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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CEO 리더십 - 록펠러

by 휴리스틱31 2021.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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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리더십 - 록펠러

 

석유왕 존 록펠러

 

가장 좋은 것에도 약간의 악이 있으며, 가장 약한 것에도 약간의 선이 있다이는 존 데이비슨 록펠러가 좋아했던 시의 한 구절이다 록펠러 자신의 평가에도 선과 악이 섞여 있다. 그는 가장 훌륭한 사업가의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또한 사업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세인들의 비난을 수없이 받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시대에는 부에 대한 욕망이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일반에게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많은 부패 측면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정신적 유산이며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시대를 남보다 앞서서 걸어가 약관 40세에 석유계의 거성으로 군림하며 미국 산업계에 불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록펠러의 리더십을 조명해 본다.

 

 

 

 

 

 

숫자적 인간

 

록 펠러가 어떤 스칸디나비아의 뱃사람과 좀 오랜 시간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뱃사람과 헤어지면서 비서에게 "저 친구는 75,000달러의 값어치가 있어 보여"하고 그의 인상에 대해서 한 마디 했다고 한다. 사람을 돈으로 환산한다는 것이 좀 점잖지 못한 발상임에는 틀림없지만 사람의 생애의 경험이나 철학, 그리고 됨됨이를 모조리 돈으로 환산해 보려는 그의 기질이 사업가답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록 펠러는 자신을 '숫자의 인간'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의 비서가 "록 펠러가 숫자를 끄집어 내어 그것을 계산하도록 해서 상대를 시험하려고 할 때에 보여 주는 그의 상기된 표정을 보노라면 그가 얼마나 숫자에 연연하는가를 쉽사리 읽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고, 그의 동료들도 록펠러의 인생은 숫자를 중심으로 그려졌다고 그에 대한 기억을 회상했을 정도이다.

오랜 기간 록펠러를 위해서 일했던 찰스 우드버리라는 사람은 록펠러가 아직 장부관리를 하고 있었을 당시, 그는 늘 경리실에 틀어박혀 장부를 열심히 조사하는 것을 아주 즐겼고 쉽게 잘못된 점을 발견했다. 숫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노라면 신기할 정도이다.”라고 술회했다.

록펠러는 정원을 가꾸면서도 나무를 길러서 단 몇 달러라도 이익을 남기는 것을 계산하고 있었으며 1백만 달러짜리 계약을 하면서도 3만 달러 수수료를 내지 않을 궁리를 했던 사람이다. 만년의 그에 대한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돈에 대한 이러한 집착을 묘사하는 것들이어서 록펠러의 개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숫자와 계산을 즐기는 경영자, 이는 리더들은 스케일 큰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자질구레한 것에는 대담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견해와는 어울리는 풍경이 아니다. 이러한 숫자 지향적인 록펠러의 모습은 젊어서부터 교회에서 또는 직장에서 회계를 담당한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17세 즈음해서 그는 대리석 운반 하적장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기차나 증기선으로 운반해 오는 물량이 많지 않아 항상 차질을 빚었다. 한번은 경영자가 록펠러를 신임하여 회계감사역을 맡겼다. 그는 계산서를 세밀히 분석해 많은 오류를 찾아내어 회사를 위해서 큰돈을 절약했다.

금액이 많고 적은 것을 불문하고 계산서를 주의 깊게 감사해 잘못된 점을 찾아내는 그러한 경험은 나주에 스탠더드석유회사의 큰 자산이 되었다. 숫자에 매료되어 있는 록펠러의 모습에서 사업에 대한 그의 지독한 관심을 읽을 수 있다.

 

 

 

 

 

평범하고 능력 없는 학생

 

소년기의 록펠러에게서 위대한 인물이 될 조짐을 암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었으며 머리가 좋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한가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수업의 예습 때문에 그야말로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근근히 쫓아간 학창시절을 회상하기도 했다. 비교적 많은 경영자들이 유년 시절을 독특하게 보낸 것과는 대조적으로 지극히 평범했던 록펠러의 소년 시절은 남들 앞에 한 번 제대로 나서지도 못하고 소극적인 소년 시절을 지낸 청년들에게 희망과 도전의욕을 동시에 불어넣어 준다.

록펠러가 처음 사회에 발을 딛게 된 것은 어느 운송회사에 취직을 한 것이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그는 돈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고 또한 대인기술, 즉 사람을 상대하는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결정적으로 돈에 대한 야심을 품게 된 것은 21세 때 교회에서의 한 사건이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록 펠러는 가족이 클리블랜드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자 에리가의 침례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그곳에서 세례를 받고 교회의 모든 회계를 맡아서 보는 교회 사무원이 되었다. 당시 교회는 2,000 달러의 저당을 잡혀 있었는데 저당권자가 갑자기 돈을 지불해 줄 것을 요구해 왔다. 이자 지불이 늦어질 것 같아 저당권자가 불안을 느낀 것이다.

