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초상(1981)
-이문열-
● 줄거리
◆ 제1부 : <하구(河口)>
고등학교(1학년)를 중퇴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나는 자신의 헝클어진 삶을 정리하고 새로 시작해 볼 생각으로 형에게 편지를 쓴다. 형의 답장을 받고 강진에 도착한 나는 그 곳의 모래장에서 형님의 사업을 도와 사무실에서 일하며 틈틈이 대입 검정고시 준비를 한다.
모래장사 동업자 사이인 최광탁과 박용칠의 싸움을 보게 되고, 그들의 독특한 관계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어느 날 장티푸스에 걸려 일을 도울 수 없게 되었는데, 점차 회복을 하면서 산책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마을 사람들을 무작정 사귀기 시작하여 김성구란 건달과, 강진의 유일한 대학생인 서동호, 그리고 별장집의 남매를 알게 된다.
그들 중 서동호에게 수학 지도를 받다가 그의 아버지인 서노인의 내력에 관해서 듣게 된다. 서울로 올라가 시험을 치르고, 목표했던 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은 후 돌아온 강진에서 황의 죽음(폐병)을 듣게 되고, 그 남매의 숨겨진 이야기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날 밤 서둘러 강진을 떠난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다시 찾은 강진에서 김성구를 만나 그를 통하여 정마담이 된 별장집 누이 동생을 만난다. 그녀가 나를 좋아했다는 김성구의 말을 뒤로 우리는 나의 유적과 그녀의 복수가 끝나지 않았다는 확인을 한다.
◆ 제2부 : <우리 기쁜 젊은 날>
대학에 입학한 첫 해 학창 생활을 값지게 보낼 것을 다짐한다. 그러나 지식에 대한 배회, 가난에 대한 무게로 피로해 한다. 도서관에서 하가(河哥)를 만나 친구가 된다. 우리는 이념이 짙은 모임에서 김형을 만나 그 모임의 허상을 통해 뜻을 같이하게 된다. 학기가 새로 시작되고 학생운동은 무참히 짓밟힌다. 나와 하가는 김형의 소개로 문학 서클에 가입하지만 말썽을 일으키고 축출된다.
당시 우리들은 단골 술집을 으레 쩌그노트라 불렀는데, '골목 안집'으로 통하던 이름 없는 대폿집의 술자리에서 있었던 몇 개의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필기 노트가 인연이 되어 혜연과 사귀게 되지만, 가정 환경의 차이로 열등감을 느끼고 함께 간 파티에서 말썽을 일으킨 뒤 헤어진다.
그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해따기'라는 우화를 쓴다. 술과 연애로 궁핍 속에서 고민하던 중 뜻밖에 맡은 번역일을 하러 들어간 싸구려 여인숙에서 신문팔이 소년을 만나 그에게 압도되어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하가와 김형이 떠나고, 민속 서클 대표들과 싸움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나마 최후의 소속 집단이었던 과에서 고립되어 서글퍼하던 중 김형의 죽음을 보고 까닭모르르 허무와 절망에 도시를 떠난다.
