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구락부 전말기(1959)
-최인훈-
● 인물의 성격
◆ 현 : 주인공. 한 때는 독서에 몰두하기도 했으나 미래에 대한 뚜렷한 전망도 없이 그레이 구락부를 들락거리는 허무주의자.
◆ 키티 : 현의 권유로 그레이 구락부에 가입하는 유일한 여성 회원.
◆ K : 현의 친구로 화가다. 현이 그레이 구락부에 가입하도록 추천함.
◆ M : 음악광. 자기 집을 그레이 구락부의 본부로 선뜻 희사한 인물임.
◆ C : 당돌한 인물
● 이해와 감상
◆ 회색(그레이)이 상징하는 의미는?
회색의 상징적 의미는 일반적으로 회의주의다. 그래서 어떤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회색 분자라고도 한다. 이 작품에도 바로 그 회색을 자기의 빛깔로 가진 여러 명의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겉보기를 믿지 않는다. 대신 한동안 바깥의 거리와 발을 끊은 채 구락부의 창문을 통해서만 바깥을 응시할 뿐이다.
이런 그들이 그들의 상징으로 삼는 것은 잿빛의 저녁놀 속에서만 눈을 뜨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다. 원래 이 부엉이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해서야 날개를 편다는 말의 의미는, 철학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하여 그 대상을 완전한 의식으로 드높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은 그 말의 뜻을, 움직임을 마다한 채 세상을 바라보는 슬기로움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슬기로움으로 '동지 간에 서로 내적인 유대 감정을 이어가고 순수의 나라에 산다는 느낌'을 이어가고자 한다. 만약 누군가가 밖으로 자신들의 일에 관한 이야기를 흘릴 때에는 그를 정신적인 암살의 대상으로 삼아 속물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절교를 선언하는 것이 그들의 규칙이다.
곧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혼탁한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창문 안에 갇히려고만 한다는 점에서 다소 어둡고 현실도피적이며, 뚜렷한 목표를 가지지 못한 채 순수한 감정에만 충실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폐쇄적이라고 할 수 있다.
● 핵심사항 정리
◆ 갈래 : 현대, 단편소설 - 관념적, 사색적, 현실비판적
◆ 배경
* 1950년대 말의 어느 도시
* 전후의 허무주의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외부의 서술자가 특정 인물의 시각에서 서술해 나감.)
◆ 표현상 특징
* 난해함, 혼란스러움, 방황, 소외 등을 형상화하여 1950년대 후반의 답답하고 어두운 시대상을 반영함.
◆ 주제 ⇒ 폐쇄된 공간 속에서 자유를 추구하려는 허무주의적 젊은이들의 고뇌와 방황
● 더 읽을거리
◆ 우화(羽化)를 꿈꾸는 현자들의 밀실사(密室史)
- 최인훈의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론
<1>
작가란 어떤 형식으로든지 그 시대의 모습을 담을 수밖에 없고, 때로는 담아야 하는 당위성을 가진다. 당대의 기록자로서 혹은 당대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바퀴의 한 축으로서 작가는 존재하여야 한다. 작가의 눈을 통해 그 사회는 읽혀지고, 그 작가가 보는 눈을 통해서 결국 작가 자신도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고진하의 시집 『프란체스코의 새들』중 「自序」부분)
이렇듯 기록으로 후대에 남겨지는 그 시대 '사초(史草)'로서의 문학은 치열할 수밖에 없고, 그의 작품에 쏟아지는 무수한 화살들은 비판이든 찬사든 그의 몫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상을 보았던 자신의 눈으로 결국 자신의 값도 매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 최인훈에게 쏟아지는 비판과 찬사의 극명한 대조는 의외인 부분도 있으나 어쩔 수 없는 작가의 운명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소설을 두고 '너무 난해하다', '관념적이다', '지적 유희에 치우쳐 있다', '문제의 본질을 비켜서 지엽적인 것에 천착했다'는 등의 평을 하지만 그가 헤쳐 나와야 했던 5~60년대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 '어지럽고' '난해'할 수밖에 없으며 '본질과 부차'가 가려질 만큼 정리가 되지 않았던 탓이 더 큰 이유이다. 그의 60년대 발표되었던 대부분의 소설들이 관념적이며 에세이처럼 교술적이었다면 그의 첫 출발선은 바로 '59년 『자유문학』지에 추천받아 데뷔하였던 「그레이구락부전말기」에서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도 않은 50년대 후반, 꿈도 낭만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채, 그들의 사고는 관념적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적당히 시기가 무르익으면 날갯짓을 꾀하고자 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아니라, 밝음의 대로에서 쫓겨 들어와 어두운 동굴의 천장에서 아래를 굽어보며 자아도취하여 희열을 느끼는 '박쥐'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바로 「그레이 구락부」가 탄생하게 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다. 당당하게 모여서 생각을 주고받는 사교의 장이 아닌, 비밀 결사의 '어두운 거리'가 그들의 통행로였다.
