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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소설 줄거리/해설]나목(1970)-박완서-

by 휴리스틱31 2021.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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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1970)

-박완서- 

 

● 줄거리

 

주인공 이경은 6 · 25 전쟁 중 서울 명동의 미8군  PX의 초상화부에 근무한다. 그녀는 자기 때문에 두 오빠가 폭격으로 죽었다는 죄의식과 동시에 두 아들을 잃고 망연자실한 상태로 살고 있는 어머니와 암울한 집안 분위기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최 사장은 우람하고 큰 중년의 사나이, 옥희도를 데려온다. 그러나 새로 온 옥희도는 환쟁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환쟁이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 각자의 수입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환쟁이들이 서로 잡담하며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옥희도는 다른 환쟁이들과는 조금이라도 달랐으면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황량한 풍경이 담긴 눈을 가진 옥희도에게 마음이 끌린다.

 

 

어느 날 갑자기 다이아나 김이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다. 그러나 옥희도가 그린 초상화를 본 다이아나는 심하게 빈정거린다. 옥희도는 스카프에 그린 초상화를 뺏어 아무렇게나 구겨 뭉갠다. 이경은 옥희도를 기쁘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중에 그림값을 받아 옥희도에게 주나 다이아나에게 모멸을 받았을 때보다 한층 깊이 상심하는 그의 모습에서 이경은 당혹해 한다. 옥희도의 제의로 저녁 식사를 한 그들은 명동 거리와 장난감 침팬지가 술을 따라 마시는 완구점 사이를 거닐며 서로의 고독을 느낀다.

 

그 다음날부터 옥희도는 감기 몸살로 인하여 결근하였고, 왜 결근하는지 모르는 이경은 PX 전공(電工) 태수와 함께 옥희도를 찾아간다. 거기서 옥희도의 부인을 보고 호감을 갖는 자기에게 화가 나 곧 돌아오게 된다.

해가 1952년으로 바뀌고 이경이 21세가 되었다. 새해 첫날 이경은 재작년 설빔이었던 한복을 입고 태수를 만나러 나갔다. 그러나 이경은 태수에게 별다른 느낌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곧 그의 집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도중 태수에 대한 연민을 느끼고, 그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은 베풀고 싶어하게 된다.

 

새해 들어 옥희도는 병이 나았는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옥희도는 가끔 기침을 했으나 저번에 문병 갔을 때보다는 가벼운 편이었다. 옥희도는 다른 환쟁이들과 같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경과 옥희도는 우연히 예전의 그 장난감 가게에서 만났다. 그리고 옥희도와 이경은 아무런 약속도 안 했으면서 매일 밤 어김없이 침팬지 앞에서 만나게 된다.

 

 

어느 날 태수는 형님과 형수님에게 색시감이 있다며 소개시켜 준다고 하고는 이경과 같이 나간다. 서로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 태수 형님이 옥희도의 오랜 친구였다는 사실이 생각나자 거북해진 이경은 곧 일어서서 그 자리를 나온다. 이경은 태수와 팔짱을 꼈을 뿐, 서로의 마음이 화음을 이룬 적이 없는 사이라는 것에는 전혀 변화가 없음을 느낀다.

 

이경과 옥희도는 매일 완구점 앞에서 그들의 '함께 있음'을 즐겼다. 그리고 이경은 옥희도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지만, 옥희도는 어울리는 사이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이보다는 어울리는 사이가 더 축복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며, 태수와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옥희도는 진짜 화가가 되고 싶다고, 미치도록 그리고 싶다며 말하고는 며칠동안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경에게 말한다.

 

이경은 PX에 나오지 않는 옥희도를 찾아간다. 그녀는 옥희도의 집, 캔버스 위에서 하나의 나무를 보았다. 거의 무채색의 불투명한 화면에 꽃도 열매도 잎도 없는 참담한 모습의 고목이 서 있었다. 화면 전체가 흑백의 농담으로 마치 모자이크처럼 오톨도톨 질감을 주는 게 이채로울 뿐 하늘도 땅도 없는 뿌연 혼돈 속에 고목이 괴물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이경은 옥희도의 부인에게 화가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달음질쳐 빠져 나온다. 이경은 옥희도가 불투명한 공간에서 죽어가는 고목을 그리게 된 것을 그가 그 모든 것에 심한 기갈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경은 얼마 전 알 게 된 GI의 기갈을 도울 수는 있어도 옥희도의 기갈을 도울 수는 없음을 서글프게 깨닫는다.

