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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한용운

by 휴리스틱31 2021.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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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

 

1. 한용운(호는 만해 : 1879-1944)

한용운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고향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통감과 서경을 통달했지요. 1896년 서당에서 교사가 되어 아동을 가르쳤고, 1899년에는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다가 세계 여행을 계획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으나 박해를 받고 돌아와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1904년 봄에 고향으로 내려가 여러 달을 머물다가 초여름 백담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습니다. 백담사에 머물면서 참선과 수도를 하던 그는 1908년 일본 여행을 통해 신문물을 접하게 됩니다. 동경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고, 유학중인 최린과 사귀었지요.

개인 및 사찰 소유의 토지를 일제로부터 보고하기 위해 측량 학교를 세우고, 송광사,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 대회를 개최하는 등 불교 개혁 운동과 독립 운동에 앞장선 그는 1911년 한일 합방의 울분을 참지 못해 만주로 망명을 합니다. 거기서 그는 독립군에게 민족 독립 사상을 북돋워 주고, 망명중인 박은식, 이시영, 윤세복 등과 만나 독립 운동의 방향을 논의했습니다. 1913{조선 불교 유신론}, 1914년에는 {불교 대전}을 간행하는 등 불교 대중화를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았지요.

문학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18년 윌간지 {유심}을 창간하여 편집자 겸 발행인이 되면서부터 이었습니다. 이 잡지에 논설과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 을 발표하고 이후 문학 창작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듬해 일어난 3.1운동에 민족 대표 33인의 하나로 참여하여 투옥된 그는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를 발표했습니다. 출옥 후에는 옥중시 무궁화를 심고자](1922), 장편 소설 {죽음}(1924), 시집 {님의 침묵}(1926)을 잇달아 간행했습니다.

1933년부터 서을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기거하면서 장편 소설 흑풍], [박명등을 짓고, 불교에 관한 논설과 수필을 발표하던 그는 1944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고 망우리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18세 때 의병에 가담하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기개 있고 고매한 삶은 오늘날까지도 민족 지도자요 선각자의 표상으로 살아 있습니다.

한용운의 시는 '소멸'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소멸의 시학 또는 모순의 시학이라고 합니다. 그에게서 모순은 소멸을 통해, 소멸은 다시 모순과의 변증법적 갈등과 화해를 통해 새로운 극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모순으로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님의 소멸이라는 극적인 발상을 했습니다. 그의 시는 식민지 시대의 억압을 극복하려는 치열한 사회 의식을 소멸과 모순의 변증법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또한 한용운은 고전적 정신과 불교의 가락을 체득해 은유적 방법을 확립하고, 현대시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모호한 상상과 퇴패적 감상주의가 주조를 이루던 당대의 시적 풍토를 뛰어넘어 그가 간 길은 귀중한 우리의 자산입니다. 그는 종교 의식과 예술 의식의 교차점에서 개인과 사회를 접맥시키고, 이것을 다시 역사 의식으로 고양시켰습니다. 이 점이 바로 한용운이 대시인으로 칭송되는 이유입니다.

 

 

 

2. 본 문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

한용운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南江)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矗石樓)는 살 같은 광음(光陰)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논개(論介),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同時)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느뇨. 죽지 않은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나는 황금의 칼에 베어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當年)을 회상(回想)한다.

술 향기에 목맺힌 고요한 노래는 옥()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귀신 나라의 꽃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가냘핀 그대의 마음은 비록 침착하였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아름답고 무독(無毒)한 그대의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 더욱 슬펐다.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게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조운(朝雲)이냐 울음의 모우(暮雨)이냐 새벽달의 비밀이냐 이슬꽃의 상징(象徵)이냐.

삐비 같은 그대의 손에 꺾이우지 못한 낙화대(落花臺)의 남은 꽃은 부끄럼에 취()하여 얼굴이 붉었다.

옥같은 그대의 발꿈치에 밟히운 강 언덕의 묵은 이끼는 교긍(驕矜)에 넘쳐서 푸른 사롱(紗籠)으로 자기의 제명(題名)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 볼 기회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으려면 나의 창자가 먼저 꺾어지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금석(金石)같은 굳은 언약을 저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나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한()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겨서 그대의 사당에 기념비를 세운들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노래에 '눈물'의 곡조를 낙인(烙印)으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에 제종(祭鍾)을 울린대도 나에게 무슨 속죄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 주지 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맹세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는 신에게 참회를 아니한대도 사라지겠습니다.

 

천추(千秋)에 죽지 않는 논개여,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는 웃음이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여.

 

 

 

3. 요점 정리

 

1: 논개에 대한 추모와 애정의 제시

2: 논개의 삶과 순국의 장면 제시

3: 논개의 묘에서 추모와 결의

4: 독립 실천의 의지를 다짐함

5: 논개를 추모하고 예찬함

 

글의 종류 : 자유시, 서정시, 애도(추도), 상징시

 

성격 : 상징적, 묘사적, 영탄적

율격 : 유장(悠長)한 산문적 리듬(4음보의 율격적 특성이 가미됨)

 

어조 : 추모, 예찬의 비장한 목소리

태도 : 성찰적, 실천적 자세

표현 : 불교적 깨달음을 전제로 역설법이 사용되었음.

인과적 서술로 실천적 의지를 효과적으로 부각함.

다양한 종결 어미를 구사하여 폭넓은 감정을 드러냄

감각적 심상과 비유적 심상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역사적 인물을 관념 속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생생하게 다가오게 함.

제재 : 논개의 애국심

주제 : 논개의 충혼을 추모함.

조국 독립을 위한 헌신적 의지

출전 : '님의 침묵'(1926)

 

 

 

4. 작품 해설

시인은 자기의 작품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드러내며 독자는 그 작품을 통하여 작가(시인)를 대면하게 된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일컫는 작품에는 그 작품만이 지니는 개별적인 특질뿐만 아니라 보편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작가의 삶과 시대 현실, 창작 동기를 알아보는 것은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시는 승려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널리 알려진 한용운의 작품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투철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조국과 민족의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확신했던 보기 드문 민족시인이며 신념에 찬 행동의 시인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는 한용운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사상적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 시는 임진왜란 때 진주(晋州)에서 왜장(倭將)을 살해하고 산화(散華)한 논개의 넋을 기리는 시이다. 시적 화자는 자신이 논개의 애인이라는 가정 아래 그를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심정을 절절히 풀어가고 있다. 이와 동시에 시적 화자는 일제 강점기라는 불행하고도 수치스러운 역사적 현실에 처해 있는 민족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논개의 의로운 뜻을 이어받지 못한데 대하여 참회와 자책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양면적 주제가 한용운 시의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역설로써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이 시의 특징이다.

이 시는 나라와 민족을 향한 당대의 사고방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당대의 생활문화가 예술문화로 승화되어 오늘날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1926년에 간행된 시집,대표시 <<님의 침묵>>을 비롯해서 발시() <<독자에게> <<최초의 님>> <<하나가 되셔요>> <<칠석>> <<의심하지마셔요>> <<나의길>> <<이별>> <<의심하지 마셔요>> <<참말인가요>> <<당신의 편지>> <<계월향>>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등 모두 9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본서에 수록된 일련의 시들은 불교적 비유와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이루어진 서정시 이면서 , 그 속에는 깊은 사상성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민족에 대한 애정이 짙게 나타나 있다. 본서는 제목이 말해 주듯이 임이 침묵하는 시대의 시편들이다.작자 자신이 시집의 서언서언 <<군말>>에서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남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의 ''이란 우리로 하여금 무한이 동경케 하는 영원자혹은 절대자일 수도 있고 민족일 수도 있으며,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으나,작자는 본서의 작품을 통해서 그의 종교적,사회적 활동의 전체를 판류 하고 있는 어떤 근본적인 존재방식에 대한 반성과 증언의 대상을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본서에 수록된 시들은 대개 진실이 부재하는 세상에 있어서의 괴로움을 노래하고 있으면서도 슬픔과 고뇌가 희망과 의지로 승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작자는 그의 시대를 임의 침묵의 시대로 밝혀 놓고 조국.중생.진리등으로 표상되는 ''을 통해 민족의 현실과 염뭔을 노래했다. 그의 시는 형이상학적이고 명상적이며 , 종교적 민족적 전통에 뿌리박은 시로서 ,또 고도의 역사의식을 내포하고 있다.<<님의 침묵>>의 후반부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일 줄 아는 까닭에 , 걷 잡을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의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읍니다/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아아,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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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讚頌)

 

님이여, 당신은 백번이나 단련한 금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 천국의 사랑을 받읍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엤 오동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의()가 무거웁고 황금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십니다.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의 보살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의 봄바람이여.

 

 

 

 

[박명(薄命)] 장편.1938518일부터 이듬해 312일 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가련한 운명의 여인을 그린 일종의 인정세태소설이다.내용은 시골에서 자라난 순영이 탕아의 아내가 되어 처음으로 버림을 받는다. 그러나 순영은 병과 빈곤을 가지고 돌아온 남편을 최후의 순간까지 순정과 열성으로 받들어 그를 회개하게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여기 등장하는 여성은 옛날의 열녀관념으로 본 여성이 아니라 다만 한 사람의 인간이 다른 한 사람을 위해서,처음에 먹었던 마음을 끝까지 변치 않고, 스스로를 포기하면서 섬긴다는 고귀하고 거룩한 심정의 여인이다. 작자가 운명의 여성 순영을 통해서 그린 <<박명>>은 단순히 한 여성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민족이 살아나가기 위한 생활의 원리 를 탐구하는 데 그 근본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처음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한 여인을 떠올리게 됩니다. 여인이 사랑하는 '당신'은 여인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곧 우리는 땅이 없어 설움 받는 가난한 농민을 만납니다. 이어 집도 없고 민적도 없어 정조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 여인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그는 항거할 줄 알았고 분노할 줄 아는 여인입니다. 그 여인은 이 세상의 온갖 잘못된 윤리.도덕.법률을 고발하기도 합니다. 이 여인의 설움과 고통 뒤에는 떠나버린 '당신'이 있습니다. 시를 되새겨 읽을 즈음 우리는 시 속의 여인이 님이 그리워 우는 연약한 여인이 아니라는 걸 깨닫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여인이 사랑했던 어떤 한 남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제 꼼꼼히 시를 읽어보도록 합시다.

1연에는 떠난 '당신'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함이 많다는 것은 당신이라는 존재가 내게 살 힘을 주고, 삶의 의미가 되기 때문이겠지요. '당신'은 줄곧 이 시의 의미를 풀기 위한 열쇠가 됩니다.

2연은 땅이 없어 거둬들인 곡식도 없는 나의 처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먹을 것도 없어 쌀도 아닌 거친 잡곡을 이웃에게 꾸러갑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멸시뿐입니다. 이때 ''는 당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정말 땅이 없는 거렁뱅이의 현실로 생각해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표현에 나타난 것 이상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땅이 없어 굶주리는 거렁뱅이 신세와 같았던 일제 식민지 시대의 우리 민족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주권을 빼앗겼기에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신세가 되고 인격마저 무시당한 것이 만해가 살았던 당시 우리 민족의 삶입니다.

3연에 이르면 그 비참함이 더 심해집니다. 집도 없고 민적도 없는 떠돌이 방랑자와 같은 신세, 그것은 조국이 든든한 뒷받침이 될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하달 수 있는 인권을 유린당하고 정조마저 빼앗길 지경입니다. 그야말로 절망의 순간에 ''는 저항하고, 분노와 슬픔 속에서 '당신'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용운의 시에서 눈물과 슬픔이 오히려 힘이 되는 역설적인 진실을 만납니다. 기쁨의 순간이나 승리의 순간에 당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최대한의 절망과 슬픔 속에서 자신이 갈 길을 깨닫는 것입니다. 가야할 길은 곧 '당신'입니다. 찾아야하고 만나야 할 '당신'입니다.

4연은 ''의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 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칼과 황금은 일본 제국주의를 가리키는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이런 암담한 현실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망설이는 순간에 다시 '당신'의 모습은 나타납니다. ?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 없는 자신의 길이 바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찾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만해 한용운은 '''당신'을 노래한 시인입니다. 1926년 발간된 그의 시집 제목은 '님의 침묵'입니다. 여기 실린 여러 편의 시에서 만해는 님과의 이별을 아프게 노래합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

-[님의 침묵]에서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 수록 생각히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

-[나는 잊고자]에서

 

남들을 자유를 사랑한다 하지만은 나는 복종을 좋아해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

-[복종]에서

 

이렇게 그의 시에는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고 복종하겠다는 '''당신'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대체 그의 님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는 시집의 앞 부분 '군말'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맛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그의 님은 일제에 빼앗긴 조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기도 했고, 죽어도 죽지 않는 민족 정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의 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용운에게 중생은 깨우쳐야할 대상이며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할 존재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합하여 그의 님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며 생명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국도 중생도 한용운 한용운에겐 삶의 근원이었고 그의 삶은 그 님을 위해 살아온 한평생이었습니다.

 

 

 

평생 곧게 살다간 우리의 님 만해 만해는 1879년 충남 홍성군 주복면 옥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맺은 지 3년 뒤입니다. 열강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가는 역사의 격동기에 그는 태어난 것입니다.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을 보낸 만해는 아버지로부터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몸 바친 의인, 지사의 이야기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이것은 소년 한용운에게 역사 의식과 비판의식을 깨우쳐준 산 공부였습니다. 만해는 어릴 때부터 주관이 뚜렷하고 때로는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 서당에서 [대학]이라는 책을 공부할 때입니다. 하루는 서당 선생이 만해의 책을 보니 군데 군데 먹으로 지운 흔적이 있었습니다. [대학]의 해석이 마음에 안 들어 지워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일곱 살이었습니다.

아홉살 때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방물장수가 만해의 글재주와 총명함에 반해 촌 구석에 처박혀 있지 말고 서울로 가자고 이끌었습니다. 만해는 아무말없이 동구밖까지 방물장수를 따라갔습니다. 그러더니 인사를 하고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려 했습니다. 왜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가느냐는 방물장수의 물음에 만해는 "어른께서 제 글재주를 칭찬해 주신데 대한 예의로 여기까지 왔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방물 장수가 거듭 같이 가자고 하자 만해는 "방물장사를 따라다녀 보았자 방물장수밖에 더 되겠습니까."라며 가기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나라 형편은 더욱더 어지러워졌습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고, 1895년에는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운동도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18세에 그는 갑오농민전쟁에 참가했다가 몸을 피하기 위해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불교 공부를 하게 되고 1905년에는 백담사로 들어가 중이 되었습니다.

