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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by 휴리스틱31 2021.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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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1. 김소월(1902-1934)

본명은 정식(廷湜). 평북 정주 출생. 오산학교 졸업. 일본 동경 상대 수학. 1920창조낭인의 봄, 그리워등을 발표하며 등단. 영대(靈臺)동인. 민요시인, 국민시인, 전통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전통적 율조와 정서를 성공적으로 시화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의 시는 이별과 그리움에서 비롯하는 슬픔눈물정한 등을 주제로 하며,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해 독특하고 울림이 큰 표현을 이룩하는 경지를 보여준다. 바로 이와 같은 특징이 그를 한국 현대시인 가운데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가장 많이 연구된 시인이 되도록 한 것이다.

시집으로는 진달래꽃(매문사, 1925)이 있으며, 그가 작고한 후 이에 기타 발표작을 수습첨가해 많은 시집이 발간되었다.

 

 

2. 단원 개관

이 시는 1922개벽25호에 발표된 작품으로 1925년에 간행된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시의 정서는 고려가요의 '가시리'와 민요 '아리랑'에 접맥되며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애송시이다. 작품 자체가 지닌 내용의 이해에 중점을 두지 말고 '노래하기'라는 측면에서 학생들과 함께 서정적 자아의 어조를 감안한 율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런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짤막한 시 작품을 산문으로 풀어 쓰면 어떤 차이가 나는가 대조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3. 본문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대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이 시의 내용을 산문(줄글)으로 풀어서 이야기해 보자.

 

임께서 나를 곱게 보시던 정이 식어 (또는 그 정이 다른 데로 옮겨 져서), 내가 싫어져서 떠나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겠습니다. (곱기로 이름난) 영변의 약산(동대의) 진달래꽃을, 한 아름 따다가 임께서 나를 버리고 떠나시는 길 위에 뿌려 놓겠습니다. 이미 뿌려 놓은, 임께서 가시는 발자국마다에 놓여 있는 그 진달래꽃을 아무런 부담 없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볍게 눌러 밟고 가시옵소서. 나를 곱게 여기시던 마음이 가시어 이제 버리고 떠나실 때에는, 가시는 임을 붙들고 하소연하여 그 길을 막는 눈물 따윈 이를 악물고 안으로 삼키겠습니다.

 

 

시의 의미

 

1) 시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시적화자, 서정적 자아라고 한다.

이 시의 화자는 남성일까? 여성일까?

여성

 

 

2) 그렇게 보는 이유는?

기원형 '옵소서'가 여성적인 어법이고, 꽃을 뿌리는 행위도 역시 여성적이기 때문

 

 

3) 보통 시에서는 시인이 곧 화자이다. 그런데 왜 소월은 여성의 목소리로 노래했을까?

이 시가 씌어진 시기가 1920년대이다. 그때에는 이별을 당하는 측이, 즉 행위의 대상이 주로 여성이었다는 점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의해 소월도 보편적 상황논리에 따라 여성의 탈(persona)을 썼을 것이다. 우리의 전통 시가들도 대개 여성을 서정적 자아로 가지고 있으며, 여성의 인고와 기다림, 남성의 유랑성을 다루고 있는 것이 많다. 우리 시의 여성 편향은 존재의 나약성과 함께 잠재된 저항력의 지속적 표출의 결과라고도 말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섬세하고 부드러우면서 순화적인 감정 승화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4) 화자가 처한 상황은 어떠한가?

실제 이별의 상황이 아니라 이별을 가정하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에서 알 수 있다. 영어로 번역하면 'when'아니면 'if', 가정법이다. 그러니까 화자는 사랑의 한복판에 있을 때 오히려 이별을 생각한 것이다.

 

 

5) 화자는 떠나가는 임에게 표면적으로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

표면적으로는 임께서 가시겠다면 기꺼이 보내드리겠다고 하고 있다.

 

6) 이 시의 화자는 가시는 임에게 진달래꽃을 한아름 뿌려 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진달래꽃을 흩뿌리는 행위가 특히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진달래꽃을 두견새와도 관련이 있고, 색깔이 선홍색의 핏빛을 띠고 있다. 그런 꽃을 떠나는 임에게 뿌려 축복하는 행위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진달래꽃은 흔히 두견화라고 하는데 이것은 두견새가 한맺힌 절규를 하면서 흘리는 핏방울이 진달래꽃으로 피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의 표상이면서, 진달래는 그 선홍의 맑고 깨끗한 빛으로 하여 더욱 애처로운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더구나 이 시에서 버리고 떠나는 임을 원망하지 않고 고향 산에 흐드러지게 핀 그 꽃을 정성스럽게 따서 임의 앞에 뿌리는 숭고한 극기의 행위가 감동적이어서 이 부분의 표현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7) 이 시에서 '진달래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 시에서는 원망과 증오로 표출되어야 할 버림받음에 대한 반응이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축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매체가 되는 진달래꽃이 민족의 보편적 정서인 을 표상하긴 하지만 이 시에서는 단지 으로 끝나지 않는다. 증오해야 할 상대를 오히려 축복하는 이와 같은 비상식적 행위는 임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여 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이 희생되겠다는 의식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결국 여기서의 진달래꽃은 '지고한 희생적 사랑'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다.

 

 

8) 마지막 행에서 화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럴까?

실제로는 흘러 넘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쏟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9)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고 하면서 입술을 깨물고 참는 화자의 모습이 오히려 그 슬픔을 더 증폭시키고 있다. 속마음과는 반대로 표현하고 있는 셈인데 이것을 수사법으로 무엇이라 하는가?

반어법(Irony)

 

 

10) 반어에 대해 이 시를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반어는 표면적 의미와 속뜻이 서로 대립되는 것을 말한다. 이 시에서 서정적 자아가 너무 슬퍼서 눈물이 비오듯이 흐를 거라는 말을 오히려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과 같다.

 

 

11) 갈등은 두 개의 상반된 의지가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난 갈등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식으로 극복되고 있는가?

이 시의 주된 갈등은 사랑하는 임과 이별해야 하는 상황과 이별하고 싶지 않은 시적 자아의 마음 사이에 일어나는 것으로, 이 시의 화자는 임과의 이별을 자기 희생적 자세에서 상대에 대한 축복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정리함으로써 갈등을 해소시키고 있다. , 떠나는 임을 잡는 것이 아니라, 임과 이별하는 슬픔을 참고 견디면서 극복하려 하는 것이다.

 

 

12) 이별이라는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에 있어 한용운의님의 침묵과는 차이가 있다. 차이점을 지적해 보라.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이별도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에서 화자는 이별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한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 부었습니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임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다시 만날 것'을 기다린다. 즉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적극적으로 삶의 의지를 가다듬는다.

 

 

13) 이러한 차이점을 소월과 만해의 삶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자.

불우한 어린 시절과 절망적인 청년기를 보내고 32세에 자살한 소월과 굳은 의지를 가지고 한평생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만해의 삶의 차이가 반영된 것도 아닐까?

 

 

 

운율적 표현

 

 

- 언어는 소리와 의미가 일체를 이룬 것이다,. 따라서, 한편의 시는 형식면에서 보아 소리를 연속적으로 짜맞춘 구조물이 음악적 효과를 빚어 내게 된다. 한 편의 시에서 우리가 규칙화하여 파악할 수 있는 소리들의 음성적 자질 (자음과 모음의 효과)은 물론 휴지(休止), 분행(分行), 분절(分節)등의 일정한 배열에 의지하여 형성되고, 문장 부호의 규칙적 사용 및 심지어 한글과 한자의 시각적 효과까지도 이용될 수 있다.

 

1) 이 시의 첫 연은 어떻게 끊어 읽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나 보기가/역겨워/가실 때에는/(3음보)

 

 

2) 이 시의 운율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1920년대의 시는 자유시라고는 하나 아직 과거의 정형시의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반복적인 리듬과 음악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시의 음악성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준다.

그리고 토속적인 정감을 주는 시어(역겨워, 즈려 밟고)를 효과적으로 구사하여 리듬을 더 효과적으로 살려 준다.

 

 

 

전통 시가와의 관련성

 

 

1) 이 시의 소재인 진달래꽃은 우리 강산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다. 그만큼 문학의 소재로 자주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 꽃이 나타난 향가 작품은? 헌화가

 

 

2) '꽃울 뿌려 축복하는'행위를 흔히 산화공덕(散花功德)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문학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산화공덕이 나타난 향가 작품은?

도솔가

 

 

3) 우리 문학에는 유달리 ''을 노래한 작품이 많다. 특히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작품들은 우리 문학사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둔 것이 많다. 이런 주제를 가진 고려 속요는? 서경별곡, 가시리

 

 

4) 이러한 ''은 맺힘이며,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풀려야 한다. 그러나 이별에 처한 행동 양상이 꼭 같지는 않다. 고려 속요인 '서경별곡, 가시리'와 민요인 '아리랑'에 나타나는 시적 자아의 태도상의 차이점을 비교해 보자.

'가시리'에는 임이 돌아오기를 은근히 바라는 의지가 나타나고, '서경별곡'에는 가시는 임에 대한 하소연, 다짐, 원망, 질투심 등이 나타나며, 심지어 '아리랑'에는 저주까지 나타나는 데 비해, '진달래꽃'에서는 그러한 원망이나 저주는커녕 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가장 소박한 바램까지도 의지적으로 숨기면서 오히려 임을 축복한다.

 

 

5) 그밖에 이 시를 전통 시가와 관련짓는 것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3음보의 민요적 가락, 향토적인 시어의 선택

 

 

시를 더 생각하며 읽기

 

 

1. 이 시의 상황이 이별을 가정하고 지었다고 보는 일반적 견해와 달리, 이별을 하면서 지었다는 견해도 있다.(김경숙,1995. 1920년대 한국시의 근대성 연구. 문학과지성사) 이 시가 이별을 하면서 지어졌다고 보는 것과 이별을 가상하고 지어졌다고 보는 것 사이에는 어떤 느낌의 차이가 있는가?

이별하는 과정에서 지어졌다면, ''이 떠났다는 사실에 대해 정서적으로 객관화하지 못하고 슬픔을 극복하려는 화자의 정서에 느낌의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러나 이별을 가상한 상황에서 지어졌다면, 임과의 이별을 언제든지 받아들이고 여전히 변치않는 마음으로 사랑하겠다는 화자의 내면적 의지와 숭고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2. 시적 자아가 대상에 대하여 갖고 있는 대립적인 정서를 간단히 서술하라.

떠나는 임에 대하여, '축복까지 더하여 고이 보내 드리는 마음''절대로 임을 떠나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 가더라도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순종의 미덕이 잔잔히 깔려 있으면서도 내면으로는 여성의 강한 만류의 뜻이 담겨 있는 시이다.

 

3. 임이 가시는 길에 꽃을 뿌리겠다는 것을 그 행위가 지니는 표현적인 의미와 내면적 진실이 상반된 것일 수 있겠다. 그 상반된 의미를 설명해 보라.

표면적으로는 임의 가시는 길에 꽃을 뿌려 그 걸음을 영화롭게 한다는 축복의 의미를 지니지만, 내면적으로는 차마 나의 사랑을 짓밟고 가시지는 못하리라는 만류의 뜻이 담겨 있다.)

 

4.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에는 한국 여인의 인고(忍苦)의 정신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태도와 관계가 깊은 4자의 한자 성어를 쓰라.

(哀而不傷)

 

 

다른 작품과 관련지어 읽기

 

 

5. 김소월과 마찬가지로 한용운의 시에도 여성적 화자가 많이 나타난다. 어조는 화자의 인격이나 신분 또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하는데, 다음 시의 어조상 효과를 지적하라.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전통적인 남녀 관계에서 순종이나 복종은 일반적으로 여성의 미덕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당신'으로 불리는 사람에 대해 복종을 맹세하는 ''는 여성적 어조를 띰이 자연스럽다. 또 절대적인 복종을 향한 가열한 의지(그것은 남을 복종하라는 임의 명령에는 오히려 복종할 수 없다는 역설로 나타남)를 표상하는 데는 연약한 여성을 통해 내재적 힘을 표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6.진달래꽃과 다음의자진 난봉가의 차이에 대하여 정서의 표현을 중심으로 100자 내로 써보자.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고

이십리 못가서 불한당 만나고

삼십리 못 가서 되돌아온다네

 

→「진달래꽃의 정서는 님에 대한 헌신적 사랑을 다하는 자세인데 비해 자진 난봉가는 원망의 정서가 나타나 있고, 진달래꽃은 반어적 표현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데 비해 자진 난봉가는 직설적이다.

 

4. 요점 정리

 

갈래

서정시, 자유시, 전통시, 민요시, 낭만시

 

율격

7.5조의 음수율과 3음보의 민요조.

 

표현

1. 1연을 4연에서 반복한 수미쌍관 구조

2. ---결의 4단 구성

3. 반어적 표현을 통한 절제의 압축미

4. 산화공덕(散花功德),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인고의 덕과 인종(忍從)의 미덕을 바탕으로 한 유교적 휴머니즘을 사성적 배경으로 함.

5. 여성적 어조에 의한 완곡한 표현

6. , 연 배열의 정형성에 입각한 규칙형

7. 전통적 율격과 정서를 계승하고, 향토적 지명, 소재 등을 구사하며, 민요시의 일면을 보여 줌.