<2>
세상은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겐 결코 열린 공간이 아니었다. '밀실'과 '광장'이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 밀실의 연장이 광장이요, 광장의 끝이 밀실이던 시대 ―― 정신 없이 돌다가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미로이거나, 모든 공간을 안팎으로 이분하여 버리는 단일 폐곡선의 닫힌 내부에 그들의 세계가 있었다. '한동안 거리에서 발을 끊어보는 게 어떨까 해서' 만들게 된 '현자의 모임'인 '그레이 구락부'는 '현실과의 쓸데없는 부대낌'을 피하고자 하는 그들의 고육지책이었으며 동시에 유일한 폐쇄회로의 탈출구였던 셈이다.
비밀 결사란 사전적 해석에 의하면 '가입자 이외의 사람에 대하여는 조직 · 목적 따위를 비밀로 하는 단체'라고 되어 있다. 그들이 만든 비밀 결사 ― 현자의 모임 ― 는 거대한 사회의 비밀스런 구조 안에 또 다른 부분집합으로서의 세포조직일 뿐 자신들이 숨쉬는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을 수 있는 '대안 있는 모임'일 수는 애당초 못 되었다.
비밀 결사? 오라, 어두운 등잔불 밑의 숨은 모임. 문간에는 피스톨 든 망보기. 어두운 거리. 뒤따르는 밀정. 모퉁이. 쓰러지는 그림자. 브라보! 좋아. 비밀 결사란 말이 영 멋있어. 우리의 비밀 결사를 위해 한 잔!
친구 K의 제의를 받은 주인공 현이 그들의 모임에 보인 반응이다. 모두가 첩자이면서 어느 누구도 첩자가 아닌 그 시대에 그들만이 꿈꾼 '금지된 장난'이었다.
'분단의 시대'는 결국 '전쟁의 시대'를 의미한다. 전쟁의 시대에서의 주역은 적군과 아군이다. 또한 전쟁의 속성은 승리이다. 모든 인간은 적과 동지로만 구분될 뿐 적도 동지도 아닌 제3의 그룹은 없다. 항시 이분법의 구도 안에서는 제3의 위치라는 것은 의혹의 대상이며 불온이다. 따라서 '승리'라는 우상의 숭배를 위해서라면 어떤 대상이든 제거할 논리와 대의명분을 갖고 있는 셈이다.
결국 이 시대는 '혐의의 시대'이고 '체포의 시대'이다. 사방이 꽉 막힌 경찰서의 취조실에서 모든 죄는 만들어지고 벌은 죄와 분리된 채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던 시대이다. 취조실에서 운명이 결정될 수밖에 없던 시절의 이야기가 최인훈 소설의 원형질이다. 그의 작품에서 취조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취조실은 조용한 공간이다. 그곳은 모든 혐의를 씌우는 공간이면서 또한 혐의를 벗는 공간이다.
현자들――그레이 구락부――의 공간이 '창'이 있음으로서 존재 이유가 있었다면 취조실에는 밖을 볼 수 있는 창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창이 있는 공간에서 '꿈'을 꿀 수 있고 그들만의 순수함으로 마음껏 평화로울 수 있다면, 창이 없는 공간――취조실――에서는 모든 꿈이 깨어져야 했고 그들의 순수는 화장이 뭉그러진 늙은 창녀의 얼굴처럼 추한 얼룩의 맨살을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슬기 있는 이는 역사가 하루의 움직임을 뉘우치며 참회의 계단에 엎드리는 잿빛 노을을 이끕니다. 우리는 잿빛을 사랑하는 자로 나섭니다. 어찌하여 속물들은 '치기'를 그리도 두려워 합니까? 우리는 분명한 마음으로 외칩니다. 우리는 움직임을 마다한다고. 잿빛 저녁놀 속에서만 슬기의 새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눈을 뜹니다. 이는 우리의 상징입니다. 우리의 강령은 심령적인 것입니다. '동지 서로 사이에 내적인 유대 감정을 이어가고 순수의 나라에 산다는 느낌을 이어간다.'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움직임(행동, 실천)이 막혀 버린 세계에서 그들은 움직임을 거부한다. 움직임이 멈추어진 세계는 이미 '창조가 끝'난 세계인 것이고, 더 이상 창조될 수 없는 세계에서는 지루한 되풀이만 남는다고 본 것이다. 낮이 행동의 시작이고 창조의 시간이라면, 밤은 행동이 정지된 시간이고 모든 의식이 안으로 잦아들어 '시간의 아지랑이'가 걷히고 '역사의 알몸'을 보는 '슬기로운' 시간이다. 그들의 행동이 시작되는 잿빛의 저녁놀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눈을 뜨고, 밤(혼돈된 시대)이 깊어 갈수록 부엉이의 눈은 맑아만 간다.
