 또는 한구에 소집하여 중국혁명원조문제를 토의. 보로딘 경비 5만원 제공을 승락, 국민정부위원회에서도 의견서를 제출하라고 함. 상해에 돌아와 임시정부 외무총장 조소앙과 협의, 준비에 착수하여 274월 의견서를 휴대하고 한구에 가서 국민정부위원회에 의견서를 제출하였으나 당시 국민정부와 러시아인,공산당측의 알력이 심하여 7월 러시아인 및 공산당이 구축되는 사태가 일어나 의견서제출도 하등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1927

 

1월 무창에서 상해에 귀환

 

2-3월 국민군이 浙江부근까지 오자 이를 틈타 상해에서 국민당대표 검永建, 공산당대표 瞿秋白, 러시아군사고문 등과 밀의, 국민당원, 각노동 학생 합동의 제3차 폭동계획을 협의, 이를 실행에 옮기게 함

 

4월 국민군 상해점령후 장개석의 노동군의 무장해제 등 반동정책에 따라 5,6월중에는 타스통신사에 부칠 번역 및 첩보등에 전념, 7,8월에 이르러 보로딘, 칸니등 러시아인들이 본국으로 철수하자 상해 국민당좌파 陳公博과 연락하고 있을뿐이었으며, 11월에 상해부영사 웰테가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2천원을 맡겨놓으면서 타스통신사업무를 계속해줄 것을 부탁, 286월까지 이 업무를 계속함.

 

5월 여운형의 집에서 홍남표, 구연흠 등이 모여 중국공산당 상해한인지부를 결성, 여운형은 참여치 않음.

 

여름 상해에서 러시아로 철수하는 보이틴스키와 만나 조선공산주의운동에 대하여 의견 교환. 보이틴스키, 조선공산주의운동의 파쟁성에 염증, 귀국한 뒤에도 조선공산당에는 적극적인 후원을 하지 않겠다고 말함. 여운형도 공감.

 

1928

 

봄 상해에서 복단대학에 명예교수로서 체육부를 담당.

 

3월 복단대학 축부를 인솔하고 싱가포르, 마닐라 등을 순회, 각지에서 30회에 걸쳐 연설(정치적 강연은 마닐라에서 1회뿐)

 

1929

 

4월 상해에서 이르크츠크파 책임자 여운형과 洪南杓, 曺奉岩, 具然欽등 약15명은 항상 여운형집에 모여 여운형을 통해 중국측과 연락을 도모함

 

7월 상해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됨.

 

1930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 개시, 3년 징역형언도받음.

 

19327월 대전감옥에서 가출옥

 

19333월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

 

1934년 조선체육회 회장에 취임.

 

19368월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 폐간되고 사장직을 물러남.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김성수, 이만규, 미국유학생들에게 일본패망을 언명함.

 

1938년 미나미총독 비서 시오하라, 보호관찰소소장 나가사키, 윤치호, 한상룡 등의 전쟁협조 요구를 단연 거절.

 

1940년 동경에 체류하면서 세계정세를 포착하여 유학생을 규합하고 해방될 조국의 인재양성을 위하여 활동하다. 3월 육군성 병무국장 다나카 다까요시소장, 오오까와 슈우메이, 고노에 후미마로 등을 만남.

 

1942년 해방을 예견, 張權에게 치안대 조직을 연구케하다.

 

12월 일본에서 귀국 도중, &#12391;유언비어 유포혐의&#12392;로 시모노세키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재차 투옥되다.

 

194363년간 집행유예로 출옥.

 

11楊州 奉安으로 소개 명목으로 은거. 동지연락과 청년지도에 진력.

 

19445월 정무총감 엔도오가 봉안에 와서 중국행을 종용, 이를 거절함.

 

8월 조동우, 현우현, 황운, 이석구, 김진우 등과 함께 朝鮮建國同盟 지하조직을 전국으로 조직하여 해방에 대비하다.

 

10월 양평 용문산에서 농민동맹을 조직(김용기 등과 함께).

 

1945

 

5월 연안 독립동맹 조선의용군과 협동작전을 전개키 위해 박승환을 사자로 파견.