 

제재

진달래꽃의 정서와 이별

 

출전

<개벽> (1922. 7.)

 

주제

이별의 한과 그 승화

 

 

 

시의 운율

 

 

 

시인은 음악적 효과를 창조하기 위해 소리를 모형화하는데, 이것이 리듬이다. 운율적 언어의 사용은 언어가 가진 어떤 소리자질의 규칙적 반복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규칙적 반복이란 동일성의 현상이며 이 동일성의 현상이 리듬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리듬은 통일성과 연속성과 동일성의 감각을 준다

리듬은 말소리의 모든 자질은 물론 休止와 의미, 分行, 分節, 구두점의 종류 및 유무와 심지어 한글과 한자의 시각적 효과까지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시의 리듬은 韻律, (rhyme)(meter)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율격만 가리키는 용어는 아니다.

운이란 한시나 영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으로 소리의 반복이다. 압운이라고도 불리는 이 리듬은 각운, 두운, 자음운, 모음운 등으로 다시 세분된다. 두운은 단어의 첫 자음의 반복이고 모음운은 강음절의 모음이 반복되는 현상이고 각운은 시행 끝 강음절의 모음과 자음이 반복되는 현상인데 이 각운은 운의 대표가 된다. 이밖에 하나 이상의 압운어가 시행 내에 있을 때 중간운 또는 요운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고전시가나 현대시의 경우 한시나 영시에서처럼 엄격한 규칙성의 운은 찾아볼 수 없다. 압운은 대체로 음절의식이 강한 언어체계에서 주로 사용되어온 기교이기 때문에 우리의 경우 이런 음절의식이 철저하지 못한 점, 우리말이 부착어이기 때문에 文節, 어절, 어휘 등의 반복이 음절의 반복보다 우세하고 사용하고 있는 점, 그리고 우리의 언어구조에서 한 문장이나 문절의 끝음절의 음상이 빈약하다는 점 등이 현대시는 물론 고전시가에서 압운이 실패하는 이유가 된다.

율격은 고저, 장단, 강약의 규칙적 반복이다. 롯츠(Lotz)에 의하면 율격을 형성하는 운율의 자질에 따라 율격의 형태는 순수음절 율격과 복합음절 율격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진다. 여기서 순수음절 율격이란 우리가 흔히 부르는 음수율, 즉 음절 계산의 리듬이다. 이 음수율은 고려 속요, 경기체가, 시조, 가사, 민요 등의 고전시가나 현대시의 운율 연구에서 지배적 방법이 되어왔다. 우리말은 첨가어이기 때문에 체언과 용언에 조사나 어미가 붙어서 한 어절이 대개 3음절 내지 4음절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음수율은 2.3, 3.3, 3.4, 4.4, 3.3.2, 3.3.3, 3.3.4조로 가르고 또 개화기 이후 일본에서 도입되었다는 7.5조 역시 73.4, 52.3 등으로 가를 수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통 음수율의 변형에 지나지 않아 한국 현대시에서 정착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복합음절율격은 이 음절수와 더불어 어떤 형태의 운율적 자질이 규칙화된 리듬이다. 이것은 다시 고저율(tonal)과 강약율(dynamic)과 장단율(durational)로 세분화된다. 고저율은 소리의 고저가 규칙적으로 교체 반복되는 율격으로서 음성률, 聲調律格, 平仄律格이라고도 불리며 주로 한시에 사용되어 왔다.

강약율은 영시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악센트 있는 강한 음절과 악센트가 없는 약한 음절의 교체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리듬의 패턴이다. 장단율은 장.단의 소리가 규칙적으로 교체 반복되는 리듬, 즉 소리의 지속 시간의 양에 의하여 결정되는 리듬으로, 고대 희랍이나 로마어에서 볼 수 있는 리듬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율격은 악센트라는 변별적 자질을 필수조건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율격의 정의 와 분류는 한시나 영시에 적용되는 리듬 패턴이지 우리의 그것은 아니다. 여기서 한국시가의 율격개념은 새로 정립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음보율이 대두되었다.

음보율은 음보의 규칙적 반복이다. 그러나 우리 시가의 음보는 영시에서 강음절과 약음절을 결합한 형태가 아니므로 음보율은 영시의 강약율(meter)과 아주 다르다. 우리말의 어휘는 2음절과 3음절로 된 것이 압도적으로 많고, 여기에 조사나 어미가 붙어 실제로 운용되는 어절은 3음절 내지 4음절이 되어, 시가에도 3음절 내지 4음절이 리듬의 기본 단위가 된다. 통사적으로 배분된 어절이 끝난 다음에 休止가 와서 3음절 내지 4음절을 휴지의 한 주기로 기대하게 된다. 음보란 이렇게 휴지에 의해서 구분된 문법적 단위 또는 율격적 단위이다. 중요한 것은 휴지가 일정한 시간적 길이마다 나타나는 것이 음절수가 같기 때문이 아니라 율독을 할 때 호흡에서의 같은 시간적 길이 때문인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음보는 3음절 내지 4음절을 휴지의 일주기로 하여 동일한 시간량을 지속시키는 等時性에서 발생한다.

3음보와 4음보는 우리 시행을 이루는 기본 율격으로서 3음보는 우리의 미의식과 결부된 고유 리듬이며 4음보는 중국 문화의 偶數 개념의 영향으로 성립된 리듬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두 전통적 율격이 창작 계층과도 결부되어 있는 기능과 효용의 면이다. 3음보는 서민 계층의 세계관과 감성의 표현인 데 반하여 4음보는 사대부의 귀족 계층의 세계관과 감성의 표현이다. 개화가사가 4음조의 율격을 선택한 것은 민족의식의 고취와 개화사상과 새로운 지식의 보급이라는 그 교술적 기능만 요청되었기 때문이며 개화가사의 창작 계층인 당시 사대부인 유학생의 세계관과 중인 계층의 보수주의적 경향 때문이다.

현대시는 과거 정형시가의 외형률을 깨뜨린 자유시와 산문시적 특징을 가진다. 보통 현대시의 리듬을 내재율로서 간단히 처리하지만, 음보율이 폭넓은 변형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고려하면, 음보의 개념으로 내재율의 정체를 밝힐 가능성이 보인다. 가령 일본에서 도입된 리듬인 7.5조의 음수율을 3(4).4.5로 재배분하고, 이것을 다시 3(4).4.2(3).3(2)로 배분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산문시인 박두진의 ''를 분석하면 2음보가 중첩된 율격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여기서 청록파의 문학사적 의의는 3음보와 4음보의 전통적 리듬을 여러 가지로 변형시키면서 개발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청록파의 초기 시와는 달리 뚜렷이 율성이 느껴질 수 없는 현대시들에게도 전통적 음보의 변형된 형태로서의 계승을 엿볼 수 있다. 가령 한용운의 '복종''남들은/自由/사랑한다지마는//나는/服從/좋아하야요//自由를 모르는 것은/아니지만//당신에게는/服從/하고 싶허요'처럼 마지막 음보가 긴, 장중한 느낌의 3음보로 재분할 수 있다. 이처럼 3음보와 4음보의 전통 율격이 행과 연의 배열과 또는 산문시 형태에 의하여 다양하게 변용되고 있는 것을 현대시에서 찾아볼 수가 있는데, 이런 전통율격의 변형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마련한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란 개념으로 기술할 수 있다.

- 金埈五<詩論> (이우출판사,1989) '3장 리듬' 부분 요약

 

 

 

아이러니와 역설

 

 

 

언어는 우리가 이질적인 두 사물을 연결하는 유사성을 지각하거나 반대로 유사한 두 사물을 분리시키는 차이성을 지각하는데 기여한다. 언어의 이 두가지 양상은 시에서 각기 '비유적 비교''반어적 대조'의 형식을 취한다. 그리하여 비유와 아이러니는 서로 대립되면서 시어의 이중적 토대가 되고 중요한 시적 장치가 된다.

유사성을 발견하는 태도인 비유의 정신에 비해 (이것이 원래의 시정신, 곧 서정적 비전이다), 아이러니는 유사성의 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유사성의 부정은 자아와 세계의 차이성에 대한 관심의 집중현상으로, 아이러니는 '거리'의 정신이며 객관적 정신이다. 여기서 '거리'는 자아와 세계 사이의 외적 거리인 동시에 분열된 자아들 사이의 내적 거리도 포함한다. 이런 점에서 아이러니는 비서정적 성격을 본질로 하며, 지적이고 분석적 정신의 산물이다. 아이러니 정신은 실제의 세계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산문정신으로, 서사적 비전으로서 대상에 대한 이화작용의 소외효과를 창조하며 비판적 기능을 수행한다.

문학적 장치로서 아이러니는 '變裝(dissimulation)'의 뜻을 가리키는 희랍어 에이로네이아(eironeia)에서 유래했다. 어원적으로 보면 아이러니는 변장의 기술이다. 고대 희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에서 분류한 두가지 타입의 인물에 각각 에이론 (Eiron)과 알라존(Alazon)이란 이름을 부여하여 주인공으로 채택했다. 에이론은 약자이지만 겸손하고 현명하며, 알라존은 강자이지만 자만스럽고 우둔하다. 이 양자의 대결에서 관객의 예상을 뒤엎고 약자인 에이론이 강자인 알라존을 물리쳐 승리한다. 아이러니의 시는 드러난 알라존과 숨어있는 에이런이란 두 개의 퍼소나(Persona)를 가진다. 알라존은 시인이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는 사상과 시점을 가진 목소리를 낸다. 이런점에서 아이러니는 이중성과 복합성으로서 '종합'의 원리를 지니면서 동시에 분리단절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이러니는 '순간속에서 자아가 이중으로 나타나거나 분열되는', '共時的구조(synchronic strucrure)'로서, 이런 이중성과 공시성은 '속임수에 의한 비판'이다. 다시 말하면 표면에 나타난 퍼소나의 시점을 가면으로 하여 이면에 숨은 퍼소나 (이것은 시인의 시점과 동일시 된다)가 비판하는 것이 아이러니다. 그래서 시인은 표면에 나타난 퍼소나(곧 탈)와 필연적으로 거리(분열단절)를 두기 마련이며 이 거리는 정서적 거리(감정을 절제하고 지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상충되는 2개의 시점, 그러니까 두 개의 화자와 어조가 공존하는 것이 아이러니의 기본 원리이지만 비평가에 따라 아이러니의 개념은 다양하게 정의되고 이런 다양한 정의 자체는 아이러니의 분류가 된다. 이에는 언어적, 낭만적, 내적, 구조적, 극적 아이러니가 있다.

언어적 아이러니는 '표현된 것''의미된 것'의 상충에서 오는 시적 긴장으로, 이면에 숨겨진 참뜻과 대조되는 발언을 말한다. 귀여운 아이를 보고 '밉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낭만적 아이러니는 현실과 이상,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有限我絶對我, 자연과 감성 등 이원론적 대립의식에서 발생한 것이다. 무한한 것, 이상세계에 대한 동경은 유한한 인간 존재에 내재하는 본질적 감정이지만, 유한적 인간의 한계의식에서 낭만적 아이러니는 필연적으로 페이서스의 어조를 언제나 띠게 된다. 이상 세계와 절대아는 유한한 인간 존재를 비참하게 되비추는 거울일 뿐으로, 시인은 불가피하게 알라존이면서도 동시에 이 알라존을 비웃은 에이런이다. 이런 이중적이고 모순된 인간의 존재성 때문에 아이러니는 미학적 가치이기 이전에 존재론적 가치를 띠고 있다.

겸손한 아이러니는 적과의 근본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고 이 적을 필요로 하고 이 적에게 빚지고 있으면서 이 적의 밖에서 적을 바라보는 관찰자인 동시에 또한 자기 내부에 그 적을 지니고 있어 적과 동질적인 것이라는 감각에 의존한다. 인간은 자의식적 존재로서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대상화하는 존재다. 작품 속의 두 개의 퍼소나는 동일한 시적 자아의 양면이기 때문에 겸손한 아이러니는 존재론적으로 필수적인 것이며 진정한 자아 발견을 위한 실마리인 것이다. 지적 관찰자가 비지적 관찰자의 탈을 쓰고 세계를 비판하는 아이러니를 '외적'아이러니라 한다면, 낭만적 아이러니나 겸손한 아이러니는 화자가 바로 자신을 비판하는 '내적' 아이러니다. 외적 아이러니에서 어리석음이 외부세계에 있다면 내적 아이러니에서는 그 어리석음이 자신의 내부에 있다.

구조적 아이러니는 신비평에서 논의되는 아이러니로서, 한 작품에서 상충대조되는 요소들의 종합과 조화의 상태를 말하며,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에 따른다면 갈등을 포함한 모든 문학에 아이러니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밖에 플롯의 역전 또는 반전, 주인공의 행위가 그가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 경우, 주인공은 모르고 있으나 독자는 알고 있는 경우 등을 가리키는 극적 아이러니가 있다.