◆ 제3부 : <그 해 겨울>
도시를 떠나 탄광과 어촌 등을 떠돌다가 어느 여관 겸 술집에서 자리를 잡고 방우(허드렛일 하는 사람)로 일한다. 나는 방랑의 동기가 여러 가지 혼란과 피로, 허무와 절망의 분위기였다고 회상한다. 낮에는 술집, 밤에는 요정으로 변하는 여관에서 내가 하는 일이 처음에는 고된 것이었지만 차츰 익숙해진다. 나는 요정에 오는 공무원들의 온갖 비리와 요정 색시들의 불쌍한 처지를 떠올린다. 나는 자신의 의식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떠나기로 결심한다. 바다를 향해 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다가 한 폐병쟁이를 만나 나 자신의 허황된 생각들을 꿰뚫어보는 그의 말에 괴로워한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다가 칼을 가는 사내를 발견한다. 우연히 들른 중국집에서 친척 누님을 만나 유부남을 사랑한 누님의 과거를 알게 된다. 아름다운 창수령의 주막에서 칼을 갈던 사내를 다시 만난다. 사라진 사내를 따라 서둘러 주막을 나왔다가 토끼몰이를 하고 돌아오는 청년들과 4H회관에서 술자리를 한다. 추위에 눈을 뜬 나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 유서를 쓴다. 의식을 잃을 때쯤 칼 가는 사내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그로부터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여기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사내와 헤어져 바다를 바라보다가 생명 자체에 포함된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한다. 바닷가에서 칼 가는 사내를 다시 만나게 된다. 사내가 칼을 던지는 것을 보고 자신도 가지고 다니던 약을 바다에 던진다. 칼 가는 사내의 사연을 듣고 상행 열차에 탄다. 복숭아 과수원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될 봄을 느낀다.
● 이해와 감상
◆ 이 작품은 장편소설이라는 단서를 달고 출간되었지만, 실제로는 2년 여에 걸쳐 발표한 3편의 중편을 3부작 형식으로 한 데 묶은 것이다. 원래는 발표 순서가 <그 해 겨울>, <하구>, <우리 기쁜 젊은 날>의 순이었으나, 한 데 묶이면서 작품 내적 시간 순서에 따라 각각의 중편은 그 자체로 완결 구조를 갖춘 독립된 작품이면서 동시에 전체적으로는 일인칭 서술자 '나'로 나타나는 한 젊은 주인공의 방황과 고뇌를 통한 정신적 성장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펼쳐 보이고 있어서, 피카레스크식 구성으로 볼 수도 있다.
◆ 1인칭 '나'가 자신의 내면 세계를 토로하고 주변 인물들의 삶의 관찰하고 있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작품으로, 서술자 '나'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자신을 찾고 미래의 불안하지 않은 삶을 위해 대학에 진학한 인물로서 지적 방황과 고뇌 속에서 점차 성장해 간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각 부마다 다른데, 제1부 <하구>의 배경은 부산직할시 강진이라는 하구이고, 제2부 <우리 기쁜 젊은 날>은 '나'가 다니고 있는 서울의 한 대학과 그 주변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제3부 <그 해 겨울>은 태백산맥과 대진이라는 바닷가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 작품은 대학생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거나 대학생이라는 신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을 다룬 것으로, 대학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의 지식과 교양의 성장과정, 젊은이의 낭만적인 열정과 사랑, 지성과 긍지, 성장기 대학생들의 애환 등을 그리고 있다.
◆ 그런데 작품 내적 시간으로 3년 가까운 방황과 고뇌의 기간은 작가 이문열의 실제 경력과 거의 어긋나지 않는다. 스스로 밝힌 작가 연보에 의하면 48년생인 그는 65년에 안동고등학교를 그만두고 3년간 '건달'로 떠돌다가 대입 검정을 거쳐 6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67년은 바로 대입 검정을 준비하던 시기이며, 이 시기는 <하구>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연보에는 이어서 '1969년 <사대 문학회>에 들면서 작가 지망생이 됨.
1970년 안정된 직업을 위해 사범 시험 준비 시작'이라고 되어 있는데, 입학 이후 69년 가을 까지의 기간이 <우리 기쁜 젊은 날>에 대응한다. 그러고 보면 <그 해 겨울>은 69년 겨울에 해당하는데, <그 해 겨울>의 그 치열한 성인식을 통해 어렵게 도달한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라는 깨달음과 연보의 '1970년 안정된 직업을 위해 사범 시험 준비 시작'이라는 대목이 부조화를 이루어 독자에게 혼란을 준다.