 

8.15 엔도 정무총감과 회담

 

8.16 건준 결성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연설, 조선총독부정무총감 엔도와의 회담경위를 보고

 

8.18 건준위원장 여운형, 건준의 성격과 사명에 대하여 담화

 

9.1 안재홍, 국민당 결성

 

9.2 건준, 선언과 강령을 발표

 

9.6 한민당 발기대회

 

건준,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조직, 여운형 인민공화국 부주석으로 추대됨

 

9.7 송진우, 국민대회소집준비회를 개최

 

9.8 한민당발기인, 인정지지와 인공비난 성명서 발표

 

9.9 미군 입경

 

9.10 안재홍, 건준 탈퇴 성명

 

9.14 인민공화국 선언, 정강, 시정방침, 정부부서 발표

 

9.16 한민당 결당식

 

9.24 5개정당 통합으로 국민당 결성

 

10.1 여운형, 기자단과 회견하고 인민공화국 탄생경위 등 소감을 개인자격 으로 언명

 

10.3 여운형 중앙인민위원회 12인 전형위원으로 피선

 

10.4 여운형 하지중장과 회담

 

10.5 각 정당 지도자들 양근환의 주선으로 각 정당단체의 대동단결과 신정권 수립에 관하여 간담회

 

군정청, 김성수등 11인을 군정장관고문관으로 임명, 여운형도 포함

 

10.7 건준, 해소식

 

10.10 군정장관 아놀드,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군정부이외의 어떤 정부도 인정할 수 없다고 발표

 

인민공화국, 군정장관의 발표문에 대하여 반박성명을 발표

 

10.12 4(건국동맹, 조공, 한민당, 국민당) 대표협의회 2차회담에서 통일전선 결성에 합력할 것을 논의

 

10.15 여운형, 군정청고문관의 사표를 제출

 

10.16 하지, 군정부만이 유일정부임을 천명

 

이승만, 귀국

 

10.17 이승만, 귀국일성으로 대동단결을 주장

 

여운형, 인민공화국 부주석의 자격으로 허헌과 함께 이승만을 방문 환영인사

 

10.18 여운형, 미군정청에 출두하여 아놀드로부터 인공을 해소하고 정당을 전환하라는 권고문을 받음

 

10.23 이승만을 중심으로 각정당단체대표 2백여명,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결성을 결의

 

10.26 이승만, 여운형, 안재홍과 통일전선 결성문제에 대하여 협의

 

10.29 여운형, 인민공화국중앙위원회측의 인공해소 불가입장을 아놀드군정장관에게 전달

 

10.30 박헌영, 통일전선 결성에 관한 조선공산당의 견해를 피력

 

10.31 건국동맹, 신탁관리 절대반대를 성명

 

이승만, 박헌영과 통일전선결성문제에 대하여 협의

 

11.1 인민공화국, 인공해체운운은 낭설이라고 발표

 

11.2 건국동맹, 임시총회에서 조선인민당으로 개칭할 것을 결의

 

독촉중앙협의회결성을 위해 각 정당단체대표가 회합, 여운형도 참석

 

11.3 조선공산당, 독촉에 대하여 조공의 임장을 밝히는 성명 발표

 

11.4 독촉, 4대국에 보내는 결의서를 발송

 

이승만, 독촉의 결의서에 대한 조공과의 차이점 등에 대하여 문답

 

11.7 이승만, 방송을 통하여 인민공화국 주석 수락거부를 밝힘

 

11.10 여운형, 인공문제로 아놀드와 면담

 

11.11 여운형, 아놀드와 면담

 

11.11 중앙인민위원회, 이승만의 인공주석 취임 거부에 대하여 담화

 

11.12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인민당 결당

 

11.12 여운형, 하지와 인공문제로 면담

 

11.15 박헌영, 하지 아놀드와 회담하고 군정에 협력하고 또 비판건의할 것을 표명

 

11.20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가 22일까지 열림, 인공 해체를 거부

 

11.23 대한민국임시정부요인, 환국

 

조선공산당 장안파, 재건파와 합동

 

11.24 김구, 귀국인사. 기자단과 회견

 

11.25 김구, 이승만과 요담

 

11.26 각도 대표인민위원, 임정 요인과 회견

 

11.27 김구, 각 정당수뇌와 요담, 여운형과도 만남

 

11.28 임정 정부주석, 인민공화국 입각설을 부인

 

11.30 여운형, 민족통일문제에 대하여 하지와 요담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 인공 국호변경 또는 해체문제에 대하여 결의문을 발표

 

12.2 임정요인 2차환국

 

1946

 

2.15 民戰 5인 의장단의 1인으로 선출됨

 

4월 평양행, 김일성 등과 회동

 

3-5월 미소공동위원회의 순조로운 진행에 전력을 기울임.

 

58일 미소공위 무기휴회

 

6월 김규식 박사와 좌우합작위원회 구성

 

7.17. 신당동 산에서 絞殺 직전 도주.