백담사에 갈 때 만해는 시냇물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시냇물에 얼음이 둥둥 떠가는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차가운 시냇물을 건너는 일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 때 만해는 뼈와 살을 깎는 것보다 더 극심한 시련 속에 있는 민족의 처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물 속에서 비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일은 주저앉거나 넘어지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저앉을 수는 없었습니다. 넘어져서도 안된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거기서 포기한다면 자신이 민족을 위해 몸바쳐 살 길은 영영 사라져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1910년 만해는 금강산 표훈사에서 조국의 멸망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반나절이나 짐승처럼 울부짖었고 한달 반 동안 문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님인 조국이 그렇게 짓밟히고 역시 자신의 님인 중생이 노예가 된 현실에 기가 막일 따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만해는 빼앗긴 님을 다시 만나기 위해 시를 썼고 온몸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의 삶과 시 모두가 빼앗긴 님, 당신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독립운동의 무대였던 만주를 찾아가 군관학교를 세우는 데 힘썼고 독립군 훈련장을 찾아다니며 독립의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 첩자로 오인한 독립군의 총에 맞아 죽을 뻔한 일도 있습니다. 뼈를 갉아내는 수술을 하였는데 마취제도 없이 수술을 했습니다. 그는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도 신음 한번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국이 당하는 고통을 자신이 고스란히 짊어지겠다는 성자의 마음에서였을 것입니다.

 

 

19193.1운동 때 만해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만해는 한결같은 투지와 곧은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민족 대표라고 서명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일본의 총칼 앞에서 부끄러운 소리를 해댔습니다. "운명으로 체념하겠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로부터 분가하고 문권을 내달라고 의뢰하는 거나 다름없다." "어리석은 생각을 계획에 참가했다" "결코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치욕스런 대답들을 내뱉을 때 만해는 "죽어 생명이 끊어져도 정신이나 영혼으로라도 민족운동을 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어진 3년의 감옥 생활에서도 만해는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옥중 투쟁 3대 원칙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변호사를 대지 말 것 2.사식(감옥에서 주는 밥이 아니라 개인이 사서 먹는 밥)을 취하지 말 것 3.보석(금품을 주고 석방되는 것)을 요구하지 말 것 등이 그 세가지 입니다. 어떤 어려움이라도 자기가 몸소 지고 이겨나가겠다는 뜨거운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일본의 침략을 받고 있는 이 땅 모든 곳이 다 감옥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19926[님의 침묵]은 태어났습니다. 결코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겠다는 한용운의 의지가 오롯이 담긴 주옥같은 시들이었습니다.

일제 침략기 막바지인 1930년대 말 만해는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글들을 쓰고자 했지만 번번히 중단해야 했습니다. 생활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불교 계통의 반일 단체를 주도한 혐의로 검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생활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끼니를 잇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항일 정신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친구들이 마련해준 집도 총독부 방향을 보기 싫다 하여 북쪽을 향하게 했으며 일제 치하에서는 호적도 만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시 속에 '민적도 없는' 여인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딸을 학교에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승려가 되기 전에 결혼했다가 집을 떠난 뒤 55세에 다시 뒤늦게 결혼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그는 친일한 사람들의 도움을 극구 거절했습니다. 같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뒤에 변절한 최린은 만해의 생활이 염려되어 돈을 두고 갔다가 돌려받아야 했습니다. 만나주지도 않았습니다.

이광수가 일본식 군대와 전투복을 입고 그의 집에 오는 것을 보고 욕을 하며 쫒아낸 일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창씨 개명한 사람들을 개자식 같은 놈들이라고 하니 만해는 "그런 소리 말라. 개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의라도 있는데 의가 없는 인형은 개만 못하니 개가 들으면 반대할 것이다"고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총독부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유명 인사들이 학병 권고를 하러 다니니 강연은 안해도 사진이나 한 번 찍자고 했습니다. 신상에 위험이 있다는 위협도 곁들였습니다. 만해는 크게 호령했습니다.

 

 

 

"이놈,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났으면 사람 노릇을 해야 한다. 사람의 도는 정의와 양심이다. 정의를 생명보다 중히 여겨는 법이다. 너희 같은 놈들은 신상 위협은 고사하고 조금만 이익이 있으면 양심의 부끄러움도 모르고 짐승의 짓도 하지마는 나는 정의가 생명이다. 위험은 겁내지 않고 못할 짓은 죽어도 못한다. "

1944년 님의 모습을 다시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건만 만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66세였습니다. 죽어도 ''의 모습을 잊지 못함인지 4일 동안 그의 시신은 살아있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평생 올바른 삶의 길을 추구하며 님을 노래한 한용운의 삶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우쳐주었습니다. 한평생 ''을 노래하며 살았던 그의 삶은 이제 우리에게 ''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나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2) 감상 노트

1926년 발표된 {님의 침묵}은 우리 시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갖는 시집으로 평가됩니다. 왜냐하면 이른바 '동인지 시대'라 하여 낭만파니 경향파니 하는 시파들이 유행하던 1920년대에 어떤 시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시세계를 이룬 시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대시의 빛나는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시집에는 주옥같은 순수 서정시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굴하지 않는 강인한 내적 에너지를 여성의 목소리로 담고 있습니다.

88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시가 바로 시집 제목과 같은 님의 침묵입니다.

이 시는 전 10행으로 된 전연시입니다. 님과 이별한 슬픔과 그 극복을 노래하고 있는데, 형식과 내용이 향가인 제망매가와 매우 비슷합니다. 우선 형식 면에서 향가 10구체는 낙구에 '아으'라는 감탄사가 반드시 오게 되어 있는데, 이 시 역시 10행으로 되어 있고 9구에 '아아'라는 감탄사가 나옵니다. 또한 내용 면에서도 제망매가]가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극락 정토에서 만날 날을 기다리며 불도에 정진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데, 이 시도 님과의 이별로 인한 슬픔, 그 슬픔을 님이 돌아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극복하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통점은 이 시가 슬픔을 한()으로 응결시키지 않고 의지적으로(종교적으로) 극복하는 시가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지요. 그럼 각 시행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1행은 '님은 갔습니다'라는 점충적 반복을 통해 님과의 이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님이 떠난 이유는 제시되어 있지 않고 다만 님이 떠나고 없는 상태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때 '아아'라는 감탄사는 이별의 슬픔을 영탄적으로 드러내 준 것으로 해석됩니다.

2행 역시 님의 부재 상태를 그려 주고 있는데, 과거에 님이 떠날 때의 모습을 재현시키고 있습니다. 님은 '푸른 산빛'을 깨뜨리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정녕 떨치지 못할 나를 '차마(이 말은 문법상 부정 호응하는 말인데 시적 자유로 쓰임) 떨치고 갔습니다'. 여기서 '푸른 산빛'은 싱싱한 색채 이미지로서 희망을 상징하는 데 비해 '단풍나무'는 낙엽이 되어 없어질 조락을 뜻합니다. ''''가 함께 나누었던 기쁨의 나날들이 이제는 퇴색되어 님은 내 곁을 그렇게 떠나갔던 것입니다.

3행은 님이 떠난 후 내게 온 변화를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님과 함께 사랑을 나누었을 때 님과의 맹서는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났습니다. 그러나 님이 가버린 지금, 그것은 '차디찬 티끌'이 되어 '한숨의 미풍'에조차 가볍게 날아가 버렸습니다. 매우 슬픈 실연의 아픔입니다.

4행 역시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가버린 님을 그려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나의 운명을 전환시켰다고 말하고 있는데, 왜 첫 키스의 경험을 '달콤하다'는 수식을 달지 않고 '날카롭다'고 했을까요. 이는 '첫 키스'가 육체적 접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각성, 깨달음의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승려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시인이 속세를 떠나 불도에 귀의하게 된 일이나, 3.1운동을 계기로 독립 운동가로서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 일 등을 그렇게 표현한 것 아닐까요. 시인의 삶과 관련지어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시인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가 시인의 삶과 고뇌, 그리고 영혼까지도 모두 담고 있다고 할 때, 시인의 삶은 시의 해석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더구나 만해의 시는 매우 함축적이고 다의적인 시어로 이루어져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는데, 그의 삶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것이 오류를 줄이는 방법일 것입니다. 어쨌든 4행에서 시인의 운명을 전환시킨 장본인인 님은 뒷걸음쳐서 사라진 상태입니다.

5행에서는 내 운명을 전환시킨 님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다는 사랑의 맹목 상태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귀먹고 눈멀었다'는 표현은 역설법으로, 역설을 통해 나에게 님의 존재가 어떠한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로 님은 나의 생존의 의미이며 나의 온 삶을 지배하는 절대적 존재인 것이지요.

6행에는 뜻밖의 이별에 슬픔을 터뜨리는 시인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시인은 사람의 사랑은 영원할 수 없고 단지 순간에 불과함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했어도 막상 사랑하는 이와 혜어지는 순간이 오면 어쩔 수 없이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겠지요. 그러나 사람이 만나면 언젠가 혜어지는 것처럼, 혜어지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회자 정리(會者定離 :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 거자 필반(去者必反) :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이라고 하지요. 이 행에서는 회자 정리만 말하고 있지만 결국 시인은 거자필반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7행에서는 전체 시상이 전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라는 역접을 통해 이별의 눈물을 거부하고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붓는, 슬픔에서 희망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쓸데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줄 아는 까닭'입니다. 오히려 님이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정진하며 님을 기다리는 것이 참된 사랑임을 시인은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8행에서 이러한 태도의 전환은 깨달음에서 신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회자 정리로 님과 헤어진 것처럼 거자 필반으로 님과 다시 만날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는 9행의 역설이 가능해집니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고 해서 그 위에 푸른 하늘이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님은 현재 일시적으로 은폐되어 있을 뿐이며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행에서 감탄사 '아아'1행에서와 같이 슬픔의 영탄이 아니라, 님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의 영탄으로 보아야 합니다.

또한 9행은 '무엇은 무엇이다'는 각 행의 단조로운 진술과는 달리 역설적인 진술을 하고 있으며, ()-()-()의 변증법적인 논리로 희망-조락, 기쁨-슬픔, 이별-만남의 대립을 통일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시행이 매우 긴밀하고 유기적인 구조를 가지게 됩니다.

마지막 10행은 9행의 연장으로, 시인의 영원한 노래가 님의 침묵을 쉽싸고 도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님이 침묵을 깨고 다시 만날 때까지 끝없는 사랑으로 살아가겠다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님의 침묵'은 인간의 정지된 침묵이 아니라, 말없는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침묵으로 해석됩니다, 왜냐하면 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종교적인 순종과 맹목의 사랑임을 볼 때, 님의 침묵 역시 종교적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의 문맥을 따라서 이 시의 대강을 살펴보았는데, 그러면 과연 ''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요? 만해의 시는 다의적인 시어를 사용해 해석의 다양성을 보여 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이라는 시어는 그의 시를 더욱 애매하면서도 미묘한 맛을 지니게 하는 요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한용운의 ''은 한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육체적인 사랑의 존재는 아닙니다. 님은 내게 날카로운 진리의 깨달음을 가져다 주고, 끝없이 예찬되고 나의 사랑을 받는 숭배의 대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님은 내게 정신적인 존재이고 나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절대자입니다. 그러므로 님의 실체를 알려면 작가의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평생 독립 운동가로서, 승려로서 우뚝 선 삶을 살았고 이에 끊임없지 정진했던 만해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은 바로 독립 운동가로서의 만해에게 '조국'일 수밖에 없고, 승려였던 그에게 '부처'일 수밖에 없겠지요.

시의 해석이 작가의 생애에 꼭 구속될 필요는 없겠지만 님의 침묵의 경우는 한 순간의 정서를 표출한 시라기보다는 만해의 삶의 연장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이런 해석이 큰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3) 생각해 보기

1) 한용운의 시가 1920년대 문단에서 가졌던 특수성과 시사적 의의를 생각해 봅시다.

2) 이 시가 신라 향가 제망매가와 유사한 점을 형식과 내용 면에서 생각해 봅시다.

3) ''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고, 고려 속요 가시리의 님, 정철의 가사 사미인곡의 님 등과 비교해 봅시다.

4) 이 시의 시상 전개를 볼 때, 불교 사상과 관계가 깊습니다, 불교의 공 사상과 윤회 사상이 나타나 있는 부분을 찾아봅시다.

5) 만해의 시는 저항적인 내용과는 달리 여성적인 어조로 쓰여 있습니다. 그 까닭을 생각해 봅시다.

 

 

(4) 또 다른 시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을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생각하면서 읽어 봅시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1910829`한일병탄'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를 공식화한 일제는 식민지배를 공고히하기 위한 각종 조처를 착착 밟아나갔다. 총독부에서 헌병 및 경찰로 이어지는 행정적무력적 기반 마련, 항일의병전쟁에 대한 강력한 토벌작전, 신문지법과 출판법, 조선교육령 등의 법제적 장치를 통한 언론 및 교육의 통제, 그리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식민지적 농업구조의 형성을 거치면서 일본의 식민지배는 안정궤도에 올라선 것처럼 보였다.

 

`무단정치'(武斷政治)로 규정할 만한 일제의 식민통치는 그러나 조선민중의 거센 반발에 부닥치게 된다. 일찍이 동학농민전쟁과 의병투쟁 등을 통해 외세를 물리치기 위한 검질긴 투쟁의 전통을 쌓아온 조선인들은 1919121일 급서한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에 흥분하고, 그해 28일 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 발표에 고무받아 전국적인 규모의 항일시위에 나선다. 31만세운동이다. 그 만세운동의 한가운데에 만해 한용운이 있었다.

 

만해는 31운동의 계획과 준비 단계에서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거사 당일에는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의 앞에 서서 독립투쟁의 의지를 다짐하는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도했다. 거사 직전 다른 민족대표들에게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취하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 3대 행동원칙을 제시한 그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이냐는 일본인 판사의 질문에 대해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또한 옥에 갇힌 민족대표들 사이에 자신들이 극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그들 중 일부가 불안과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분뇨통을 그들에게 던지며 나약함에 대해 일갈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만해는 불굴의 투지와 용기를 지닌 독립투사인 동시에 당대 최고의 불교사상가요 한국 현대시의 한 흐름을 열어젖힌 탁월한 시인이기도 했다. 혁명가와 사상가와 문인이라는 세가지 성격을 한 몸 안에 아우른 그의 전인적인 풍모는 한국사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경우를 찾기 힘들 정도다. <조선불교유신론>을 비롯한 저술과 월간 불교잡지 <불교>의 운영, 청년불교단체의 설립과 지도 등을 통해서 그는 불교의 혁신과 대중에의 파급을 꾀했으며 그 궁극적 도달점은 그 자신 `불교사회주의'라 이름한 것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인들 사이에 한층 더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역시 <님의 침묵>이라는 걸출한 시집을 펴낸 시인으로서의 만해 한용운이다. 31운동과 관련해 옥고를 치르고 나온 뒤인 1925년 설악산 백담사에 딸린 오세암에서 탈고해 다음해 책으로 묶어낸 <님의 침묵>31운동의 정신과 힘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문학적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명시집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표제시를 비롯해 <님의 침묵>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이라는 절대의 존재를 향한 구애와 귀의, 이별의 슬픔과 기다림의 환희라는 일관된 주제의식 아래 묶여 있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상태에서 떠나간 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애정을 토로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는 연애시의 구도를 취한 이 시집은 만해의 님이 그가 귀의한 불교적 진리일 수도, 그의 조국인 독립 조선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넓고도 깊은 울림을 준다. 그러나 󰡒나의 머리가 당신의 팔 위에 도리질을 한 지가, 칠석을 열 번이나 지나고 또 몇 번을 지내었습니다󰡓라는 시 `칠석'의 한 구절은, 그가 <님의 침묵>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시점을 감안한다면, 만해의 님의 자리에 무엇보다도 먼저 조국을 놓아두어야 함을 알게 한다.