그러나 이 <젊은 날의 초상>이 비록 자전적 작품이긴 하지만 자서전이 아닌 소설 작품이라는 점에서, 소설 속 서사적 자아인 '나'와 현실에서의 경험적 자아인 작가는 같은 차원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소설의 내용이 작가 체험의 단순한 소설적 형상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해 버리면 그 작품의 많은 의미 있는 부분을 놓치게 되므로, 소설적 관점에서 작품의 내적 구조를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에는 자아와 세계의 구조적 대립과 그 대결 양상이 선명하지 못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주인공과 대립 대결함으로써 주인공의 정신적 성장에 본질적 작용을 하지 않고 실제적으로는 주인공과 동류에 속하는 등장 인물들의 역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하구>에서의 최광탁과 박용칠은 단순한 관찰 대상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 기쁜 젊은 날>에서의 하가와 김형은 주인공의 열정적인 면(하가)과 사변적인 면(김형)이 각각 강조되어 있는 주인공의 동행일 분이다. 또한 <그 해 겨울>에 등장하는 중요한 두 인물인 친척 누님과 칼갈이 사내 역시 마찬가지다.
둘 다 배신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인물로서, 주인공이 어렵게 도달한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라는 깨달음에 주인공보다 먼저 도달해 있거나(누님) 주인공과 거의 동시에 도달하는(칼갈이 사내) 것이다. 따라서 이들도 본질적으로는 <우리 기쁜 젊은 날>에서의 하가나 김형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자아와 세계의 대립과 대결이 선명치 않은 대신 <젊은 날의 초상>에는 회고의 주체인 작품 외적 자아의 개입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1인칭 서술자 '나'는 위상을 달리하여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이야기'되는' 나 즉 과거의 '나'이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하는' 나 즉 회고하는 '나'이다. 작품 속에서는 후자가 거침없이 작품 표면에 튀어나와 부단한 간섭을 행한다. 작품 외적 자아가 표면으로 튀어나와 직접적으로 작품에 개입하는 행위가 거듭 되풀이되면서 지속성을 얻음에 따라, <젊은 날의 초상>은 단순한 회고적 서술에 그치지 않고 작품 외적 자아의 작품 내적 자아에 대한 적극적 대결의 성격까지 띠게 된다. 그런데 이 '대결'은 일반적으로 작품 외적 자아의 주도 하에 수행되어, 결국 현재 입장에서의 과거에 대한 일방적 의미 부여나 마찬가지가 된다.
◆ <젊은 날의 초상>은 젊은 주인공이 정서적 충동과 지적 모험을 겪으면서 자기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작가는 성장기에 겪어야 하는 젊은이들의 고뇌에 그 관심을 집중하고 있으며, 자신이 체험한 바 있는 젊음의 시절, 그 정신적 충격과 아픔의 시련 등을 근간으로 소설적 구성의 완결성을 시도하였다.
그가 끈기 있게 추적하고 있는 젊음의 시기는 성년의 단계로 입문해 가는 가장 격렬한 변화의 시기이며, 이 시기에 겪는 젊은이들의 정신적인 방황과 그 고통은 성숙한 인간으로서 기성의 사회에 참여하기 위한 하나의 '통과제의'나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소설 속에서 볼 수 있는 주인공의 갈등과 방황은 대체로 그 원인이 내면적인 것에 있다기보다는 외면적인 것에서 찾아진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의 부조화라고 할 수 있으며, 이념과 현실의 간격, 개인적 욕망과 그 좌절 등으로 갈등이 젊음의 충동 속에서 더욱 격렬해지고 방황의 몸부림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이 같은 문제를 전혀 외면하지 않고 모든 고통을 견디면서 끊임없이 자기 확인의 노력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고통을 내면화하고 갈등을 넘어서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소설의 주인공은 스스로에게 더 큰 육체적 고통을 부여하였으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삶의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단계에 올라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발견',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한 추구', '삶의 가치에 대한 인식' 등은 이 소설의 핵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삶의 과정은 곧 자기 성장의 과정인 것이다. 그의 방황은 새로운 것을 구하며 방황하고, 방황하면서 더 큰 것을 찾고자 하는 데에 그 참뜻이 있다. 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지속된 갈등은 결국 새로운 내일을 맞으려는 변혁의 의지에 다름이 없으며, 바로 이러한 갈등이 어쩌면 인간의 의식에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는 생의 기본적인 리듬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삶이란 이 갈등의 리듬을 타고 새로이 전개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 속 주인공이 겪은 모든 체험과 그 아픔은, 고통을 통해서 살아간다는 것의 어려움을 실감하고, 고뇌를 겪으면서 새로운 지적 세계에 폭넓게 접근하며, 방황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는 점에서 자기 생의 새로운 발견과 그에 따른 성장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 핵심사항 정리
◆ 갈래 : 장편소설, 성장소설, 자전적, 회고적 소설
◆ 배경 : 1970년대 서울, 강진, 동해 등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특징
* 3부작으로 구성됨.
