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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n Seeing

이중섭 평전을 읽고

by 휴리스틱31 2021. 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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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삶은 어떠할까?? 어느 시대든 어느 나라이든 천재는 있다. 대부분 길지 않은 삶을 살며 순탄치만은 않은 인생을 보여준 천재들이 많다. 우리나라 또한 여러 분야에서 천재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천재화가 이중섭을 만나려 한다.

이중섭은 부농중의 하나인 지주 이희주의 막내아들로 1916410일에 평남 명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희주는 중섭이 잉태되어 있을때 극심한 정신이상 현상을 나타내어 천장만 응시하다가 30세의 짧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훗날 이중섭의 모습이기도 한 이 아버지의 죽음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다. 때문에 이중섭은 유복자로 태어난다. 중섭의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절망을 경험하며 과부로써 꿋꿋하게 살아가 여장부의 면모를 보이며 자식들을 키운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중섭은 어려움이 없이 자라게 된다.

19314월에 중섭은 오산중학교에 입학을 한다. 그곳에서 예술가이자 중섭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예술가 임용련 선생을 만나고 그분에게서 후기 인상파 화법을 배우게 된다. 임용련 선생은 이중섭이 장차 대화가가 될 것을 예측하고 있었던 분이셨다. 또한 그로인해 이중섭의 평생 주제인 소가 이때부터 등장하게 된다. 그의 소는 길진섭의 말과 대비되어서 훗날 일제말 해방 시대의 남북 화단의 쌍벽을 이루며 다른 작가의 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의 소는 소가 아니라 종교이며 이중섭이 곧 소라는 의미를 일깨워 준다. 들녘에 나가서 저문 무렵의 소를 관찰하다가 어두워서야 돌아오는 일이 많았던 일화가 있든 중섭은 예술의 오브제로서의 소의 애착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무렵 일제 무단 정책은 국어말살을 시도하여 국어 소용을 중지하였다. 중섭이 다니는 학교에는 바로 영향을 받아 중섭은 소를 이용하여 조선언문을 남기려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다 어머니에 의한 형의 묵허를 받아 도쿄 데이고쿠 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조선냄새’, ‘된장국 냄새가 물컹물컹나는 그림을 그린다. 그전에 비하여 달라진 것은 소를 그리면 소의 골체만을 그렸다. 그는 일본에서 분카가쿠잉의 루오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며 유명세를 타고 야마모토 마사코라는 평생 인연을 만나게 된다. 일본인과 한국인 갭이 그당시 너무나 컸지만 그들의 진실에 의해 그들은 서로에게 귀의하게 된다. 이중섭이 원산으로 다시 돌아간 후에 마사코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으로 간다. 중섭을 보기위해.. 결국, 19455월 그들의 간절함은 결국 결혼의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1950년에 전쟁이 일어나 더 이상 원산에 살 수 없게 된 이중섭은 어머니의 의지로 인해 어쩔수 없이 어머니와 형수를 그곳에 남겨두고 아내와 조카들을 데리고 피난을 가게 된다. 피난지인 부산에서는 수용소라는 창고에서 처참한 급식으로 겨우 목숨만 부재한다. 그러다 중섭은 불현듯 제주도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여 19514월에 제주도로 향하게 된다. 제주도에 온 그들은 그해 12월까지 한 7개월동안 지금의 서귀포에서 생활을 하게된다. 제주도에 살면서 중섭은 작품 20점이라는 놀라운 수확과 계획한 대형화 및 대형 벽화의 꿈들을 그의 내면에 다시 한번 진지한 열의를 일으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다시 부산으로 올라온다. 부산에서 그들은 너무 힘들게 살아간다. 이어지는 고통으로 인해 아내와 자식들은 인본인 수용소로 가 일본으로 먼저 떠난다. 중섭이 좀 더 지내다 일본으로 데리러 간다는 약속을 하고서 말이다. 허나 그때부터 중섭의 방랑생활이 시작된다. 그리움으로 인해 매일 술을 마시고 힘들어한다. 그려왔던 그림을 팔았지만 돈이 오고가는데 관심이 없던 중섭은 흐지부지하게 술로 모두 탕감해 버린다.

천재화가인 이중섭은 고독한 천재였던 것이다. 작가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림을 믿을 뿐이다. 술마시며 자주 울고 친구를 껴안고 입맞추자고 대드는 일, 노래를 부르는 일이 있어도 밖에서 그는 작가로 마감된다. 이런 작가적 조건이 그림을 그리는데 가장 악조건이 된 그 말년에 아이러니하게도 탁월한 그림들이 속출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후 그는 마사코(남덕)가 보고 싶어 5일간 도쿄를 다녀온다. 마사코를 만나서는 약간의 부자가 되어서 오겠다고 약속을 한다. 돌아온 그는 몇번이고 남덕(마사코)이가 보고 싶어 가려하지만 부자가 되어서 건너간다는 약속이 걸려 좌절하고 만다.

1955년 이중섭에게 있어서 그의 생애를 통해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갖게되고 118일부터 27일까지의 10일간 전시를 하게 된다. <경향신문>에서는 찬사가 나오고 대부분의 작품들이 팔려나갔다. 방황의 끝이 아닐까 하는 미소도 갖게 되던 때였다. 하지만 개인전 이후 이중섭은 또다시 방황의 길을 걷고 폭주와 영양실조에 의해서 유지되지 못하다 입원을 하게 된다.

마침내 195696일에 오전 1145분에 간장염으로 입원가료중 사망한다. 40세의 나이에...더없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로부터 48일 뒤에는 49재 법회가 있었고 이중섭의 뼈 한자루는 박고석이 정릉 산기슭에 파묻고 나머지 뼈 한자루는 일본에 있는 그의 사랑인 부인 마사코에게 전해졌다.

그가 떠나고 그의 비석에는 화백 이중섭 지묘라고 새겨졌다. 그리고 중섭의 그림은 세상에 남아서 떠돌고 있다.

이중섭의 삶의 모토는 무엇이엇을까? 화백으로서의 모습도 있었겠지만 누구나가 갖고 있는 행복한 가정 또한 이중섭 화백이 정말 원하던 것이란걸 느낄 수 있었다. 삶의 유한성에서 인생의 무상함과 공허함이 그를 더없이 안타깝게 만드는 것 같아 읽는 나로서는 이중섭의 마지막이 가슴이 박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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