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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론(遺才論) - 허 균 / 해설 정리

by 휴리스틱31 2021.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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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론(遺才論) - 허 균

 

나라를 경영하는 자와 임금의 직무를 다스릴 자는 인재(人才)가 아니면 안 된다. 하늘이 인재를 내는 것은 원래 한 시대의 쓰임을 위한 것이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 귀한 집 자식이라고 하여 재주를 넉넉하게 주고, 천한 집 자식이라고 해서 인색하게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옛날의 어진 임금은 이런 것을 알고 인재를 더러 초야에서 구했으며, 낮은 병졸 가운데서도 뽑았다. 더러는 싸움에 패하여 항복해 온 적장 가운데서도 뽑았으며, 도둑 무리를 들어올리고, 혹은 창고지기를 등용하기도 하였다. 쓴 것이 다 알맞았고, 쓰임을 받은 자도 또한 자기의 재주를 각기 펼쳤다. 나라가 복을 받고 치적이 날로 융성케 된 것은 이러한 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같이 큰 나라도 인재를 혹 빠뜨릴까 오히려 염려하였다. 근심되어 옆우로 앉아 생각하고, 밥 먹을 때에도 탄식하였다.

인재 등용의 바른 자세

 

그런데 어찌하여 산림(山林)과 연못가에 살면서 보배를 품고도 팔지 못하는 자가 그토록 많고, 영걸한 인재로서 낮은 벼슬아치 속에 파묻혀서 그 포부를 펴지 못하는 자가 또한 그토록 많은가. 참으로 인재를 모두 얻기도 어렵거니와, 그들을 다 쓰기도 또한 어렵다.

잘못된 인재 등용에 대한 개탄

 

우리 나라는 땅덩이가 좁고 인재가 드물게 나서, 예로부터 그것을 걱정하였다. 그리고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는 인재 등용의 길이 더욱 좁아졌다. 대대로 명망 있는 집 자식이 아니면 높은 벼슬자리에는 통할 수 없었고, 바위 구멍이나 초가집에 사는 선비는 비록 뛰어난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억울하게 등용되지 못했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니, 비록 덕이 훌륭한 자라도 끝내 재상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하늘이 재주를 고르게 주었는데 이것을 문벌과 과거로써 제한하니, 인재가 모자라 늘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 넓은 세상에서, 첩이 낳은 아들이라고 해서 그 어진 이를 버리고, 개가했다고 해서 그 아들의 재주를 쓰지 않았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다. 어미가 천하거나 개가했으면 그 자손은 모두 벼슬길에 끼지 못했다. 변변치 않은 나라인데다 양쪽 오랑캐 사이에 끼어 있으니, 인재들이 모두 나라를 위해 쓰이지 못할까 두려워해도 오히려 나라 일이 제대로 될지 점칠 수 없다. 그런데도 도리어 그 길을 막고는, "인재가 없다. 인재가 없어."라고 탄식만 한다. 이것은 수레를 북쪽으로 돌리면서 남쪽을 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웃 나라가 알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 아낙네가 원한을 품어도 하늘이 슬퍼해 주는데 하물며 원망을 품은 사내와 홀어미가 나라의 반을 차지했으니 화평한 기운을 이루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 나라 인재 등용의 현실

 

하늘이 낳아 준 것을 사람이 버리니, 이는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늘을 거스르면서 하늘에 기도하여 명을 길게 누린 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하늘의 순리를 받들어 행한다면, 크나큰 명을 또한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올바른 인재 등용의 자세 촉구

 

<요점 정리>

 

갈래 : 수필

성격 : 비판적,

주제 : 신분을 떠나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

 

<이해와 감상>

 

상층이건 하층이건 그 재능에 있어서 사람은 평등하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서 조선의 인재 등용 방식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글이다. 특히, 첩과 개가한 여자의 자식은 과거조차 응시할 수 없는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중국의 사례와 대비해서 우리 나라에서 인재를 버리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임을 밝혀, 인재를 버리지 말 것을 강한 어조로 촉구하고 있다.

 

<참고 자료>

 

허균(許筠/1569~1618)

 

조선 중기의 문신소설가. 본관 양천(陽川). 자 단보(端甫). 호 교산(蛟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1589(선조 22) 생원이 되고, 94년 정시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지냈다. 97년 문과중시에 장원급제,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다가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내고 1602년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전적(典籍)수안군수(遂安郡守)를 역임하였다. 1606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여 명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10(광해군 2)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도가 되었고, 천주교 12()을 얻어왔다.

이 해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친척을 참방(參榜)시켰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 후 태인(泰仁)에서 창작에 전념하다가 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평소 친교가 있던 박응서(朴應犀) 등이 처형되자 신변의 안전을 위해 권신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예조참의호조참의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지냈다. 17년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왕의 신임을 얻었다. 이 해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하고, 광해군 폭정에 항거하여 이듬해 하인준(河仁俊)김개()김우성(金宇成)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18년 가산이 적몰(籍沒)되고 참형되었다. 시문(詩文)에 뛰어난 천재로 여류시인 난설헌(蘭雪軒)의 동생이며 그의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의 대표적 걸작이다. 작품으로 교산시화(蛟山詩話)》 《성소부부고(惺所覆藁)》 《성수시화(惺詩話)》 《학산초담(鶴山樵談)》 《도문대작(屠門大爵)》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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