아이러니의 본질인 변장성이란 이중성이며 이중성은 복합성이다. 아이러니의 복합성은 인생의 폭넓은 인식으로서 그를 통해 사물과 현실의 리얼리티에 도달하게 하는 기능을 가진다. 또한 독자로 하여금 이면에 숨겨진 (의미된 것)과 표면에 오도된 것(표현된 것)의 이중의미를 찾는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역설(paradox)'para(초월)+doxa(의견)'의 합성어다. 역설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이러니와 구분되는 모순을 내포하는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의 경우 진술 자체에는 모순이 없으나 진술된 언어와 이것이 지시하는 대상이나 숨겨진 의미 사이사이에 모순이 생기는 반면 역설은 진술 자체에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휠라이트는 이 역설을 표층적 역설(paradox of surface), 심층적 역설(paradox of depth), 시적 역설로 나누었다.

표층적 역설은 모순어법(oxymoron)이다. 이것은 일상 언어용법에서는 모순되는 두 용어의 결합형태, 곧 수식어와 피수식어 사이의 모순이다. '즐거운 비명', '찬란한 슬픔', '소리없는 아우성' 등에서 발견된다.

심층적 역설은 종교적 진리와 같이 신비스럽고 초월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역설이다. '道可道非常道'와 같은 노자의 진술이나, 만해의 시에 흔히 나타나는 표현법이 그것이다. 님과 같은 초월적 존재나 선의 경지나 종교적 진리는 상징이나 역설로밖에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시적 역설은 시행에 나타나는 부분적 역설인 표층적 역설과 달리 시의 구조 전체에 나타나는 역설이다. 시적 역설은 진술 자체가 앞 뒤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진술과 이것이 가리키는 상황 사이에 명백한 모순이 나타나는 경우다. 물론 이 모순은 모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 본다면 우리는 인생 도처에서 많은 모순을 발견할 것이다. 모순이 인간의 본질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순이 진리를 인식하고 진리를 드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모순 그 자체가 진리가 되는 경우를 우리는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 김준오<詩論>(이우출판사, 1989) '9장 아이러니와 역설' 부분 요약 -

 

 

 

반어와 역설적 표현을 사용한 시구

 

 

 

김소월의 먼 후일'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그 때에 내말이 잊었노라'

윤곤강의 입추(立秋)에 나오는 '다시 가만히 귀 모으면/가까이 들리는 머언 발자취'

한용운의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서 '낮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南江)은 가지 않습니다./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는 살 같은 광음(光陰)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남강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곳에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아무래도 가지 않는 것이고, 이에 대하여 촉석루는 '광음을 따라' 날로 퇴락하여 옛 자취는 사라졌으니, 어디론지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용운의 쾌락에 나오는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T.S엘리어트의황무지에 나오는 '사월은 잔인한 달', '겨울은 차라리 따뜻했거니'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한용운의 사랑의 존재에서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이 아닙니다.'

한용운의 반비례에서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어요'

 

 

 

그리운 목소리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될 때 그것을 붙잡고자 함은 누구나 가지는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간곡하게 붙잡음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밖에 없다면 그런 때는 어찌할 것인가? 그런 일을 스스로 겪어 보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 있는 답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진달래꽃'은 하나의 시적 해답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인물은 님이 떠나실 때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겠노라고 한다. 2,3연에서는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을 한 아름 따다 길에 뿌려 놓을 터이니 그것들을 걸음마다 밟고 가시라고 한다. 그리고는 한 번 더 강조하여, 님이 떠나실 때는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겠노라고 한다. 어차피 떠날 수밖에 없는 님이라면, 그리고 떠나는 것이 진실로 님이 바라는 일이라면 굳이 붙잡지 않겠노라는 비장한 말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의미가 전부라면 '진달래꽃'은 별로 주목할 만한 작품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 작품의 중요한 문제는 위의 내용이 작중 인물의 진실과는 다른 반어적 표현 내지는 역설이라는 데 있다. 비록 말의 표면에서는 떠나는 님을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겠다고 하고,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고 하지만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말이 아니다. 진심은 그 반대이다. 그는 님이 떠날 때 도저히 그렇게 보낼수 없을 만큼 절실한 사랑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위의 구절들을 그 깊은 의미에서는 오히려 표현의 문맥과는 반대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제 2, 3연의 말들을 좀더 깊이 음미할 수 있게 된다. 님이 가시는 길에 뿌리는 꽃은 단순한 꽃이 아니다. 그것은 곧 그 꽃처럼 붉고 아름다운 그의 사랑이기도 하다. 가시는 걸음마다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가 달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깊은 사랑을 떠나는 님에게까지도 아끼지 않으려는 정성의 표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차마 그 아름다운 사랑을 밟으며 따날 님에게 원망의 한이 서리어 있기도 하다. 이처럼 애절한 사랑과 슬픔 그리고 한을 나지막한 호소의 말씨에 실어 노래한 데에 '진달래꽃'의 간절한 뜻이 나타난다. 그것은 흔히 말하듯 고려 가요의 '가시리'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러나 '가시리'의 작중 인물이 님에게 '가시는 듯 돌아오십시요'라고 말하는 기다림의 여유가 있었던 데 비해 이 작품은 그만 한 기다림도 가질 수 없는 절망적 분위기와 슬픔을 띠고 있다.

- 김흥규(1993),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 한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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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그렵다

말을 할까

하니 그려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져 산()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압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쟈고

흘너도 년다라 흐릅듸다려*.

 

 

({개벽} 40, 1923.10)

 

* 흐릅디다려 : '흐릅니다그려'의 준말.

 

<해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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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후일

 

 

먼 후일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후일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해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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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다면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 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새라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 가나니, 볼 지어다.

희망의 반짝임은, 별빛의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느란 길이 이어가라.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 새벽 동무들

저 저 혼자…… 산경을 김매이는.

 

 

(시집 {진달래꽃}, 1925)

 

<해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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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화(山有花)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시집 {진달래꽃}, 1925)

 

<해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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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동새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津頭江)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 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夜三更)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산 저산 옮아 가며 슬피 웁니다.

 

 

({배재} 2, 1923.3)

 

* 불설워 : 평안도 사투리로 '몹시 서러워'의 뜻.

 

<해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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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개벽} 25, 1922. 7)

 

<해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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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招魂)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어!

허공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어!

불너도 주인(主人)업는 이름이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듸는

끗끗내 마자하지 못하엿구나

사랑하든 그 사람이어!

사랑하든 그 사람이어!

 

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니웟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떠러저 나가 안즌 산() 우헤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서름에 겹도록 부르노라,

서름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빗겨 가지만

하눌과 땅 사이가 넘우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여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어!

사랑하든 그 사람이어!

사랑하든 그 사람이어!

 

 

(시집 {진달래꽃}, 1925)

 

<해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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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해설>

 

소월 특유의 7.5조 운율과 이별의 정한을 담고 있는 시이다.

7.5조의 시행(詩行)배치가 일률적이지 않고 다양하게 구사되어 있다. 1, 2연에서는 음보 단위로 따로 떼어져 길게 읽혀지게 해 놓았고, 3, 4연에서는 빠른 템포로 읽혀지게 해 놓았다. 전반부의 느린 호흡은 헤어지기를 아쉬워하는 심정 때문에 그렇고, 후반부에는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상황 때문에 그렇다. 소월의 시는 운율과 의미가 기막힌 조화를 이루는데, 비단 이 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진달래꽃>에서도 아쉬운 상황과 아픈 결의의 태도를 각기 다른 배열로 구성하고 있음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화자는 지금 이별의 아픔에 젖어 있다. 이 아픔의 상황 공간은 강가로 설정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강은 이별의 공간이다. 강물이 흘러 가듯 사랑도 흘러간다. 그런데도 화자는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흐르는 물과 서 있는 화자의 구도만으로도 설움에 잠긴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 그립다고 말하려 하니 그리움은 울컥 치솟는다.

2. 그냥 가 버릴까 단념하면 그래도 미련 때문에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아진다.

3. 그래도 머뭇거리고 있는 화자에게 까마귀는 길을 재촉한다. 날이 저무니 어서 떠나자고 자꾸만 재촉한다.

4. 화자의 곁에서 흐르는 강물마저도 연이어 흐르면서 갈 길을 재촉한다. 먼저 흐른 물은 따라오라고, 나중에 따라 흐르는 물은 빨리 따라가자고 재촉하는 상황이다.

이 시는 이별의 상황 앞에서 떠나기 싫어하는 화자의 심정이 애상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상황은 갈길을 재촉하는데 마음은 미련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는 화자의 아픔이 여성 어조와 전통적 율조에 실려 독자로 하여금 애상감에 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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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후일" 해설>

 

'먼 후일(後日)'은 아직 오지 않은 날이다. 뒷날에 대한 판단은 현재의 심정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먼 후일'은 지금 현재와 심정적으로 동일한 시간대이다. 그런 점에서 화자가 먼 후일에 내릴 수밖에 없는 판단인 '잊었노라'는 현재의 갈등을 그대로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나무라는 정도가 깊어질수록 그에 대한 변명도 정도를 더해 가는 병치 구조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무람에 화자의 반응이 달라져 가는 변화 과정이다. 그것은 '잊었노라그리다가 잊었노라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그 순간까지 그리다가 그때에 잊었노라'로 전개된다. 짧은 대답에서 긴 대답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다. 이것은 냉담한 반응에서 관심 있는 반응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1연에서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 끝 연에 이르면 심정적 거리는 무척 가까워진다. 이 점은 1연의 반응이 화자의 진심이 아니었고, 겉으로 보이는 태도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잊었노라'는 결국 내적인 면에서 '잊지 못하노라'의 역설적 표현임을 감지할 수 있다. 서러움과 원망이 극에 달하면 도리어 자신으로부터 임을 소외시키지만, 그것은 하나의 심리적 기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움이 전제된 관계에서의 이런 행동 양식은 쉽게 무너져 버릴 방어벽이다. 내심으로는 사랑이 복구되기를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잊었노라'의 자기 주체 진술도 하나의 의지의 표현에 불과하지 사랑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끝 연에서의 '그때에 잊었노라'라고 하는 데에서도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싸인 여인의 짙은 원망과 한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 미래적 정황의 제시는 현재 정황에 대한 염려 때문인데, 화자는 임이 떠나 버릴 것만 같은 불안에 싸여 있다. 사랑은 영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을 때, 먼 훗날 화자가 주체가 되어 단절을 결의하는 심리적 태도로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현재의 지속이라는 소망의 절실한 표현이다. 화자가 먼 후일 그런 결의를 하지 않도록 지금의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이 시는 인간의 내면, 특히 여성의 마음에 자리한 이율 배반(二律背反)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보편적 공감을 끌어내고 있으며, 표현과 의도의 불일치가 자아내는 역설적 성격으로 인해 시적 충격을 충분히 던져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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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다면" 해설>

 

흔히 정한과 비애의 전통적 정서로 파악되는 소월의 시 세계의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현실 인식이 투영된 그의 또 다른 시 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임의 부재(不在)'에서 비롯된 그간의 한과 체념의 정서로부터 벗어나, 국권 상실이라는 비극적 현실 인식과 그러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저항 의지를 보여 주는 이 시는, 민족 공동체로서의 정서를 땅의 상실이라는 구체성에 바탕을 두어 작품의 효율성을 얻고 있다. 이러한 변모는 식민지 치하의 현실 상황에서 그저 한스럽다며 울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적극적 자세를 드러내 주는 것으로, 개인적 서정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우리의'과 같은 민족 모두의 문제로 시적 인식의 폭을 확대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꿈의 모습인 1연과 땅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현실의 24연을 대립시킴으로써 현실의 고통과 비극을 더욱 극명히 드러내는 표현 방법을 취한 이 시는 '보습 대일 땅', 즉 농토를 빼앗김으로써 물거품이 되어 버린 꿈을 쓸어안고, 아침부터 저물녘까지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20년대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동서남북을 유랑하는 그들에게 희망은 '별빛'처럼 아득일 뿐이요, '가슴에 팔 다리에'는 절망과 고통의 '물결'만이 떠오를 뿐이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생존을 위해 새벽부터 열심히 산비탈을 경작하는 이웃들을 목격하는 순간,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일지도 모르는 절망적 심경을 떨쳐 버리고, '나는 나아가리라/한걸음, 또 한 걸음'이라 힘차게 외치며 밝은 내일을 향한 미래 지향적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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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화(山有花)" 해설>

 

[진달래꽃]과 함께 소월의 대표시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기,,,결의 완벽한 구성과 평범하면서도 함축성 있는 시어를 구사하여 서정시로서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먼저 제목으로 쓰인 '산유화'는 어떤 꽃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산에 피어 있는 꽃'이라는 뜻으로 ''''을 함께 제시하는 조어(造語)이며, 모든 생명체를 대표하는 대유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인간'을 제외시킨 채 다만 ''''''으로 대표되는 자연만을 노래한 서경시가 아니라, 꽃이 피어 있는 공간으로서의 자연과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의 꽃을 포괄하는 수준 높은 존재론의 서정시이다.

첫째 연은 산이라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평범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자연의 질서는 '갈 봄 여름 없이'라는 구절처럼 계절의 변화이자 순환의 원리를 뜻한다. 따라서 생성과 소멸이라는 두 축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자연의 원리에 따라 꽃도 존재하므로, '산에 꽃피네/꽃이 피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피네.'라는 시행 속에는 산과 꽃, 즉 자연과 생명이 공간적 질서와 시간적 질서의 결합 위에 놓여 있으며, 그것은 바로 순환의 원리에 근거한다는 소월의 깨달음이 나타나 있다.

