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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n Seeing

[극문학 줄거리/해설]동 승 -함세덕-

by 휴리스틱31 2021.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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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승     -함세덕-

 

● 줄거리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오래 된 절에서, 아직 수행을 쌓지 않은 열네 살의 사미승 도념은 자기를 버리고 달아난 어머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의 생모는 여승이었으나 사냥꾼을 만나 파계를 하고 절을 떠난다. 주지승은 생모의 행적을 들어 도념으로 하여금 어머니를 기다리는 일을 포기하도록 하지만 어린 도념으로서는 모자의 정을 쉽게 끊을 수 없다. 그러던 차에 서울에서 내려온 아름다운 미망인에게 마음이 끌리고, 아들을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던 미망인 또한 도념을 수양 아들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도념을 타락한 속세로 보내지 않으려는 주지승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서울행이 좌절되자 도념은 결국 홀로 절을 떠나게 된다.

 

● 감상 및 이해

 

이 작품에는 도념의 어머니를 향한 간절한 기다림, 그에 따른 절망과 좌절이 매우 간결하고 긴밀한 극적 구조 속에 용해되어 있다. 도념과 미망인은 서로 마음의 상처를 감싸 줄 수 있는 상대를 발견한다. 미망인은 잃어 버린 아들의 모습을 도념에게서 찾고, 도념은 미망인을 통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낀다. 어머니에게 선물할 털목도리를 만들고자 토끼를 잡아 불상에 걸어 놓고 바라보곤 한 것은 절에서의 계율을 어긴 일이기는 하지만,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극한적으로 표현된 것이기에 도념에 대한 연민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어린아이에게 불도에 정진할 것을 강요하는 주지 스님의 모습에서도 아버지와 같은,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인간의 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나무꾼인 초부는 중요한 등장인물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어린 도념을 지속적으로 지켜보며 동정하는 따뜻한 인간애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떠나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소재를 취급하고 있으면서도, 이면적으로는 보다 심원한 불타적 사랑을 변증법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 정리하기

 

 성격 및 갈래 → 희곡, 단막극, 비극, 낭만주의극

 인물 → 도념, 주지승, 미망인, 초부, 인수 등.

 배경 → 초겨울. 동리에서 멀리 떨어진 심산고찰(深山古刹)

 출전 → <한국 해금 문학 전집>

 갈등 → 인간적인 사랑과 불타적 사랑 간의 갈등

 주제 → 자유와 꿈, 모정을 향한 인간미 추구

 특성

   1) 심리 묘사의 탁월함.

   2) 인간적 숙명과 극복 의지 사이의 대립을 잘 보여줌.

   3) 도념을 사이에 둔 주지승과 미망인의 태도가 대조됨.

            주지승 <-----------> 미망인

          종교적 사랑                               인간적 사랑

             운명적 수용                     동심을 이해하는 따뜻함.

             불도를 중시

 

 

● 참고자료

 

「동승」이라는 제목은 독특하다. 작가가 원제「道念」을 「동승(童僧)」이라는 제목으로 바꿨다는 것은 어린 스님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 ―― 아이로서, 그리고 스님으로서의 이중성 ――을 상징하는 말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포인트를 잡은 나는 이 희곡을 이중적으로 읽을 수 있음을 생각하였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인간적인 사랑이 더욱 강조되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희곡이 근본적으로 열린 텍스트라는 점을 가정하면, 연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승(僧)의 측면을 강조해서 표현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1. 童 ―― 동심에 대한 폭력

