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리더십을 배우자(스티븐 잡스)
애플의 독재자 스티븐 잡스
1998년, 애플사 직원들은 실로 오랜만에 가슴 설레고 묘한 흥분에 휩싸인채 강당에 모여들었다. 바로 14년 전 애플이 매킨토시를 시장에 선보일 때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이었다. 돌이켜보면, 여러 가지로 우여곡절이 많은 시간들이었다. 분명히 기술적으로는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시장 경쟁에서의 냉혹한 현실로 인해서 지금가지 버텨온 것만도 다행스러울 정도로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오늘 가슴이 뛰는 것은 14년 전의 벅찬 모습이 재현되기 때문이다. 그 당시 애플을 이끌었던 스티븐 잡스가 돌아왔고 그가 또다시 신제품을 소개하는 휘장을 벗기게 된 것이다. 비롯 옛날처럼 청바지 차림은 아니었지만 훨씬 성숙된 모습으로 나타난 잡스가 서서히 애플의 신제품을 소개하기 위해 휘장을 거두자 강당에 모인 수천 명의 직원들과 고객들은 환호와 박수로 애플의 새로운 도전을 축하하였다.
애플의 희망, ‘iMac'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iMac의 탄생은 마치 애플의 창업주 스티븐 잡스의 새로운 도전을 위한 서곡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온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훌륭한 기술적 혁신 중의 하나로 예견되는 PC 발명가 스티븐 잡스,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으로 차별화된 리더십을 선보였으며 기술적인 혁신을 추구하기 위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컴퓨터 산업의 풍운아. 그의 독보적이고 오만한 경영방식, 애플사의 전설로 전해질 정도로 누구도 따라 잡을 수 없는 우월성과 ‘완벽한 경영’을 선호하는 스티븐 잡스의 경영철학을 살펴본다.
☆ 폭스바겐 버스를 팔아 컴퓨터를 만들다
애플사 PC의 시조는 사실 스티븐 잡스가 아니라 스티븐 우즈니악이었다. 우즈라 종종 불리우는 우즈아닉은 잡스 스스로 ‘자신이 만난 사람 중에서 자신보다 전자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유일한 사람’ 이라고 인정할 정도로 탁월한 재능을 가졌었다. 그러나 PC 개념이 보편화 되고 생활화 될 수 있는 기틀을 세운 사람은 스티븐 잡스였다. 그가 실제로 ‘애플 I’을 상품화하기 위해 보인 열정과 헌신이 없었더라면 PC는 훨씬 늦게 보급되었을지도 모른다.
초창기 애플사의 출판기자인 레지스 맥케나는 PC의 개발에 있어서 스티븐 잡스의 역할을 다음처럼 소개했다. “우즈가 훌륭한 기계를 설계해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계는 잡스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장난감 가게에나 진열되어 있을 것이다. 우즈가 복음전도사와 손잡은 것은 행운이었다.” 컴퓨터 업계에서 전도사의 역할을 한 사람으로 잡스를 꼽는 비유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전도사로 만들었을까?
1976년에 출시된 애플 I은 최초의 프로그래밍 컴퓨터가 아니었다. 1974년 통신판매 카탈로그를 통해서 판매된 알타리 8800이 원조인데 게임기나 취미용품 정도로 소개되었다. 알타리는 사용자가 프로그래밍 할 때 저장과 취소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최초 PC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불운을 겪고 만다. 그러나 잡스와 우즈가 개발한 애플 I은 달랐다. 프로그래밍에 있어서의 사용자 요구를 수용하여 보편성을 갖추었으며 곧이어 발표된 애플 II는 기능상 오늘날 PC의 표준과 동일한 최초의 PC가 되었고 1977년에는 키보드, 외부 프로그래밍, 컬러 모니터 등을 함께 갖춰 판매되기 시작했다.
PC의 탄생에 기여한 잡스의 공로는 잡스와 우즈의 관계가 잘 설명해 준다. 기성세대에 마음껏 저항하며 살아가던 잡스는 17세 고등학교 시절 버클리대학을 다니던 4년 선배인 우즈와 장거리 전화가 가능한 ‘블루박스’을 조립하여 파는데 성공한다. 우즈가 개발했고 잡스가 파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말하자면 애플의 탄생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2년 뒤 잡스는 자시의 폭스바겐 버스를 팔고, 우즈를 설득하여 그의 전자계산기를 팔아 1,300달러를 마련하고는 애플 I의 최초 모델을 만드는데 도전했다.