둘째 연에는 자연과 생명의 공간적 존재성이 형상화되어 있다. ''이라는 공간 속에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는 꽃은 모든 존재들의 숙명적인 개체성 또는 실존적 존재성을 표상한다. 따라서 다의적(多義的)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 '저만치', 실제의 공간적 거리라기보다는 꽃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심리적 거리이자, 꽃과 꽃, 인간과 인간, 즉 모든 존재들이 숙명적으로 지니고 있는 실존 상호간의 거리를 의미하며, 이는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는 모든 존재의 고독한 모습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연에서는 다시금 모든 사물의 상대적 존재성을 제시하고 있다. '''꽃이 좋아/산에서 살'지만,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꽃으로 인해 ''과 하나가 될 수 없으므로 ''''는 모두 고독한 존재로서의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넷째 연은 첫째 연과 호응하면서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연에서의 '피는' 행위가 넷째 연에 이르러 '지는' 사건으로 마무리되면서 탄생과 죽음, 생성과 소멸이라는 우주 만상의 존재 원리를 강조한다. 따라서 시적 화자도 자신이 인간과 자연으로부터 '저만치'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유한적(有限的) 존재임을 인식하고, 무한적이고 영원한 자연과 결코 합일되거나 동류(同類)가 될 수 없음에 절망한다. 그는 '갈 봄 여름 없이' 피었다 지는 ''을 통하여 인생의 무상함과 자연의 원리를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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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동새" 해설>

 

소월이 수학했던 배재고보의 교지 {배재}에 발표한 이 시는 설화에서 소재를 차용한 민요적 분위기의 작품이다. 전해 오는 설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평안북도 진두강가에 한 소녀가 부모와 아홉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죽고 계모가 들어왔다. 계모는 포악하여 생모의 유품을 모두 없애 버렸으며, 10남매에게는 끼니도 주지 않고 집에다 가두기도 하였다. 소녀는 나이가 들어 박천의 어느 부잣집 도령과 혼약을 맺게 되었다. 부자인 약혼자 집에서 많은 예물을 보내오자, 이를 시기한 계모는 예물을 빼앗고 소녀를 장롱 속에 가두고는 불에 태워 죽였다. 누나의 죽음을 슬퍼하며 동생들이 재를 파헤치자, 재 속에서 한 마리 접동새가 날아 올랐다. 이를 안 관가에서 계모를 잡아다 같은 방법으로 계모를 죽였는데, 그 때는 까마귀가 날아 올랐다. 접동새가 된 소녀는 죽어서도 계모가 무서워 대낮에는 나오지 못하고 깊은 밤에만 조심스레 동생들이 자는 창가에 와 슬피 울었다.

접동새의 울음소리를 의성화한 '접동/접동''아홉 오래비'를 활음조(滑音調)시킨 '아우래비'를 조화시켜 리듬의 불협화음을 막은 데서 일상적 언어를 자기 것으로 육화(肉化)한 소월의 천부적 시 능력이 유감 없이 나타나 있다. 또한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비서술적 형식인 압축과 비약의 표현 방법을 사용하여 감동을 극대화하고 있다.

'오랍동생'중 하나인 시적 화자는 23연에서 접동새에 얽힌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제시하다가, 4연에 이르러 주관적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 '누나''우리 누나'라고 하여 독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여 독자를 시적 화자와 일체화, 동일시하게 함으로써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찾아와 우는 누나의 슬픔과 어린 동생들의 그리움을 화자는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새를 자유와 비상(飛翔)의 표상이라고 하지만, 누나의 분신인 접동새는 동생들 때문에 자유롭게 날아가지 못하고 지상에 남아 있다. 이렇듯 자유와 구속의 모순된 이중성을 갖는 접동새가 '()'의 표상이라면, 이 작품은 바로 한국인의 의식 구조에 내재해 있는 한의 세계를 그려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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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해설>

 

이 시는 소월시의 정수(精髓), 이별의 슬픔을 인종(忍從)의 의지력으로 극복해 내는 여인을 시적 자아로 하여 전통적 정한(情恨)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이 정한의 세계는 [공무도하가], [가시리], [서경별곡], [아리랑]으로 계승되어 면면히 흘러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전통 정서와 그 맥을 같이 한다.

412행의 간결한 시 형식 속에는 한 여인의 임을 향한 절절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체념과 극기(克己)의 정신이 함께 용해 되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 떠나는 임을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겠다는 동양적인 체념과, '나 보기가 역겨워'떠나는 임이지만, 그를 위해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는 절대적 사랑, 임의 '가시는 걸음 걸음'이 꽃을 '사뿐히 즈려 밟'을 때, 이별의 슬픔을 도리어 축복으로 승화시키는 비애, 그리고 그 아픔을 겉으로 표출하지 않고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는 인고(忍苦) 등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진달래꽃'이다. '진달래꽃'은 단순히 '영변 약산'에 피어 있는 어느 꽃이 아니라, 헌신적인 사랑을 표상하기 위하여 선택된 시적 자아의 분신이다. 다시 말해, '진달래꽃'은 시적 자아의 아름답고 강렬한 사랑의 표상이요, 떠나는 임에 대한 원망과 슬픔이며, 끝까지 임에게 자신을 헌신하려는 정성과 순종의 상징이기도 하다.

떠나는 임을 위해 꽃을 뿌리는 행위가 비현실적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까닭은 임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시적 자아의 사랑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꽃을 뿌리는 행위의 표면적 의미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산화 공덕(散華功德)'이며, 가시는 길에 꽃을 뿌려 임의 앞날을 영화롭게 한다는 '축복'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임을 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강한 만류의 뜻이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그저 이별을 노래하는 단순한 차원의 것이 아니라, 이별이라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존재론의 문제로도 확대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소월은 그의 다른 대표작인 [산유화]에서처럼, 여기서도 '진달래꽃'의 개화와 낙화를 사랑의 피어남과 떨어짐, 즉 만남과 이별이라는 원리로 설정함으로써 마침내 사랑의 본질을 깨달은 그는 더 나아가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생성과 소멸의 인생 의미를 깊이 인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버림받은 여인과 떠나는 남성 간에 발생하는 비극적 상황이 초점을 이루는 설화적 모티프- 여성의 인종(忍從)과 남성의 유랑(流浪) 및 잠적(潛跡)-를 원형(原型)으로 하고 있는 이 시는, 여성 편향의 '드리오리다', '뿌리오리다', '가시옵소서', '흘리오리다'등의 종지형을 의도적으로 각연마다 사용함으로써 더욱 애절하고 간절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피학적(被虐的)이던 시적 자아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마지막 시행과, '걸음 걸음',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에서 나타나듯이 그저 눈물만 보이며 인종하는 나약한 여성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떠나는 남성이 밟고 가는 '진달래꽃' 한 송이 한 송이는 바로 여성 시적 자아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그가 꽃을 밟을 때마다 자신이 가학자(加虐者)임을 스스로 확인해야 하는 것을 아는 시적 자아는 그러한 고도의 치밀한 시적 장치를 통해 떠나는 사랑을 붙잡아두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아울러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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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招魂)" 해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혼()이 몸을 떠나는 것이라는 믿음에 의거하여 떠난 혼을 불러들여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 내려는 간절한 소망이 의례화(儀禮化)된 것을 고복 의식(皐復儀式) 또는 초혼(招魂)이라 한다. 그 의식은 사람이 죽은 직후, 그가 생시에 입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지붕이나 마당에서 북쪽을 향해 죽은 이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행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초혼은 죽은 이를 소생시키려는 의지를 표현한 '부름의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사랑하던 그 사람'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이름이여''그 사람이여''부르노라'와 같은 호칭적 진술을 반복하는 부름의 형식을 통해 고복 의식을 투영시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소월의 시는 임을 떠나보낸 후의 상실감비탄감을 체념적수동적 어조로 분출해 내는 나약함을 지니고 있는 것에 반해, 이 작품은 격정적이고 능동적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임의 갑작스런 죽음을 대하는 시적 자아는 '사랑한다'는 말도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한' ()을 가슴속에 새겨 넣고 '붉은 해가 걸린 서산 마루'에 올라앉아 '슬피 우는 사슴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허탈한 모습으로 '그대의 이름을 부른다 '임과 나는 결코 이어질 수 없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의 절망적 거리로 멀어져 있다는 현실에 체념하지만, 곧바로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부르다가 내가 죽을' 임의 이름을 부르며 임의 죽음을 부정하는 설움의 극한을 보인다. ''은 백제의 가요 '정읍사'나 박제상의 처가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望夫石)' 모티프와 관련이 있으며, 임이 죽은 사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살아 돌아와야 한다는 비원(悲願)을 담은 한의 응결체인 것이다.

시적 자아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초혼이라는 전통 의식에 맞추어 한 인간의 극한적 슬픔을 말하고 있다. '산산히 부서진/허공 중에 헤어진/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을 부르는 슬픔을 표현한 1연에 이어, 미처 고백하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애달픔을 말한 2, 허무하고 광막한 시적 공간을 제시하며 슬픔의 본질을 드러낸 34, 그리고 망부석으로 비유된 슬픔을 마지막 5연에서 말하며 임이 떠나간 저 세상으로 간절히 자신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간적 배경으로 제신된 '해질 무렵'은 밝음과 어둠의 경계선으로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으로 제시된 공간적 배경 또한 땅과 하늘의 경계, 곧 현실의 세계와 영원의 세계를 구분짓는 것으로, 산 자가 죽은 자의 세계로 다가갈 수 없다는 절망적 한계를 인식하게 한다.

이러한 의미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된 시적 자아의 심리적 추이 과정을 살펴보면 대략 '충격과 슬픔''허무와 좌절''미련과 안타까움'으로 말할 수 있다. 죽음을 바라보는 이러한 비극적 세계관을 통해 시적 자아는 자신도 그 죽음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마침내 임의 죽음을 긍정하게 되고 허무의 초극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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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史발굴특종 / 월간중앙 WIN 43. 1998.12.1

 

 

시인 金素月의 재발견

 

이것이 소월의 진짜 얼굴 /오산학교 시절 교복 입은 사진 첫 공개

病死아닌 '자살' 가족 증언 입수

 

김홍균 月刊중앙 WIN 기자

 

金素月의 진짜 얼굴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소월의 얼굴은 생전의 사진이 없어 󰡐초상화󰡑를 놓고 眞僞 논란이 계속돼왔다. 본지는 최근 소월의 오산학교 시절 사진을 단독입수했다. 그의 사후에 실제 얼굴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사진은 재야 연구가 金鍾旭씨가 그동안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 보관중이던 것을 찾아내 본지에 제보해온 것이다. 본지는 이와 함께 그동안 학계에서 논쟁을 빚어온 소월의 사인이 자살이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본지가 얼굴사진과 함께 입수한 북한 주간지 󰡒문학신문󰡓에 게재된 기행문 󰡐소월의 고향을 찾아서󰡑에 따르면, 북한에 살고 있는 소월의 가족들은 󰡒그가 일본 경찰의 탄압에 못이겨 자살했다󰡓고 증언했다. 소월의 생애를 둘러싼 미스터리를 규명한다.

 

(<그림 > 북한 [문학신문]에 실린 오산학교 김소월. 오산학교는 1919년 폐교돼 이 사진은 소월이 17세쯤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

 

소월 김정식(金廷湜)은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단연 사랑받는 시인이다. 그의 시 가운데 노래로 불린 것만 해도 50곡이 넘는다. 시인 고은씨는 그를 가리켜 󰡐한국의 정한(情恨)을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했다. 민요적 시어와 운율로 그려낸 그의 시들은 서정시의 󰡐완결판󰡑으로 평가돼왔다.

그런 소월에 대한 북한의 평가는 어떠한가. 북한의 󰡒문학신문󰡓1966510일부터 72일까지 󰡐소월의 고향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12회에 걸쳐 소월의 시와 생애를 평가했다. 이 시리즈는 당시 󰡒문학신문󰡓 기자가 소월의 고향인 평북 영주군 곽산면 남단동과 그가 숨을 거둔 구성군 서산면 평지동 일대를 돌며 가족과 친구들,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들을 현지 취재한 기행문이다.

󰡒문학신문󰡓은 북한 작가동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 주간(週刊)으로 현재까지 문예출판사가 발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가운데 1면에는 김일성김정일 부자(父子)의 문예방침에 대한 해설기사와 함께 김부자로부터 평가받은 문학작품들이 실리고, 나머지 지면은 시수필소설평론들로 꾸며져 있다.

 

일본 경찰 조사받은 뒤 󰡐자살󰡑󰡐망명󰡑 언급

 

기행문은 소월의 생애와 관련, 상당히 주목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국내에서는 아직도 논란의 불씨가 남은 소월의 사인(死因)과 관련된 글이다. 기행문에는 당시 북에 살아남은 소월의 가족들(아들 준호은호락호와 둘째딸 구원)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들은 소월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증언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소월의 부인 홍단실(洪丹實본래 이름은 洪尙一이었지만 소월이 다시 지어주었다)(죽은) 시인의 베개 밑에서 흰 종이봉지를 발견하였다󰡑면서 소월의 사인은 자살이라고 주장했다. 소월이 죽기 전날 함께 술을 마셨다는 부인 홍씨는 이 기사에 등장하지 않아 당시 생존 여부가 불투명하다.