 

<님의 침묵>에서 이별은 화자의 세계인식과 문학적 형상화를 가능케 하는 기본 전제로 기능한다. <님의 침묵>의 모든 시들은 이별이라는 상황으로부터 비롯한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이별은 그러나 사랑하는 대상과의 합일의 가능성이 완전히 깨어지고 마는 부정의 원천이 아니라 사랑의 강도를 확인하고 장래의 합일을 희구하게 만드는 긍정적생산적인 이별이다.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이별은 미의 창조')라는 구절은 이별과 만남, 눈물과 웃음, 죽음과 생성의 변증법적 순환을 요령있게 표현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님의 침묵')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 한학을 수학한 만해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조국의 존망을 염려하며 일단 출가한 것이 그의 나이 17살 때인 1896년이었다. 백담사와 오세암 등지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시베리아에 다녀오기도 한 그는 1904년 초 잠시 향리에 들렀다가 그해 말 완전히 출가하게 된다. 외아들 보국이 태어난 지 불과 며칠 만의 일이었다.

 

행동하는 학승으로 변모한 그는 경성에서 불교개혁과 조선독립을 위한 사회적 활동을 펼치는 사이사이 그가 처음 머리를 깎고 계를 받은 백담사와 오세암에 머물며 <조선불교유신론><님의 침묵> 등을 저술했다. 그러나 지금 백담사와 오세암에서 그의 자취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가 머물던 백담사의 요사채는 `만해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흔한 편액 하나 걸려 있지 않다. 다만 그 곁에 세워진 시비 `나룻배와 행인'만이 한가닥 씁쓸한 위안을 던져줄 뿐이다. 백담사를 찾는 관광객들 역시 만해의 자취보다는 지난 89년 표변한 세상인심에 쫓긴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던 방의 위치에만 관심을 보인다. 만해와 전두환씨는 60여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같은 건물 같은 방에 머물렀었다.

 

백담사에서 6남짓 떨어져 있는 오세암 역시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만해 시절의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다 불타 없어져 버렸고, 원래의 암자가 있던 자리에 새로 지은 `천진관음보전'의 옆 벽에 <님의 침묵>을 집필하는 만해의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을 따름이다. 오세암의 주승인 경원 스님은 󰡒오세암 경내에 만해의 시비를 건립하고 그가 머물던 방을 다시 꾸미는 한편, 백담사에서 오세암에 이르는 산길에 그의 법명이나 싯구를 딴 이름을 붙이는 방안을 관련 학자 및 문인들과 논의중󰡓이라고 밝혔다.

 

백담사/글 최재봉

 

 

만해 한용운의 작품 세계

 

1. 들어가는 말

萬海 韓龍雲(18791944)舊韓末日帝時代의 어려운 時期를 독립운동가로 佛敎學者, 詩人으로서 살다 간 民族의 빛이 될만한 先人이었다. 당시 혼란기의 시대적 狀況이 만해로 하여금 그의 才能을 발휘하게 함으로써 실천적인 불교학자로, 민족운동가로 詩人으로 확고한 자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과 의식있는 사람들이 日帝의 강권에 못이겨 일제 강점기 체제에 동조하거나 변절한 글을 쓰거나, 올바른 대응 방법을 찾지 못한채 일본으로부터 들어 온 서구 근대사조에 무분별하게 휩쓸려 가고 있을 때 만해는 이러한 문학적 시련을 克服하고 문단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지 안흥면서도 독자적 문학활동으로 당대의 문제점과 지향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행동하였다는 데서 萬海文學의 참뜻이 놓이게 된다.

 

 

2. 萬海 詩에 나타난 詩精神

萬海詩集 [님의 沈黙]은 나와 님과의 사랑을 노래한 시집이다.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사랑이란 표현은 '''' 또는 '''우리'의 관계로 보아야지 남녀관계만은 아닌 것이다. ''은 군말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마다 그 시에서 나타내는 ''이 같을 수는 없다. 때로는 조국이나 민족을 의미할 수도 있고 때로는 연인일 수도 있고 때로는 논개나 계월향 같은 실제 인물일 수도 있으며 또는 인물이 아닌 절대자나 열반의 경지 또는 무아와 같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님은 곧 沈黙이란 말도 성립된다. 님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며 사랑의 다른 表現은 기다림과 그리움 등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祈禱, 祈禱]에서 이 시집을 [사랑의 노래]라고 지적한 것이나, [사랑의 證道歌]라고 한 것은 정곡을 찌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萬海詩精神을 사랑(자비)이라고도 할 수 있다.

萬海詩集 [님의 沈黙]의 대다수의 는 이별에서 시작하여 만남으로 끝나는 연작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집의 구조는 [님의 존재][님의 부재]를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存在] [不在] [存在]의 변증법적인 인식을 통한 止揚을 나타낸 주고 있다. 이별을 통한 님의 부재에서 노래는 시작되어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님의 存在]를 알리는 데서 끝나고 있다. 그의 는 이별의 인식을 통하여 깨달음이 시작되고 만남의 확신에서 해탈과 열반에 도달하는 구도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해탈이란 대 자유를 뜻하여 대 자유는 인욕과 속박과 기다림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그는 안다. 이러한 대주제 아래 계획된 일련의 구조를 가지고 쓰여졌기 때문에 연작시로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만해 시의 미학은 그의 표현기교와 체험을 바탕으로 한 깊은 사상이 잘 조화되어 있는 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수사법의 특징은 은유법과 逆說과 부정적 표현 등에 있다. 이러한 수사법은 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으며 시의 사상과 잘 조화되어 있다. 그의 사상적 깊이는 예술적 표현으로 인하여 잘 형상화되어 있다.

萬海 詩의 핵심어들은 <, , 이별, 만남, 사랑>등이다. <>는 만해 자신일 수도 있고 독자일 수도 있으며 <우리>일 수도 있다. <><누구>, <그대>, <당신>등으로도 표현되며 그 대상은 일정할 수 없고 다만 그리운 것이거나 사랑하는 대상은 다 <>이 될 수 있다. 나와 님 사이에 이별이 있고 만남이 있으며, 사랑이 있다. 이별과 만남이 둘이 아니듯 도 또한 둘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도달할 것을 희망한다. 이별의 슬픔에서 만남의 희망으로 끝나는 그의 <어린양><깨달은 양>으로 되는 과정을 체험하도록 짜여져 있다.

萬海詩精神은 기다림과 사랑이라 할 수 있고, 체험을 통한 그의 역사의식이나 종교적 염원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의 역사의식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요, 종교적 염원도 결국은 대승사상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만해는 선승, 지사, 시인의 세 측면으로 인간을 이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의 文學韓國 現代詩史에서 독특한 존재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를 볼 때에는 그의 人間的인 세 측면은 결국 하나로 합치된다고 할 수 있다. 선승시인, 지사시인이 일체로서의 詩人일 따름이다. 선승이나 지사로서의 체험이 바탕을 이루어 창작된 이기 때문에 시정신에 있어서 더욱 치열하며 따라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시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그의 詩作品 <님의 沈黙>은 이별과 만남의 因果律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별이 원인이라면 만남은 그 결과에 불과하다. 그와 반대로 만남이 원인이라면 이별은 그 결과다. 이별과 만남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불이사상에 귀착된다. 이 작품은 이별과 만남이 인과율에 따라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을 깨닫게 한다. <나룻배와 행인>은 기다림과 희생적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기다림은 사랑의 다른 표현일 뿐 똑같은 내용이다. 부처의 중생에 대한 사랑은 헌신적 사랑이다. 이 시는 부처의 자비를 깨닫게 해주는 시작품이다. <당신을 보았습니다>는 만해의 역사의식을 잘 반영한 시다. 조국광복을 위한 정열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역사의식이란 역사에 대한 비판정신이라 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한 비판정신은 시정신과 상통한다. 시정신 속에 현실의식이나 역사의식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알 수 없어요>는 우주적 상상력과 종교적 염원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난 求道精神萬海의 시정신의 일면이라고 하겠다. 만해의 시정신은 詩集 [님의 沈黙]에서는 사랑으로 나타났다. 중생에 대한 사랑이건 사랑은 궁극적으로는 둘이 아니요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또 만해의 시작품을 보면 <人間과 자연과 과의 合一化> 건너간다. 안고 강을 건너는 행위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꾸어 생각하면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참고 행하는 헌신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詩集 [님의 沈黙]萬海는 나와 님 사이의 사랑을 노래한 라 할 수 있다. 만해 시를 [사랑의 證道歌]라고 이름 붙이기도 하였는바 증도란 불교용어로 깨달음의 진리 그 자체 또는 그것에 대하여 굳게 약속을 한 실천 행위를 뜻한다.

만해는 조국이 일제하에 강점된 현실 앞에서 절망하여 몸을 가누기 어려운 때 불교에 몸을 맡길까, 독립투사가 될까, 아니면 이대로 타락의 길에 몸을 맡겨 좌절하고 말까 하고 방황하는 순간에 조국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처럼 만해의 길은 조국을 위하여 한 일까지도 大乘思想에서 나온 것이라 보여진다. 중생구제라는 사상에서 조국과 민족의 불행을 좌시할 수 없었으리라 본다. 그의 시정신 속에는 현실이나 역사의식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3. 만해 시작품의 특징

 

(1) 逆說的 表現

萬海逆說的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만해 의 특징을 <동일과 모순을 융합한 論理>라고 하며, 또 만해 시의 역설을 佛敎存在論에 입각한 存在論逆說로 분류했다.

이러한 역설이나 여성편향적 구조는 韓國文學의 저변에 깔려 있는 정서의 세계로 이별, 슬픔, 그리움, 체념, 숙명등으로 表象된다. 이런 정서의 특성은 女性偏向的 속성과 결부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逆說은 아이러니와 함께 고대 그리스에서 수사학의 용어로 사용되어 왔고, 19C 낭만주의시대에는 아이러니와 혼동되어 사용되었고 20C 신비평가인 브룩스가 "言語逆說言語."라고 하여 現代詩構造 原理로 삼기까지 했다. 逆說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이러니와 구분되면서도 흔히 혼동되고 있는 문학적 장치로서 곧 둘 다 모순을 통한 진리의 발견에 기여하며 서로 상반되는 모순을 내포하는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이 복잡성은 現代詩美的價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라는 진술은 외견상 자기 모순에 빠져 있지만 그 속에는 진리가 숨어있는 逆說이 된다. 휠라이트는 이 逆說을 크게 세 종류로 분류하여 표층적 逆說, 심층적 역설, 시적역설로 나타내었다.

萬海 詩逆說은 이 중에서 주로 심층적 역설에 해당되는데 이 역설은 종교적 진리와 같이 신비스럽고 초월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만해의 에서 이러한 역설은 그의 시 <反比例>에서 잘 드러난다.

, 全文이 역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리][침묵]의 모순되는 두 命題가 가설적으로 결합된다. 따라서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랫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라는 시적 逆說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역설은 모순을 극복하고 시적 초월과 비약을 성취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동시에 시적 상상력을 전개하는 근본 원리로 사용하게 된다. 바로 이 점이 만해 속에 깔려있는 정신적 극복과 시상을 전개하는 方法論으로서의 逆說의 중요성이 인정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그의 시 <님의 침묵>에서도 역설이 잘 드러나 있는데 대표적인 시형은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이다. 이런 역설은 '움직임이 곧 고요함이요, 고요함이 곧 움직임'이라는 생사를 초월한 그의 선사상(禪思想)에서 확실히 찾아 볼 수 있으며 불교의 언어가 바로 역설임을 반영하고 있다. 님과 같은 초월적 존재나 의 경지나 종교적 진리는 상징이나 역설로 밖에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2) 님의 象徵化

 

 

萬海에 있어서의 ''은 대단히 重要意味를 갖는다. 그의 詩集 [님의 沈黙]에 실린 88편 중 ''이 나타나 있는 作品46편이다. 萬海에게 있어서 님은 생명이 根源이고 永遠에의 극치며 또한 삶을 위한 신념의 결정이다. 그가 노래하고 있는 ''이란 萬海 이전의 생명적 요소로 究明할 수 있으며 생명적 요소가 형이상학적인 思惟에 의하여 예술로 승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은 어떤 때는 佛陀도 되고, 자연도 되고, 日帝에 빼앗긴 조국이 되기도 하였다. ''이 가지는 象徵的意味는 그만치 形而上學的인 다양한 신비성을 띠우고 있었다. 그의 임은 佛陀異性도 아닌, 바로 日帝에 빼앗긴 조국이었다. 그의 ''은 조국도 될 수 있고, 민족도 될 수 있고, 佛陀도 될 수 있고, 異性도 될 수 있는, 환언하면 어디까지나 복합체로 구성된 존재 가운데서, 여기서는 다름 아닌 '衆生'을 그의 ''一典型으로 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보아 그 衆生 안에 이성도 민족도 식물도 동물도 모두 내포시켜 통틀어 그의 ''으로 정한바 있었다.

韓龍雲''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詩集 [님의 沈黙]序文을 보아야 한다. "[]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釋迦의 님이라면 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伊太利. 님은 내가 사랑할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님만 님이 아니라'의 첫 ''은 보통 쓰이는 意味의 님, 곧 이성간이나 인간관계에서의 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한용운은 이런 일반적인 님의 개념을 부정하고, 그리워하는 대상은 다 님이라 하여, 님의 개념범주를 확대하고 있다.

韓龍雲의 님은 어떤 存在이건 佛法과 관련되어 있거나, 佛身의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이며 (色卽是空, 空卽是色), 또는 '無常 無我'의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不定論理에 의거한 (逆說的 存在)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에 나타나는 ''은 바로 '佛身' '逆說的 存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보이면서 보이지 아니하고, 갔으나 가지 아니하였으며, 있으면서 있지 않는 존재다. 顯示性隱蔽性, 단절성과 동일성, 現實性과 초월성을 가진 존재가 한용운의 님이다.