 

자신이 어떻게 되든 옥희도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 옥희도가 자신과 더 가까이 있었다면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변명이 더 소중하다고 느낀 이경은 GI와 약속한 호텔에 들어가지만 핏빛으로 물들어 보이는 시트를 보고, 혁과 욱이 오빠처럼, 시트를 붉게 물들이며 참담하고 추악하게 조각이 날 것 같아 도망쳐 나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혁이 오빠와 욱이 오빠가 죽은 기억이 다시 선명하게 되살아난 그녀는 문득 집으로 가기가 싫어진다. 그녀는 옥희도의 부인을 생각하고 그녀에게 푹 안기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그리고는 옥희도의 집으로 가서는 잠을 청한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어머니가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룻밤이 지나도 어머니의 상태가 좋아지지 않자 그녀는 의사를 데리고 왔다. 진찰을 마친 의사는 상당히 위독한 상태라고 말하고, 처방을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곧 죽게 된다.

 

태수의 형수님은 이경의 모친상을 자신의 일인 양 도와주려 애를 쓰고, 태수와 결혼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경은 태수에게 우리는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일 뿐이라고 말하고 옥희도와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한다. 또한 옥희도 역시 이를 인정한다. 태수는 아연해 하고, 옥희도는 이경에게 아버지와 오빠의 환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라고 이야기를 하며 떠난다. 그리고 얼마 후 태수와 이경은 결혼을 한다.

 

세월이 흘러 이경과 태수는 두 아이와 함게 살아간다. 어느 날 신문에서 고(故) 옥희도 유작전의 기사를 읽고 태수와 함께 유작전에 간다. 거기서 이경은, 지난날 옥희도가 그리고 있던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이 지금의 자신에게는 고목이 아니라 나목(裸木)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인물의 성격

 

 이 경 → 전쟁통에 죽은 두 오빠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는 죄책감과, 두 아들에 대한 회상 속에서만 살아가는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고독한 인물

 어머니 → 전쟁 중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그 후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과거의 시간 즉, 6 · 25라는 전쟁의 시공간에 그녀의 삶은 정지되어 있다.

 옥희도 →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 먹고 살지만 진정한 화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

 황태수 → 평범한 사람. 이경을 정말로 좋아하여 긴 구애 끝에 결혼하게 됨.

 

 

● 구성 단계

 

 발단 : 미군 PX의 초상화부에서 일하게 되는 이경

 전개 : 이경과 옥희도의 만남

 위기 : 옥희도에 대한 이경의 사랑

 절정 : 이경 어머니의 죽음과 옥희도의 떠남

 결말 : 옥희도의 유작전

 

● 이해와 감상

 

 1970년에 발표된 박완서의 처녀작인 「나목」은 자신의 체험을 배경으로 한 소설로 전체가  1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51년에서 1952년에 걸치는 겨울을 시간적 배경으로 UN군에 의해 재수복되긴 하지만 아직 환도는 이루어지지 않은 서울을 배경으로 청춘의 성숙 과정과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 위한 길을 교차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을 살아가야 했던 때에 인간다움 혹은 가치를 실현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목」에서 전쟁은 단순한 소재적 차원의 배경이 아닌 작품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여러 인물들의 성격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다. 즉 두 오빠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면서 그로 인해 경아네 집안사정이 속속들이 밝혀지면서 어머니의 존재는 상징적인 인물로서 작품 흐름에 한 축을 형성한다. 전쟁 중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그 후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과거의 시간, 즉 6 · 25라는 전쟁의 시 · 공간에 그녀의 삶은 정지되어있다. 폭격으로 두 아들을 잃고 난 후 "어쩌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들들은 몽땅 잡아가시고 계집애만 남겨놓셨노." 라는 어머니의 말은 주인공 경아에게 자신이 오빠들을 죽게 한 장본인이라는 피해의식을 심어주게된다. 결국 경아와 오빠들의 죽음 사이엔 단지 우연일 뿐이었을 사건이 어머니라는 존재가 매개됨으로써 전쟁으로 인한 피해의식이 주인공에게 직접적으로 미치게 된다.