 

8.16 3(인민당, 신민당, 공산당) 합당으로 인민당 해체.

 

9월 재차 평양행.

 

10월 자택 문전에서 납치되어 소나무에 묶임.

 

10월 좌우합작 7원칙에 합의

 

1947

 

1-2. 사회노동당 해소와 인민당 재건 준비에 착수.

 

3.17. 괴한이 침실 폭파

 

3-4. 경상남북도 순회강연중 인도 세계 민족대회 참가문제로 미국총영사 랭던의 전화를 받고 돌연 귀경.

 

4.3. 혜화동 로터리에서 승용차 피격

 

5.21. 미소공위 재개

 

5.24. 근로인민당 해체.

 

6월 좌우합작과 미소공위 성공토록 적극 활동.

 

7.19. 정오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에 피격되어 62세를 일기로 사망.

 

인물로 읽는 남북현대사(1)

 

󰡐좌우합작 민족화합의 정치지도자󰡑 몽양 여운형(呂運亨)

 

정병준(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여운형을 둘러싼 논란

한국현대사의 우여곡절을 겪은 정치인 가운데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 1886~1947) 만큼 찬반과 훼예(毁譽)가 양극적인 인물은 없다. 그가 살았던 당대에는 물론 사후에도 그를 둘러싼 논쟁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에게는 정치인을 이념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수사가 동원되었다. 공산주의자, 민족적 민주사회주의자, 좌경적 사회주의자, 민주적 사회주의자, 민족적 사회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각양각색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그에게 적용되었다. 그에 대한 논란은 주로 해방후 그의 행적과 관련되어 증폭된 것이었다. 당시 좌파의 인물평에 따르면 여운형은 팔방미인형의 정치지도자였고 그 반면에는 강철의 혁명가 박헌영이 위치했다. 미군정의 비유법에 따르면 여운형은 병약한 약골 김규식의 파트너인 은도끼였다.

 

때에 따라 여운형에 대한 각 정파의 입장은 극에서 극으로 치달았다. 좌파는 혁명동지로 출발해서 회색적 기회주의자, 친미 허수아비에 이르는 극단적 평가를 오르내렸고, 미군정 역시 온건 민주주의 인사로부터 친공 친북주의자, 기회주의적 공산주의자, 친일 브로커에 이르기까지 양립할 수 없는 인물평을 내렸다. 어떻게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극단적이며 논란 그 자체일 수 있는가? 해방후 여운형은 양극단으로부터 논란과 비난의 표적이 되었고, 역사상 가장 많은 테러의 표적이 되어 마침내 생을 마감했다. 도대체 여운형은 누구인가?

 

항일과 건국준비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난 여운형이 겪은 20세기 한국사는 말 그대로 비극적이었다. 철들 무렵 봉건왕조는 몰락했고,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조국해방을 위해 싸워야 했다. 그가 잠시 맛본 해방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국토분단과 민족분열의 와중에서 그의 운명은 암살로 예정되어 있었다.

 

일제시기 여운형의 활동은 1929년을 기점으로 크게 두시기로 나뉜다. 첫 시기 여운형의 주활동무대는 중국이었다. 일제의 강제합병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여운형은 1917년 신한청년당 결성과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을 필두로 상해임시정부 외무차장, 일본 제국의회에서 조선독립 호소(1920) 등 외교적 방법에 의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파리강회회의 실패를 겪은 후 여운형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열과 가까워졌다. 상해의 초기 공산주의그룹에 가담하기도 했던 여운형은 공산당선언을 최초로 번역한 한국인이었다. 1921년 모스크바 극동노력자대회에 참가해 레닌 트로츠키 등을 만난 여운형은 이후 중국혁명운동에 가담,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양당의 특별당원이 되었다. 1929년 상해에서 마흔 네 살의 나이로 검거된 여운형이 출감한 것은 1932년이었다.