소월은 슬하에 42녀를 두었다. 북한에 남은 31녀 외에 11녀가 더 있었는데 큰딸 구생(龜生)625 피난중에 병사했고, 3남 정호(正鎬66)는 현재 서울에 살고 있는 유일한 혈육이다.

그동안 국내 소월 연구가들 사이에서 소월의 사인은 자살과 병사(病死)로 갈려 있었다. 소월의 은사인 안서 김억(金億)은 그가 아편을 먹고 자살한 것으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일보󰡓(341227일자)는 소월의 부음기사에서 그의 사인을 뇌일혈로 보도했다. 또 문학평론가인 김윤식 서울대 교수는 87년 김억의 󰡐요절한 박행시인 김소월에 대한 추억󰡑이라는 글에서 언급된 󰡐저다병󰡑(楮多病)을 각기병으로 해석, 소월이 각기병으로 죽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 신문은 소월의 자살을 뒷받침할 만한 정황으로 말년의 소월이 일본 경찰의 호출로 경찰서에 불려다니면서 󰡐(만주)망명과 자살을 언급했었다󰡑고 적고 있다.

소월의 학창시절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알려진대로 소월은 그의 고향 남단동에 있는 공주 김씨 문중학교(소월은 공주 김씨 집성촌인 고향마을의 장손으로 어려서부터 󰡐잣놈󰡑이란 애칭으로 불렸다)인 남산학교를 졸업한 뒤 오산학교를 다녔다. 당시 오산학교에는 교육자 이승훈 선생이 교장으로 있었고, 조만식 선생과 시인인 김억도 재직중이었다. 소월의 사상적인 토양이 이들로부터 영향받았을 것은 쉽게 추론해볼 수 있다.

소월은 오산학교 시절 3.1운동을 겪었다. 공교롭게 오산학교는 3.1운동 직후 폐교됐다. 󰡒문학신문󰡓에서도 소월이 3.1운동 후 오산학교를 찾았을 때는 학교 건물은 불타고 빈 터만 남아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 기사는 소월이 당시 오산학교의 3.1만세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한때 도피생활을 했던 사실도 처음 밝히고 있다.

 

"오산학교 시절 사진은 북에 남은 유일한 것󰡓

 

󰡐3.1독립운동을 맞은 것은 그가 3학년 때였다. 당시 오산에서 대산에 이르는 가도에는 수많은 시위 군중이 노도와 같이 밀렸다. 당시 동문회 회장이었던 정식은 학생들의 지도적 위치에 서서 시위대열에 참가했다. 정주의 경찰대는 급거 오산으로 출동하였다. 정식도 가슴에 󰡐삐라󰡑를 품고 시위 선두에 섰던지라 붙잡혀 수색을 당했다. 오산학교의 중심인물이었던 그는 계속 놈들의 추격을 받았다.󰡑 북한에서 김소월은 한동안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데 대해 󰡐패배적 감상주의󰡑에 젖어 󰡐현실을 극복할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한 사상적인 제약성󰡑을 가진 작가로 평가절하되기도 했다. 그것은 67년 주체사상의 강화기와 때를 같이한다. 그러나 소월은 그 이전만 해도 애국적 민족시인으로 상당한 평가를 받았다. 󰡒문학신문󰡓에서 그는 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농민의 한 사람으로도 상세히 기술된다. 사실 여부는 가릴 수 없으나 그는 말년을 보냈던 구성지역에 󰡐고구마와 유자를 처음 도입한 사람󰡑이라고 소개됐을 정도다.

 

(<그림 2> 58년 북한의 '김소월론'에 실린 소월의 초상. 오산학교 시절의 교복 입은 사진을 옮겨 그렸다. )

 

한편 󰡒문학신문󰡓은 오산학교 시절 소월의 사진을 입수해 게재했다. 그동안 알려진 소월의 얼굴사진은 30년대 초 󰡒개벽󰡓지에 실린 사진과 34󰡒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이 전부. 그러나 당시 신문이나 잡지 인쇄기술 수준이 미흡해 소월의 얼굴사진은 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결국 그 사진을 토대로 몽타주나 초상화가 그려졌지만 그것들조차 실제 얼굴과 다르다는 지적이 있어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90년 문화부가 소월을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하고 주도적으로 초상화 작업을 벌였을 때는 가족 증언과 함께 소월의 손자 얼굴을 토대로 새 영정을 만들었을 정도다. 그러나 이번에 처음 공개된 소월의 청년시절 사진은 북한에 남은 둘째 아들 은호(殷鎬)가 보관해오던 것을 󰡒문학신문󰡓에 제공한 것으로 사진 상태도 아주 양호한 편이다. 지금까지의 한복차림 초상과 달리 소월은 단정한 학생복 차림을 하고 있다. 서울에 사는 3남 정호(正鎬)씨는 󰡒이 사진이 내가 어린 시절 보았던 아버님의 유일한 사진󰡓이라고 말했다. 󰡐소월󰡑이란 아호(雅號)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이 제기됐다. 그동안 소월이란 아호는 그의 은사인 김억이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신문은 그의 아호는 소월 자신이 직접 지어 붙인 것이라고 밝혔다.

 

(<그림 3> 30년대 "개벽"지에 소개된 소월의 사진을 확대, 가필한 초상.)

 

한편 아호는 고향마을 뒷산인 남산봉(진달래봉)의 옛이름 󰡐소산󰡑(素山)과 관련이 있다고도 전했다. 북한 기자는 곽산읍 향토사에서 소월의 고향마을인 남단동에 소산이라는 산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남단동 촌로의 증언을 토대로 소월은 󰡐소산에 뜬 달󰡑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어린 시절 성장과정에서 소월에게 문학적 자양분을 제공했던 것으로 알려진 숙모 계희영(桂熙永, 작고) 여사도 그의 󰡒소월선집󰡓에서 소월과 남산봉달과의 󰡐유별난󰡑 인연을 언급한 바 있다. 󰡐소월의 시 가운데에도 달맞이에 관한 것이 있는데 남산의 달맞이는 유별났다. 소월은 달맞이에 취미가 있었던지 초생달이 뜬 밤에도 달구경을 나가곤 하였으니 보름달 맞이에 빠지지 않고 좋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이밖에도 기행문에서는 소월의 묘소가 그가 숨을 거둔 구성군에서 고향마을인 영주군 곽산면 남단동 진달래봉 중턱으로 옮겨진 사실과 함께 묘소 앞 시비(詩碑)에 그의 대표시 가운데 하나인 󰡐초혼󰡑이 새겨져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시비는 67년 소월이 숙청되면서 그와 함께 모진 수난을 겪어야 했다. 지난 95년 귀순한 북한 작가 장모(54)씨는 북한의 소월 평가와 관련해 이런 증언을 해주었다.

 

한때 기념행사까지 하다가 숙청 뒤 墓碑 뽑히는 수모

 

󰡒67년 당중앙위원회 415차 전원회의 이후 김소월은 다산 정약용이나 연암 박지원 등의 사상저서와 함께 봉건.유교사상으로 낙인찍혀 연구대상에서 아예 배제됐습니다. 그때 당 선전분야에서는 수정주의와 부르주아 사상과 함께 봉건 유교사상에 물든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대규모 색출작업이 벌어졌습니다.󰡓

 

장씨는 또 󰡒내가 북한 중앙방송 재직시절 김소월의 조카와 한 사무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이름은 김정품(현재 나이 53세쯤). 항렬을 따져볼 때 김소월과 같은 󰡐󰡑자 항렬이어서 착오가 있는 듯하지만 그의 증언은 비교적 구체적이었다. 󰡒그 친구 고향이 정주 곽산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67년 소월이 숙청당했을 때 그의 묘소 앞의 시비는 󰡐초당파󰡑들에 의해 깨진 뒤 뽑혀나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소월의 사인에 대해서도 자살이라고 못박았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소월은 󰡐복어알 안주󰡑를 먹고 자살했습니다.󰡓

 

(<그림 4> "문학사상"에서 "동아일보" 사진을 토대로 몽타주한 얼굴)

 

북한에서 20년 넘게 어둠 속에 묻혔던 소월의 문학이 정식으로 복권된 것은 92. 김정일은 󰡒주체문학론󰡓(조선노동당출판사)을 발표하면서 일제 때 진보적인 작품을 창작했던 신채호, 한용운, 김억, 정지용 등과 함께 직접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이들의 복권을 지시했다.

 

이러한 김정일의 복권 지시는 이미 80년대말부터 싹텄다. 그는 북한의 시가 사상성, 당파성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인민의 정서를 반영하는 시를 써야 한다면서 서정시 󰡐옹호론󰡑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후 93년 완간된 북한 󰡒문학예술사전󰡓은 김소월에 대해 󰡐비판적 사실주의 작가, 애국적 감정과 민족적 정서를 민요풍의 아름다운 형식으로 구현해 근세 시문학의 운율과 형식 발전에 기여했다󰡑고 공식 평가했다.

 

(<그림 5> 90년 문화부가 복원한 초상. "동아일보" 사진에다 아들,손자의 얼굴을 참조해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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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史발굴특종 / 시인 金素月의 재발견 제 431998.12.01

 

"아버님이 살아오신 것 같다"

 

 

서울 거주 素月3男 金正鎬

 

김홍균 月刊중앙 WIN 기자

 

󰡒50년 전 그때 고향집에서 보았던 바로 그 사진입니다. 아버님이 오산학교 시절 찍은 사진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버님이 본래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않아 옛날 집에서 제가 본 사진도 이것 하나뿐입니다.󰡓

 

서울에 살고 있는 김소월의 유일한 혈육인 김정호(66). 본지가 처음 공개한 청년 시절 소월의 사진을 살펴보며 그는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소월의 42녀 중 3남인 김씨는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625 19세 나이로 인민군으로 참전했다 반공포로로 서울에 남았다. 그러나 그에게 붙여진 소월의 아들이라는 󰡐화려한󰡑 수식에 걸맞지 않게 그의 생활은 너무 궁색했다. 특별한 직장 없이 수많은 세월을 보냈다. 지금도 오랫동안 병상에 누운 아내 걱정으로 기자를 만나는 일조차 극구 사양했다. 그런 탓인지 󰡐고향 소식󰡑에도 다소 무덤덤한 표정이다.

 

그동안 북쪽에 있는 가족들 소식을 간접적으로라도 들었나.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럴 처지가 아니다.󰡓

 

남쪽에 북에서 내려온 친척이나 가족이 남아 있나.

󰡒큰 누님(구생)이 전란중에 돌아가셨고, 외갓집 누님(홍인걸)이 한분 있었는데 최근 돌아가셨다. 27세 때 결혼한 뒤 신문을 보고 작은 할머님(계희영)이 남쪽에 계신 줄 처음 알았다. 그분도 오래 전 돌아가셨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나.

󰡒한동안 특별한 직업 없이 전전했다. 미당 서정주 선생님 등의 배려로 한때 철도청 공무원과 홍익회 수위직으로 일했다.󰡓

 

북한 󰡒문학신문󰡓에 고향 얘기가 실렸는데 소감은.

󰡒정말 오랜만에 아버님 사진을 보았다. 비록 30년 전의 일이라지만 북쪽의 형제들이 그때까지 살아있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러나 그들도 지금은 살아있기 어렵지 않겠나. 혹 막내동생은 살아있을지 모르겠다.󰡓

 

선친의 죽음에 대해 들은 바 있나.

󰡒자살한 것으로 들었다.󰡓

 

고향 소식을 듣고 싶을 텐데.

󰡒월남한지 벌써 50년이 다 돼간다. 출세했다면 고향에 돌아가겠지만 조건이 안된다.󰡓

 

신문에 고향집 사진이 실렸는데 옛날 그 고향집인가.

󰡒아니다. 과거 우리집은 상당히 큰 규모였다. 집안만 2천평은 너끈했을 것이다. 본채 말고도 머슴살이 살림채가 두개 있었고 대문도 두개나 있었다. 사진속의 집은 전란 후에 다시 지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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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입수 / "문학신문" 기행문 전문게재 제 431998.12.01

 

"소월의 고향을 찾아서"

 

한국을 대표하는 서정시인 金素月. 북한 문단의 그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굴곡의 연속이었다. 그는 한때 민족주의, 애국주의 시인으로 추앙받다 67년 봉건유교사상주의자로 낙인찍혀 그의 시와 함께 매장됐다. 그의 시가 다시 햇빛을 보기까지는 20여년의 긴 세월이 걸렸다. 북에서 소월 에 대한 평가의 분기점은 67. 북한 󰡒문학신문󰡓은 소월 시에 대한 재평가가 내리기 직전인 665월부터 2개월동안 󰡐소월의 고향을 찾아서󰡑라는 제하의 기획기사를 연재했다. 이 기사는 󰡒문학신문󰡓 소속 기자인 김영희가 직접 소월의 고향을 찾아 취재한 기행문이다. 올해(1224)로 서거 64주기를 맞는 그를 기리기 위해 본지는 이 기행문을 단독입수, 전재한다. 기사 가운데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국내 소월 연구가 金鍾旭씨가 주석(괄호안 내용)을 달았다. 일부 표현과 내용은 우리식 표기법으로 바꾸거나 첨삭했다.