* 회상의 구조를 사용하여 사건을 요약적으로 전달
* 1인칭 독백체를 사용하여 인물의 내면 심리를 구체적으로 그림.
◆ 주제 ⇒ 허무의 극복과 진정한 삶의 성장 모색
성장기에 겪는 삶의 고뇌와 극복의지
● 생각해 볼 문제
1. '겨울바다'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자.
⇒ '나'는 언제든 자살할 수 있도록 가방에 화공약품을 넣어 가지고 다니다가 겨울 바다를 찾는다. 이 때의 겨울 바다는 주인공의 절망이 최고조에 다다랐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배경이다. 하지만 그 겨울 바다에서 '나'는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다시 삶을 시작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된다. 끝인 줄 알았던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발견한 것이다. '겨울'은 한 해의 끝이며 한 해의 시작이기도 하다. '바다' 역시 육지의 끝이며 육지의 시작이다. 이렇게 볼 때 '겨울 바다'는 절망, 끝을 의미함과 동시에 희망과 시작을 뜻하는 것이다.
● 더 읽을거리
◆ 작가 이문열
작가 이문열은 1948년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원철, 어머니 조남현 사이의 3남 2녀 중 3남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향은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인데 그곳은 집성촌으로 그의 옛집이 있는 원리동에서 백 가구 가까운 일가가 지금도 살고 있다.
세 살 되던 해인 1950년 6 · 25가 일어나자 아버지가 월북하여 외가인 경북 영천에 내려가 잠시 머물렀는데 그 후 아버지는 망령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다치기 쉬운 유년시절을 온통 장악하고, 그의 가치관 정립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내 고향은 분명 영양군 석보면 원리동이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는 인연을 갖지 못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천석 재산을 팔아 허망한 건국사업에 열중하시던 아버님 덕분에 내가 태어난 곳은 서울 청운동의, 지금은 헐려 버린 어느 아파트였다. 그리고 그 뒤로도 2년간 나는 서울거리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자라다가 세 살 때 6 · 25가 터지면서 어머님의 친정인 영천을 거쳐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다. 갑자기 가장을 잃고 어린 5남매와 시어머니만 남게 되자 아직도 팔리지 않고 있던 고가와 전답에 의지하기 위해 어머님게서 주장하신 귀향이었다." (산문,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중에서)
1951년 조상 대대로의 고향인 경북 영양으로 돌아가는 등 수 차례 이사하였다. 성장기의 이문열은 크게 보아 세 번의 귀향과 실향을 거듭하게 된다. 국민학교 4학년 무렵 서울로 이사하여 종암 국민학교를 다녔고, 또 밀양으로 이사하여 밀양 국민학교로 전학하는 등 안동, 서울, 밀양을 떠돌아 다닌다.