萬海佛敎思想을 제대로 理解하면 그의 ''이 과연 누구냐 하는 의문은 저절로 풀린다. ''이 한 여인의 사랑하는 남성이자 시인이 잃어버린 조국과 자유요 또 불교적 진리이자 중생이기도 하다는 것, 그 모든 것이면서 그것이 그때 중첩되어 보이기도 하는 것, 그것은 가장 이성적인 사고방식이며 존재의 참 모습에 대한 가장 온당한 일컬음인 것이다.

 

 

 

역설적 표현이 두드러진 한용운의 주요 작품

 

이하 짙게 쓰인 부분은 역설적 표현에 해당됩니다.

 

 

작품.1 離別創造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 없는 황금과 밤의 올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읍니다.

님이며,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읍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작품.2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작품.3 님의 沈黙

 

님은 갔읍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읍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읍니다.

황금의 꽃 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읍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읍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읍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 부었읍니다. 우리는 만날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읍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작품.4 幸福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겠읍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고통도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겠읍니까.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일생에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여 나를 미워한다면 나의 행복은 더 클 수가 없읍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나를 미워하는 원한의 豆滿江이 깊을수록 나의 당신을 사랑하는 행복의 白頭山이 높아지는 까닭입니다.

 

 

작품.5 服從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읍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작품.6 快樂

 

 

님이며 당신은 나를 당신 계신 때처럼 잘 있는 줄로 아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나를 아신다고 할 수가 없읍니다.

 

 

당신이 나를 두고 멀리 가신 뒤로는 나는 기쁨이라고는 달도 없는 가을 하늘에 외기러기의 발자취만큼도 없읍니다.

 

 

거울을 볼 때에 절로 오던 웃음도 오지 않습니다.

꽃나무를 심고 물 주고 복돋우던 일도 아니합니다.

고요한 달 그림자가 소리 없이 걸어와서 엷은 창에 소곤거리는 소리도 듣기 싫습니다.

가물고 더운 여름 하늘에 소낙비가 지나간 뒤에 산모롱이의 작은 숲에서 나는 서늘한 맛도 달지 않습니다.

동무도 없고 노리개도 없읍니다.

 

 

나는 당신 가신 뒤에 이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쾌락이 있읍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따금 실컷 우는 것입니다.

 

 

작품.7 禪師說法

 

나는 선사의 설법을 들었읍니다.

[너는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고 선사는 큰 소리로 말하였읍니다.

 

 

그 선사는 어지간히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인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도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大海脫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드렸읍니다.

 

 

작품.8 反比例

 

당신의 소리는 [沈黙]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래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 그려

당신의 소리는 沈黙이여요

 

 

당신의 얼골은 [黑闇]인가요

내가 눈을 감은 때에 당신의 얼골은 분명히 보입니다 그려

당신의 얼골은 黑闇이여요

 

 

당신의 그림자는 [光明]인가요

당신의 그림자는 달이 넘어 간 뒤에 어두운 창에 비칩니다 그려

당신의 그림자는 光明이여요

 

 

작품.9 사랑의 存在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을 이름지을 만한 말이나 글이 어데 있읍니까.

微笑에 눌려서 괴로운 듯한 薔薇빛 입설인들 그것을 슬칠수가 있읍니까.

눈물의 뒤에 숨어서 슬픔의 黑闇面反射하는 가을 물결의 눈인들 그것을 비칠 수가 있읍니까.

그림자 없는 구름을 거쳐서 메아리 없는 絶壁을 거쳐서 마음이 갈 수 없는 바다르 거쳐서 存在? 存在입니다.

그 나라는 國境이 없읍니다. 壽命時間이 아닙니다.

사랑의 存在는 님의 눈과 님의 마음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의 秘密은 다만 님의 手巾놓는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詩人想像과 그들만이 압니다.

 

 

작품.10 떠날때의 님의 얼골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목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골이 더욱 어여쁩니다.

 

 

떠나신 뒤에 나의 幻想의 눈에 비치는 님의 얼골은 눈물이 없는 눈으로는 바로 볼 수가 없을 만치 어여쁠 것입니다.

님의 떠날 때의 어여쁜 얼골을 나의 눈에 새기겄읍니다.

님의 얼골은 나를 울리기에는 너머도 야속한 듯하지마는 님을 사랑하기 위하야는 나의 마음을 질거웁게 할 수가 없읍니다.

만일 그 어여쁜 얼골이 永遠히 나의 눈을 떠난다면 그때의 슬픔은 우는 것보다도 아프겄읍니다.

 

 

작품.11 藝術

 

몰란 결에 쉬어지는 한숨은 봄바람이 되야서 야윈 얼골을 비치는 거울에 이슬꽃을 핍니다.

나의 周圍에는 和氣라고는 한숨의 봄바람밖에는 아모것도 없읍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水晶이 되야서 깨끗한 슬픔의 聖境을 비칩니다.

나는 눈물의 水晶이 아니면 이 세상에 寶物이라고는 하나도 없읍니다.

 

 

한숨의 봄바람과 눈물의 水晶은 떠난 님을 기루어하는 秋收입니다.

저리고 쓰린 슬픔은 힘이 되고 이 되야서 어린 과 같은 적은 목숨을 살어 움직이게 합니다.

님이 주시는 한숨과 눈물은 아름다운 藝術입니다.

 

- 한국 현대 시문학 대계2, 한용운, 지식산업사, 1985 -

 

 

<어우야담>에 기록된 논개

 

논개(論介)는 진주 관기(官妓)였다. 계사년(癸巳年)에 김천일(金千溢)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를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마침내 성은 함락되고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이때,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하고 촉석루(矗石樓)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서 있었으니, 아래는 만 길 낭떠리지였다. 사람의 혼이라도 삼킬 듯 파도가 넘실거렸다.

왜병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왜장 하나가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논개는 요염한 웃음을 흘리면서 왜장을 맞았다. 왜장의 손이 그녀의 몸을 잡자, 논개는 힘껏 왜장을 끌어안는가 싶더니 마침내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둘이는 모두 죽고 말았다.

임진란을 당하여 관기의 경우, 왜놈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이가 어찌 논개 한 사람에 그치겠는가? 이름도 없이 죽어 간 여인들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 관기라 하여 왜적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목숨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정렬(貞烈)이라 칭할 수 없으니 어찌하랴.

그러나 그런 도랑물 같은 신세로서도 또한 성화(聖火)할 수 있는 정신이 있었으니, 나라를 등지고 왜적에게 몸을 바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을 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유몽인, '어우야담', (이민수 역편, 정음사, 1975)에서>

 

 

역설(逆說)의 이해

 

한용운의 시가 널리 애송되는 까닭은 그 나름의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매력의 하나는 역설(逆說, paradox)이다.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南江(남강)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矗石樓)는 살 같은 光陰(광음)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論介(논개),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同時(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論介(논개),

 

 

이 시는 400년전 임진왜란 때 진주(晋州)에서 산화(散花)한 논개의 넋을 기리는 시다. 자신이 논개의 애인이라는 가정 아래 그를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심정을 절절히 풀어 가고 있는 애도시이다.

그런데 이 시는 전후가 당착된 진술 방식으로 독자를 의아하게 만든다. '흐르고 흐르는 남강'인데 왜 가지 않는단 말인가? 이 말은 사리(事理)에 맞지 않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 보면 진실인 것도 같다. 400년전의 비극의 현장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눈앞에 그냥 있기 때문이다. , 거기 서 있는 '촉석루'는 어디론지 '달음질'친다고 했으니, 이것 역시 뭇 독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역시 진실이다. 왜냐하면 '살 같은 광음을 따라서'라는 말이 전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월의 강물에 밀려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가고 있지 않은가? 빛 바랜 단천, 깨어진 기왓장에 돋아난 잡초, 트고 금간 기둥, 풍화되어 가는 초석이나 석계(石階), 무엇이든 어디론지 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fact)은 아니나 시적 진실(poetic truth)의 진술은 독자에게 큰 충격과 함께 깊은 감동을 준다. 그래서 논개는 독자에게까지도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가 된다.

논개의 순국 당시 나이는 21, 꽃다운 나이다. 그에게도 소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짧은 생애였지만 여러 가지 중요한 고비, 의미 있는 사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비''사건'등은 사상(捨象)되고, 우리 머릿속에 나타나는 것은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한 논개가 왜장 게다니(毛谷六助)라는 자를 떠밀면서 의암(義岩)에서 투신하는 극적 장면인 것이다.

그래서 '천추에 죽지 않는 논개'는 곧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이기도 하다. 죽음을 현재형으로 파악함으로써 죽어 가고 있는 상태를 환기하고, 죽음의 의미를 영원성으로 승화하고 있다.

이와같이 모순되고 앞뒤가 당착(撞着)된 진술은, 실은 한용운의 시학(詩學)의 핵심 원리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관이나 인생에 대한 인식의 원리이기도 하다.

 

 

-김은전- (교과서 부록 341)

 

 

논개

 

임진왜란 때의 의기(義妓). 성 주(). 전북 장수(長水) 출생. 진주병사(晋州兵使) 최경회(崔慶會)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며,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 6만을 맞아 싸우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왜장들은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였다. 기생으로서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울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전사한 장군들의 원한이라도 풀어주고자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冑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이 날은 장수군에서 논개아가씨를 선발하고 기념탑을 참배하는 등 논개의 정신을 되새기는 각종 민속행사를 가진다.

- 두산세계대박과사전 -

 

義妓祠. 경남 진주시 본성동 소재. 경남 문화재 자료 제7. 논개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전북 장수군 장수읍의 논개 사당인 의암사(義岩祠)에 세워진 비. 비에 쓰인 것은 변영로(卞榮魯)의 시이다.

 

義巖祠. 전북 기념물 제46. 전북 장수군 장수읍에 있는 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 1954년 건립.

 

경남 진주시 본성동 소재. 의기(義妓)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촉석루 바로 옆에 있다.

 

경남 진주시 소재. 논개의 영정이 있는 사당의 내부

 

- 관련 화보 출처 - 계몽 on-line 웹백과

 

 

 

한용운 韓龍雲

1879(고종 16) 1944 시인. 독립운동가.승려. 아명은 유천(裕天),계명(戒名)은 봉완(奉玩). 법명은 용운,법호는 만해(萬海 or 卍海). 충남 홍성군 경성면 성곡리에서 옹준의 차남으로 출생.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수학, 1896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실패하고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 여기서 수년간 머무르며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인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에 접했다. 특히 중국의 선각자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0114세 때 결혼했던 고향의 처가에 돌아와 약 2년간 은신, 그후 다시 집을 나와 방황하다 1905년 강원도 백담사에서 중이 되었다. 이해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방황하며 견문을 넓히고 귀국, 안변 석왕사에서 참선하다가 다시 만주와 시베리아로 유랑, 1905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토쿄, 교토, 등지의 사찰을 순례하고 조동종대학림에서 3개월간 불교와 동양철학을 연구했다. 1911년 만주의 교포실정을 알아보기 위해 도만했다가 교포로부터 밀정으로 외심을 받아 총격을 당해, 이것이 만성 요두증의 원인이 되었다.

이 무렵 친일 승려 이 희광 일파가 원종종무원을 설립,1910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체결하고 돌아오자 그는 이에 분개,1911년 박한영등과 승려대회를 개최,친일불교의 획책을 폭로하여 그 흉계를 분쇄하는데 성곡했다. 한편 넓은 견문과 근대적인 지식을 터득한 그는 이같은 인식을 토대로 당시 조선 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와 운든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 비판 한 대저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 ,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는 학구적인 입장에서 불교를 해설한 이론서가 아니라 조선불교의 현상을 타개하려는 열렬한 실천적 의도에서 집필한 것이다. 여기 제시된 그의 사상은 자아의 발견,평등주의,불교의 구세주의등으로서 이후 그의 모든 행동적,사상적 발전은 이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졌다. 1917년경부터 항일투사로서의 행동을 시작했고,19193.1 운동때는 독립선언준비과정에 최인과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 3년간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조선독립이유서>를 집필, 그의 독립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했다. 1922년 출옥,각지로 전전하며 강연을 통해 청년들의 각성을 촉구했고, 1924년 불교청년회의 총재에 취임,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간행하여 문단에 큰 파문을 던졌다.그는 이미 1918<창조>동인들보다 앞서 <유심>에 두세 편의 작품을 발효한 일이 있고 후일에도 <흑풍>,<후회>,<박명>등 장편소설과 상당수의 한시(),시조를 남겼으나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님의 침묵>한귄으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특이한 데가 있다. 문단이라는 것의 권외에 있었던 사실, 수입된 문예사조를 업고 다니지 않았던 사실, 동인지의 구성원이 되지 않았던 사실, 즉 문단적 시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는 당시의 문단이 빠져 이던 반()역사성과 비()사회성에서 초연히 동떨어져 문단적 테두리 안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못했던 문학적 깊이와 폭을 달성했다. 50세를 전후하여 심우장에 온거하면서 1927년에는 신간회의 발기인이 되어 경성지부장을 역임 ,1929년 광주학생운동때는 민중대회를 열고 독립운동을 도왔고[조선불교총동맹][만당]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활약,1931년에는 <불교>지를 인수, 간행하여 불교청년운동 및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벌였다. 한편 그는 앞서 말한 소설 및 불교관계의 수많은 논설을 집필했다. 일제가 민족지도자를 강요, 그들의 전쟁 목적 수행에 이용했을 때 많은 지사와 영도자가 변절했으나 그는 끝까지 만족의 지조를 지켜 서릿발 같은 절개와 칼날 같은 의기를 말해 주는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중풍으로 사망, 유해는 화장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수여,1967년 비가 파고다 공원에 건립되었으며, 1973<한용운전집(6)>이 간행되었다.

 

 

 

1. 한용운(호는 만해 : 1879-1944)

한용운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고향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통감과 서경을 통달했지요. 1896년 서당에서 교사가 되어 아동을 가르쳤고, 1899년에는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다가 세계 여행을 계획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으나 박해를 받고 돌아와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1904년 봄에 고향으로 내려가 여러 달을 머물다가 초여름 백담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습니다. 백담사에 머물면서 참선과 수도를 하던 그는 1908년 일본 여행을 통해 신문물을 접하게 됩니다. 동경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고, 유학중인 최린과 사귀었지요.

개인 및 사찰 소유의 토지를 일제로부터 보고하기 위해 측량 학교를 세우고, 송광사,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 대회를 개최하는 등 불교 개혁 운동과 독립 운동에 앞장선 그는 1911년 한일 합방의 울분을 참지 못해 만주로 망명을 합니다. 거기서 그는 독립군에게 민족 독립 사상을 북돋워 주고, 망명중인 박은식, 이시영, 윤세복 등과 만나 독립 운동의 방향을 논의했습니다. 1913{조선 불교 유신론}, 1914년에는 {불교 대전}을 간행하는 등 불교 대중화를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았지요.