 

(<그림 7> 소월의 옛집.그러나 서월에 남아있는 3정호씨는 이 집은 자신이 예날에 살았던 그집이 아니라고 말했다.)

 

선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사람이어!

사랑하던 그사람이어!

 

이것은 소월 김정식(金廷湜)의 묘비에 아로새겨진 그의 유명한 시 일부다 (소월의 묘비는 현재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에 소재하고 있다. 소월은 최후를 평안북도 구성군 방현면에서 마쳐 그의 묘소는 그곳에 있었는데 1965년 그의 본적지인 곽산(郭山) 남단동(南端洞)으로 이장됐고 시비(詩碑)도 그곳에 세워졌다. 이 시비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초혼(招魂)󰡑이 새겨진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설사 이 󰡐글발󰡑이 새겨져 있지 않다 해도 그의 묘비 앞에 서 본 사람이라면 이 통절한 노래가 스스로 귓가에 울려오는 것을 어쩔 수 없으리라.

 

2은호씨가 준 素月의 사진

 

일찍이 송강 정철(鄭澈)의 묘를 찾았던 시인 권필()󰡐빈산에 나뭇잎 지고 쓸쓸히 비 내리나 선생의 노래는 귀에 상기(항상) 쟁쟁하다󰡑고 노래한 바 있거니와 소월의 묘비 앞에 서니 말 그대로 그의 시가 귀에 쟁쟁한 것 같다.

천재시인 소월의 시는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람들의 가슴속에 잠겨 칠현금처럼 힘있게 울리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소월의 고향을 찾은 것은 바야흐로 봄이 무르익을 때이다. 새 깃과 같이 포근한 󰡐금잔디󰡑 위에 시인은 잠들어 있었는데 그 둘레에는 소월이 평생 그토록 좋아하던 아름다운 진달래가 그에게 그윽한 향기를 품어주고 있었다.

자연은 너무나도 불행했던 시인을 따뜻이 품어 위로하는 듯 싶었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소월, 나 역시 그의 시를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그의 시를 사랑하던 나머지 그의 아름다운 시의 요람, 시인의 고향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그곳을 가보고 싶은 마음은 해마다 봄이 오면 더욱 간절하였다.

소월의 시에는 󰡐진달래꽃󰡑뿐 아니라 󰡐여름의 달밤󰡑󰡐가을 저녁󰡑, 고요히 눈 내리는 겨울 아침도 있다. 말하자면 춘하추동을 다 노래하였다.

그러나 그는 봄을 무척 그리워한 시인이었다.

그래 봄이 오면 소월의 고향을 더욱 찾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소원대로 여름이나 가을, 더구나 겨울이 아닌 바로 이 봄에 소월의 고향을 찾게 되었다.

나는 수수께끼처럼만 듣던 󰡐차 가고 배 가는󰡑 곳도 보았고, 󰡐접동새󰡑 찾아들던 골짜기도 보았다. 처음 찾는 고장이지만 언젠가 본 듯한 정다운 풍경들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보다 정다운 것은 그의 고향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반가이 나를 만나주었다. 소월이 평생 못잊고 그리워한 그 사람들을 만났으니 무엇이라 감격이 자꾸 앞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때마침 청명날 밤 나는 소월의 옛 고향집에 하루를 묵었다. 맏아들 준호는 청명날이라 푸짐한 음식을 차려주었다. 그가 바로 소월의 시 󰡐돈과 밥과 맏아들󰡑(이 시의 원제는 본래 󰡐돈과 밥과 맘과 들󰡑이지 󰡐돈과 밥과 맏아들󰡑이 아니다)에 나오는 그 맏아들인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만 열세살 난 소년 김정식이 그 놀랄 만한 시재를 보여준 󰡐긴 숙시(熟視)󰡑를 썼구나 하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하였다(그러나 최근 이 산문시는 소월의 작품이 아니라 소월(素月) 최승구(崔承九)의 작품인 것으로 밝혀졌다).

내가 소월의 옛이야기를 들으로 왔다니까 그날 밤 소월의 집에는 수많은 소월의 옛 친구들과 친척들이 찾아왔다. 거기에는 김정식이 자기 호를 왜 소월로 붙였는가를 아는, 항렬(行列)로 보아 소월의 할아버지 격인 76세의 김송하 노인, 사립 남산학교 동창생인 김상적김상점 노인들, 소월이 장가들 때 각시를 구경왔던 매실 할머니 등이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밤 가는 줄 몰랐다. 시인이 작고한지 설흔(서른)해도 더 넘고 또 어떤 이는 시인과 헤어져 4050년이 되었으나 모두가 어제인 듯 생동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다음날 다시 그의 고향을 보니 무심히 보이던 󰡐모래동󰡑, 그저 스쳐 지날 수 있는 󰡐오리나무󰡑도 모두가 사연이 깊었다.

나는 그가 거닐던 바닷가─ 󰡐파랗게 좋이 물든 남빛 하늘에 저녁 노을 스러지는󰡑 바닷가를 거닐기도 했고, 그가 좋아하던 󰡐녕변의 약산󰡑도 올랐고, 󰡐비맞아 함뿍이 젖은 제비도 가다오다 돌아󰡑온다는 구성(龜城)땅도 편답(遍踏)하였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그곳 들에는 많은 전변(轉變)이 일어났다. 그곳 들에는 소월이 󰡐상쾌한 아침󰡑에서 그렇듯 열망한 󰡐많은 전변󰡑이 일어 󰡐우리의 손에서 아름다와󰡑졌다.

󰡒! 선생은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났지요. 만일 그이가 앉아 계신다면 우리 세상을 얼마나 감격에 겨워 노래했겠소.󰡓

이 말은 어려서 소월에게 무척 사랑받았다는 왕인협동농장 차성관 작업반장의 말이다. 이렇게 얘기를 듣고 보니 땅을 구르는 뜨락또르(트랙터) 한대 무심히 볼 수 없었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드면󰡑하던 소월이 우리의 땅을 울리는 뜨락또르를 본다면 얼마나 환희에 넘쳐 노래하였을까.

 

지금 나의 책상 위에는 수많은 자료가 놓여있다.

시인의 둘째아들인 은호씨가 나에게 준 소월의 사진, 문장리에 있는 시인의 딸 김구원이 나에게 들려준 소월의 일화를 적은 두툼한 수첩, 그가 소학교 시절 배웠다는 교과서 그리고 시인의 소꿉놀이 친구였던 관상리 오철청 할머니가 소월에게서 배웠다는 노래 구절들, 시인을 두고 일찍이 친구들이 지은 시문들, 서투른 솜씨로 내가 찍은 20여점의 사진들(殷鎬는 소월의 둘째아들. 소월은 부인 洪實丹과의 사이에 42녀를 두었다. 준호, 은호, 정호, 낙호, 구생, 구원으로 김구원은 소월의 차녀다).

 

남산봉 기슭에 자리잡은 소월의 묘

 

어떻게 하면 이 자료를 가지고 소월의 생애와 그 고향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글을 쓸 수 있을까.

먼 옛날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일화를 수집한 리인로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선행한 명인들의 일화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은 후손들의 큰 의무라고 하였다.

내 어찌 󰡒파한집󰡓의 저자를 따를 수 있으랴마는 다만 후대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무딘 붓을 가다듬을 뿐이다.

이제 얼마간 지상을 통해 독자들과 더불어 소월의 고향을 붓이 내키는 대로 찾을까 한다.

곽산읍에서 남단리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재를 넘어 마을 뒤로 돌아서 가는 지름길이고 또 하나는 신작로를 따라 마을 앞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신작로 길을 택하였다.

소월이 그렇듯 아름답게 노래한 고향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고 생각하니 사뭇 감회깊은 가운데, 문득 머리위에서 정겨운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신작로 위에는 물오리떼가 날고 있었다. 만일 저것이 기러기떼였다면 소월은 이곳에서 󰡐󰡑이라는 시를 노래했을 것이다.

 

말마소 내 집도

정주 곽산

차 가고 배 가는 곳이라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공중엔 길 있어서 잘 가는가.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이것이 고향마저 일제에 빼앗긴 소월의 시다. 고향을 사무치도록 사랑한 시인은 죽어서도 넋은 고향으로 가야 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설 땅마저 빼앗긴 시인이 갈 곳은 그 어디였으랴. 마을을 들어서니 벌써 햇살이 쫙 퍼졌다.

소월의 고향은 남향으로 위치해 있는데 그 뒤를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야산이라고 볼 수 없는 남산봉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남산봉 왼쪽에는 금로봉이라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고 그 언덕 기슭에는 관리위원회와 상점, 유치원 등이 자리잡고 있다(참고로 남쪽에 살고 있는 소월의 3남 정호씨는 아버지의 고향집에 대해 󰡒아버님이 자란 곳은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일명 남산동) 569번지다. 본가는 열네칸이나 되는 입구()자의 묵은 기와집이었다. 집 울 뒤의 3천여평의 담장 주위에는 옛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각종 과일나무가 즐비하게 있었다󰡓고 한 글에서 적었다).

남산봉은 소월의 옛집 뒤에 있는 아름다운 산이다. 그 산 상봉에는 흡사 투구 모양을 한 투구봉이 있고 그 밑으로 산 줄기가 뻗었는데 󰡐옥녀 산발형󰡑즉 옥녀가 머리를 풀은 형극이라는 구천봉이 있고 그 사이로는 덕수물이 내린다는 횅천골이 있다. 그리고 그리 크지 않은 진달래봉이라는 시적인 이름을 가진 언덕도 있다.

이 남산봉 기슭은 갈피마다 소월의 시가 깃들어 있는 곳이며 소월이 어린 시절 일화를 남겨놓은 시의 요람이다. 진달래봉은 금잔디와 오리나무 숲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어린 소월은 여기에 올라 글짓기를 했다.

소월의 묘도 이 전망 좋은 남산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 작은 남산봉에 올라 뒤를 돌아보면 곽산읍이 한눈에 보이고 남행열차의 모습도 보인다. 앞쪽으로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 고깃배가 떠돈다. 바다 한가운데에는 신미도 삼각산이 불쑥 솟아난듯 떠있다.

 

산에나 올라서서

바다를 보라.

사면에 백열리 창파 중에

객석만 둥둥떠나간다. (소월의 시 󰡐집생각󰡑의 한 구절)

 

소월의 짧은 시들은 자연을 그대로 품에 안고 있다. 남산봉에는 곳곳마다 소월의 시가 스며 있다는 말이 실감났다. 남산봉 기슭 후면에는 무슨 전설이라도 깃든 듯한 여러가지 모양의 괴석이 깔려 있는데 그 반대편으로 고려의 명장 서희 장군이 거란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성을 쌓고 선조들이 외적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한 릉한산이 놓여 있다.

그 주변으로 의병장 홍천록이 어부 4백여명으로 의병을 조직했다는 선사포, 더 가까이는 평안도 농민전쟁 당시 마을사람 모두 인민의 편에 서서 싸우다 한사람 같이 순사하였다는 남촌. 그리고 투구봉 바로 위에는 봉수대가 자리잡고 있다.

남산봉은 이 곱고 다정할 뿐만 아니라 슬기롭기도 하였다. 시인의 남다른 조국애도 이런데서 자란것이 아니겠는가. 남산봉! 그리고 남산마을, 이 정다운 산천, 아름다운 마을에서 어떻게 시인이 자랐는지 알기 위해 저녁녘에 소월의 옛집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소월의 북쪽 가족들 직업 등 소개

 

김소월의 집에 밤이 오면 󰡐아오라비 접동새󰡑 등 작은 새소리가 고요를 타고 들려온다.

소월은 이 집을 시에서 󰡐꿈에도 생시에도 눈에 선한 우리 집󰡑을 잊지 못해 했다. 그는 자신의 집을 시 󰡐집생각󰡑󰡐우리 집󰡑󰡐나의 집󰡑을 통해 노래했다.

소월의 집에는 풍경화와 가족사진들이 나란히 걸려 있다(소월은 사진찍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그의 3남 정호씨가 술회한 적이 있다. 지난 19909월 문화부에서 소월의 진영(眞影)을 새로 제작할 때 사용했던 동아일보 구성지국장 시절(1926)에 찍었던 퇴색한 사진을 보고도 정호씨는 그것이 선친의 사진인지 여부를 가려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농장의 재간있는 목수인 이 집의 주인 소월의 장남 준호 그리고 평북도 경공업총국의 상급지도원으로 있는 은호, 대학을 마치고 평양의 어느 설계 연구기관의 연구사로 있는 락호 등 소월의 아들들 얼굴이 차례로 보인다. 그리고 아랫방에는 영실, 정옥, 영철 등 시인의 손자, 손녀들이 포근히 잠들어 있다.

이날 노인들이 들려준 불우한 소년 정식의 이야기 중에서도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시인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이야기였다(소월의 숙모 계희영(桂熙永) 여사의 󰡐소월에 대한 이야기󰡑 속에 나오는 소월의 성장과정은 실제 전하는 사실과 틀리는 곳이 상당히 많다. 예컨대 계여사는 소월이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적었다).