 

 

 이 작품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시각적 심상이 있다. 그것은 '부우연' 휘장, '부우연' 캔버스와 같은 '부우옇다'는 심상이다. 이것은 이경이 옥희도의 눈에서 본 '황량한 풍경의 일각 같은 것'과 같은 심상이다. 외부의 세계가 부옇게 보이는 것은 '자신의 눈에 무엇이 덮여 그렇게 보이는 것'과 '정말로 외부의 세계가 부우옇다'라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여기서 나타난 '부우연'의 의미는 인물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생각들이,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를 부옇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경은 옥희도가 그리던 그림을 죽어 버린 나무, 생명력을 상실한 나무로 보았고, 후에 가정을 가지고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후, 똑같은 그림을 통해 겨울 한 철을 이겨내고 있는 나목이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청춘의 성숙 과정을 다룬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우선 이 소설의 화자이면서 귀엽고 당돌하면서 섬세한 감성을 소유한 이경(경아), 가난하고 불우한 화가로 등장하면서 진실을 꿰뚫어 보는 예술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과묵한 성격의 옥희도, 항상 자상하면서 밝고 착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평범한 남자 태수, 그리고 남편을 여의고 전쟁의 와중에서 두 아들을 잃고 그 충격으로 죽어있는 삶의 상태를 살아가는 어머니와 현역 국군 중령으로써 삶을 냉철하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촌오빠 이진(진이 오빠), 미군부대에서 매춘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하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다이아나 김이 그들이다. 그들은 이 소설의 작중화자인 이진의 시점과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전쟁이라는 이 작품의 주요한 시공간적 배경 속에서 전쟁으로 인한 아픔을 공유하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불안, 피해의식을 극복하려 하거나 혹은 제압 당한다. 결국 그들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근본적인 층위에는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에서 등장하는 ‘환부를 모르는 아픔’처럼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존재한다. 곧 그들에게 있어서의 전쟁은 어느 날 우연히 포성의 굉음과 함께 날아든 핏빛의 절망스런 기억, 즉 불행과 시련의 시작인 것이다.

 

 나무는 우주를 상징하는 바, 그것은 조화, 성장, 증식, 생성과 재생의 과정을 의미한다. 또한 나무는 끊임없이 지속되는 생명을 상징하고, 따라서 불멸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들로 등가의 관계에 놓인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죽음이 없는 생명'이라는 개념은 존재론적 측면에서 '절대적인 현실'을 의미하며, 가지가 하늘을 향한다는 점에서 상부 지향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성장과 반전, 곧 끊임없는 생명 과정이라는 의미를 토대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선과 악이라는 지식을 표상하는 나무보다는 '생명의 나무'와 '죽음의 나무'가 있다. 또한 뿌리가 물질의 수준에 있다면 줄기와 잎은 정신의 수준으로 하늘에 존재한다. 이는 다시 말해 모든 물질적 성장 과정은 정신적 세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성서에서도 불멸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나무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이 나무는 바다 밑에 있다는 불멸의 우물처럼 혹은 괴물처럼 숨겨져 있거나 혹은 헤스페리데스의 황금 사과처럼 숨겨져 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곳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에 항시 정정할 수 있는 나무'라고 노래한 유치환의 경우를 상기해 보며, 작품 '나목'에서의 '고목'과 '나목'의 의미를 희망을 지닌 것과 아닌 것으로 구분하여 보면 작중의 주인공이 가졌던 깨달음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 핵심사항 정리

 

 갈래 : 장편소설, 전후소설, 성장소설, 세태소설

 

 배경

* 시간적 → 전쟁 중

* 공간적 → 명동의 미군 PX 초상화부와 서울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특징

* 순행적 구성

* 논리적인 서술형의 호흡이 긴 문체

* 체험적이고 시대증언적인 성격

 

 제목의 의미 : 전쟁으로 인해 정신적, 물질적으로 헐벗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우리 민족의 모습

 주제  청춘의 성숙 과정과 진정한 예술가의 길

◆ 출전 : 『여성동아』(1970)

 

 

● 생각해 볼 문제

 

1. 옥희도는 화가 박수근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특히 주목하고 있는 것은 그의 삶의 어떠한 면인지 생각해 보자.

