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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해설]저녁에 - 김광섭 -

by 휴리스틱31 2021.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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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 김광섭 -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서정적, 관조적, 사색적, 미래지향적, 명상적

 표현

* 불교적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만남과 이별에 대한 인식을 노래함.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는 사색적 어조

*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선경후정의 구성 방식(별의 모습 - 안타까운 심정)

대응 구조(별 하나 - 나,  밝음 - 어둠,  천상 - 지상)

* 마지막 행에서 의문형으로 끝냄으로써 시적 여운을 남기고 간절한 소망을 드러냄.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저렇게 → 별과 화자 사이의 거리감을 표현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 별과 나의 관계는 선택적인 관계임.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별과 화자의 관계를 특별한 관계, 친밀한 관계, 의미있는 관계로 만듦.(대구법)

 

 

* 밤이 깊을수록 → 평화로움과 외로움을 동시에 깊이 인식함.(밤은 이별의 시간을 의미함.)

*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  새벽에 별이 흐려지는 것으로, 친밀한 관계가 서서히 소멸하는 상황

*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늙어서 죽어야 하는 인간의 비극적 숙명의 상황 의미

* 별은 밝음 속에 ~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새벽이 다가오면서 별빛이 흐려지고 둘 사이의 관계가 끝을 맺는 상황으로 인간의 숙명적 비극성을 표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밤이 깊을수록 더욱 빛나는 존재인 별은 날이 밝으면 사라지고, 인간은 '어둠 속'이라는 시어가 보여 주듯이 삶의 역경과 시련 속에서 늙고 죽는 숙명적인 고독을 지니고 살다가 사라진다는 의미임.(대조와 대구법)

* 3연 → 대상과의 인연은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불교의 윤회설에 바탕을 둔 표현으로 미래에 대한 화자의 기대와 희망이 잘 나타나 있고 따뜻한 인간 관계를 회복하길 바라는 화자의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친밀한 관계가 소멸한 존재들 사이에서 '정다움'이라는 또 다른 평범한 진리를 찾아낸다. 그리고 이런 '정다움'이 존재하는 한 대비적 존재인 인간('나')과 자연('별')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든지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노래한다.

  

 제재 : 저녁의 별

 주제 친밀한 인간 관계에 대한 소망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성찰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별과 나와의 친밀한 교감

◆ 2연 : 친밀한 관계의 소멸과 인간의 고독

◆ 3연 : 다시 만나고 싶은 소망과 기대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현대 산업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고립감을 미국의 사회학작 데이비드 리스먼은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인간 관계의 단절과 고립적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 자연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기를 소망하고 있으며, 하늘에 무수한 별이 있지만 단 하나의 별과 정다운 관계를 맺고 있는 화자의 모습은 '어린 왕자'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은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저녁이라는 풍경으로부터 현대인의 고독을 느낀 화자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인간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을 간결한 문체로 표현한 작품이다. 소외와 단절 속에서 고독을 느끼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도 하지만 물질 문명에의 힘이나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숙명적 삶으로 인해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외로운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별'에 투영된 현대인의 모습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 중의 어느 한 별이 지상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화자와 친밀하고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밤하늘의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 유독 어느 한 별만을 지켜보고 있는 화자와, 지상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화자만을 지켜보고 있는 그 별은 일대일의 친밀한 대면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는 군중 속에서의 고독이라는 말처럼 현대의 거대 조직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단절감, 고립감을 나타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다가 밝음이 다가오면 사라지는 별의 모습은 온갖 어둠을 헤치며 살아가다가 홀로 죽어 가는 인간의 숙명적인 고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결국 이 시는 물질 문명에 밀려서 소외되어 살아가는 현대인의 외로운 자화상을 그려 준 것이라 볼 수 있다.

 

◆ <저녁에>에 나타난 '저녁'의 이미지

저녁이라는 어둠의 시작이 운명처럼 '나'와 별을 함께 맺어 주고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 저녁이라는 한 순간의 시간 속에서 우연처럼 별 하나와 '나' 하나가 만난다. 이러한 우연, 그러나 절대적인 운명과도 같은 이 마주보기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이차원(二次元)과 그 절대 거리를 소멸시키는 저녁인 것이다. 저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인간의 삶 그것처럼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저녁은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의 관계를 탄생시키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사라짐을 예고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저녁은 밤이 되고 새벽이 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시간이기 때문이다.

 

 