제작에 성공한 두 사람은 커다란 기로에 서게 된다. 아이디어를 파느냐 아니면 생산해서 판매에 도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우즈는 로열티를 받고 설계를 팔자고 제안했다. 아직 나이가 어려 제작해서 팔기가 힘든 상황이므로 어떠한 방식이든 자신들의 아이디어가 상품으로 제조되어 판매되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우즈의 제안에 잡스는 눈에 불을 켜고 반대를 했다.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즉시 아버지의 집에 자기 방, 응접실, 차고 등을 개조하여 아예 미니 공장을 만들어 버렸다.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하려는 잡스 특유의 ‘독재 군주’의식이 발동 걸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19세에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만다. 만들지도 않은 컴퓨터를 홍보하고 판매업자를 설득하여 선불을 받아낸 것이다.
우즈는 천재적인 엔지니어였지만 경영마인드는 없었다. 잡스는 엔지니어의 천재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혁신적인 기업가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의욕적이고 저돌적인 잡스의 도전정신이 없었다면 애플사의 탄생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PC의 탄생이 스티븐 잡스의 의지에서 이뤄졌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 장발에 마리화나까지 즐긴 별종 인간
1956년 2월 캘리포니아 마운틴 뷰에서 태어난 스티븐 잡스에게 애플 I의 탄생은 이미 예고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곳이 훗날 실리콘 밸리와 마이크로컴퓨터 산업의 중심부가 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유복자로 태어나서 곧 입양되어 양부모의 보호 아래 자라난 잡스는 당시 젊은 세대의 상징인 긴 머리, 마리화나, 샌들 등으로 무장된 대표적인 반항아로 성장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했으며 자신과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난 청소년들이 그러하듯이 자신을 붙들어 맬 수 있는 상상 속의 아이덴티티를 찾아서 모든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는 풍운아였다.
한 후원자가 벤처 투자가를 잡스에게 소개하자 투자가가 전화를 걸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별종 인간한테 나를 보냈느냐?”고 항의할 정도로 잡스는 시대의 이방인이었다. 어떻게 보면 운명적으로 만난 우즈가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모든 것을 갖춘 것이 자신의 삶과 대비되어 잡스의 삶에 대한 태도는 더욱 왜곡되어 보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방황 끝에 잡스가 찾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는 바로 애플 컴퓨터였다. 그에게 있어 애플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그러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잡스의 애플에 대한 애정은 그에게 희망을, 때로는 절망을 안겨준다. 애플은 70년대 후반 주변의 회의적인 관망 속에 외롭게 미래를 향해서 도전한다. IBM, HP, Intel, DEC 등 모든 업체들이 개인용 컴퓨터의 필요성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심지어 1971년에 인텔이 개발한 혁신적 제품인 마이크로프로세스가 PC의 핵심부품이었건만 인텔의 창시자인 로버트 노이즈도 PC의 미래를 단지 취미용품 정도로 간주했다.
사용자가 개인적으로 컴퓨터를 쓸 필요가 있으면 주컴퓨터에 연결된 단말기를 사용하면 될 것인 주컴퓨터에 비해서 성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장난감 같은 pc를 누가 사용하겠는가, 하는 논리였다. 그래서 이들 회사들은 아무도 애플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당시 히피 같이 긴 머리에 샌들을 질질 끌고 다니는 잡스가 제품을 소개하자 속으로 “너같은 히피들이나 쓰는 장난감이 무슨 상업성이 있겠냐?”고 할 정도로 찬 밥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PC 시장이 가진 잠재력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오직 잡스만이 미래의 현실을 선명하게 내다보고 있었고 애플에 대한 절대적인 애정으로 새로운 세상에도 도전했다.
1976년 자금난에 허덕이던 애플이 10만 달러와 잡스를 포함한 3명의 개발자를 연 3만 6,000 달러에 고용해주는 조건으로 매각조건을 제시했지만 컴모도, 알타리, HP 같은 회사들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4년 후, 잡스 개인의 재신만도 2억 5,600만 달러가 될 정도로 성장했으니 그들로서는 굴러온 역사적인 기회를 바로 찬 셈이 되었다. 그러나 잡스 자시도 애플에 대한 지나친 애정과 자신의 고집 때문에 일생일대의 실수를 범하게 된다. 80년대 초반 PC 업계를 석권하지만 아무도 자신을 흉내내지 못하게 하고 오직 애플만의 길을 만들어 PC 세계를 집권하겠다는 잡스의 군주적인 판단이 호환용 컴퓨터의 탄생을 가로 막아섰던 것이다.
80년대 중반, 잡스는 ‘애플이 호환용 컴퓨터 개발을 허용했다면 오늘날 PC 시장은 완전히 애플이 석권하고 있을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상황을 반전시키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모든 것을 자신이 주도하고 통제하려는 그의 개성과 애플에 대한 지나친 애정이 빚어낸 쓰라린 실착이었다.