'동지 서로 사이에 내적인 유대 감정'을 이어서 건설한 창 밖의 현실을 멀리 관조할 수 있는, 팔 조짜리 방의 '순수의 나라'는 한 여자에게 쏠리는 사랑의 밀물을 이기지 못하여 파국을 맞게 되고, 충성심을 잃어 버린 배반자는 스스로 모반의 괴수를 꿈꾸며 해체의 명분을 찾는다. 한 번 기울어지기 시작한 '신기루의 나라'는 급속하게 와해되어 더 이상 슬기로운 '미네르바의 부엉이'의 안식처가 아니었다. 키티와 함께 탈출을 꿈꾸는 순간 부엉이의 날카로운 발톱에 상처를 입고, 잠든 키티의 얼굴을 보며 비로소 한 남자로 태어나게 된다.
현은 키티의 잠든 얼굴에서 비로소 이성을 앓아 보았다. 지금껏 현에게 있어서 키티는 이성이라기보다 재주 있는 사람이었다. 그 재주가 키티가 끄는 힘이었다. 크리스마스 날 그녀와 입술을 맞추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현의 수에 골탕먹고 이렇게 남의 집 소파에서 잠든 키티는 그저 여자였다. 그리고 현 자신도 그저 남자인 것을, 그저 사람인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아름답고 신비하지만 그것만을 쓰고 있을 수 없는 탈을 인제는 벗어야 할 것 아니냐, 현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현자도, 철인도, 공주도 아닌 그저 사람, 얼마나 좋은가, 더 멋있다.)
그들의 순수를 키우고 '꿈과 이상의 나라'를 세우려던 비밀결사는 결국 '무능한 소인들의 만화, 호언장담하는 과대망상증의 소굴'이었으며 '남자답지 못한 잔신경, 여자 하나를 편안히 숨쉬게 하지 못하는 봉건성'을 버리지 못한 채, 아니러니컬하게도 경찰서 취조실에서 그들의 입으로 추한 맨살의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우린 그저 모여서 철학이나 문학에 대한 잡담을 하고 소일한다는 것 뿐, 집이 너르고 하여 같은 집에서 자주 만났다는데 지나지 않고, 무슨 목적이 있었다든가 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현의 마음에서는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이 복받쳐 올라 왔다. 이게 우리의 그레이 구락부에 대한 내 입에서 나온 풀이란 말인가?
형사의 다그침에 어쩔 수 없이 뱉은 말이긴 하여도 이 답변 속에는 온갖 수식어로 미화시킨 그들의 '현자의 모임'의 실체가 드러나 보인 것임에 틀림없다.
젊은이들의 지적 방황은 그들만의 오붓한 공간에서 잠재우지도 못하고 사랑을 통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키티' 때문에 '현자의 모임'이 파산되었던 것이 아니라, 키티로 인하여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언젠가는 그들은 그 공간에서 우화(羽化)하여 고치를 뚫고 나와야 하는데, 그 촉매 작용을 그녀가 한 셈이다. 어두운 시대, 폐쇄된 공간 안에서 사랑만이 구원이라는 사실을 또다시 확인시켜 주는 명편이었다.
<3>
최인훈의 소설에는 예외없이 '소외자로서의 지식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눈을 통해서 세상은 읽혀지고, 그들의 눈으로 편집된 세상을 독자들은 읽는다. 이런 반복은 결국 거듭되는 굴절과 왜곡에 의하여 최초의 상을 알아볼 수 없게 된 채, 요령부득한 상태에서 최인훈의 소설들은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난해함, 혼란스러움, 방황, 소외, 이상에의 집착――이것들은 그 시대를 가장 아프게 살아가는 작가가 온몸으로 형상화시킨 그 시대의 풍속도인 셈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유로 최인훈의 고통스런 소묘를 깊은 경외감으로 감상할 의무가 있다. 그의 눈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우리의 모습도 비추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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