문학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18년 윌간지 {유심}을 창간하여 편집자 겸 발행인이 되면서부터 이었습니다. 이 잡지에 논설과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 을 발표하고 이후 문학 창작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듬해 일어난 3.1운동에 민족 대표 33인의 하나로 참여하여 투옥된 그는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를 발표했습니다. 출옥 후에는 옥중시 무궁화를 심고자](1922), 장편 소설 {죽음}(1924), 시집 {님의 침묵}(1926)을 잇달아 간행했습니다.

1933년부터 서을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기거하면서 장편 소설 흑풍], [박명등을 짓고, 불교에 관한 논설과 수필을 발표하던 그는 1944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고 망우리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18세 때 의병에 가담하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기개 있고 고매한 삶은 오늘날까지도 민족 지도자요 선각자의 표상으로 살아 있습니다.

한용운의 시는 '소멸'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소멸의 시학 또는 모순의 시학이라고 합니다. 그에게서 모순은 소멸을 통해, 소멸은 다시 모순과의 변증법적 갈등과 화해를 통해 새로운 극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모순으로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님의 소멸이라는 극적인 발상을 했습니다. 그의 시는 식민지 시대의 억압을 극복하려는 치열한 사회 의식을 소멸과 모순의 변증법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또한 한용운은 고전적 정신과 불교의 가락을 체득해 은유적 방법을 확립하고, 현대시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모호한 상상과 퇴패적 감상주의가 주조를 이루던 당대의 시적 풍토를 뛰어넘어 그가 간 길은 귀중한 우리의 자산입니다. 그는 종교 의식과 예술 의식의 교차점에서 개인과 사회를 접맥시키고, 이것을 다시 역사 의식으로 고양시켰습니다. 이 점이 바로 한용운이 대시인으로 칭송되는 이유입니다.

 

 

2. 본 문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에

한용운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南江)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矗石樓)는 살 같은 광음(光陰)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논개(論介),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同時)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나는 시인으로 그대의 애인이 되었노라.

그대는 어디 있느뇨. 죽지 않은 그대가 이 세상에는 없고나.

 

나는 황금의 칼에 베어진 꽃과 같이 향기롭고 애처로운 그대의 당년(當年)을 회상(回想)한다.

술 향기에 목맺힌 고요한 노래는 옥()에 묻힌 썩은 칼을 울렸다.

춤추는 소매를 안고 도는 무서운 찬바람은 귀신 나라의 꽃수풀을 거쳐서 떨어지는 해를 얼렸다.

가냘핀 그대의 마음은 비록 침착하였지만 떨리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웠다.

아름답고 무독(無毒)한 그대의 눈은 비록 웃었지만 우는 것보다도 더욱 슬펐다.

붉은 듯하다가 푸르고 푸른 듯하다가 희어지며 가늘게 떨리는 그대의 입술은 웃음의 조운(朝雲)이냐 울음의 모우(暮雨)이냐 새벽달의 비밀이냐 이슬꽃의 상징(象徵)이냐.

삐비 같은 그대의 손에 꺾이우지 못한 낙화대(落花臺)의 남은 꽃은 부끄럼에 취()하여 얼굴이 붉었다.

옥같은 그대의 발꿈치에 밟히운 강 언덕의 묵은 이끼는 교긍(驕矜)에 넘쳐서 푸른 사롱(紗籠)으로 자기의 제명(題名)을 가리었다.

 

아아, 나는 그대도 없는 빈 무덤 같은 집을 그대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름뿐이나마 그대의 집도 없으면 그대의 이름을 불러 볼 기회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피어 있는 꽃을 꺾으려면 나의 창자가 먼저 꺾어지는 까닭입니다.

나는 꽃을 사랑합니다마는 그대의 집에 꽃을 심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의 집에 꽃을 심으려면 나의 가슴에 가시가 먼저 심어지는 까닭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금석(金石)같은 굳은 언약을 저버린 것은 그대가 아니요 나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쓸쓸하고 호젓한 잠자리에 외로이 누워서 끼친 한()에 울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요 그대입니다.

나의 가슴에 '사랑'의 글자를 황금으로 새겨서 그대의 사당에 기념비를 세운들 그대에게 무슨 위로가 되오리까.

나의 노래에 '눈물'의 곡조를 낙인(烙印)으로 찍어서 그대의 사당에 제종(祭鍾)을 울린대도 나에게 무슨 속죄가 되오리까.

나는 다만 그대의 유언대로 그대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다른 여자에게 주지 아니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얼굴과 같이 잊을 수가 없는 맹세입니다.

용서하여요 논개여, 그대가 용서하면 나의 죄는 신에게 참회를 아니한대도 사라지겠습니다.

 

천추(千秋)에 죽지 않는 논개여,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즐거우며 얼마나 슬프겠는가.

나는 웃음이 겨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겨워서 웃음이 됩니다.

용서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여.

 

 

3. 요점 정리

 

1: 논개에 대한 추모와 애정의 제시

2: 논개의 삶과 순국의 장면 제시

3: 논개의 묘에서 추모와 결의

4: 독립 실천의 의지를 다짐함

5: 논개를 추모하고 예찬함

 

글의 종류 : 자유시, 서정시, 애도(추도), 상징시

 

성격 : 상징적, 묘사적, 영탄적

율격 : 유장(悠長)한 산문적 리듬(4음보의 율격적 특성이 가미됨)

 

어조 : 추모, 예찬의 비장한 목소리

태도 : 성찰적, 실천적 자세

표현 : 불교적 깨달음을 전제로 역설법이 사용되었음.

인과적 서술로 실천적 의지를 효과적으로 부각함.

다양한 종결 어미를 구사하여 폭넓은 감정을 드러냄

감각적 심상과 비유적 심상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역사적 인물을 관념 속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생생하게 다가오게 함.

제재 : 논개의 애국심

주제 : 논개의 충혼을 추모함.

조국 독립을 위한 헌신적 의지

출전 : '님의 침묵'(1926)

 

 

4. 작품 해설

시인은 자기의 작품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드러내며 독자는 그 작품을 통하여 작가(시인)를 대면하게 된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일컫는 작품에는 그 작품만이 지니는 개별적인 특질뿐만 아니라 보편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작가의 삶과 시대 현실, 창작 동기를 알아보는 것은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시는 승려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널리 알려진 한용운의 작품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투철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조국과 민족의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확신했던 보기 드문 민족시인이며 신념에 찬 행동의 시인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는 한용운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사상적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 시는 임진왜란 때 진주(晋州)에서 왜장(倭將)을 살해하고 산화(散華)한 논개의 넋을 기리는 시이다. 시적 화자는 자신이 논개의 애인이라는 가정 아래 그를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심정을 절절히 풀어가고 있다. 이와 동시에 시적 화자는 일제 강점기라는 불행하고도 수치스러운 역사적 현실에 처해 있는 민족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논개의 의로운 뜻을 이어받지 못한데 대하여 참회와 자책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양면적 주제가 한용운 시의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역설로써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이 시의 특징이다.

이 시는 나라와 민족을 향한 당대의 사고방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당대의 생활문화가 예술문화로 승화되어 오늘날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1926년에 간행된 시집,대표시 <<님의 침묵>>을 비롯해서 발시() <<독자에게> <<최초의 님>> <<하나가 되셔요>> <<칠석>> <<의심하지마셔요>> <<나의길>> <<이별>> <<의심하지 마셔요>> <<참말인가요>> <<당신의 편지>> <<계월향>>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등 모두 90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본서에 수록된 일련의 시들은 불교적 비유와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이루어진 서정시 이면서 , 그 속에는 깊은 사상성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민족에 대한 애정이 짙게 나타나 있다. 본서는 제목이 말해 주듯이 임이 침묵하는 시대의 시편들이다.작자 자신이 시집의 서언서언 <<군말>>에서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남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의 ''이란 우리로 하여금 무한이 동경케 하는 영원자혹은 절대자일 수도 있고 민족일 수도 있으며,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으나,작자는 본서의 작품을 통해서 그의 종교적,사회적 활동의 전체를 판류 하고 있는 어떤 근본적인 존재방식에 대한 반성과 증언의 대상을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본서에 수록된 시들은 대개 진실이 부재하는 세상에 있어서의 괴로움을 노래하고 있으면서도 슬픔과 고뇌가 희망과 의지로 승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작자는 그의 시대를 임의 침묵의 시대로 밝혀 놓고 조국.중생.진리등으로 표상되는 ''을 통해 민족의 현실과 염뭔을 노래했다. 그의 시는 형이상학적이고 명상적이며 , 종교적 민족적 전통에 뿌리박은 시로서 ,또 고도의 역사의식을 내포하고 있다.<<님의 침묵>>의 후반부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일 줄 아는 까닭에 , 걷 잡을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의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읍니다/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아아,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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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讚頌)

 

님이여, 당신은 백번이나 단련한 금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 천국의 사랑을 받읍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엤 오동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의()가 무거웁고 황금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십니다.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의 보살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의 봄바람이여.

 

 

 

 

[박명(薄命)] 장편.1938518일부터 이듬해 312일 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가련한 운명의 여인을 그린 일종의 인정세태소설이다.내용은 시골에서 자라난 순영이 탕아의 아내가 되어 처음으로 버림을 받는다. 그러나 순영은 병과 빈곤을 가지고 돌아온 남편을 최후의 순간까지 순정과 열성으로 받들어 그를 회개하게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여기 등장하는 여성은 옛날의 열녀관념으로 본 여성이 아니라 다만 한 사람의 인간이 다른 한 사람을 위해서,처음에 먹었던 마음을 끝까지 변치 않고, 스스로를 포기하면서 섬긴다는 고귀하고 거룩한 심정의 여인이다. 작자가 운명의 여성 순영을 통해서 그린 <<박명>>은 단순히 한 여성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민족이 살아나가기 위한 생활의 원리 를 탐구하는 데 그 근본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처음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한 여인을 떠올리게 됩니다. 여인이 사랑하는 '당신'은 여인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곧 우리는 땅이 없어 설움 받는 가난한 농민을 만납니다. 이어 집도 없고 민적도 없어 정조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 여인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그는 항거할 줄 알았고 분노할 줄 아는 여인입니다. 그 여인은 이 세상의 온갖 잘못된 윤리.도덕.법률을 고발하기도 합니다. 이 여인의 설움과 고통 뒤에는 떠나버린 '당신'이 있습니다. 시를 되새겨 읽을 즈음 우리는 시 속의 여인이 님이 그리워 우는 연약한 여인이 아니라는 걸 깨닫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여인이 사랑했던 어떤 한 남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제 꼼꼼히 시를 읽어보도록 합시다.

1연에는 떠난 '당신'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함이 많다는 것은 당신이라는 존재가 내게 살 힘을 주고, 삶의 의미가 되기 때문이겠지요. '당신'은 줄곧 이 시의 의미를 풀기 위한 열쇠가 됩니다.

2연은 땅이 없어 거둬들인 곡식도 없는 나의 처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먹을 것도 없어 쌀도 아닌 거친 잡곡을 이웃에게 꾸러갑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멸시뿐입니다. 이때 ''는 당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정말 땅이 없는 거렁뱅이의 현실로 생각해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표현에 나타난 것 이상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땅이 없어 굶주리는 거렁뱅이 신세와 같았던 일제 식민지 시대의 우리 민족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주권을 빼앗겼기에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신세가 되고 인격마저 무시당한 것이 만해가 살았던 당시 우리 민족의 삶입니다.

3연에 이르면 그 비참함이 더 심해집니다. 집도 없고 민적도 없는 떠돌이 방랑자와 같은 신세, 그것은 조국이 든든한 뒷받침이 될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소중하달 수 있는 인권을 유린당하고 정조마저 빼앗길 지경입니다. 그야말로 절망의 순간에 ''는 저항하고, 분노와 슬픔 속에서 '당신'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용운의 시에서 눈물과 슬픔이 오히려 힘이 되는 역설적인 진실을 만납니다. 기쁨의 순간이나 승리의 순간에 당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최대한의 절망과 슬픔 속에서 자신이 갈 길을 깨닫는 것입니다. 가야할 길은 곧 '당신'입니다. 찾아야하고 만나야 할 '당신'입니다.

4연은 ''의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 앞에서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칼과 황금은 일본 제국주의를 가리키는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이런 암담한 현실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망설이는 순간에 다시 '당신'의 모습은 나타납니다. ?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 없는 자신의 길이 바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찾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만해 한용운은 '''당신'을 노래한 시인입니다. 1926년 발간된 그의 시집 제목은 '님의 침묵'입니다. 여기 실린 여러 편의 시에서 만해는 님과의 이별을 아프게 노래합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

-[님의 침묵]에서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 수록 생각히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

-[나는 잊고자]에서

 

남들을 자유를 사랑한다 하지만은 나는 복종을 좋아해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

-[복종]에서

 

이렇게 그의 시에는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고 복종하겠다는 '''당신'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대체 그의 님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는 시집의 앞 부분 '군말'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맛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그의 님은 일제에 빼앗긴 조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기도 했고, 죽어도 죽지 않는 민족 정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의 님은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용운에게 중생은 깨우쳐야할 대상이며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할 존재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합하여 그의 님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며 생명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국도 중생도 한용운 한용운에겐 삶의 근원이었고 그의 삶은 그 님을 위해 살아온 한평생이었습니다.

 

평생 곧게 살다간 우리의 님 만해 만해는 1879년 충남 홍성군 주복면 옥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맺은 지 3년 뒤입니다. 열강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가는 역사의 격동기에 그는 태어난 것입니다.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을 보낸 만해는 아버지로부터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몸 바친 의인, 지사의 이야기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이것은 소년 한용운에게 역사 의식과 비판의식을 깨우쳐준 산 공부였습니다. 만해는 어릴 때부터 주관이 뚜렷하고 때로는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 서당에서 [대학]이라는 책을 공부할 때입니다. 하루는 서당 선생이 만해의 책을 보니 군데 군데 먹으로 지운 흔적이 있었습니다. [대학]의 해석이 마음에 안 들어 지워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일곱 살이었습니다.

아홉살 때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방물장수가 만해의 글재주와 총명함에 반해 촌 구석에 처박혀 있지 말고 서울로 가자고 이끌었습니다. 만해는 아무말없이 동구밖까지 방물장수를 따라갔습니다. 그러더니 인사를 하고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려 했습니다. 왜 여기까지 왔다가 돌아가느냐는 방물장수의 물음에 만해는 "어른께서 제 글재주를 칭찬해 주신데 대한 예의로 여기까지 왔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방물 장수가 거듭 같이 가자고 하자 만해는 "방물장사를 따라다녀 보았자 방물장수밖에 더 되겠습니까."라며 가기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나라 형편은 더욱더 어지러워졌습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고, 1895년에는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운동도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18세에 그는 갑오농민전쟁에 참가했다가 몸을 피하기 위해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불교 공부를 하게 되고 1905년에는 백담사로 들어가 중이 되었습니다.