→ 힘들게 전쟁을 겪고 생계를 유지했던 박수근은 삶의 힘겨움을 탓하지 않고 무던히 살아가는 서민들의 마음을 그렸다. 즉 고난한 삶 속에서도 예술적인 가치를 찾고자 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화두를 던져주고자 했던 것이다.  

 

2. 술 먹는 침팬지 앞에 이경과 옥희도가 함께 모이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보자.

→ 이경과 옥희도가 술 먹는 침팬지 앞에 모이는 것은 그들이 서로의 아픔과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무런 자신의 정체성 없이 공허한 외국의 언어로 떠들면서 하루를 보내는 이경이나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살리며 즐겁게 살지 못하고 미국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살아야 하는 그들의 기계적이며, 수동적, 반복적인 삶을 술을 먹는 침패치가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그러한 침패치를, 그리고 그 침패치를 웃으며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애틋한 자기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다.

 

3. 옥희도가 그리는 그림이 애당초 이경에게 고목으로 보인 까닭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 스스로의 삶에 힘들었기 때문이다. 즉 본질적인 삶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현실의 고달픈 삶에 지친 이경은 그것을 단순히 죽어있는 고목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옥희도를 사랑하고 그의 아픔과 상처를 공감하게 되면서 그것이 나목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즉 현실은 암울하지만 봄의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나목, 후에 이경은 그 나목을 보게 된다.

 

4. '나목'과 '고목'의 차이는 무엇인가?

→'고목'은 생명력을 상실한 채 말라죽은 나무로서 미래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목'은 봄을 기다리며 겨울의 추위를 맨몸으로 이겨내고 있는 나무라는 점에서 절망적 현실을 오히려 온몸으로 맞서는 삶의 태도를 상징함.

 

 

● 더 읽을거리

 

◆ '나목'의 구성상의 특징 / 복합적 갈등 구조

이 작품은 이경과 옥희도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 사회의 복잡한 갈등 양상을 담고 있다.

옥희도에 대한 이경의 사랑은 아버지와 오빠 즉, 남성들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어머니와 딸, 즉 여성들의 관계가 깊은 갈등 상태에 빠지고 있다.

극한적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모습을 통해 전쟁이라는 사회적 환경과 인간 사이의 갈등도 발견할 수 있다. 부수적으로 초상화를 주문하는 미군들과 한국인들과의 민족적 갈등도 나타난다.

 

◆ '나목'의 상징성

예술가의 삶과 관련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예술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고, 자기 고유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예술혼을 상징한다.
인물과 관련 민족사의 혼란기에도 미래의 소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강인한 의지를 반영한다.
시대적 상황과 관련 전쟁으로 인해 정신적, 물질적으로 헐벗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민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내용과 관련 옥희도의 삶을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던 '나'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원형상징성 '나무'는 생명, 지혜와 관련된 원형 상징성을 지닌다. '나목' 역시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생명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 문학과 미술의 영향 관계

예로부터 문학과 미술은 깊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다. 미술은 문학의 주제에서 영감을 끌어내었고, 문학은 미술의 이미지를 문학에 형상화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 작품 역시 박수근의 실제 그림에 작가의 체험과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박수근과 박완서는 6 · 25 전쟁 이후 미군 부대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는데, '나목'은 그 때의 경험과 박수근의 그림에서 얻은 영감으로 창작된 작품이다. 즉 작가는 미술 작품 속에 숨겨진 의미를 발굴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박수근과 박완서의 `나목`(굿굿하고 정직한 삶) [문화일보<푸른광광>2002.5.9]

“그럼 도대체 왜 부인을 버렸단 말입니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잘 나가는 증권중개인이었던 찰스 스트릭랜드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홀연히 떠난다. 불혹의 나이 40에. ‘달과 6펜스’에서 서머싯 몸은 폴 고갱의 삶과 예술을 이렇게 극적으로 재현했다. 그림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타이티로  찰스 스트릭랜드, 즉 폴 고갱은 그곳에서 불후의 명작들을 남기고 생을 마친다. 그는 천재가 갖추어야 할 예술적 성취와 비극적 삶이라는 극적 요소들을 두루 갖춘 매력적인 인물이다. 고갱으로 인해 몸의 ‘달과 6펜스’가 더 읽혔는지, 아니면 뛰어난 문체를 자랑하는 몸의 책으로 인해 고갱이 더 많이 알려졌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둘이 상호 보완적으로 다른 하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시너지 효과가 있다는 것. 미술과 문학은 서로 그리 멀지 않은 상호 보완적 존재이니까.