어린 소월이 세상에 태어날 무렵은 평화롭던 곽산 땅도 일제의 침략으로 날이 갈수록 소란스러웠다. 일제놈들은 남산봉 뒤쪽에 철도공사판을 벌여 놓았다.

마을사람들이 응하지 않자 약이 오른 일본놈들은 마을의 몇몇 청년들에게 불의의 폭행을 가함으로써 조선사람의 기세를 꺾으려고 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소월의 부친 김성도(金性燾), 지금의 김송하 노인의 부친 김경로 등에게 생트집을 부렸고 김성도에게는 잔인한 폭행을 하였다.

성도는 오랫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며칠후부터는 일제를 저주하는 고함을 지르며 실성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완전히 정신이상에 걸려 폐인이 되었다.

소월은 아버지의 사랑은 받지 못했으나 어머니로부터는 끔찍한 사랑을 받았다. 어머니 장씨는 시부모를 모셔야 했고 실성한 남편을 돌보아야 했으며 농삿일까지 맡아야 했다(소월의 어머니는 장경숙(張景淑)이라 불렀다).

자연히 소월은 조부를 따르게 되었다. 조부 김상주(金相疇) 노인 또한 반일감정이 강한 사람이었다. 어린 소월은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향토의 원한과 슬픔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던 것이다.

후일 소월은 길가에서 일본 관리들과 마주치면 󰡐개와 사람이 어찌 한 길을 걸을 수 있는가󰡑라면서 돌아서서는 놈들이 다 지난 다음에야 되돌아 걸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가 단순한 󰡐향토시인󰡑이 아닌 애국시인으로 자란 것은 이러한 가정환경과 중요하게 관련되는 것이다.

 

󰡐나는 지으리 나의 집을

다시금 큰 길을 앞에다 두고

나는 문깐에 서서 기다리리

지나가는 길손을 눈여겨보며

그대인가고, 그대인가고. 󰡑(󰡐나의 집󰡑 중에서)

 

옛집은 전란중에 불타고

 

소월의 생가 택호(宅號)는 일봉집이다. 소월의 노할머니가 선천군 일봉리에서 이곳으로 시집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집의 사랑방에는 마실꾼들이 항상 모여 일제의 탄압에 나라 걱정을 하였으며 이야기마당으로 이용되었다.

원래 곽산 땅은 옛날부터 전설과 민화가 풍부한 곳이어서 이야기의 샘물은 마를 줄 몰랐다. 󰡐릉한산성󰡑에서 거란을 물리친 역사적 사실을 비롯해 봉건 영주의 포악상을 폭로하는 󰡐수청베리 이야기󰡑, 그 효성을 하늘도 알아본다는 󰡐효녀 사월 이야기󰡑, 절개를 지킨 󰡐최씨부인 이야기󰡑, 단독으로 호랑이를 잡은 󰡐박돌소년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사랑방에 모인 동네사람들은 소월의 첫 문학선생인 셈이었다. 여섯살밖에 안된 소월은 옛이야기의 줄거리뿐만 아니라 󰡐심청전󰡑 등은 책에 쓰인대로 내용과 곡조를 줄줄 외웠다.

사람들은 귀엽기도 하였지만, 저 애가 신동이 아닌가 싶어 범상히 생각하지 못했다.

상주노인은 당시 한문에 조예가 상당히 깊었는데 하루는 글읽기를 마치며 책을 덮으려는데 어린 소월이 들어서며 󰡒제가 한번 읽을테니 들어보세요󰡓라고 말했다.

소월은 앉은 자리에서 여러 장에 걸친 글을 두루 외웠다. 상주노인은 손자를 덥썩 안고 󰡒이게 정말 여섯살짜리 애인가󰡓하고 탄복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동네사람들은 󰡒상주노인집에 문장이 났다󰡓고까지 하였다.

한때 소월이 학비가 없어 학교를 못가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어른들을 따라 밭에서 쇠스랑을 쪼고 있었는데 어른들이 쉬었다 하자고 하자 소월은 엽낭에서 책을 꺼내 땅에 박은 쇠스랑에 기대어 책을 읽었다고 한다. 책뿐만 아니라 피리 또한 잘 불었으며 장기도 한몫하였다. 그의 장기는 동네어른들을 거의 이기는 놀라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저 󰡐진달래봉󰡑 앞 못가에서 낚시질을 하지 않았나. 그런데 하루는 가만히 가보니 미끼도 달지 않은 낚시를 온종일 못가에 던지고 있더란 말일세. 보아하니 낚시질에는 생각이 없고 글귀를 생각했던 모양이네.󰡓

한 노인은 소월에 얽힌 또 하나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소월의 고향집은 625 때 미군의 눈먼 폭탄을 맞아 사랑방은 완전 파괴되고 원채도 거의 무너진 것을 목수인 아들 준호가 다시 보수하여 살고 있다.

소월이 출생할 무렵 이 집은 원래 초가였는데 지금은 기와를 얹고 있다(소월의 3남 정호는 그의 집이 초가집이 아닌 기와집으로서 매우 큰 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집은 소월의 생가는 아니다. 그의 생가는 구성군 왕인리 안끝 부락이다(소월의 생가는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동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본적지인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남단동 569번지와 혼동하여 본적지를 소월의 생가로 잘못 적어놓고 있는 기록을 많이 보고 있다. 소월은 오산중학을 거쳐 배재고보를 졸업한 사실은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배재중학에 남아있는 그의 학적부에 생년월일이 잘못 기재된 사실이 얼마 전에 드러났다. 그것은 1902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어야 할 그의 출생연도가 명치33(1900)으로 기재된 것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공주 김씨 족보(族譜)를 봐도 1902년생으로 나타나 있는 만큼 시정되어야 할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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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입수 /"문학신문" 기행문 전문게재 제 431998.12.01

 

소월의 고향을 찾아서

 

 

주춧돌만 남은 남산학교

 

지금도 그 마을에는 소월의 외삼촌 어머니가 살고 있는데 소월은 외가댁인 그곳에서 태어났던 것이다(소월이 태어난 곳은 외가로 당시의 습속이 갓 시집온 색시가 첫 아기를 출산할 때는 반드시 새색시의 친가에 가서 아기를 낳게끔 되어 있어 소월은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가 만년에 쓴 경향적인 것으로 추측되는 시편들과 그가 사용한 모든 것이 몽땅 폭격에 없어졌다(김정호씨의 말을 빌리면 8.15 직후까지도 아버지 소월이 남긴 미발표 유고가 한 트렁크 정도는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북한 소월의 후손들은 단 한편의 소월 원고를 보관하지 못하고 있다.

 

(<그림 8> 남산학교를 졸업한 뒤 소월이 다녔던 오산학교. 그는 여기서 조만식,김억 등에게 배웠다. 31운동 후 인제에 의해 폐교됐다.)

 

우리는 소월이 낚시질한 못을 넘어 수업을 쌓던 남산학교 터로 발길을 옮겼다.

소월은 불우한 소학교 시절을 보냈다. 󰡐일봉집󰡑은 몰락했고 그의 어머니는 소월에게 모자조차 사줄 수 없어 한숨을 지었다니 쪼들렸던 가사를 짐작할 수 있다.

 

소월은 남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도 집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 3년동안 어른들을 따라 농사를 지었다.

그가 다닌 사립 남산학교는 진달래봉,구천봉 등이 좌우에 서 있는 아늑한 골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보잘 것이 없고 운동장이라야 노적가리 하나가 들어앉기 빠듯할 정도였다.

 

(<그림 9> 소월의 어린시절 다녔던 사립 남산학교.본래는 서당으로 지어진 ''자 형의 한옥으로 작가가 그린 것이다.)

 

현재는 주춧돌만 남아있을 뿐이다.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소월은 재학시절 타학교와의 경쟁에 학교를 대표하여 출전, 1등상으로 연필과 백로지를 타가지고 오기 일쑤였다.

당시 소월의 문재(文才)가 어떠했는지는 그의 어릴 적 글인 󰡐긴 숙시󰡑를 보면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소월은 조숙한 소년이었으며 남들이 마치기 어려운 재능을 가진 어린이였다. 현재 평양에 있는 시인과 함께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는 교수 한경순 박사의 말이 생각났다.

소월이 남산학교를 다닐 무렵은 소위 한일합방을 전후한 때여서 여간 시국이 복잡하지 않았다. 일본은 애국적인 감정이 농후한 사립학교를 백방으로 해체하려 하였다. 그들은 사립학교에 다니면 배울 것이 없다는 맹랑한 낭설을 퍼뜨려 학생들을 소위 공립 보통학교로 유인하였다.

곽산읍에 있는 공립 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도 이러한 방법으로 남산학교를 없애버리려 하였다.

하루는 그가 소월이 다니는 학교에 왔다. 그가 교실에 들어서자 교실 안은 침을 삼키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일본인 교장은 소월 앞에 이르러

󰡒연필은 무엇으로 만드느냐.󰡓

󰡒일본은 동쪽에 있느냐, 서쪽에 있느냐.󰡓는 등 하찮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렇게 유순해 보이던 소월의 얼굴은 파랗게 일그러졌고, 그렇게도 답변을 잘하던 그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와 네가 무슨 상관이냐󰡑는 뜻이었다.

일본인 교장이 간 후 소월과 몇몇 학생들은 비밀리에 배우던 󰡐국권은 어데로 가고/ 기반되기 어인 일가. /여보 우리 동창 제군/우리 본분 지킵시다󰡑로 된 󰡒유년필독󰡓이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결국 소월은 소학교 4년간을 첫자리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더이상 웃학교에 가지 못했다.

 

아름다운 素山月色

 

김정식의 호 󰡐소월󰡑(素月)이란 두 글자의 유래는 어디에 근거하고 있을까(소월이란 필명은 안서(岸曙) 김억(金億)이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곽산읍의 향토사에는 남단리에 소산(素山)이라고 하는 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는데 소산과 소월이란 이름에 무슨 인연이 있는 것 같았다. 취재하면서 남단리를 죄다 뒤졌지만 소산이란 산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마을의 연장자인 김송하 노인을 찾아 우선 소산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노인의 집은 바로 진달래봉 밑에 자리잡고 있었다. 김송하 노인은 소산이 바로 진달래봉이라고 말해주었다.

놀랍게도 우리가 여태 다녀온 남산봉을 가리켜 옛날에 소산이라고 불렀던 게 아닌가. 소월이란 이름도 이 소산과 관련되어 있었다.

송하 노인은 항렬로 보아 시인의 할아버지격이요, 연세로 보면 시인보다 열 한살 위다. 그러나 남산학교를 다닐 때는 소월보다 두 학년이나 아래 반이었다.

어느 해인가 소월은 송하 노인에게 자기의 필명을 소월이라 짓는 것이 어떤가하고 물었다. 송하 노인도 찬성했는데 그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소월은 소산에 뜬 달이라는 말인데 고향 산에 뜬 달로서 언제나 그리운 향토를 지켜보겠다는 뜻이요, 나아가서는 내 나라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런 큰 뜻이 기본을 이루고 󰡐󰡑()자는 희다, 소박하다는 뜻과 바탕 또는 근본이란 뜻으로도 쓰이는데 흰 달과 같이 결백하여 소박하며 근본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소산(素山)의 달밤은 아름다웠다. 산기슭에는 시냇물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소산에 뜬 달처럼 언제나 향토를 지켜보겠다던 김소월은 자신의 고향, 고향사람들에 대한 정에 못이겨 󰡐정 베이는 칼 없고 물베이는 칼 없다󰡑고 써놓은 적이 있다.

이것은 시구가 아니라 중학에 다니던 그가 오래간만에 고향에 들러 친구들과 함께 남산학교에 올라가 칠판에 우연히 써놓은 글이다.

그는 이처럼 그 이름과 함께 평생을 고향과 고향사람들과 한몸으로 살았다.

어느 때인가, 그는 고향에 들르러 온 적이 있었다.

소월을 각별히 사랑하던 노인들은 그가 고민에 쌓여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시냇가로 소월을 불러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소월은 반대로 노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격한 감정이 가슴을 눌러왔다. 그는 즉석에서 빼앗긴 조국을 부르짖으며 압제자를 저주하는 즉흥시를 불렀다. 그런 후 그는 소산이 떠나갈 듯 통곡하였다(이 즉흥시를 외던 노인은 얼마 전 사망했다).

 

시인이여! 그대 이름을

소산에 뜬 달이라 하였으니

내 오늘밤 그대 얼굴을 보는 듯하여라.

그대는 산상에 떠 빙그레 웃고

그대는 여기 관개수에 잠겨

<인제는 내 고향도 좋은 세상이라. >

정다움에 못이겨 출렁이누나.

오오 시인이여 눈물을 걷우라.