☆ 잡스, 좋으냐 아니면 싫으냐?
잡스는 ‘절대적 권력’을 추구했으며 목표지향적인 경영자였다. 처음 애플에 근무하고 있을 당시 그는 이사진이 위임한 아무런 직책이 없었다. 권한의 범위를 스스로 결정했고 사업계획, 제품개발 및 영업에 이르기까지 마음대로 전권을 행사했다. 오로지 자신이 세운 목표달성에만 관심이 있었으며 인간관계나 조직의 역학구조에 대해서는 일말의 고려도 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80년대 초 애플사의 경영간부였던 제프 래스킨이 그의 독선적인 특성에 대해 “스티븐은 프랑스의 대왕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고 말할 정도로 모든 애플사의 직원들이 그를 황제 같이 떠받들도록 군주적 경영방식을 보여왔다.
이러한 잡스의 독선적인 리더십은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그의 성격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이며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해 온 그의 삶의 방식이 기업 운영에도 여실히 나타났던 것이다. 잡스는 자신의 의사결정은 논리적으로 일어지는 것인 만큼 느낌을 근거로 결정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굳게 믿었다. 항상 나무를 보지 않고 숲을 보기를 좋아했으며 자기처럼 판단하지 않는 사람을 싫어했다. 이러한 그의 오만으로 인해서 오로지 흑백 인간관계만이 존재했다. 잡스를 좋아하든지 아니면 싫어하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름대로 성공적인 기업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그의 의지와 탁월함 덕분이다.
1977년, 애플사는 회사가 필요로 하는 자본을 충족시키기 위해 마이크 모르쿨라를 회장에 그리고 마이크 스콧을 대표이사로 선임하였다. 그들은 전문적 경영방식을 도입해 사업계획, 마케팅 전략을 구상하고 자본금을 끌어들이는 전술을 시도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77년, 78년, 79년 역시 부도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80년대 초반, 마이크 스콧은 사업을 분산시키는 과정에서 잡스에게 아무런 역할을 주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스티븐 잡스가 이유를 묻자, 경험부족과 경영인으로서는 너무 불안하다고 반박하였다. 애플사는 경영권 분쟁에 휩싸였는데 결국 마이크 스콧이 사임하고 잡스는 회장으로 취임하여 잡스의 승리로 결판났다. 잡스가 정치력을 발휘해 모든 권한을 손에 쥐었지만 이사회도 잡스에게 지위는 유지하되 경영에는 참여하지 모하도록 결정했다.
CEO로서의 자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사회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잡스는 의지의 사나이였다. 단 1년 만인 82년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을 정도로 다시 한 번 애플맨 잡스의 권위를 전세계에 선보였다.
☆ 반항과 좌절감이 창조력으로 융화되다
스티븐 잡스가 대학교육이라고 받은 것은 고작 오레건주의 리드컬리지에서 한 학기 수료한 것이 전ㅂ이다. 그는 새로운 창조를 좇아다녔고 오로지 ‘할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성공한 사람이다. 청소년 시절에는 즐거움을 찾아다녔고 사업을 하면서는 새로운 기술과 기회를 찾는 개척가였다.
조지 길더는 잡스의 기업정신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기업가들의 경향에서 볼 때, 그의 초기의 방황은 향상 동기부여의 모토가 되었다. 모든 감정상의 동요와 역동적인 젊음 - 반항, 좌절감, 범죄 행위, 배반감 - 은 돌연히 억누를 수 없는 창조력으로 융화되었던 것이다.” 인생여정의 목적지를 찾지 못한 그의 모습은 이 사회의 이방인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삶의 의미인 컴퓨터를 발견한 뒤 그의 모습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는 선도적인 개척자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애플은 사업을 시작한지 4년 반 만에 주식을 상장시켰다. 잡스가 고작 24세가 되던 해이다. 80년 대중에게 선보인 애플 최초의 주식은 22달러로 책정되었는데 이는 포드가 1950년대에 상장시킨 이래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애플사는 역사상 그 어느 회사보다도 빠르게 성장하게 된 것이다. 사용 편리성과 응용 프로그램에 최상의 기술력을 지닌 컴퓨터 회사로 알려지면서 고객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PC는 비즈니스의 도구이자 생활 필수품이 되었다. 잡스가 개척한 PC 시장은 그 자신이 10%대 시장점유율 확보도 힘에 부칠 정도로 거대해져 버렸다.