"밀양은 여러 가지로 내게는 감회어린 도시다. 내가 밀양으로 간 것은 열 살 때이고 떠날 때가 열네 살 때였으니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셈이다. 내 애틋한 유년의 추억은 거의 밀양에서의 것이고 내 친구의 대부분도 그때 사귄 친구들이다. 이제는 만난 지가 40년이 가까워 오는 친구들, 거기다가 그곳에는 내게 유일한 졸업장을 준 밀양국민학교가 있다."
중학교를 한 학기 다니다가 중퇴한 그는 3년 동안 큰형을 도와 황무지 2만평을 개간하는 일을 도우며 지낸다. 그 후 검정고시를 거쳐 안동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1965년 큰 이유 없이 학교를 중퇴하고 끝없는 유적이 다시 시작한다.
"나는 그 편지(형에게 보낸 것)에 우선 목적 없는 내 떠돌이 생활의 쓰라림과 서글픔을 은근하게 과장하고, 속절없이 늘어만 가는 나이에 대한 초조와 불안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내 믿음과는 달리 정말로 그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벌서 어른들처럼 머리를 길 게 길러 넘기고 어른들의 옷을 입고, 술이며 담배 같은 어른들의 악습과 심지어는 시시껄렁한 타락까지 흉내내고는 있었지만, 나이로는 여전히 아이도 어른도 아니었으며, 정규의 학교과정은 밟지 않고 있었으나 또한 책과 지식과는 완전히 벗어난 생활도 아니어서 학생이랄 수도 건달이랄 수도 없었다. 당시 내 깊은 우려 중의 하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평균치의 삶조차 누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도 솔직하게 썼다." (<하구> 중에서)
1968년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서울대학 사범대 국어과에 진학, 작가의 꿈을 안고 사대문학회에서 활동하였다 1969년 고시공부를 시작, 1970년 대학을 중퇴하였으나 고시와 문단 등단에 실패하고 1973년 군에 입대하였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새하곡>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후 데뷔 원년부터 <사람의 아들>, <들소>,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어둠의 그늘>, <황제를 위하여>, <달팽이의 외출>, <이 황량한 역에서> 등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현란한 문체와 해박한 지식이 뒷받침된 능란한 이야기 솜씨로 풀어내어 폭넓은 대중적 호응과 사랑을 받는 국민작가로 불리게 되었다.
이문열의 문학세계는 종교와 예술관, 분단과 이데올로기 갈등,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재를 다루며, 정통적인 리얼리즘의 기법으로부터 역사나 우화의 형식 등 소설 기법도 다채롭다. 이러한 작가의 소설은 크게 두 경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황제를 위하여>,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으로 현실을 하나의 체계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관념적이며, 장인의 솜씨가 돋보이는 소설로서 작가적 성향을 높인 작품들이다.
다른 하나는 연작 장편으로 <젊은 날의 초상>,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등과 같이 작가 자신의 실존적 번민을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특히 1986년에 연재를 시작하여 12년만에 완성한 대하소설 <변경>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72년 유신 전야까지를 배경으로 전쟁과 왜곡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몰락해가는 가족사를 그리고 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 중 '가장 거대한 서사'로 꼽는 것으로 작가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보여주며, 우리 문학의 질적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1999년 호암예술상을 수상함으로써 작가적 역량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1990년 <금시조>와 <그 해 겨울>이, 1991년 <새하곡>, 1992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프랑스에서 번역 출간되었고, 1992년 <금시조>가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또 1998년 미국의 출판 에이전시 뉴욕 와일리사와 전속계약을 맺기도 했다. 1993년 계간 <상상>의 자문위원을 지냈고,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세종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99년 현재 부악문원 대표로 있다.
1979년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래 <금시조>로 동인문학상(1982), <황제를 위하여>로 대한민국문학상(1983), <영웅시대>로 중앙문화대상(1984),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이상문학상(1987), <시인과 도둑>으로 현대문학상(1992), <전야 혹은 시대의 마지막 밤>으로 21세기 문학상(1998), <변경>으로 호암예술상(1999)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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