 

두 번째 시기의 활동무대는 국내였다. 1933년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 되었고, 이 신문은 베를린올림픽 우승자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최초로 주도했다. 이 시기 여운형은 언론인으로서 그리고 조선체육회 회장이자 청년들을 사로잡던 당대의 웅변가로 합법공간에서 활동했다. 일제시기 마지막 여운형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비밀스런 조직을 꾸리고 운영했다. 비합법 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은 1943년에 조선민족해방연맹이란 이름으로 출범했는데, 이는 각계 각층을 망라했을 뿐 아니라 국외 항일단체와도 연계된 반일민족통일전선이었다. 건국동맹은 해방후 여운형이 정계의 핵심으로 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건국동맹은 명칭 그대로 일제의 패망을 당연한 전제로 삼아 건국을 준비한 국내 유일의 조직체였고, 이런 건국준비와 항일투쟁을 2년 이상 유지한 연륜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일제시기 여운형과 관련해서 별다른 논란이나 의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일제시기 여운형의 활동과 위상은 탁월하긴 했으나 독보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해방후 여운형은 준비된 조직력을 바탕으로 건국준비위원회를 꾸렸고, 출범 한달만에 남한 145개 시군에 지부를 둔 건준은 한국인들이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정치 경제적 이해와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되었다. 해방후 한국정치의 폭발성을 표현하는 정당 사회단체의 족출(簇出)과 대중의 혁명적 진출은 해방이라는 계기를 향도한 건준이라는 도약대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여운형은 곧바로 남한의 핵심적 지도자로 등장했다.

해방후 여운형의 활동 가운데 가장 눈여겨 볼 대목은 그가 가는 곳에서 민족통일이 논의되었고, 그는 모든 민족통일전선 결성시도에 빠지지 않는 대표주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해방후 최초의 민족통일전선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 건준-인공의 합작의 중간역, 5당 코뮤니케의 주체, 좌우합작운동의 선봉, 5차례의 방북이 여기에 해당한다. 해방후 그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여운형의 지지자들은 좌우합작운동만을 과도하게 미화하는 반편, 비판자들은 인공활동과 민주주의민족전선 활동 등 좌익활동만을 과도하게 부각시켜 그의 친공산주의적 노선을 드러내는데 집착했다. 나아가 정보당국에 고용된 익명의 필자는 여운형의 방북과 직계 가족의 월북을 거론하며 여운형이 북한의 5열이었다는 단행본을 간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운형이 해방후에 걸어간 노선은 짧게는 해방직전의 건국준비활동, 길게는 1920년대 상해의 망명시절부터 형성된 역사적 근원을 갖고있는 것이었다. 사상이나 노선만을 놓고 볼 때 여운형의 입장은 ()식민지시대를 경험한 지식인 혹은 정치가가 선택하게 되는 이념적 모호성을 대표했고 특정한 사상 이념의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때문에 여운형을 평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의 사상적 지향이나 이념적 경향성이라기 보다는 그의 실천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좌우합작 남북연합의 새로운 조명

지금까지 여운형의 해방후 활동과 관련해 찬반 양론자가 모두 주목했던 것이 1946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이후 본격화 된 좌우합작운동이었다.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는 일제시대 신간회의 민족 통일단결정신을 계승한 것이며 1948년의 남북연석회의로 이어지는 민족통일운동의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이었고, 부정적인 평가는 미군정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공작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종래에 중간좌파 여운형과 중간우파 김규식이 주도한 좌우합작운동은 단순히 남한 내에서 좌익과 우익의 연합을 목표로 한 것이며 좌익과 우익의 물리적 결합 혹은 동수연대의 방안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제로 좌우합작운동은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구체적 목표를 위한 합작이었고, 그 속에는 남한 내 좌우합작의 완성이라는 하나의 목표와 이에 기초한 남북연합이라는 또다른 목표가 존재하고 있었다.

즉 좌우합작운동은 본질적으로 미소공위 재개를 위한 남한내 좌우파의 합작, 이에 기초한 남과 북의 연대연합이라는 두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좌우합작남북연합으로 통일독립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전혀 논의되지도 주목받지도 못한 지점이다. 1946년의 시점에서 남북연합의 구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1948년의 남북연석회의와는 달리 이 시점의 남북연합 구상은 실현가능성이 높은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소공위 재개와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제한된 목표를 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1946년에만 5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했고, 김일성김두봉 등과 십여 차례 이상 서신교환을 가졌다. 또한 여운형은 소련군 사령부의 고급장교들과 북한 정치지도자들과도 접촉했다. 이들 사이에선 남북통일문제가 당연히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여운형을 만난 소련군 사령부는 그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문서를 남겼다. 남북연합은 단순한 구상의 수준에 머문 것이 아니라 구체적 시도와 접촉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다.

