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1번지
- 신경림 -
해가 지기 전에 산1번지에는
바람이 찾아온다.
집집마다 지붕으로 덮은 루핑을 날리고
문을 바른 신문지를 찢고
불행한 사람들의 얼굴에
돌모래를 끼어 얹는다.
해가 지면 산1번지에는
청솔가지 타는 연기가 깔린다.
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내들은
서로 속이고 목을 조르고 마침내는
칼을 들고 피를 흘리는데
정거장을 향해 비탈길을 굴러가는
가난이 싫어진 아낙네의 치맛자락에
연기가 붙어 흐늘댄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1번지에는
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
죽어 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 온
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
애비 없는 애를 밴 처녀는
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그리하여 산1번지에 밤이 오면
대밋벌을 거쳐 온 강바람은
뒷산에 와 부딪쳐
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
-<창작과 비평>(1975)-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참여적, 비판적
◆ 표현 : 유사한 통사 구조의 반복과 변형을 통한 시상의 고조 · 심화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바람, 돌모래 → 시련과 고통
* 찾아온다, 끼어 얹는다, 흐늘댄다, 던진다, 쏟아진다. → 현재형의 진술(현장감, 생생한 느낌 부여)
* 루핑 → roofing, 지붕을 일 때 쓰는 재료로 보통 섬유 제품에 아스팔트 가공을 한 방수포를 이른다.
* 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내들, 가난이 싫어진 아낙네, 복어알을 구해 온 어버이, 애를 밴 처녀
→ 소외받고 고통받는 서민들, 1970년대 도시의 빈민들
* 7 ~ 14행 → 해가 지고 난 후, 도시 빈민들이 겪는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부분
* 모두 함께 ~ 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 시적 대상이 겪어야 하는 아픔을 생생하게 표현함.
* 대밋벌 → 큰 벌 아래
* 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 → 가난한 서민들의 처절한 아픔
◆ 화자 : 산1번지의 가난한 서민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
◆ 주제 : 가난하고 소외된 도시 서민들의 고통
[시상의 흐름(짜임)]
◆ 1 ~ 6행 : 해가 지기 전 산 1번지에 찾아온 바람
◆ 7 ~ 14행 : 가난한 산 1번지의 서민들
◆ 15 ~ 24행 : 가난한 서민들의 통곡과 슬픔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산 1번지'를 공간적 배경으로 그곳의 가난한 도시 서민들의 삶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산 1번지'는 1970년대 비닐이나 판자로 집을 짓고 살아갔던 서울의 빈민촌 곳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폐쇄적이고 절망적인 공간 설정을 통해 도시 빈민의 치열한 삶의 고통을 실감나게 진술하고 있다. '해가 지기 전 → 해가 진 후 → 어둠이 내리기 전 → 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도시 빈민들의 가시화된 고통을 유사한 통사 구조의 반복과 변형을 통해 서술함으로써 시상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 시는 1970년대 신경림 시인의 작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하나같이 절망적인 이야기를 간직한 밑바닥 인생들, 우리가 한때 '민중의 삶'이라 불렀던 그런 인생들이 한데 뒤엉켜 한 폭의 참담하고 막막한 풍경화를 연출해 내고 있다. 그렇다고 끝없는 절망이나 증오, 분노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지는 않은데, 아마도 그의 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연민의 정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지난 60~70년대, 집 없는 이들이 비닐이나 판자로 지어 살았던 서울의 빈민촌 곳곳을 가리키는 말도 되겠지만, 한때 시인이 살았던 '홍은동 1번지'이기도 할 것이다. 김관식을 중심으로 이규헌, 백시걸, 신경림 등이 무허가로 집을 짓고 살았던 홍은동 1번지, 시유지여서 번호가 없어 사람들이 멋대로 이렇게 번지수를 매겼다 한다. 신경림 시인은 '산 1번지' 인생에서 벗어난 지 오래고, 지금은 원로시인이자 동국대 석좌교수로 대접받는 '온후한' 노년을 보내고 있지만, '산 1번지' 자체가 없어진 건 아닐 것이다. 그 곳에 살았던 인생들은 철거되고 밀려나고 또 지워져 눈앞에 보이지 않도록 '정리' 되었지만, 도시 전체 곳곳에 산개(散開)된 채 불쑥불쑥 무력한 절규를 토해내는 21세기 '산 1번지' 인생들은 더 참담한 풍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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