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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CEO 리더십-코카콜라의 에이서 캔들러

by 휴리스틱31 2021.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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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리더십

 

코카콜라의 에이서 캔들러

 

아마 여러분들은 10여 년 전에 소비자의 눈을 가리고 두 잔의 콜라를 마시게 하고서는 더 시원한 음료수 잔을 지명하도록 한 후 소비자의 선택이 결국 펩시콜라라는 사실을 광고하는 코카콜라와 펩시와의 콜라전쟁을 기억할 것이다. “펩시 챌런지는 정말 대단했었지요. 우리는 휘청거리고 마켓 점유율이 현저하게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뉴코크를 출시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이미지가 좋은 연예인인 빌 코스비를 광고로 이용하여 대대적인 광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뉴 코크는 실패했습니다. 고민 끝에 원래대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코카콜라 클래식입니다.” 이는 여러 해 전에 코카콜라사의 부사장으로 있던 사람이 리더십 강좌에서 직접 소개한 펩시와의 전쟁의 뒷얘기였다.

세계적인 청량음료의 대명사 코카콜라, 펩시, 마운틴 듀, 닥터 페퍼, 세븐 업 등 끊임없는 도전 음료들을 뒤로 하고 당당히 버티고 있는 코카콜라를 일으켜 세운 창업자의 리더십을 살펴본다.

 

 

 

 

 

 

 

코카콜라는 청량음료

 

에이서 캔들러에 의해서 이 시대 최고의 음료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코카콜라의 탄생은 존 템비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템비턴 외에 세 명의 동업자와 함께 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 프랭크 로빈슨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코카콜라라는 이름을 만들어 냈다. 그 이유는 그 음료의 주성분임을 쉽게 나타나게 해주고, 어감이 좋고, 당시 사람들이 ‘SSS'’BBB'처럼 반복적인 표현에 친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카콜라의 발명자인 존 템비턴은 연구에 몰두하고 온 정열을 판매에 기울였지만 그는 갑자기 자신의 소유권리를 팔려고 했다. 가족을 부양해야 했고 모르핀 중독자여서 점점 심해지는 통증을 진정시키기 위해 돈이 필요해서라는 소문이었다. 동료인 프랭크 로빈슨은 이 사실을 듣고 무척 놀랐으며 자기를 구제해줄 사람을 찾던 중에 에이서 캔들러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에이서 캔들러가 등장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캔들러는 로빈슨으로부터 코카콜라 제조법에 관하여 배운 후에 법적인 소유권의 필요성을 느끼고 코카콜라 제조법을 인수한 후, 19993월부터 동업으로 ‘The Coca-Cola Company’라는 이름의 회사를 차린다.

코카콜라가 처음에는 일종의 약으로 판매되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지금도 간간이 회자되는 얘기지만 코카콜라의 주성분 중의 하나가 코카잎이라는 특징이 그러한 출발을 만든 배경이 된다. 초창기에는 신문에 코카콜라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큼지막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캔들러는 이에 즉각 광고를 내어 코카콜라 때문에 코카인 중독을 일으킨 사례를 누구라도 제시해 보라고 도전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있었고 코카는 꼭 필요한 재료였기 때문이었다. 항상 자신의 주관으로 강력하게 일을 추진하는 그는 생산 분야보다는 판매 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중 대표적인 수단으로서 광고를 들 수 있다. 초기의 광고는 거의 일률적으로 코카콜라의 약효를 자랑하는 것이었다. 비즈니스맨, 흡연자, 그리고 어린 등을 대상으로 순차적으로 집중 광고를 시도하여 시장을 넓혀 나갔으며 무료 교환 쿠폰을 발행하여 판매를 더욱 촉진했다.

창업한 지 10년 후부터는 판매 전략을 대폭 수정하여 청량음료수로 발향 선회를 하게 된다. 프랭크 로빈슨이 여성 고객들로부터 코카콜라 = 이라는 이미지에 반대하는 편지가 자주 옵니다.”라는 보고를 접한 캔들러가 코카콜라를 약으로서가 아니라 청량음료로서 판매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여행객에게 제일 먼저 가르쳐 주는 것이 코카콜라는 코크라고 불린다는 사실이다. 그 덕분에 자기의 영어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여행객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코크를 주문해서 마시게 된다. 집요한 판매 전략과 광고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사용한 짧은 상품명이 오늘날도 거두고 있지 보이지 않는 성과이다.