백담사에 갈 때 만해는 시냇물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시냇물에 얼음이 둥둥 떠가는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차가운 시냇물을 건너는 일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 때 만해는 뼈와 살을 깎는 것보다 더 극심한 시련 속에 있는 민족의 처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물 속에서 비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일은 주저앉거나 넘어지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저앉을 수는 없었습니다. 넘어져서도 안된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거기서 포기한다면 자신이 민족을 위해 몸바쳐 살 길은 영영 사라져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1910년 만해는 금강산 표훈사에서 조국의 멸망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반나절이나 짐승처럼 울부짖었고 한달 반 동안 문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님인 조국이 그렇게 짓밟히고 역시 자신의 님인 중생이 노예가 된 현실에 기가 막일 따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만해는 빼앗긴 님을 다시 만나기 위해 시를 썼고 온몸을 바쳐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의 삶과 시 모두가 빼앗긴 님, 당신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독립운동의 무대였던 만주를 찾아가 군관학교를 세우는 데 힘썼고 독립군 훈련장을 찾아다니며 독립의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 첩자로 오인한 독립군의 총에 맞아 죽을 뻔한 일도 있습니다. 뼈를 갉아내는 수술을 하였는데 마취제도 없이 수술을 했습니다. 그는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도 신음 한번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국이 당하는 고통을 자신이 고스란히 짊어지겠다는 성자의 마음에서였을 것입니다.

19193.1운동 때 만해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만해는 한결같은 투지와 곧은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민족 대표라고 서명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일본의 총칼 앞에서 부끄러운 소리를 해댔습니다. "운명으로 체념하겠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로부터 분가하고 문권을 내달라고 의뢰하는 거나 다름없다." "어리석은 생각을 계획에 참가했다" "결코 독립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치욕스런 대답들을 내뱉을 때 만해는 "죽어 생명이 끊어져도 정신이나 영혼으로라도 민족운동을 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어진 3년의 감옥 생활에서도 만해는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옥중 투쟁 3대 원칙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변호사를 대지 말 것 2.사식(감옥에서 주는 밥이 아니라 개인이 사서 먹는 밥)을 취하지 말 것 3.보석(금품을 주고 석방되는 것)을 요구하지 말 것 등이 그 세가지 입니다. 어떤 어려움이라도 자기가 몸소 지고 이겨나가겠다는 뜨거운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일본의 침략을 받고 있는 이 땅 모든 곳이 다 감옥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19926[님의 침묵]은 태어났습니다. 결코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겠다는 한용운의 의지가 오롯이 담긴 주옥같은 시들이었습니다.

일제 침략기 막바지인 1930년대 말 만해는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글들을 쓰고자 했지만 번번히 중단해야 했습니다. 생활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불교 계통의 반일 단체를 주도한 혐의로 검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생활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끼니를 잇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항일 정신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친구들이 마련해준 집도 총독부 방향을 보기 싫다 하여 북쪽을 향하게 했으며 일제 치하에서는 호적도 만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시 속에 '민적도 없는' 여인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딸을 학교에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승려가 되기 전에 결혼했다가 집을 떠난 뒤 55세에 다시 뒤늦게 결혼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그는 친일한 사람들의 도움을 극구 거절했습니다. 같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뒤에 변절한 최린은 만해의 생활이 염려되어 돈을 두고 갔다가 돌려받아야 했습니다. 만나주지도 않았습니다.

이광수가 일본식 군대와 전투복을 입고 그의 집에 오는 것을 보고 욕을 하며 쫒아낸 일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창씨 개명한 사람들을 개자식 같은 놈들이라고 하니 만해는 "그런 소리 말라. 개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의라도 있는데 의가 없는 인형은 개만 못하니 개가 들으면 반대할 것이다"고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총독부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유명 인사들이 학병 권고를 하러 다니니 강연은 안해도 사진이나 한 번 찍자고 했습니다. 신상에 위험이 있다는 위협도 곁들였습니다. 만해는 크게 호령했습니다.

 

 

"이놈,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났으면 사람 노릇을 해야 한다. 사람의 도는 정의와 양심이다. 정의를 생명보다 중히 여겨는 법이다. 너희 같은 놈들은 신상 위협은 고사하고 조금만 이익이 있으면 양심의 부끄러움도 모르고 짐승의 짓도 하지마는 나는 정의가 생명이다. 위험은 겁내지 않고 못할 짓은 죽어도 못한다. "

1944년 님의 모습을 다시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건만 만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66세였습니다. 죽어도 ''의 모습을 잊지 못함인지 4일 동안 그의 시신은 살아있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평생 올바른 삶의 길을 추구하며 님을 노래한 한용운의 삶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우쳐주었습니다. 한평생 ''을 노래하며 살았던 그의 삶은 이제 우리에게 ''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나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2) 감상 노트

1926년 발표된 {님의 침묵}은 우리 시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갖는 시집으로 평가됩니다. 왜냐하면 이른바 '동인지 시대'라 하여 낭만파니 경향파니 하는 시파들이 유행하던 1920년대에 어떤 시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시세계를 이룬 시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대시의 빛나는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시집에는 주옥같은 순수 서정시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굴하지 않는 강인한 내적 에너지를 여성의 목소리로 담고 있습니다.

88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시가 바로 시집 제목과 같은 님의 침묵입니다.

이 시는 전 10행으로 된 전연시입니다. 님과 이별한 슬픔과 그 극복을 노래하고 있는데, 형식과 내용이 향가인 제망매가와 매우 비슷합니다. 우선 형식 면에서 향가 10구체는 낙구에 '아으'라는 감탄사가 반드시 오게 되어 있는데, 이 시 역시 10행으로 되어 있고 9구에 '아아'라는 감탄사가 나옵니다. 또한 내용 면에서도 제망매가]가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극락 정토에서 만날 날을 기다리며 불도에 정진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데, 이 시도 님과의 이별로 인한 슬픔, 그 슬픔을 님이 돌아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극복하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통점은 이 시가 슬픔을 한()으로 응결시키지 않고 의지적으로(종교적으로) 극복하는 시가류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지요. 그럼 각 시행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1행은 '님은 갔습니다'라는 점충적 반복을 통해 님과의 이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님이 떠난 이유는 제시되어 있지 않고 다만 님이 떠나고 없는 상태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때 '아아'라는 감탄사는 이별의 슬픔을 영탄적으로 드러내 준 것으로 해석됩니다.

2행 역시 님의 부재 상태를 그려 주고 있는데, 과거에 님이 떠날 때의 모습을 재현시키고 있습니다. 님은 '푸른 산빛'을 깨뜨리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정녕 떨치지 못할 나를 '차마(이 말은 문법상 부정 호응하는 말인데 시적 자유로 쓰임) 떨치고 갔습니다'. 여기서 '푸른 산빛'은 싱싱한 색채 이미지로서 희망을 상징하는 데 비해 '단풍나무'는 낙엽이 되어 없어질 조락을 뜻합니다. ''''가 함께 나누었던 기쁨의 나날들이 이제는 퇴색되어 님은 내 곁을 그렇게 떠나갔던 것입니다.

3행은 님이 떠난 후 내게 온 변화를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님과 함께 사랑을 나누었을 때 님과의 맹서는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났습니다. 그러나 님이 가버린 지금, 그것은 '차디찬 티끌'이 되어 '한숨의 미풍'에조차 가볍게 날아가 버렸습니다. 매우 슬픈 실연의 아픔입니다.

4행 역시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가버린 님을 그려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나의 운명을 전환시켰다고 말하고 있는데, 왜 첫 키스의 경험을 '달콤하다'는 수식을 달지 않고 '날카롭다'고 했을까요. 이는 '첫 키스'가 육체적 접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각성, 깨달음의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승려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시인이 속세를 떠나 불도에 귀의하게 된 일이나, 3.1운동을 계기로 독립 운동가로서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 일 등을 그렇게 표현한 것 아닐까요. 시인의 삶과 관련지어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시인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가 시인의 삶과 고뇌, 그리고 영혼까지도 모두 담고 있다고 할 때, 시인의 삶은 시의 해석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더구나 만해의 시는 매우 함축적이고 다의적인 시어로 이루어져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는데, 그의 삶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것이 오류를 줄이는 방법일 것입니다. 어쨌든 4행에서 시인의 운명을 전환시킨 장본인인 님은 뒷걸음쳐서 사라진 상태입니다.

5행에서는 내 운명을 전환시킨 님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다는 사랑의 맹목 상태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귀먹고 눈멀었다'는 표현은 역설법으로, 역설을 통해 나에게 님의 존재가 어떠한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로 님은 나의 생존의 의미이며 나의 온 삶을 지배하는 절대적 존재인 것이지요.

6행에는 뜻밖의 이별에 슬픔을 터뜨리는 시인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시인은 사람의 사랑은 영원할 수 없고 단지 순간에 불과함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했어도 막상 사랑하는 이와 혜어지는 순간이 오면 어쩔 수 없이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겠지요. 그러나 사람이 만나면 언젠가 혜어지는 것처럼, 혜어지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회자 정리(會者定離 :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 거자 필반(去者必反) :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이라고 하지요. 이 행에서는 회자 정리만 말하고 있지만 결국 시인은 거자필반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7행에서는 전체 시상이 전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라는 역접을 통해 이별의 눈물을 거부하고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붓는, 슬픔에서 희망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쓸데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줄 아는 까닭'입니다. 오히려 님이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정진하며 님을 기다리는 것이 참된 사랑임을 시인은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8행에서 이러한 태도의 전환은 깨달음에서 신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회자 정리로 님과 헤어진 것처럼 거자 필반으로 님과 다시 만날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는 9행의 역설이 가능해집니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고 해서 그 위에 푸른 하늘이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님은 현재 일시적으로 은폐되어 있을 뿐이며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행에서 감탄사 '아아'1행에서와 같이 슬픔의 영탄이 아니라, 님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의 영탄으로 보아야 합니다.

또한 9행은 '무엇은 무엇이다'는 각 행의 단조로운 진술과는 달리 역설적인 진술을 하고 있으며, ()-()-()의 변증법적인 논리로 희망-조락, 기쁨-슬픔, 이별-만남의 대립을 통일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시행이 매우 긴밀하고 유기적인 구조를 가지게 됩니다.

마지막 10행은 9행의 연장으로, 시인의 영원한 노래가 님의 침묵을 쉽싸고 도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님이 침묵을 깨고 다시 만날 때까지 끝없는 사랑으로 살아가겠다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님의 침묵'은 인간의 정지된 침묵이 아니라, 말없는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침묵으로 해석됩니다, 왜냐하면 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종교적인 순종과 맹목의 사랑임을 볼 때, 님의 침묵 역시 종교적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의 문맥을 따라서 이 시의 대강을 살펴보았는데, 그러면 과연 ''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요? 만해의 시는 다의적인 시어를 사용해 해석의 다양성을 보여 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이라는 시어는 그의 시를 더욱 애매하면서도 미묘한 맛을 지니게 하는 요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한용운의 ''은 한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육체적인 사랑의 존재는 아닙니다. 님은 내게 날카로운 진리의 깨달음을 가져다 주고, 끝없이 예찬되고 나의 사랑을 받는 숭배의 대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님은 내게 정신적인 존재이고 나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절대자입니다. 그러므로 님의 실체를 알려면 작가의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평생 독립 운동가로서, 승려로서 우뚝 선 삶을 살았고 이에 끊임없지 정진했던 만해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은 바로 독립 운동가로서의 만해에게 '조국'일 수밖에 없고, 승려였던 그에게 '부처'일 수밖에 없겠지요.

시의 해석이 작가의 생애에 꼭 구속될 필요는 없겠지만 님의 침묵의 경우는 한 순간의 정서를 표출한 시라기보다는 만해의 삶의 연장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이런 해석이 큰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3) 생각해 보기

1) 한용운의 시가 1920년대 문단에서 가졌던 특수성과 시사적 의의를 생각해 봅시다.

2) 이 시가 신라 향가 제망매가와 유사한 점을 형식과 내용 면에서 생각해 봅시다.

3) ''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고, 고려 속요 가시리의 님, 정철의 가사 사미인곡의 님 등과 비교해 봅시다.

4) 이 시의 시상 전개를 볼 때, 불교 사상과 관계가 깊습니다, 불교의 공 사상과 윤회 사상이 나타나 있는 부분을 찾아봅시다.

5) 만해의 시는 저항적인 내용과는 달리 여성적인 어조로 쓰여 있습니다. 그 까닭을 생각해 봅시다.

 

 

(4) 또 다른 시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을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생각하면서 읽어 봅시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1910829`한일병탄'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배를 공식화한 일제는 식민지배를 공고히하기 위한 각종 조처를 착착 밟아나갔다. 총독부에서 헌병 및 경찰로 이어지는 행정적무력적 기반 마련, 항일의병전쟁에 대한 강력한 토벌작전, 신문지법과 출판법, 조선교육령 등의 법제적 장치를 통한 언론 및 교육의 통제, 그리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식민지적 농업구조의 형성을 거치면서 일본의 식민지배는 안정궤도에 올라선 것처럼 보였다.

 

`무단정치'(武斷政治)로 규정할 만한 일제의 식민통치는 그러나 조선민중의 거센 반발에 부닥치게 된다. 일찍이 동학농민전쟁과 의병투쟁 등을 통해 외세를 물리치기 위한 검질긴 투쟁의 전통을 쌓아온 조선인들은 1919121일 급서한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에 흥분하고, 그해 28일 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 발표에 고무받아 전국적인 규모의 항일시위에 나선다. 31만세운동이다. 그 만세운동의 한가운데에 만해 한용운이 있었다.