고갱 하면 박수근(1914~1965)이 떠오르는 것은 순전히 취향의 문제일까?(물론 박수근 하면 반대로 고갱이 떠오른다). 원근이나 명암 등의 회화 규칙들을 무시하고 평면성을 추구한 것, 향토적 서정성을 극대화한 것, 사조를 무시하고 고집불통 외길을 간 것 등 공통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평가와 분석은 전문가에게 맡기자. 그들이 한 짝으로 기억되는 다른 이유는 고갱에게 ‘달과 6펜스’가 있듯이 박수근에게는 박완서의 ‘나목(裸木)’이 있기 때문이리라.

 

우리 시대의 걸출한 글쟁이 박완서가 ‘본시가 환쟁이’인 박수근을 만난 것은 6·25 전란 중 미군부대의 초상화부에서였다. 스무살 적의 이 운명적 만남은 다시 스무해가 지난 후에도 박완서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찰스 스트릭랜드처럼, 나이 40에, 어쩌면 평범한 주부였던, 그러나 강렬한 창조의 힘에 저항력을 잃고 만 박완서를 문단으로 내밀었고, 마침내 ‘나목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나목 감명깊게 읽은 사람이 박수근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박수근을 좋아하면서 ‘나목 진한 감동을 느끼지 못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나목으로 해서 박수근이 더 좋아지고, 박수근으로 인해 박완서의 글을 읽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내가 사람이 아니란 것보다 화가가 아닌 것이 더 두려워. 화가가 아닌 난 무엇일 수 있을까?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어.” ‘나목 주인공 옥희도는 이렇게 말한다. 본시부터 환쟁이인 박수근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지극히 평범한 견해”를 갖고 우리의 참모습들을 그려냈다.

기름기 없는 투박한 유화를 덧칠하여 우툴두툴한 화강암 질감을 내고, 그 위에 그림을 새겨 넣은 회백색 화폭은 첫눈에도 낯설지 않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화강암 때문일까. “나는 우리나라의 석탑과 석불 같은 옛 석물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며, 이를 조형화하는 일에 애쓰고 있다”는 그의 염원이 구현된 것이다. 그가 외국에서 가장 인정받는 한국 작가로 자리매김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박수근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나무 그림이다. 잎과 열매들을 다 떨구고 맨몸으로 서있는 나목 박완서의 말처럼 나목이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고, 거침없이 당당하고 늠름하지 않은가. 물기 없는 질박한 화강암 표피에 우뚝 서있는 나목은 언젠가 새싹을 틔워낼 생명에의 희망이 아닌가.

현대 미술품 최고가를 연달아 경신하는 작가, 5월의 문화인물, 한국적인 소재와 정서를 독창적 조형언어로 구사한 화가. 이러한 사후 평가가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더 많은 박수근, 더 많은 ‘나목 나오기를 기다릴 뿐.  

/글 장영준 중앙대 영문학 교수  

 

◆ 

소설의 구조 원리를 중심으로 분류한 것으로 시정소설 또는 풍속소설이라고도 한다. 모든 시대에 타당한 사회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시기의 풍속이나 세태의 한 단면을 묘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소설로 작중 인물의 내면 세계를 심리주의적으로 파헤치는 작법과는 달리, 소설의 사건과 전개를 순전히 풍속 세태적인 사실에서 구하는 소설 양식이다.

따라서, 세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든 시대에 타당한 인간적 진실을 지닌 인물이 아니라, 어떤 특정 시기의 특정 사회적 양상에 타당한 진실을 지닌 인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태소설에서는 작가가 지니고 있는 주장이나 이념이 등장하지 않고, 다만 작가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관찰된 당대 사회의 풍속이 제시될 뿐이다. 1930년대에 사회주의 이념을 내세운 카프문학이 점차 퇴조하면서, 이념의 공백을 채운 것이 곧 세태소설이다. 박완서의 <나목>은 전쟁이 끝난 1950년대의 황량한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태소설로 분류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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