 

물론 남북연합은 남한 내 좌우합작의 완성에 기초해야 본격화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좌우합작운동의 성격변화와 맞물려 공개적전면적으로 논의되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하지만 여운형의 암살이후 그와 함께 남북연합을 추진했던 김규식이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함으로써 그 경험적 유산이 이월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좌우합작운동의 내용적 핵심이 좌우합작남북연합이었다는 점은 새롭게 평가될 필요가 있다. 현재 이 부분에 대해서도 남과 북의 견해차이가 존재한다. 북한은 좌우합작운동은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여운형과 김일성의 연대를 강조하는 입장을 취하는 반면, 남한은 김일성과의 접촉은 가급적 비켜가며 좌우합작운동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좌우합작과 남북연합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진보적 민주주의자의 길

해방직후 여운형은 단지 좌우합작 부분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층위에서 주목할만한 역할을 수행했다. 여운형은 해방이후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독립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의 대립, 좌익과 우익이라는 사상이념적 대립, 남한과 북한이라는 지역적 분립이라는 세가지 층위의 대립구도를 극복해야 가능하다는 판단을 갖고있었다. 이에 따라 여운형은 좌익내부, 좌익-우익 간의 합작, 미군정과 소군정과의 관계, 그리고 남북관계의 차원에서 활동했다. 여운형은 좌익 내부의 통일에도 기여했지만, 분열에도 일조한 것이 사실이며 한편으로는 우익진영과 합작을 논의한 유일한 좌파였다. 미군정에 드나들었지만 소군정과도 접촉했으며, 때에 따라 미소 양측으로부터 정치적 유혹을 받은 유일한 남한 정치인이었다. 여운형에 대한 지지와 비판의 양론은 이러한 다양한 층위의 활동 중 일부분만을 과도하게 강조한 데서 극단적으로 입장이 갈라졌다.

 

과연 여운형은 정치적 기회주의자였던 것인가? 해방이후 암살(1947. 7.19)에 이르기까지 여운형의 활동은 미-, 좌우, 남북간에 걸친 폭넓은 것이었지만, 그 중심은 민족 내부의 통일단결 완성 혹은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집중되었다. 여운형은 민족 내부에 대해서는 민족통일을 중시하는 합리적 민주주의자의 입장을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점은 여운형이 합법 정치공간에서 대중정치가였다는 사실이다. 여운형은 비합법 조직가나 강철의 혁명가가 아닌 대중정치가였고, 선동가였다. 여운형은 원칙에 근거해 대화와 설득, 양보와 타협을 중시했으며,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바로 좌우합작운동이었다. 대외적으로 여운형이 강조한 것은 민족자주였지만, 여기서 여운형이 보인 모습은 극히 현실주의적 접근방식이었다. 내부적 힘을 강조해 외세를 경시하거나, 외세를 등에 업으려 하지도 않았다. 때에 따라 여운형이 미군정에 의해 흔들린 적이 있었지만, 자신의 말처럼 여운형은 미소를 한반도의 주인이 아니라 물러나갈 󰡐손님󰡑으로 대접하고 사고한 것만은 분명했다.

 

한편 미-, -, -북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여운형은 매우 다면적 접촉관계를 유지한 정치인일 수밖에 없었다. 대립갈등관계가 중첩되어 있던 해방후 정치상황에서 여운형은 동일한 이념적정치적 입장을 견지했다기 보다는 현실문제 타개방안을 중심으로 부동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를 중심으로 좌우합작-남북연합이 논의된 것은 그의 정치적 특징장점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반면 이데올로기의 진영 대립 속에서 공중분해될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여운형의 정치적 추종자와 반대파는 특정 사상이념으로 그의 사상적 지향을 규정했지만, 이는 규정자의 상대적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실제로 여운형의 사상적 지향노선은 이미 체계화되고 일관된 논리를 갖춘 사상에 기초했다기 보다는 민족통일독립을 위해 그의 말과 글, 활동을 집약시키던 형성과정에 놓여있었다. 여운형은 외세에 대해서 대외자주, 민족내부에 대해서 민족통일, 이념적으로는 친사회주의적이지만 비공산주의적인 경향을, 정치적으로는 합리성에 기초한 연합연대를 추구했다. 여운형에게 중요했던 두 가지는 민족자주와 민주주의였다. 여운형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닌 진보적 민주주의자로 규정했는데, 이는 여운형의 사상이념적 모호성 불명확성을 반증하는 한편 당시의 민족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특정 이념보다는 구체적인 실천이 중요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반대파나 비판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여운형의 모습은 분명 기회주의적인 정치가의 전형으로 비춰졌을 가능성이 있다. 미소라는 강대국의 영향력 속에서 좌우익의 이데올로기 전장이 되어버린 한국현대사는 󰡐진보적 민주주의자󰡑의 현실주의적 접근마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연구 저, 신준영 편, 2001 나의 아버지 여운형김영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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