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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CEO 리더십-도요타의 도요타 기이치로

by 휴리스틱31 2021.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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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리더십

 

도요타의 도요타 기이치로

 

1980년대 초반, 미국의 자동차 업계는 완전히 비상이 걸렸다. 그토록 자신했던 그들의 아성이 소위 ‘J-Car’라고 불리는 일본 자동차들에 의해서 아주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을 심지어 진주만의 쓰라린 기억과 비교할 정도로 자동차 제조업자들과 미국인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언론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 자동차 회사에서 해고된 노동조합 근로자들이 데모를 하며 일제 승용차를 쇠망치로 두드려 부수는 장면을 보도하곤 했다. 그러한 쇠망치의 희생물이 된 일제차들은 대부분 도요타 제품이었다. - 마치 그러한 사태의 주범이라도 된다는 듯이.

자동차산업은 종합산업이므로 나름대로의 강력한 이미지를 구축하지 않고서는 소비자의 관심을 끌기 어려워 경쟁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굴지의 자동차 회사들이 각자 독특한 평판과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회사들 중에서도 독자적인 제조문화 창조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고, 지난 20여 년간 전 세계 자동차 회사는 물론 모든 제조업의 연구 대상이 되어왔던 도요타 자동차의 창업자인 도요다 기이치로의 리더십을 살펴본다.

 

 

 

 

 

 

운명적인 역경을 겪으며

 

도요타자동차사는 방적기 발명가이며 도요타그룹을 창업한 도요다 사기치의 후원 아래 아들인 도요다 기이치로가 1933년경부터 준비하여 1937년에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남다른 경영비전과 제조업에 대한 혁신적인 판단을 가슴속에 담고 있었던 기이치로는 빠르게 성공하지만, 일본이 전시였기 때문에 운명적인 역경을 겪게 된다. 그러한 기업의 흥망성쇠를 통해서 그는 도요타가 오늘날 세계 자동차 업계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던 정신적인 기틀을 이룩한다.

1929년 기이치로는 포드의 루우지 공장을 방문한다. 그 당시 루우지 공장은 포드가 도계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조립 라인을 이용하여 대량생산에 성공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한 조립라인을 시찰한 기이치로는 자동차 조립생산에서는 모든 부품들이 저스트 인타임(JIT : Just In Time) - 사실은 저스트 온 타임이 올바른 표현임 - 으로 조립라인 옆에 준비되면 좋겠군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 어설픈 영어표현이 늘 그의 마음속에 맴돌아서 기이치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말을 인용하곤 했다.

그의 그러한 신념을 확인시켜주려는 듯 역사는 그에게 혹독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 초기 사업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2차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수록 부품조달의 한계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트럭을 주로 생산해서 군수품으로 납품하던 도요타사는 자재의 부족으로 인해 심지어는 헤드라이트가 하나밖에 없는 제품을 만드는 사태까지 경험한다.

많은 부품이 필요한 자동차 생산에 있어서 물자의 빈곤과 부품조달의 불균형이 가져올 수 있는 파국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것이다.

그는 일본은 물자가 빈약한 곳이다. 우리의 특성을 잘 반영하는 (저스트 인 타임) 생산방식을 개발해서 미국을 따라잡아라하고 외치기 시작했고, 경영진은 그의 비전을 이룩할 방법을 찾아서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애매한 개념이었지만, 그는 저스트 인 타임이라는 신조어로 우수한 젊은 엔지니어들에게 멋진 비전과 숙제를 던진 셈이다. 제조시스템에 대한 기이치로의 비전은 결국 실현되었고 오늘날 도요타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슈퍼마켓도 관람하자

 

1950년 회사가 파업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할 무렵,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기이치로는 조카인 도요다 에이지를 미국에 보내서 미국의 제조방법을 배우게 하였다. 그는 GM, 크라이슬러, 포드, 심지어는 스터드베이커까지 방문하여 자신이 본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또한 그는 미국의 슈퍼마켓들도 유심히 관찰했는데, 야간에 선반들을 빠르고 정확히 정리하여 제품 공급자들이 다음날 손님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제시간에 보충할 수 있도록 하는 정리정돈 시스템에 크게 감명 받았다.