 

만해는 31운동의 계획과 준비 단계에서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거사 당일에는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의 앞에 서서 독립투쟁의 의지를 다짐하는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도했다. 거사 직전 다른 민족대표들에게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취하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 3대 행동원칙을 제시한 그는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이냐는 일본인 판사의 질문에 대해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또한 옥에 갇힌 민족대표들 사이에 자신들이 극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그들 중 일부가 불안과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분뇨통을 그들에게 던지며 나약함에 대해 일갈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만해는 불굴의 투지와 용기를 지닌 독립투사인 동시에 당대 최고의 불교사상가요 한국 현대시의 한 흐름을 열어젖힌 탁월한 시인이기도 했다. 혁명가와 사상가와 문인이라는 세가지 성격을 한 몸 안에 아우른 그의 전인적인 풍모는 한국사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경우를 찾기 힘들 정도다. <조선불교유신론>을 비롯한 저술과 월간 불교잡지 <불교>의 운영, 청년불교단체의 설립과 지도 등을 통해서 그는 불교의 혁신과 대중에의 파급을 꾀했으며 그 궁극적 도달점은 그 자신 `불교사회주의'라 이름한 것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인들 사이에 한층 더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역시 <님의 침묵>이라는 걸출한 시집을 펴낸 시인으로서의 만해 한용운이다. 31운동과 관련해 옥고를 치르고 나온 뒤인 1925년 설악산 백담사에 딸린 오세암에서 탈고해 다음해 책으로 묶어낸 <님의 침묵>31운동의 정신과 힘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문학적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명시집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표제시를 비롯해 <님의 침묵>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이라는 절대의 존재를 향한 구애와 귀의, 이별의 슬픔과 기다림의 환희라는 일관된 주제의식 아래 묶여 있다.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상태에서 떠나간 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애정을 토로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는 연애시의 구도를 취한 이 시집은 만해의 님이 그가 귀의한 불교적 진리일 수도, 그의 조국인 독립 조선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넓고도 깊은 울림을 준다. 그러나 󰡒나의 머리가 당신의 팔 위에 도리질을 한 지가, 칠석을 열 번이나 지나고 또 몇 번을 지내었습니다󰡓라는 시 `칠석'의 한 구절은, 그가 <님의 침묵>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시점을 감안한다면, 만해의 님의 자리에 무엇보다도 먼저 조국을 놓아두어야 함을 알게 한다.

 

<님의 침묵>에서 이별은 화자의 세계인식과 문학적 형상화를 가능케 하는 기본 전제로 기능한다. <님의 침묵>의 모든 시들은 이별이라는 상황으로부터 비롯한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이별은 그러나 사랑하는 대상과의 합일의 가능성이 완전히 깨어지고 마는 부정의 원천이 아니라 사랑의 강도를 확인하고 장래의 합일을 희구하게 만드는 긍정적생산적인 이별이다.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이별은 미의 창조')라는 구절은 이별과 만남, 눈물과 웃음, 죽음과 생성의 변증법적 순환을 요령있게 표현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님의 침묵')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 한학을 수학한 만해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조국의 존망을 염려하며 일단 출가한 것이 그의 나이 17살 때인 1896년이었다. 백담사와 오세암 등지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시베리아에 다녀오기도 한 그는 1904년 초 잠시 향리에 들렀다가 그해 말 완전히 출가하게 된다. 외아들 보국이 태어난 지 불과 며칠 만의 일이었다.

 

행동하는 학승으로 변모한 그는 경성에서 불교개혁과 조선독립을 위한 사회적 활동을 펼치는 사이사이 그가 처음 머리를 깎고 계를 받은 백담사와 오세암에 머물며 <조선불교유신론><님의 침묵> 등을 저술했다. 그러나 지금 백담사와 오세암에서 그의 자취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가 머물던 백담사의 요사채는 `만해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흔한 편액 하나 걸려 있지 않다. 다만 그 곁에 세워진 시비 `나룻배와 행인'만이 한가닥 씁쓸한 위안을 던져줄 뿐이다. 백담사를 찾는 관광객들 역시 만해의 자취보다는 지난 89년 표변한 세상인심에 쫓긴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던 방의 위치에만 관심을 보인다. 만해와 전두환씨는 60여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같은 건물 같은 방에 머물렀었다.

 

백담사에서 6남짓 떨어져 있는 오세암 역시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만해 시절의 건물은 한국전쟁 당시 다 불타 없어져 버렸고, 원래의 암자가 있던 자리에 새로 지은 `천진관음보전'의 옆 벽에 <님의 침묵>을 집필하는 만해의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을 따름이다. 오세암의 주승인 경원 스님은 󰡒오세암 경내에 만해의 시비를 건립하고 그가 머물던 방을 다시 꾸미는 한편, 백담사에서 오세암에 이르는 산길에 그의 법명이나 싯구를 딴 이름을 붙이는 방안을 관련 학자 및 문인들과 논의중󰡓이라고 밝혔다.

 

백담사/글 최재봉, 사진 강창광 기자

 

 

 

만해 한용운의 작품 세계

 

1. 들어가는 말

萬海 韓龍雲(18791944)舊韓末日帝時代의 어려운 時期를 독립운동가로 佛敎學者, 詩人으로서 살다 간 民族의 빛이 될만한 先人이었다. 당시 혼란기의 시대적 狀況이 만해로 하여금 그의 才能을 발휘하게 함으로써 실천적인 불교학자로, 민족운동가로 詩人으로 확고한 자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과 의식있는 사람들이 日帝의 강권에 못이겨 일제 강점기 체제에 동조하거나 변절한 글을 쓰거나, 올바른 대응 방법을 찾지 못한채 일본으로부터 들어 온 서구 근대사조에 무분별하게 휩쓸려 가고 있을 때 만해는 이러한 문학적 시련을 克服하고 문단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지 안흥면서도 독자적 문학활동으로 당대의 문제점과 지향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행동하였다는 데서 萬海文學의 참뜻이 놓이게 된다.

 

 

2. 萬海 詩에 나타난 詩精神

萬海詩集 [님의 沈黙]은 나와 님과의 사랑을 노래한 시집이다.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사랑이란 표현은 '''' 또는 '''우리'의 관계로 보아야지 남녀관계만은 아닌 것이다. ''은 군말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마다 그 시에서 나타내는 ''이 같을 수는 없다. 때로는 조국이나 민족을 의미할 수도 있고 때로는 연인일 수도 있고 때로는 논개나 계월향 같은 실제 인물일 수도 있으며 또는 인물이 아닌 절대자나 열반의 경지 또는 무아와 같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님은 곧 沈黙이란 말도 성립된다. 님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며 사랑의 다른 表現은 기다림과 그리움 등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祈禱, 祈禱]에서 이 시집을 [사랑의 노래]라고 지적한 것이나, [사랑의 證道歌]라고 한 것은 정곡을 찌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萬海詩精神을 사랑(자비)이라고도 할 수 있다.

萬海詩集 [님의 沈黙]의 대다수의 는 이별에서 시작하여 만남으로 끝나는 연작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집의 구조는 [님의 존재][님의 부재]를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存在] [不在] [存在]의 변증법적인 인식을 통한 止揚을 나타낸 주고 있다. 이별을 통한 님의 부재에서 노래는 시작되어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님의 存在]를 알리는 데서 끝나고 있다. 그의 는 이별의 인식을 통하여 깨달음이 시작되고 만남의 확신에서 해탈과 열반에 도달하는 구도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해탈이란 대 자유를 뜻하여 대 자유는 인욕과 속박과 기다림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그는 안다. 이러한 대주제 아래 계획된 일련의 구조를 가지고 쓰여졌기 때문에 연작시로 보아야 한다.

다음으로 만해 시의 미학은 그의 표현기교와 체험을 바탕으로 한 깊은 사상이 잘 조화되어 있는 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수사법의 특징은 은유법과 逆說과 부정적 표현 등에 있다. 이러한 수사법은 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으며 시의 사상과 잘 조화되어 있다. 그의 사상적 깊이는 예술적 표현으로 인하여 잘 형상화되어 있다.

萬海 詩의 핵심어들은 <, , 이별, 만남, 사랑>등이다. <>는 만해 자신일 수도 있고 독자일 수도 있으며 <우리>일 수도 있다. <><누구>, <그대>, <당신>등으로도 표현되며 그 대상은 일정할 수 없고 다만 그리운 것이거나 사랑하는 대상은 다 <>이 될 수 있다. 나와 님 사이에 이별이 있고 만남이 있으며, 사랑이 있다. 이별과 만남이 둘이 아니듯 도 또한 둘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도달할 것을 희망한다. 이별의 슬픔에서 만남의 희망으로 끝나는 그의 <어린양><깨달은 양>으로 되는 과정을 체험하도록 짜여져 있다.

萬海詩精神은 기다림과 사랑이라 할 수 있고, 체험을 통한 그의 역사의식이나 종교적 염원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의 역사의식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요, 종교적 염원도 결국은 대승사상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만해는 선승, 지사, 시인의 세 측면으로 인간을 이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의 文學韓國 現代詩史에서 독특한 존재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를 볼 때에는 그의 人間的인 세 측면은 결국 하나로 합치된다고 할 수 있다. 선승시인, 지사시인이 일체로서의 詩人일 따름이다. 선승이나 지사로서의 체험이 바탕을 이루어 창작된 이기 때문에 시정신에 있어서 더욱 치열하며 따라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시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그의 詩作品 <님의 沈黙>은 이별과 만남의 因果律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별이 원인이라면 만남은 그 결과에 불과하다. 그와 반대로 만남이 원인이라면 이별은 그 결과다. 이별과 만남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불이사상에 귀착된다. 이 작품은 이별과 만남이 인과율에 따라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을 깨닫게 한다. <나룻배와 행인>은 기다림과 희생적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기다림은 사랑의 다른 표현일 뿐 똑같은 내용이다. 부처의 중생에 대한 사랑은 헌신적 사랑이다. 이 시는 부처의 자비를 깨닫게 해주는 시작품이다. <당신을 보았습니다>는 만해의 역사의식을 잘 반영한 시다. 조국광복을 위한 정열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역사의식이란 역사에 대한 비판정신이라 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한 비판정신은 시정신과 상통한다. 시정신 속에 현실의식이나 역사의식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알 수 없어요>는 우주적 상상력과 종교적 염원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난 求道精神萬海의 시정신의 일면이라고 하겠다. 만해의 시정신은 詩集 [님의 沈黙]에서는 사랑으로 나타났다. 중생에 대한 사랑이건 사랑은 궁극적으로는 둘이 아니요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또 만해의 시작품을 보면 <人間과 자연과 과의 合一化> 건너간다. 안고 강을 건너는 행위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꾸어 생각하면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참고 행하는 헌신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詩集 [님의 沈黙]萬海는 나와 님 사이의 사랑을 노래한 라 할 수 있다. 만해 시를 [사랑의 證道歌]라고 이름 붙이기도 하였는바 증도란 불교용어로 깨달음의 진리 그 자체 또는 그것에 대하여 굳게 약속을 한 실천 행위를 뜻한다.

만해는 조국이 일제하에 강점된 현실 앞에서 절망하여 몸을 가누기 어려운 때 불교에 몸을 맡길까, 독립투사가 될까, 아니면 이대로 타락의 길에 몸을 맡겨 좌절하고 말까 하고 방황하는 순간에 조국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처럼 만해의 길은 조국을 위하여 한 일까지도 大乘思想에서 나온 것이라 보여진다. 중생구제라는 사상에서 조국과 민족의 불행을 좌시할 수 없었으리라 본다. 그의 시정신 속에는 현실이나 역사의식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3. 만해 시작품의 특징

 

(1) 逆說的 表現

萬海逆說的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만해 의 특징을 <동일과 모순을 융합한 論理>라고 하며, 또 만해 시의 역설을 佛敎存在論에 입각한 存在論逆說로 분류했다.

이러한 역설이나 여성편향적 구조는 韓國文學의 저변에 깔려 있는 정서의 세계로 이별, 슬픔, 그리움, 체념, 숙명등으로 表象된다. 이런 정서의 특성은 女性偏向的 속성과 결부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逆說은 아이러니와 함께 고대 그리스에서 수사학의 용어로 사용되어 왔고, 19C 낭만주의시대에는 아이러니와 혼동되어 사용되었고 20C 신비평가인 브룩스가 "言語逆說言語."라고 하여 現代詩構造 原理로 삼기까지 했다. 逆說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이러니와 구분되면서도 흔히 혼동되고 있는 문학적 장치로서 곧 둘 다 모순을 통한 진리의 발견에 기여하며 서로 상반되는 모순을 내포하는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이 복잡성은 現代詩美的價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라는 진술은 외견상 자기 모순에 빠져 있지만 그 속에는 진리가 숨어있는 逆說이 된다. 휠라이트는 이 逆說을 크게 세 종류로 분류하여 표층적 逆說, 심층적 역설, 시적역설로 나타내었다.

萬海 詩逆說은 이 중에서 주로 심층적 역설에 해당되는데 이 역설은 종교적 진리와 같이 신비스럽고 초월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만해의 에서 이러한 역설은 그의 시 <反比例>에서 잘 드러난다.

, 全文이 역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리][침묵]의 모순되는 두 命題가 가설적으로 결합된다. 따라서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랫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라는 시적 逆說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역설은 모순을 극복하고 시적 초월과 비약을 성취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동시에 시적 상상력을 전개하는 근본 원리로 사용하게 된다. 바로 이 점이 만해 속에 깔려있는 정신적 극복과 시상을 전개하는 方法論으로서의 逆說의 중요성이 인정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그의 시 <님의 침묵>에서도 역설이 잘 드러나 있는데 대표적인 시형은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이다. 이런 역설은 '움직임이 곧 고요함이요, 고요함이 곧 움직임'이라는 생사를 초월한 그의 선사상(禪思想)에서 확실히 찾아 볼 수 있으며 불교의 언어가 바로 역설임을 반영하고 있다. 님과 같은 초월적 존재나 의 경지나 종교적 진리는 상징이나 역설로 밖에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2) 님의 象徵化

 

 

萬海에 있어서의 ''은 대단히 重要意味를 갖는다. 그의 詩集 [님의 沈黙]에 실린 88편 중 ''이 나타나 있는 作品46편이다. 萬海에게 있어서 님은 생명이 根源이고 永遠에의 극치며 또한 삶을 위한 신념의 결정이다. 그가 노래하고 있는 ''이란 萬海 이전의 생명적 요소로 究明할 수 있으며 생명적 요소가 형이상학적인 思惟에 의하여 예술로 승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은 어떤 때는 佛陀도 되고, 자연도 되고, 日帝에 빼앗긴 조국이 되기도 하였다. ''이 가지는 象徵的意味는 그만치 形而上學的인 다양한 신비성을 띠우고 있었다. 그의 임은 佛陀異性도 아닌, 바로 日帝에 빼앗긴 조국이었다. 그의 ''은 조국도 될 수 있고, 민족도 될 수 있고, 佛陀도 될 수 있고, 異性도 될 수 있는, 환언하면 어디까지나 복합체로 구성된 존재 가운데서, 여기서는 다름 아닌 '衆生'을 그의 ''一典型으로 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보아 그 衆生 안에 이성도 민족도 식물도 동물도 모두 내포시켜 통틀어 그의 ''으로 정한바 있었다.

韓龍雲''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詩集 [님의 沈黙]序文을 보아야 한다. "[]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釋迦의 님이라면 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伊太利. 님은 내가 사랑할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님만 님이 아니라'의 첫 ''은 보통 쓰이는 意味의 님, 곧 이성간이나 인간관계에서의 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한용운은 이런 일반적인 님의 개념을 부정하고, 그리워하는 대상은 다 님이라 하여, 님의 개념범주를 확대하고 있다.