이 사실이 어느 주일날 발표가 되었고 이제 당시로서는 상당히 거금이었던 2,000달러의 돈을 조달하지 않으면 교회를 잃게 될 판이었다. 신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던 록펠러는 이 일에 커다란 의무감을 느끼고 예배가 끝난 후 출입문에서 한 사람씩 붙들고 교회를 위해 무엇인가 해줄 것을 부탁했고 이런 그의 노력은 여러 달 계속돼 결국 기부금으로 어려운 그 일을 처리했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그는 돈에 대한 필요성을 실감했다고 한다. 돈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자세는 교회 활동과는 다소 배치되는 면도 없지 않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자신의 생활에 있어서 한쪽 팔과도 같다고 여겨 온 록펠러에게 그러한 결단은 큰 변화였다.

평범한 청년이 비록 교회 일이지만 진지하게 책임감을 갖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큰 결단을 하고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석유가 정말 좋아

 

록펠러를 시대의 총아로 만든 사건은 록펠러가 20세가 되어 막 사업을 시작하려던 시기에 고향에서 멀지 않은 땅에서 최초의 유전이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모든 가정의 조명은 값비싼 양초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워낙 양초 값이 비싼 터여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가 지면 침대에 들어가고 해가 뜨면 일어났을 정도이다. 따라서 값싼 석유의 출현은 자동적으로 활동 시간을 연장해 주는 것이 되었으며 마치 물처럼 모든 가정이나 사업체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록펠러는 초기에 중개업자로서 램프 기술을 쓰는 석유를 취급했었는데 램프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당시의 정유업은 극히 투기적이어서 자칫 잘못하면 파산을 면치 못하는 상태였으나 록펠러가 손을 대기 시작했을 무렵 석유업은 갑자기 수익성이 아주 좋은 노다지와 같은 사업이 되었다. 바로 현지에서 석유생산이 가능해진 덕분이었다. 록펠러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던 제임스 딘이 주연한 자이언트라는 영화를 회상하면 당시의 풍경이 쉽사리 머릿속에 그려진다.

사업을 하면서 석유에 대한 것만이 오로지 록펠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의 옷은 항상 석유의 악취로 젖어 있어서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손님들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밤에 집에 돌아와서도 석유 생각만 했고, 한밤중에 동생을 깨워 자기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기 일쑤였다. 문제되는 일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었으며 생활은 사업과 가족과 교회가 전부였다. 친구는 사업과 교회에서의 친구뿐, 사교클럽이나 단체에는 일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사교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이러한 모습에서 록펠러가 얼마나 비즈니스에 빠져 있었는가를 느낄 수 있다. 새삼스런 얘기는 아니지만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상대방의 이름을 적기만 해도 기쁨이 샘솟고, 독실한 크리스찬들은 성령이 충만할 때 국어 사전에서 하나님이나 예수그리스도의 정의를 읽으면서도 눈물이 난다고 한다. 자식의 성공을 불철주야 기원하는 부모들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자신의 자녀와 연관지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들은 낯익고 오히려 정겹기까지 하다. 무엇엔가 몰두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직장 A’의 장부

 

직장에서 일하면서부터 록펠러는 직장 A’라고 적은 장부에 지출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소중히 보관했다. 이 장부의 지출 내역은 아주 유명한 비화이고 청년 록펠러의 대담성을 잘 보여준다. 최초의 지출 항목은 전도 헌금 10센트였다. 그는 뉴욕의 빈민 계급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었는지 12센트를 뉴욕의 5개 전도 본부에 보냈다. 25센트를 교회의 가난한 한 사나이에게 지출했고 50센트를 한 불쌍한 여인에게 기부했다. 당시 1세트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고급 장갑 한 켤레가 2달러 정도 하던 시절이니 그의 기부금은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초기에 지출한 이러한 헌금이나 기부금들이 급료를 받기도 전의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록펠러는 자기가 저축해 놓은 돈을 가지고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선사업의 시작은 5센트 짜리 니켈화나 10센트 은화로 시작해서 21세기 돌 때까지 계속됐다. 그의 기부는 종파를 초월하여, 감리교회, 흑인교회, 가톨릭교회나 고아들에게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기여를 하기 위해서 자신은 검약주의로 일관했으며 심지어는 수전노라는 소리도 들을 정도였다.

남에게 베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어려울 때 남을 돕는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단면을 살펴보면 의외로 어려운 사람들이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흔히 볼 수 있어도 넉넉한 사람이 베푸는 미담은 그리 흔하지 않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만큼 표가 나는 면도 없지 않고 있는 자의 자비는 으레 그러려니 하는 측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진 자의 횡포와 사치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형편없는 것을 보면 아직 넉넉계층에는 자성할 일이 많은 것 같다. 록펠러의 베푸는 마음이 일찍 싹텄던 것은 우리가 본받을 일이다.

베풀 줄 아는 마음을 배우고 베풀기 위해서 남들보다 절약하는 그의 자세가 멋져 보인다. 아마 절대자는 그런 사람에게 많은 물질적인 축복을 주는 모양이다.