이 희곡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초반에 개봉했던 영화 <불멸의 연인>이었다. 베토벤을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사건 중의 하나는 바로 베토벤이 조카인 카알을 그의 제수씨인 조안나로부터 빼앗아오는 일. 베토벤의 불멸의 여인을 조안나로 설정하고 있다는 이 영화의 전제상 당연한 결과일 것이나, 나는 여기에서 베토벤의 큰 오류 ――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카 카알로 하여금 자사로 몰아넣게 된 이유에 대해서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알을 어머니로부터 격리시키고, 어머니를 '밤의 여왕'이라고 부르면서, 그가 하고 싶은 군인의 길을 걷지 못하게 하면서 동시에 피아노를 연주하게 했던 베토벤, 그것은 그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억압 ―― 또래의 아이들과 놀면 매를 내리고, 한밤중에도 피아노를 연습하게 했던 ―― 의 또 다른 형태였다. 카알에게 한 '너는 그렇게 자라지 않을 거다.'라는 약속은 사라진 채. 따뜻한 모정에의 결핍과 희망의 사라짐은 카알의 자살 미수를 불러왔고, 이것은 베토벤의 마음을 죽이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러한 구도를 <동승>에서 읽었다. 어머니에게서 버려진 아이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에게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만 느껴지는 속죄와 해탈을 위해 정진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도념을 위한 것일까? 산목련이 절에서는 피지 못하고 절 밖에서 보름이나 피어 있을 수 있다는 것에서, 도념은 산목련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향불 냄새가 지긋지긋한 아이, 어머니의 정이 그리운 아이, 친구들과의 놀이가 좋은 아이에게 절에서의 생활은 지옥과 비교할 만한 것이다. '너를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어머니를 애타게 기다리는 도념에게 가장 필요한 '아이다운 삶'에 대한 희망은 처참하게 뭉개진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 세상에서의 소박한 삶이었을 따름이지, 해탈과 속죄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결국 절에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특이한 것은, 흔히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일컬어지는 깨달음의 세계보다도 인간적인 것들이 더욱 중요함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원효가 파계승이 되었던 것, 그리고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의 깨달음에 있어 계율만을 엄격히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보이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원효의 철학에서 말하는 '진여문(깨달음의 세계)은 생멸문(변화하는 세계)과 다르지만 더불어 함께 있음'을 보았을 때 주지의 말은 어쩌면 억지스러운 면도 없지 않은가? 주지의 강요는 어떠한 근거에서 가능할 수 있겠는가? 주지가 강요하는 불도는 강요된 불도이고 또한 닫힌 불도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아이들이 진정 바라는 것은 어느 선까지 받아둘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어디까지 놓아주고 어디서부터 죄어주어야 하는 것일까? 꿈을 억압받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나에게는 심각한 질문이다.

 

 

2. 僧 ―― 일반인은 알 수 없는 깨달음의 세계

동심을 억압한다는 것은 또한 근거없는 억압이다. '너를 위해서'라는 명목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겠는가? 나의 경우도 꿈을 억압받았을 때에는 원망을 하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차 그 심정을 이해하게 된 일이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주지의 배경지식이 없고서는 주지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희곡의 첫머리에 쓰인 인물은 도념이 아니라 주지라는 점이 독특하다. 그러나 희곡은 도념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어째서 주지가 그렇게도 도념을 붙잡아두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주지의 세속에서의 삶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어떠하였길래 도념을 보낼 수가 없는 것일까? 연출을 통해서 이러한 면을 강조한다면 僧에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주지가 도념에게 절에 있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무대의 한켠에 영상으로 주지의 지난 삶을 보이는 방법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속세에서 고통 받았던 주지의 삶을 보인다면 왜 주지가 도념을 끝내 절에 두려 했는지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며, 童에 치우친 연극의 무게를 僧으로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 주지의 어투가 명령적이 된다면 동심을 억압하는 성격이 될 것이지만, 만일 체험에서 우러나온 듯한 설득적인 어투라면 우리는 연극을 보면서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위에서 잠깐 언급하였던, 아이들이 진정 바라는 것은 어느 선까지 받아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이러한 연출을 통해 더욱 복잡하게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童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있는 텍스트를 僧적인 측면도 강조하되 균형을 이루는 것이 될 수 있다.

 

 

3. 燕行 ―― 동심을 이해하는 사람들 對 불도를 중요시하는 사람들

희곡에서 도념을 제외한 인물들이 동심을 이해하는 인물군 혹은 불도를 중요시하는 인물군으로 나뉠 수 있다는 점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물론 명확하게 나누어볼 수는 없다. 초부의 경우는 좀 애매하다. 도념의 동심을 이해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주지의 뜻에 따라 도념의 어머니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념이 토끼를 잡았을 때 도념의 잘못을 감싸주거나, 절을 떠나는 도념을 그대로 보낸다는 점에서 전자에 가깝지 않나 생각된다. 그리하여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초부와 미망인을 꼽을 수 있겠고, 나머지는 대부분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성향을 연극으로 보인다면 어떻게 보일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말투와 복장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동심을 더욱 강조하고 싶다면 후자의 인물군들에게서 비판적인 인상을 받을 수 있도록 강압적인 어투를 사용한다든지 복장을 무채색 계열로 통일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반면 위에서 두 번째 논의와 연관지어 연출하고자 한다면, 후자에게서 따뜻한 인정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고, 의상 역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옷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예컨대 주지의 의복은, 동심을 강조하고 싶을 때에는 회색조의 승복을, 그리고 불가의 도를 강조하고 싶을 때에는 유채색의 승복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는 미망인이 입는 흰 색을 바탕으로 할 수 있다.

 

희곡은 언어텍스트만이 아니라 부가텍스트가 함께 작용하는 열린 텍스트이기 때문에, 그 의미는 얼마든지 변용될 수 있다. 「햄릿」에서 주인공을 햄릿의 숙부로 설정할 계획이라는 극단 악어컴퍼니의 연출 역시 열린 텍스트인 희곡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이에 「동승」역시 다양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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