◆ 감상을 위한 더 읽을거리

이산 김광섭은 오염되어 가는 지상의 문명을 고발한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이면서도 동시에, 천상의 별을 노래한 <저녁에>의 시인이기도 하다. 지상과 천상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시의 세계에서는 한 울타리 속에 있다. 인간은 땅 위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 까닭이다.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것을 영어로 컨시더(consider)라고 하지만 원래의 뜻은 '별을 바라다 본다'라는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실제의 바다든 삶의 바다이든 별을 보고 건너갔다. 점성술과 항해술은 근본적으로 하나였던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천문학)이 지배하는 시대에도 '이 세상에서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밤 하늘의 별이요, 마음 속의 시(도덕률)'라는 칸트의 경이(驚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저녁이 되어서야, 그러니까 어둠이 와야 비로소 그 정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를 나를 내려다 본다.'로 시작되는 그 시제(詩題)가 <저녁에>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시의 의미를 더 깊이 따져 들어가면 알 수 있겠지만, 엄격하게 말해서 <저녁에>의 시를 이끌어가는 언술은 '별(천상)'도 '나(지상)'도 아니다.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라는 언술의 주체는 '나'가 아니라 '별'이다. 나는 '보다'의 목적어로 별의 피사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의 다음 시구에서는 지상의 사람이, 그리고 '나'가 언술의 주체로 바뀌어 있다. 시점이 하나가 아니라 병렬적으로 복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 별과 사람, 그리고 '내려다 보다'와 '쳐다보다'가 완벽한 대구를 이루며 동시적으로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과는 달리 언어로 표현할 때는 불가피하게 말을 순차적으로 배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그 순위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저녁에>의 경우도 '별'이 '나'보다 먼저 나와 있다. 즉 별이 먼저 나를 내려다 본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시선에 있어서 나는 수동적이다. 첫 행의 경우 시점과 발신자가 별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점의 거리를 결정하는 '이', '그', '저'의 지시대명사를 보면 별의 경우에는 '저렇게 많은 것'이라고 되어 있고, 사람의 경우는 '이렇게 많은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시점 거리가 '저렇게(별)'보다 '이렇게(사람)'가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르트르처럼 본다는 것은 대상을 지배하고 정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보고 남이 나를 본다는 것은 끝이 없는 격렬한 싸움인 것이며, 인간의 삶과 존재란 결국 이러한 눈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유명한 명제 '타자(他子)는 지옥'이란 말이 태어나게 된다.

 

그런데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그 시선이 그러한 눈싸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정다운 것이 되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저렇게 많은 별 중에'라고 불렸던 별이 나중에 오면 '이렇게 정다운 별 하나'로 바뀌는 그 의미는 무엇인가. '저렇게'에서 '이렇게'로 변화하게 만든 그 시점은 누구의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것이 <저녁에>라는 시 읽기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다.

 

답안을 퀴즈 문제처럼 질질 끌 것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펼쳐보면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 시의 제목처럼 '저녁'이라는 그 시간이다. 별이 나를 내려다본 것이나 내가 별을 쳐다본 것이나 그 이전에 저녁이 먼저 있었다. 저녁이 없었다면, 어둠이라는 그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내려다보는 것도 쳐다보는 것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저녁이란 어둠이 시작이 운명처럼 나와 별을 함께 맺어주고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 저녁이라는 한 순간의 시간 속에서 우연처럼 별 하나와 나 하나가 만난다. 이러한 우연, 그러나 절대적인 운명과도 같은 이 마주보기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이차원과 그 절대 거리를 소멸시키는 저녁인 것이다. 저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인간의 삶 그것처럼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저녁은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의 관계를 탄생시키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사라짐을 예고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저녁은 밤이 되고 새벽이 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라는 둘째 연의 시구이다. 만남은 곧 헤어짐이라는 회자 정리(會者定離)의 그 진부한 주제가 여전히 이 시에서 시효를 상실하지 않고 우리 가슴을 치는 것은 그것이 시적 패러독스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에서 볼 수 있듯이 빛과 어둠의 정반대 되는 것이 그 사라짐의 명제 속에 교차되어 있다. 그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이면서도 사라지는 시간과 장소는 빛과 어둠이라는 합칠 수 없는 모순 속에 존재한다. 저녁의 시간이 빛과 어둠으로 다시 분리될 때 나와 별은 사라진다. 이것이 슬프고 아름다운 별의 패러독스이다.

그러나 김광섭은 한국의 시인인 것이다. 사람들은 멀고 먼 하늘에 자신의 별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오고 있다고 믿는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천문학의 별을 배우기 전에 멍석 위에서 별 하나 나 하나를 외우던 한국의 어린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별의 패러독스는 '타자(他子)는 지옥이다.'가 아니라 '타자(他子)는 정(情)이다.'로 변한다. 그리고 그 한국인은 윤회의 길고 긴 시간의 순환 속에서 다시 만나는 또 하나의 저녁을 기다린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슴 속에 그렇게도 오래오래 남아 있는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마지막 그 시구이다. 그 시구가 화가와 만나면 한 폭의 그림이 되고, 극작가와 만나면 한편의 드라마가, 그리고 춤추는 무희와 만나면 노래와 춤이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만나서는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의 만남이 된다. 저렇게 많은 별 중의 하나와 마주보듯이 박모(薄募)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상의 별 하나와 만난다.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지도 모르는 운명의 만남을 …….

그리고 그렇게나 먼 빛과 어둠의 두 세계로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시구를 잊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만나랴'라는 의문형으로 끝나 있지만 그러한 시적 상상력이 존재하는 한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과 땅의 몇 광년의 먼 거리를 소멸시키고 영원히 마주보는 시선을 어떤 시간도 멸하지 못한다.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수직적 공간, 그리고 그것을 에워싸는 저녁의 시간……. 그 순간의 만남을 영원한 순환의 시선으로 바꿔주는 것이야말로 시가 맡은 소중한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이어령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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