그러나 정작 스티븐 잡스는 자시의 PC신화 창조에 대해 ‘단지 운이 좋았다’며 가볍게 취급한다. “나는 단지 약간의 재능을 겸비한 시인에 불과하다”며 자신의 대수롭지 않은 재능이 때를 잘 만나 각광을 받게 되었다는 겸손이다. 물론 잡스에게 상당 부분 운이 따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최상의 조건이 아니면 카드를 뽑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그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유한 평범한 카드였어도, 일단 그의 손에 들어오면 가능성을F 지닌 에이스로 변신되었다는 점이 그의 마력이다.
☆ 모든 에너지를 미래에 집중해야 한다
잡스는 부도 직전의 위기를 수십번이나 견뎌 낸 시련에 강한 인물이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절대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한 그에게도 뼈아픈 과거가 있다. 바로 그가 NeXT를 창립해서 겪은 경영자의 굴곡이다.
1985년 애플사로부터 해고를 당한 스티븐 잡스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즉시 새로운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로 세계 교육을 혁신시키겠다는 야심으로 그를 따라 나온 애플사의 핵심인력을 중심으로 NeXT를 만들고 개인 재산을 털어 1천 500만 달러를 투자했다. 물론 이러한 그의 확신과 애플에서 그가 보여준 경영수완 덕분에 많은 투자가들이 그를 지원했다.
제품이 출시되기도 전에 로스 패롯으로부터 2,000만 달러를 투자받는가 하면 일본계 회사인 캐논에게서 1억 달러의 자본금을 영입하고 일류 대학인 스탠포드와 카네기 멜론을 끌어들일 정도로 거창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그는 결국 1993년 하드웨어 부분을 팔고 다시 소프트웨어 분야로 돌아와 빌 게이츠와 경쟁하는 것을 택했다.
NeXT와 함께 한 잡스의 경영 여정은 피곤한 것이었다. 10년 동안 경영하면서 경영적자에 허덕이다가 수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았다. 그는 비싼 교육비를 내고 ‘아무리 기술적으로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도 기존 시장의 제품들과 공유될 수 없으면 쓸모가 없을 수 있다’는 교훈을 배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잡스는 그러한 기간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컴퓨터 애니메이션 회사인 픽사르를 통해서 영화 ‘토이스토리’의 제작에 기여해 순식간에 다시 억만장자의 대열에 올라섰다. 잡스는 리더가 혁신에 앞선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요소가 많은가를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새로운 경쟁공간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에너지, 카리스마, 인내심, 추진력을 미래에 집중해야 하며 불가능은 없다는 신념이 필요하다는 것도 증명해 주었다. 그 결과의 성패에 상관없이 말이다. “잡스와 함께 일하는 동안 주의하지 않으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함께 일해본 경영자들이 말할 정도이다. 그만큼 그가 추구하는 비전은 원대했고 위험천만한 가시밭 길을 마다하지 않고 도전했다.
☆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보다 어렵다
아이러니컬하게도 1996년 애플은 다시 NeXT를 매입하고 잡스를 ‘무보수 컨설턴트’로 영입했다. 잡스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만든 회사의 백의종군하게 된 셈이다. 올해 다시 애플의 CEO로 취임하면서 기자와 주고받은 잡스의 응답이다.
“스티브, 애플사의 주식을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습니까? 애플을 소유하려는 의도가 있습니까?”
“글쎄요, 나에게 돈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티브, 돈이 아니라 상징적인 가치에 대해서 묻고 싶습니다.”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애플에서 그야말로 뼈빠지게 일했습니다. 아마 더 열심히 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애플을 돕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 과거보다 좀더 많은 시간을 가족과 보냅니다. 그간 최고경영진을 보강했고 좋은 팀을 구성하고 있다고 판단됩니다.···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보다 어렵습니다. 단순하게 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명료하게 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시점에 도달하면 태산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단순화시켜서 집중력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잡스의 주장이다. 그의 애플에 대한 애정은 차치하고라도 한 분야에 집중하기가 의외로 어렵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잡스의 경험담이다. 요즘 한 분야에서 잘하면 대학도 가고 성공하기 때문에 예전보다 훨씬 청소년들에게 수월해졌다는 세간의 평가이다. 그러나 한 분야에서 잘하는 것이 의외로 더 어려울 수 있음을 잡스의 길지 않은 경영 족적에서 배울 수 있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숙된 경영자 잡스가 새로운 각오로 운영하는 애플의 미래가 기대된다.
'경영' 카테고리의 다른 글
CEO 리더십 - 데이비드 팩커드 (0) | 2021.05.04 |
---|---|
CEO 리더십-IBM의 토머스 왓슨 (0) | 2021.05.04 |
CEO 리더십 - 록펠러 (0) | 2021.05.04 |
10년 만에 ‘1등 은행’을 만든 부드러운 카리스마-김승유 하나은행장 (0) | 2021.05.04 |
P&G (0) | 2021.05.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