韓龍雲의 님은 어떤 存在이건 佛法과 관련되어 있거나, 佛身의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이며 (色卽是空, 空卽是色), 또는 '無常 無我'의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不定論理에 의거한 (逆說的 存在)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에 나타나는 ''은 바로 '佛身' '逆說的 存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보이면서 보이지 아니하고, 갔으나 가지 아니하였으며, 있으면서 있지 않는 존재다. 顯示性隱蔽性, 단절성과 동일성, 現實性과 초월성을 가진 존재가 한용운의 님이다.

萬海佛敎思想을 제대로 理解하면 그의 ''이 과연 누구냐 하는 의문은 저절로 풀린다. ''이 한 여인의 사랑하는 남성이자 시인이 잃어버린 조국과 자유요 또 불교적 진리이자 중생이기도 하다는 것, 그 모든 것이면서 그것이 그때 중첩되어 보이기도 하는 것, 그것은 가장 이성적인 사고방식이며 존재의 참 모습에 대한 가장 온당한 일컬음인 것이다.

 

 

역설적 표현이 두드러진 한용운의 주요 작품

 

이하 짙게 쓰인 부분은 역설적 표현에 해당됩니다.

 

 

작품.1 離別創造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 없는 황금과 밤의 올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읍니다.

님이며,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읍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작품.2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작품.3 님의 沈黙

 

님은 갔읍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읍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읍니다.

황금의 꽃 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읍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읍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읍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 부었읍니다. 우리는 만날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읍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작품.4 幸福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겠읍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고통도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겠읍니까.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일생에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여 나를 미워한다면 나의 행복은 더 클 수가 없읍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나를 미워하는 원한의 豆滿江이 깊을수록 나의 당신을 사랑하는 행복의 白頭山이 높아지는 까닭입니다.

 

 

작품.5 服從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읍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작품.6 快樂

 

 

님이며 당신은 나를 당신 계신 때처럼 잘 있는 줄로 아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나를 아신다고 할 수가 없읍니다.

 

 

당신이 나를 두고 멀리 가신 뒤로는 나는 기쁨이라고는 달도 없는 가을 하늘에 외기러기의 발자취만큼도 없읍니다.

 

 

거울을 볼 때에 절로 오던 웃음도 오지 않습니다.

꽃나무를 심고 물 주고 복돋우던 일도 아니합니다.

고요한 달 그림자가 소리 없이 걸어와서 엷은 창에 소곤거리는 소리도 듣기 싫습니다.

가물고 더운 여름 하늘에 소낙비가 지나간 뒤에 산모롱이의 작은 숲에서 나는 서늘한 맛도 달지 않습니다.

동무도 없고 노리개도 없읍니다.

 

 

나는 당신 가신 뒤에 이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쾌락이 있읍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따금 실컷 우는 것입니다.

 

 

작품.7 禪師說法

 

나는 선사의 설법을 들었읍니다.

[너는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 사랑의 줄을 끊어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즐거우리라]고 선사는 큰 소리로 말하였읍니다.

 

 

그 선사는 어지간히 어리석습니다.

사랑의 줄에 묶인 것이 아프기는 아프지만 사랑의 줄을 끊으면 죽는 것보다도 더 아픈 줄을 모르는 말입니다.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大海脫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님이여 나를 얽은 님의 사랑의 줄이 약할까봐서 나의 님을 사랑하는 줄을 곱드렸읍니다.

 

 

작품.8 反比例

 

당신의 소리는 [沈黙]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래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 그려

당신의 소리는 沈黙이여요

 

 

당신의 얼골은 [黑闇]인가요

내가 눈을 감은 때에 당신의 얼골은 분명히 보입니다 그려

당신의 얼골은 黑闇이여요

 

 

당신의 그림자는 [光明]인가요

당신의 그림자는 달이 넘어 간 뒤에 어두운 창에 비칩니다 그려

당신의 그림자는 光明이여요

 

 

작품.9 사랑의 存在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을 이름지을 만한 말이나 글이 어데 있읍니까.

微笑에 눌려서 괴로운 듯한 薔薇빛 입설인들 그것을 슬칠수가 있읍니까.

눈물의 뒤에 숨어서 슬픔의 黑闇面反射하는 가을 물결의 눈인들 그것을 비칠 수가 있읍니까.

그림자 없는 구름을 거쳐서 메아리 없는 絶壁을 거쳐서 마음이 갈 수 없는 바다르 거쳐서 存在? 存在입니다.

그 나라는 國境이 없읍니다. 壽命時間이 아닙니다.

사랑의 存在는 님의 눈과 님의 마음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의 秘密은 다만 님의 手巾놓는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詩人想像과 그들만이 압니다.

 

 

 

작품.10 떠날때의 님의 얼골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목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골이 더욱 어여쁩니다.

 

 

떠나신 뒤에 나의 幻想의 눈에 비치는 님의 얼골은 눈물이 없는 눈으로는 바로 볼 수가 없을 만치 어여쁠 것입니다.

님의 떠날 때의 어여쁜 얼골을 나의 눈에 새기겄읍니다.

님의 얼골은 나를 울리기에는 너머도 야속한 듯하지마는 님을 사랑하기 위하야는 나의 마음을 질거웁게 할 수가 없읍니다.

만일 그 어여쁜 얼골이 永遠히 나의 눈을 떠난다면 그때의 슬픔은 우는 것보다도 아프겄읍니다.

 

 

작품.11 藝術

 

몰란 결에 쉬어지는 한숨은 봄바람이 되야서 야윈 얼골을 비치는 거울에 이슬꽃을 핍니다.

나의 周圍에는 和氣라고는 한숨의 봄바람밖에는 아모것도 없읍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水晶이 되야서 깨끗한 슬픔의 聖境을 비칩니다.

나는 눈물의 水晶이 아니면 이 세상에 寶物이라고는 하나도 없읍니다.

 

 

한숨의 봄바람과 눈물의 水晶은 떠난 님을 기루어하는 秋收입니다.

저리고 쓰린 슬픔은 힘이 되고 이 되야서 어린 과 같은 적은 목숨을 살어 움직이게 합니다.

님이 주시는 한숨과 눈물은 아름다운 藝術입니다.

 

- 한국 현대 시문학 대계2, 한용운, 지식산업사, 1985 -

 

 

<어우야담>에 기록된 논개

 

논개(論介)는 진주 관기(官妓)였다. 계사년(癸巳年)에 김천일(金千溢)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를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마침내 성은 함락되고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이때,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하고 촉석루(矗石樓)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서 있었으니, 아래는 만 길 낭떠리지였다. 사람의 혼이라도 삼킬 듯 파도가 넘실거렸다.

왜병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왜장 하나가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논개는 요염한 웃음을 흘리면서 왜장을 맞았다. 왜장의 손이 그녀의 몸을 잡자, 논개는 힘껏 왜장을 끌어안는가 싶더니 마침내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둘이는 모두 죽고 말았다.

임진란을 당하여 관기의 경우, 왜놈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이가 어찌 논개 한 사람에 그치겠는가? 이름도 없이 죽어 간 여인들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 관기라 하여 왜적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목숨을 끊었다고 할지라도 정렬(貞烈)이라 칭할 수 없으니 어찌하랴.

그러나 그런 도랑물 같은 신세로서도 또한 성화(聖火)할 수 있는 정신이 있었으니, 나라를 등지고 왜적에게 몸을 바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을 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유몽인, '어우야담', (이민수 역편, 정음사, 1975)에서>

 

 

 

역설(逆說)의 이해

 

한용운의 시가 널리 애송되는 까닭은 그 나름의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매력의 하나는 역설(逆說, paradox)이다.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南江(남강)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矗石樓)는 살 같은 光陰(광음)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論介(논개),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同時(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論介(논개),

 

 

이 시는 400년전 임진왜란 때 진주(晋州)에서 산화(散花)한 논개의 넋을 기리는 시다. 자신이 논개의 애인이라는 가정 아래 그를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심정을 절절히 풀어 가고 있는 애도시이다.

그런데 이 시는 전후가 당착된 진술 방식으로 독자를 의아하게 만든다. '흐르고 흐르는 남강'인데 왜 가지 않는단 말인가? 이 말은 사리(事理)에 맞지 않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 보면 진실인 것도 같다. 400년전의 비극의 현장은 오늘날에도 우리의 눈앞에 그냥 있기 때문이다. , 거기 서 있는 '촉석루'는 어디론지 '달음질'친다고 했으니, 이것 역시 뭇 독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역시 진실이다. 왜냐하면 '살 같은 광음을 따라서'라는 말이 전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월의 강물에 밀려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가고 있지 않은가? 빛 바랜 단천, 깨어진 기왓장에 돋아난 잡초, 트고 금간 기둥, 풍화되어 가는 초석이나 석계(石階), 무엇이든 어디론지 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fact)은 아니나 시적 진실(poetic truth)의 진술은 독자에게 큰 충격과 함께 깊은 감동을 준다. 그래서 논개는 독자에게까지도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가 된다.

논개의 순국 당시 나이는 21, 꽃다운 나이다. 그에게도 소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짧은 생애였지만 여러 가지 중요한 고비, 의미 있는 사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비''사건'등은 사상(捨象)되고, 우리 머릿속에 나타나는 것은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한 논개가 왜장 게다니(毛谷六助)라는 자를 떠밀면서 의암(義岩)에서 투신하는 극적 장면인 것이다.

그래서 '천추에 죽지 않는 논개'는 곧 '하루도 살 수 없는 논개'이기도 하다. 죽음을 현재형으로 파악함으로써 죽어 가고 있는 상태를 환기하고, 죽음의 의미를 영원성으로 승화하고 있다.

이와같이 모순되고 앞뒤가 당착(撞着)된 진술은, 실은 한용운의 시학(詩學)의 핵심 원리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관이나 인생에 대한 인식의 원리이기도 하다.

 

 

-김은전- (교과서 부록 341)

 

 

논개

 

임진왜란 때의 의기(義妓). 성 주(). 전북 장수(長水) 출생. 진주병사(晋州兵使) 최경회(崔慶會)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며, 그 밖의 자세한 성장과정은 알 수가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진주성만이 남았을 때 왜병 6만을 맞아 싸우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왜장들은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였다. 기생으로서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울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전사한 장군들의 원한이라도 풀어주고자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冑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이 날은 장수군에서 논개아가씨를 선발하고 기념탑을 참배하는 등 논개의 정신을 되새기는 각종 민속행사를 가진다.

- 두산세계대박과사전 -

 

義妓祠. 경남 진주시 본성동 소재. 경남 문화재 자료 제7. 논개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전북 장수군 장수읍의 논개 사당인 의암사(義岩祠)에 세워진 비. 비에 쓰인 것은 변영로(卞榮魯)의 시이다.

 

義巖祠. 전북 기념물 제46. 전북 장수군 장수읍에 있는 논개의 영정을 모신 사당. 1954년 건립.

 

경남 진주시 본성동 소재. 의기(義妓)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촉석루 바로 옆에 있다.

 

경남 진주시 소재. 논개의 영정이 있는 사당의 내부

 

- 관련 화보 출처 - 계몽 on-line 웹백과

 

 

한용운 韓龍雲

1879(고종 16) 1944 시인. 독립운동가.승려. 아명은 유천(裕天),계명(戒名)은 봉완(奉玩). 법명은 용운,법호는 만해(萬海 or 卍海). 충남 홍성군 경성면 성곡리에서 옹준의 차남으로 출생.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수학, 1896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실패하고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 여기서 수년간 머무르며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인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에 접했다. 특히 중국의 선각자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0114세 때 결혼했던 고향의 처가에 돌아와 약 2년간 은신, 그후 다시 집을 나와 방황하다 1905년 강원도 백담사에서 중이 되었다. 이해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방황하며 견문을 넓히고 귀국, 안변 석왕사에서 참선하다가 다시 만주와 시베리아로 유랑, 1905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토쿄, 교토, 등지의 사찰을 순례하고 조동종대학림에서 3개월간 불교와 동양철학을 연구했다. 1911년 만주의 교포실정을 알아보기 위해 도만했다가 교포로부터 밀정으로 외심을 받아 총격을 당해, 이것이 만성 요두증의 원인이 되었다.

이 무렵 친일 승려 이 희광 일파가 원종종무원을 설립,1910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체결하고 돌아오자 그는 이에 분개,1911년 박한영등과 승려대회를 개최,친일불교의 획책을 폭로하여 그 흉계를 분쇄하는데 성곡했다. 한편 넓은 견문과 근대적인 지식을 터득한 그는 이같은 인식을 토대로 당시 조선 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와 운든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 비판 한 대저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 ,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는 학구적인 입장에서 불교를 해설한 이론서가 아니라 조선불교의 현상을 타개하려는 열렬한 실천적 의도에서 집필한 것이다. 여기 제시된 그의 사상은 자아의 발견,평등주의,불교의 구세주의등으로서 이후 그의 모든 행동적,사상적 발전은 이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졌다. 1917년경부터 항일투사로서의 행동을 시작했고,19193.1 운동때는 독립선언준비과정에 최인과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 3년간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조선독립이유서>를 집필, 그의 독립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했다. 1922년 출옥,각지로 전전하며 강연을 통해 청년들의 각성을 촉구했고, 1924년 불교청년회의 총재에 취임,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간행하여 문단에 큰 파문을 던졌다.그는 이미 1918<창조>동인들보다 앞서 <유심>에 두세 편의 작품을 발효한 일이 있고 후일에도 <흑풍>,<후회>,<박명>등 장편소설과 상당수의 한시(),시조를 남겼으나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님의 침묵>한귄으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특이한 데가 있다. 문단이라는 것의 권외에 있었던 사실, 수입된 문예사조를 업고 다니지 않았던 사실, 동인지의 구성원이 되지 않았던 사실, 즉 문단적 시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는 당시의 문단이 빠져 이던 반()역사성과 비()사회성에서 초연히 동떨어져 문단적 테두리 안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못했던 문학적 깊이와 폭을 달성했다. 50세를 전후하여 심우장에 온거하면서 1927년에는 신간회의 발기인이 되어 경성지부장을 역임 ,1929년 광주학생운동때는 민중대회를 열고 독립운동을 도왔고[조선불교총동맹][만당]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활약,1931년에는 <불교>지를 인수, 간행하여 불교청년운동 및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벌였다. 한편 그는 앞서 말한 소설 및 불교관계의 수많은 논설을 집필했다. 일제가 민족지도자를 강요, 그들의 전쟁 목적 수행에 이용했을 때 많은 지사와 영도자가 변절했으나 그는 끝까지 만족의 지조를 지켜 서릿발 같은 절개와 칼날 같은 의기를 말해 주는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중풍으로 사망, 유해는 화장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수여,1967년 비가 파고다 공원에 건립되었으며, 1973<한용운전집(6)>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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