󰡐불서럽던󰡑 세상은 그 옛날이오

󰡐허공중에 헤어󰡑졌던 그리운 이름이

그대 고향에도 찾아왔슴에

 

남산봉 일대 공원지대 조성계획

 

󰡒아마 1931년인가 봅니다. 나는 시인을 꼭 한번 만나고 싶어 그가 서울에 들르러 왔다는 소문을 듣고 󰡐조선지광󰡑(朝鮮之光)사 앞에서 그를 만난 일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30여년이 지난 후 내가 사랑하던 시인의 고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곳 관리위원장의 말이다. 시인을 그리워하던 사람들, 시인이 그리워하던 사람들, 그들은 지금 이 땅의 주인이 되어 향토를 아름답게 꾸려나가고 있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라면󰡑하고 시인이 그렇게 갈구하던 이 땅 위에는 얼마나 많은 전변이 일어났는가. 여기 동구 옆에 자리잡은 모판을 보라. 󰡐저마다 외로움의 깊은 근심󰡑에 쌓였던 곳이 이제는 사람마다 즐거움에 가득 찬 얼굴로 파릇이 돋아나는 모판을 가꾸며 좋아라고 법석이다.

얼마나 은혜받은 대지인가. 들에는 해마다 풍년이 든다. 그리고 산에는 배복숭아 나무가 주먹같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사로청원들이 작성한 10개년 전망계획도에 의하면 남산봉 일대는 아름다운 공원지대로 꾸며진다.

동구 밖을 나서니 소월의 둘째 손자 김영보가 뜨락또르를 몰고 간다. 조그마한 보습댈 땅도 없던 우리에게는 이제는 뜨락또르 대군이 마음껏 활개치는 그런 넓은 대지가 차려진 것이다.

우리는 관상리로 가 시인의 소꿉놀이 친구였던 오철청(본명 오철) 할머니를 만났다.

그는 󰡒정식이가 소월인 줄은 해방이 되어서야 알았지󰡓라고 말한다. 오철청 할머니를 찾은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소월과 할머니의 동생 오숙과의 관계를 알고 싶어서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소월의 소꿉놀이 동무인 오숙이 시인의 첫 연인이며 후에 오숙의 죽음을 슬퍼하여 소월이 󰡐초혼󰡑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아, 우리 오숙이가 나보다 두살 아래였는데 그때 열살이 되나마나 했지. 그리고 오숙이는 정식이가 죽기 전에 죽은 게 아니라 전쟁 때 미국놈 폭격에 죽었네.󰡓

이 증언은 󰡐초혼󰡑을 한낱 연정시로 돌려버리려는 부르주아 문인들의 말이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증명해준다. 󰡐초혼󰡑은 잃은 조국을 목타게 부른 애국시인 것이다. 소월은 죽음을 앞두고 고향의 그리운 벗들을 찾아다닌 일이 있다. 그중 하나가 정주군 서호리에 있는 노문희 노인이다. 소월은 그날 노문희 집에서 낮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하룻밤 쉬고 가라는 친구의 만류를 무릅쓰고 저녁 길을 떠났다. 그때 노인은 소월과의 석별을 애석히 여겨 그날 밤 시 한수를 손수 지었다.

 

만류하며 잡은 소매 떨치고 가지 마소.

운종산에 해 저물고 갈 길은 멀고 멀다.

오늘밤 솟는 달을 같이 보면 어떠리.

천태산 높은 봉에 일어나는 저 구름아.

애끓는 이별 눈물 비삼아 배여다가

가시는 님의 발길에 뿌려주면 어떠리.

 

문단과의 관계가 거의 없던 소월이었으나 소박한 고향사람들과는 정분이 두터웠다. 다음의 일화는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구성군 방현 장거리에 시인을 아는 국수장수가 있었다. 소월이 죽은 뒤의 일이다. 사람들은 그 국수집에 와서 소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는데 이 국수장수는 소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만 보면 너무나도 반가워 국수값을 받지 않고 보냈다는 것이다.

소월은 어릴적부터 고향 앞바다를 사랑했다. 그가 교편을 잡았던 곳도 바로 바다를 눈앞에 둔 렴호리였다.

이곳 사립 중신학교에서 소월은 아동교육에 종사하는 한편 본격적인 시 창작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학생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과 어민들의 자제였는데 월사금을 물지 못해 도중에 그만두는 어린아이가 많아 졸업할 때면 78명만 남기 일쑤였다.

 

사립 중신학교 교사직 몸담기도

 

학교는 운영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이어서 새학년도가 되면 선생들이 학생 모집에 나서곤 하였다. 가난한 노인들은 어린 것들을 학교에 보내고 싶었으나 돈이 없었다. 어떤 학부형은 해마다 두달을 기한으로 학교 수리에 동원된 대가로 자녀를 학교에 보내기까지 하였다.

소월은 이러한 가난한 아동들을 동정해서, 바다를 그리워해서 스스로 이 학교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가 바다를 못견디게 그리워한 까닭은 시 󰡐바다󰡑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뛰노는 흰 물결이 일고 또 잦는

붉은 물이 자라는 바다는 어디

고기잡이꾼들이 배 우에 앉아

사랑노래 부르는 바다는 어디

파랗게 좋이 물든 남빛 하늘에

저녁 놀 스러지는 바다는 어디

곳 없이 떠다니는 늙은 물새가

떼를 지어 쫓니는 바다는 어디

건너서서 저편은 딴 나라이라

가고 싶은 그리운 바다는 어디.

 

바다를 지척에 둔 그가 왜 이처럼 바다를 그리워하였을까. 물론 그가 그리워한 바다는 자연 그대로의 바다가 아니다. 그는 자유에의 갈망을 바다에 비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월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정도어업조합󰡑이라는 게 있어 어민들을 혹사하였다. 조합측은 어민들의 안정은 아예 생각지도 않아 풍파만 일면 어부들의 시체가 번번히 포구에 밀려나오곤 하였다.

바닷가에는 󰡐이별암󰡑이라는 바위가 생기기까지 하였는데 그 까닭은 고기잡이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끝에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여인마저 밤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깃든 탓이다.

소월은 이러한 비참한 생활을 가슴아파하며 많은 서정시들로 창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곽산휴양소가 자리잡고 있다. 휴양소가 자리잡은 고미향 언덕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앞에는 무수한 바위가 바닷물에 씻기우고 뒤에는 잔잔한 저수지가 누웠는데 돌 위에는 보트들이 나뭇잎모양 떠 있다.

젊은 소월이 이 언덕에 서서 멀리 아름다운 고향산을 우러러보며 불길 이는 서해 기슭에 뜨거운 마음을 담갔을 것이다.

이 무렵부터 23년동안 소월은 가장 왕성한 창작욕에 불타올라 수십편의 시를 썼다고 한다. 소월은 󰡐이별암󰡑위에 서서 󰡐붉은 조수󰡑(潮水)라는 시를 썼을 것이다.

 

에서 보는 󰡐애국시인󰡑 김소월 행적

 

소월은 불행한 중학시절을 보냈다. 남산학교를 첫자리의 성적으로 졸업하고도 윗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있던 그는 재능을 아깝게 여긴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열다섯살 때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오산중학교에서 소월은 수재로 꼽혔는데 특히 어학수학의 성적이 남달랐다. 19193월의 31 독립운동을 맞은 것은 그가 3학년 때였다.

당시 오산에서 계산에 이르는 가도에는 수많은 시위군중이 노도와 같이 밀려들었다.

당시 동문회(동창회) 회장이었던 정식은 학생 중에서도 지도적 위치에 서서 시위대열에 참가하였다. 정주에 있던 경찰대는 급거 오산으로 출동하였고 가슴에 전단을 품고 시위의 선두에 섰던 소월은 붙잡혀 수색당하였으나 눈치빠른 그는 그 전단물을 감쪽같이 감추어 그들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오산학교의 중심인물이었던 그는 계속 놈들의 추격을 받았다. 그는 정주군 서호리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31 독립운동은 실패했다.

그가 오산학교에 나타났을 때는 사랑하던 학교는 불탄 자리만 거멓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소월은 눈물을 머금고 배재학교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몇해 후 그는 단편소설 󰡐함박눈󰡑을 창작하였다. 󰡐함박눈󰡑에는 31 독립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조국을 찾기 위해 고뇌하는 시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소월이 일본에서 돌아온 것은 학비 탓도 있었지만 일제의 민족차별 정책에 분개해서였다(소월의 귀국은 당시 관동대지진으로 놀란 가족들의 호출 때문이다). 고향에 내려온 그를 보고 사람들은 금융조합에서 일보는 것이 어떤가하고 물었다. 그러나 소월이 일제 어용기관에 근무할 리 없었다.

그는 구성군 방현에 와서 󰡐운동회󰡑라는 신문기사를 썼는데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은 그때부터 소월 선생으로 존경했다. 소월은 지방소식들과 함께 관리들의 협잡사건과 경찰들의 폭행사실도 써보내곤 하여 일제 관헌의 미움을 받았다.

그는 서울에 있는 부르주아 문단을 얼치기 문사들이라고 가끔 불렀다.

죽기 얼마 전 소월을 찾은 한 청년이 당시의 문단에 대한 시인의 견해를 알고 싶어 우선 이광수의 소설에 대해 물었다. 그는 몹시 신경질적으로 󰡐이광수의 글은 글이 아니다󰡑라고 딱 잘라 밝혔다.

청년은 소월이 소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광수주요한김동환 등 삼인시집에 대해 이야기하였더니 󰡐도대체 그 글들은 시가 아니며 백해무익한 글들이라󰡑고 말하였다. 청년은 마지막으로 소월의 스승이라고 자처한 김안서에 대해 물었는데 󰡐번역이나 하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누구를 두고 비난하기를 싫어하던 그였지만 그 당시의 문단을 두고는 늘 이렇게 비난하곤 했다.

김소월은 시인이자 농민이었다. 소월은 이 땅이 우리의 손으로 아름다워질 그날을 기다리며 처갓집 땅을 부치면서 7년동안 방현리에서 보냈다. 그는 부지런한 농민이며 땅을 귀중히 여긴 사람이었다. 그는 이 지방에 처음으로 고구마와 유자를 도입한 사람이었다. 농민들의 동정자에서 스스로 호미를 들고 논과 밭에 나섰던 것이다. 처가와 그 사이도 땅을 준 사람과 땅을 부치는 사람으로 갈라져 소월은 장인과의 거래는 거의 끊어진 상태가 되었다. 불과 몇 발자국 사이를 두고 있는 처갓집이었지만 자신뿐만 아니라 아이들마저 외가에 가는 것을 엄금하였다.

그 대신 농군들과의 관계는 빈번하였다. 당시 억울하게 차압을 당할 뻔한 홍필도 노인은 󰡒소월이는 우리 농군들 일이라면 작두날에도 올라설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1932년 수리조합이 생기면서 전국 도처에서 사람들이 고용되어왔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시인과 친교를 맺었는데 오늘 이 마을에 있는 차성관씨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되니 주재소와 그의 끄나플들의 감시는 더욱 심해 갔다. 면주재소는 수로계획도에 시인의 집을 그려넣고 집을 몽땅 헐어버리려고까지 하였다. 의분을 참지 못한 그는 시로 그 아픔을 노래했던 것이다.

그의 스승으로 자처한 김안서로부터 혹독한 평을 받고 반송되어온 시를 보고 붓을 꺾은 적은 있으나 시인으로서 자기의 사명을 다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선진적인 노동운동과 그 사상을 체득치 못하였던 소월은 날이 갈수록 고민만 커갔다.

 

일본경찰 폭압에 자살 결심

 

이 무렵 경찰의 폭압은 더욱 극심하였다. 그의 반항과 고통은 이에 비례하여 더욱 커갔다. 소월은 심지어 해외로 갈 것까지 생각했다. 5남매의 아버지가 돼 있던 소월은 가족들을 버리고 망명할 수는 없었다. 1934년 구성군 경찰서의 호출을 받았다. 경찰서에서 돌아온 시인은 이런 말을 아내에게 남겼다.

󰡒참 이런 수모를 다 겪으면서 살아 무엇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렇지 않으면 만주로 가야겠는데. 여보, 당신은 아이들을 데리고 살겠소?󰡓

다음날 아침이었다. 부인 홍실단은 의외의 변고에 억장이 막혔다.

시인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이미 숨을 거둔 것이었다. 부인은 시인의 베개 밑에서 흰 종이 봉지를 발견하였다. 그날 밤 시인은 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소월의 사망에 대해서는 자살설자연사설 등 최근까지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지금 북한의 󰡒문학신문󰡓에서도 󰡐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하나 당시 󰡒조선일보󰡓 19341227일자에 보도된 소월의 사망에 대해서는 󰡐뇌일혈로 사망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 󰡐청년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 별세: -方峴- 일찌기 󰡐진달래꽃󰡑이라는 시집을 발행하여 우리 시단에 이채를 나타내이던 재질이 비상튼 청년시인 소월 김정식씨가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바 지난 이십사일 아침에 뇌일혈로 급작히 별세하여 유족들의 애통하는 모양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이밖에도 김억은 󰡒여성󰡓잡지(19396월호)에서 시인 백석과의 󰡐소월의 생애󰡑라는 대담기사를 남기고 있는데 소월은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소월은 그렇게 죽었다. 그를 천재로 만든 것은 그의 남다른 감수성, 그의 시를 낳은 아름다운 고향이 있어서만이 아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뜨겁고 뜨거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월의 고향 남산봉에는 조선작가동맹원 일동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여 있다.

󰡐김소월, 그대의 주옥같은 노래는 인민들의 가슴에 자랑 높이 울리고 향토와 인민에게 바친 애국정신은 조국만년에 빛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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