 

 

 

 

 

 

과감한 투자

 

시대적으로 여러 가지 상황이 어려운 지경이었지만 록펠러에게는 늘 행운이 따르는 면도 없지 않았다. 링컨이 대통령 시절에 겪었던 남북전쟁도 클리블랜드시를 부흥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그에게 다가왔으니 말이다. 미시시피 강이나 오하이오 강의 교통로가 차단된 까닭에 중서부의 양대도시인 센트루이스와 신시내티의 중요성은 없어지고, 반대로 시카고와 클리블랜드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중서부의 원자재가 동부의 공업지대에 있어서는 절대적이었는데 전쟁 때문에 양대 수로가 막히는 바람에 수송이 불가능해졌고, 대신 동서부를 잇는 간선 철도와 5대호를 이용한 물자 수송이 대향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오대호에 접해 있으면서 간선 철도의 주요 역전이었던 시카고와 클리블랜드는 단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남북전쟁은 록펠러 회사에 큰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정부군인 북군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물자 중에서 록펠러의 회사는 미시간주의 새거노에서 소금을 끌어모아서 공급하였다. 군대가 필요로 하는 소금의 양이 워낙 많아서 록펠러와 합작 동료 3명이 아무리 뛰어봐도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을 정도였다.

전쟁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된 록펠러는 남아도는 돈을 어디에 투자할 것인지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좋은 기회를 맞게 된다. 광고지의 구직난에 새뮤얼 앤드류스라는 영국 청년이 실은 초를 만듭니다라는 구직 광고가 그의 눈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도 초를 조금 만들어 돈을 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클리블랜드시의 정유소에서 촉탄을 처리해서 기름을 빼는 일을 하고 있었다. 또한 석유 정제도 하고 있었는데 이는 클리블랜드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합작동료 클라크와 록펠러는 앤드류스의 기술에 눈독을 들이고는 앤드류스가 에리가의 침례교회 전도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 직접 접촉에 나섰다. 당시 정유업은 극히 투기적이고 자칫 잘못하면 파산을 면치 못하는 상태였다. 23세의 록펠러는 제대로 된 기술을 바탕으로 초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이 엄청난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록펠러는 자기도 공동 경영자의 한 사람이 된 새 회사 앤드류스클라크사에 처음으로 4,000달러를 투자했는데 이것이 그가 석유왕이 되는 길로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누구나 인생에 있어서 기회가 있게 마련이다. 이런 기회를 잘 포착해서 잡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만일 록펠러가 정유업의 투기적이고 잘못하면 파산을 면치 못한다는 이유로 뛰어드는 것을 포기했더라면 결코 그는 석유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자리엔 그에 버금가는 다른 누군가가 올라섰을 것이다. 어떤 기회가 왔을때도 놓치지 않는 상황 판단력과 도전의식이 꼭 필요하다.

 

 

 

 

선이냐 악이냐

 

1899, 록펠러 평생의 경쟁 상대자인 루이스 에밀리 2세는 미합중국 산업위원회에서 록펠러가 이끈 스탠더드석유회사의 성공 비밀은 수송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사실, 수송이 열쇠였다. 록펠러가 확보한 철도운임에서의 우위는 경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자신의 성공과 경쟁상대 타도에 있어서 최고의 무기가 되었다. 그가 확보했던 것은 '리베이트'라고 불리는 환불제였는데, 1880년에 이르기까지 리베이트를 받고 있었던 것을 인정하였다.

리베이트 제도가 인정되지 않은 시대였으므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도 록펠러는 여러 가지 형태로 철도로부터 특전을 받았다. 1880년부터는 스탠더드석유회사는 사실 송유관을 보유하게 되어서 스스로 운송 능력을 갖추게 되자 지금까지보다도 더욱 철도에 대해 압력을 가하여 운임 할인의 양보를 요구했다.

리베이트는 록펠러의 생애에서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된 용어이다. 그 어원은 '가격절하'라는 의미의 프랑스어로서 상거래에 쓰이게 되어 지불금의 반환 내지는 면제를 의미하게 되었다. 원래 그것은 일반적인 그룹에 대한 특별 요금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떤 특정인에 대한 철도운임의 비밀 환불이었으나, 특정인에 대해 운임의 특전을 준다는 거래 관습이 다른 산업에도 보이게 되었다.

록펠러가 세기의 비난을 받는 것은 이 리베이트와 트러스트에 의한 독점이다. 도덕적인 부정과 사회를 파괴하는 수법으로 돈을 번다는 논리로 여러 차례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록펠러가 전도위원회에 큰돈을 기부했을 때 '더러운 돈'이라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세상은 록펠러를 '악인이냐 성자냐' 하는 식의 두 가지 시야로 보려고 하였다. "슬프지만 나는 만족한다." 록펠러는 어느 학교에서 이러한 연설을 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그 학교의 유행어가 됐다고 한다. 록펠러가 자신을 표현한 정확한 묘사인 것이다.

록펠러를 선과 악의 선상에서 평가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어쩌면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가 생사를 사르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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