그는 돌아와서 회사로 하여금 미국의 슈퍼마켓 시스템을 연구하도록 지시하고 6년 후 유망한 엔지니어인 오노 다이이치를 다시 미국에 보내어 현장답사를 시킨다. 에이지와 다이이치의 그러한 관찰과 통찰력은 일본으로 전수되어 적용되고 개선되었다.

그들의 그러한 미국 방문은 기이치로가 그토록 갈구했던 도요타의 JIT 생산방식을 1962년에 태동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1983년에 도요타는 미국시장의 23%를 점유했으며 바로 그 해에 도요다 에이지는 도요다 에이지는 도요타사의 회장에 취임했다. 1984GM 은 미국에서 도요다 제품을 생산하는 합작투자에 서명했는데, 당시 미국의 전문가들은 “GM의 합작투자의 주된 이유는 도요타가 어떻게 회사를 운영하는가를 보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GM이 이제는 도요타의 성공전략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JIT의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슈퍼마켓 운영법을 관찰하는 데서 나왔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최고 수준의 것만 모방하려는 습관이 있다.

도요타의 성공전략은 기업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필요에 따라서는 다방면으로, 그리고 다양한 수준의 모델을 눈여겨 보고 배우는 방법을 깨닫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약간은 여담이 되겠지만, 우리 대학생들이 영어공부를 위해서 독해하기도 어려운 잡지들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을 종종 본다.

그러한 그들의 영작 수준은 미국의 초등학교 3학년 수준도 안 된다. 미국에서 10년을 살고 보니 다 쓸데없는 일이다 싶다. 그저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여유있는 마음으로 소화하고 외우는 것이 생활영어 향상에는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목표 수준은 높아야 하지만,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도요타의 JIT 시스템이 탄생하고 완성된 것처럼.

 

 

 

 

 

 

 

살신성인의 경영정신

 

기이치로의 경영일선에서의 퇴진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눈물겨운 교훈을 남겨준다. 2차대전 후 1947년부터 도요타사는 소형 승용차를 생산한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은 패전의 대가를 치르고 있었고 모든 시민의 일상적인 걱정은 당연히 생활 필수품인데다가 인플레이션가지 겹쳐서 자동차의 구입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게다가 제품의 품질 또한 너무 조악하여 국제무대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도 아주 요원한 일이었다. 결국 판매부진으로 인해 재정구조가 최악의 상태에 이르게 되고 급기야 근로자를 대규모로 해고하려던 기이치로는 근로자의 파업에 직면한다.

1950년 중반, 무려 15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의 파업을 종결시키기 위한 타협안으로써 기이치로는 근로자 1,600명을 해고하고 부실 경영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이 사건은 기이치로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으며 그는 2년 후 세상을 떠난다 - 1년 후인 1951년부터 도요타사는 노사가 호흡을 함께 하는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서 제안제도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미 혹독한 시련을 치른 도요타인들은 회사를 살리자는 단결된 마음으로 제안제도에 참여했다.

그 결과 2,000만 건 이상이라는 믿기 어려운 정도의 제안이 건의되었으며 제안 채용률도 80%를 넘을 정도였다. 오늘날 도요타가 세계자동차업계의 선두주자 대열에 끼기까지는 노사간의 긴밀한 화합이 있었고, 그것은 기이치로의 살신성인의 정신을 이어받은 모든 도요다 가족들이 이루어낸 결실인 것이다.

 

 

3개월이면 도요타맨이 될 것이다.

 

도요타인이 전부인 도요다 시의 시민들의 겸손과 절약의 미덕은 일본에서도 남다를 정도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창업자의 유지를 물려받아 도요다 문화를 형성한 도요다 에이지는 어떠한 신세대가 도요타에 들어와도 입사한지 3개월만 지나면 훌륭한 도요타맨이 될 것이다.”라고 장담했다고 한다. 기이치로가 남긴 교훈은 그렇게 하나의 새로운 기업문화를 창조시키는 빛나는 업적으로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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