 

 

 

 

 

 

 

 

1달러를 벌기 위해서 100리 길을 간 어린이

 

암팡지고 툭하면 싸우려 드는 에이서 캔들러는 대실업가의 이상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젊었을 때부터 인재에 밝았다. 그는 11명의 형제자매 중 여덟번째로 태어났다. 유복한 농원 주인이고 상인이었으며 금광 탐광사이기도 했던 그의 부친 샘 캔들러는 다른 금광들을 모으기 위하여 자기의 고장을 빌라리카라고 이름지을 정도로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자녀들에게도 독립심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넉넉한 가장 형편이었지만 자기가 쓸 돈은 자기 손으로 벌도록 하였다.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아들 에이서도 일찌감치 돈벌이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번은 그가 야생의 밍크를 고생 끝에 생포하였다. 그는 밍크 모피를 파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일은 없었으나, 모피를 한번 팔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00리가 넘는 애틀랜타까지는 당시 철도도 없었지만 그에게는 가장 알맞은 시장으로 판단되었다. 그곳에 가면 ‘2센트는 벌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에서 마차를 타고 애틀랜타로 무작정 갔고 그는 자그마치 1달러를 벌었다. 그것이 처음으로 그가 번 돈이었다. 열 살배기 꼬마가 한 것치고는 맹랑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의 적극적인 성격과 돈에 대한 집작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에이서에게 있어서 유년 시절의 특이한 점은 대부분 다른 리더들이 훌륭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평이 좋지 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 마사는 14세의 나이로 캔들러가에 시집을 왔으며 상당히 왜소한 체구였는데 우리 할머니는 누구에게나 잘난 체 명령을 했고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라고 캔들러의 아들이 할머니를 회상할 정도로 자상한 어머니의 모습은 지니지 못하였다.

1891년의 사진에 강한 인상의 모친이 성인이 된 아들들에 둘러싸인 모습으로 찍혀 있는데, 어머니나 자식들 모두 한결같이 입을 힘주어 다문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물론 당시에 사진을 찍는다 하면 상당히 얼굴에 긴장이 가는 시절이긴 하지만 그녀가 자녀들에게 강한 어머니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는 얘기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듯하다.

 

 

 

 

 

 

 

젊은 견습생

 

열 살 때 남북 전쟁이 시작되어, 캔들러는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전쟁 후 겨우 2년간 고등학교를 다니고 약국의 견습 점원이 되었다. 약국에 기거하면서 밤에는 라틴어, 희랍어, 화학 및 의학을 공부했다. 어렸을 때부터 의사가 되기를 꿈꾸었던 그는 약을 이것저것 배합하거나 병든 가축들을 돌봐주곤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약국에서 2년간 견습생을 한 그는 진자 돈벌이에 관심을 갖게 된다. 25달러 밖에 안되는 적은 급료를 2년간 받으면서 이래서는 안되겠어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21세기의 청년 캔들러는 트렁크 하나만 달랑 들고 애틀랜타로 떠났다. 어머니가 손수 지은 양복을 입고 호주머니에는 단돈 1달러 75센트밖에 없이 일을 찾아 대도시로 나온 그 당시의 이야기는 그가 성공한 후 자주 언급한 얘깃거리였다.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겨울날, 낯선 애틀랜타에 홀로 남게 된 캔들러는 집요하게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9시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조지 하워드라는 약국에 들어가니 무료해 보이는 점원이 짜증난 표정으로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캔들러가 경력을 말하자마자 그는 언제부터 일할 수 있소?”하고 물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라는 대답에 점원은 약국 주인에게 후임이 왔으니 자기는 당장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에이서 캔들러는 일자리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첫 급료를 받을 때까지 하숙비 지불을 연기해주기로 한 하숙집까지도 찾아냈다.

어떤 사람이 하품하고 비전 없다고 버린 자리에 들어와서 주인이 소유하고 있던 여러 개의 약국 중에서 하나를 캔들러가 인수하는 데는 불과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The Dun)이라는 신용금고 회사의 매니저가 성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청년이며 사업에 밝고 낭비 습관은 하나도 없다.”고 평했을 정도로 캔들러는 맹렬한 일꾼이었으며 돈 쓰는 데에 대단히 인색했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자수성가한 경영인의 표본이었던 셈이다.

 

 

 

 

 

 

 

에이서 제국의 시작

 

템비턴이 코카콜라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봄에 에이서 캔들러는 큰 돈벌이를 찾고 있었다. 34세라는 최고 활동기에 접어든 그는 이제 진짜 돈을 벌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미국 전체가 부의 축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가 보기에는 남부 제약 산업의 중심지로서 ‘BBB'’SSS'와 같은 제약회사의 본거지이기도 한 애틀랜타는 엉터리 약을 제조하여 미국의 어느 도시보다도 많은 수익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캔들러가 코카콜라의 법적 권리를 전면적으로 취득한 1888년까지는 그도 애틀랜타의 별 볼일 없는 사업가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가 20세기 초기에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청량음료가 된 코카콜라에 편승해서 애틀랜타의 대부호로 자리매김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나중에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1889년 초 캔들러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갖고 있는 것은 5만 달러의 빚과 코카콜라의 권리뿐이었다. 그러나 몇 달 후, 그는 건강을 회복했고 <애틀랜타 저널>지는 그의 약국을 번성하고 있는 약국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발생한 기적 같은 변화였다. 코카콜라는 무서운 기세로 성장했으며 캔들러는 직접 고향에 돌아가 옛 고용주들에게 코카콜라를 그들의 약국에서 취급해 달라고 부탁했다.

1889년 총 판매고는 원액 2,171갤런이었다. 한 잔에 1온스의 원액을 썼으므로, 유리컵으로 하면 6, 1,000잔 분이 팔린 셈이다. 다음 해 첫날, 에이서 캔들러는 자기의 재정 상황을 총점검해 보았다. 부채는 없고 자기 집을 포함해 순자산이 17,326달러에 이르고 있었다. 모두 다 1년도 안 되어서 이루어낸 성과였다. 자산 항목 중에는 코카콜라 특허 상표 및 기타 : 2,000달러라는 것도 있었는데 이 자료가 캔들러가 얼마를 주고 코카콜라의 권리를 샀는지 대략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그야말로 그에게 코카콜라는 노다지 금광을 찾은 것이나 진배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아이템이 탁월했지만 캔들러가 가만히 있었는데도 그러한 성공이 굴러 들어온 것은 아니다. 코카콜라에 자신의 미래가 달렸다고 확신한 캔들러는 명확한 권리 증서를 만들 결심을 하고 필요한 모든 서류를 준비해서 우선 미국 특허국에 제출했다. 약국을 팔고서는 전당포와 헌옷가게, 그리고 흑인 상대 주점이 있는 허름한 건물의 2층에서 그는 코카콜라를 본격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했다. 40갤런들이 솥에서 끓이는 조제액이 늘 흘러넘쳐 달착지근하고 진득진득한 혼합액이 바닥 널빤지를 통해 아래층으로 흘렀기 때문에 이웃들로부터 심한 눈총을 받아가면서 작업을 계속했다.

코카콜라 제조가 기본 체제를 갖추자 그는 광고에 총 매진한다. 코카콜라를 어떤 계절에도 어울리는 탄산음료라고 선전하기도 하고, 또한 우수한 의사들도 코카콜라를 심신의 피로, 두통, 권태감, 우울증에 좋은 약으로서 추천하고 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약국에 우송도 하였다. 그 편지의 말미에는 코카콜라의 주 고객은 효능이 없는 것에는 돈을 쓰지 않는 비즈니스맨이나 전문직의 사람들이다라고 강조했다. , 그는 코카콜라를 일에 좇기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강장제라고 은근히 강조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후에 한동안 마케팅 전략의 핵심이 되었다.

캔들러는 그렇게 성공했다. 남이 지겨워한 자리에 취직해서 약국을 인수했으며 남이 값싸게 버린 코카콜라 권리를 사서 하루아침에 대실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마치 운이 억세게 좋은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기회를 어떻게 잡았느냐 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남이 못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안목과 적절한 추진 전략, 이것이 바로 기업 경영 리더가 갖추어야 할 핵심요소가 아니겠는가!

 

 

 

 

 

 

 

최고가 되기를 바란다

 

코카콜라 덕분에 캔들러는 큰 부자가 되었으나 그는 자녀들에게는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자기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캔들러도 자식들에게 독립심을 가르치고 싶었으며 이러한 그의 교육 방식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잘 말해 주고 있다. 한번은 아들 하워드가 용돈을 달라고 하자 캔들러는 하워드가 사용한 금액을 10센트짜리 바나나에서부터 25센트의 칫솔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한 지출내역서를 내보였다. 그러고는 나머지 15달러 40센트라는 숫자 밑에 붉은 선을 긋고 나서 그만한 돈이 남아있어야 한다고 아들을 꾸짖었을 정도이다. 그는 자녀들에게 절약을 강조하는 동시에 우수한 성적을 올리도록 강력하게 요구했다.

하워드가 애틀랜타에 있는 에모리대학을 다니던 시절, 캔들러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하워드에게 썼다. “나는 너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네가 너 자신의 기회를 넓혀갈 수 있도록 부모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음을 잘 이해해 주길 바란다. 나는 네가 학급에서 최고가 되기를 바란다한편 생각해 보면 그 세대의 우리 아버지들이 갖고 있는 그러한 분위기이다. 시골 아버지가 모처럼 자필로 적어 보내는 편지들 말이다. 거기 덧붙여서 말로만 신앙심이 깊은 체 하지 말고, 그것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도록 해라··· 너의 생활로 항상 그리스도를 나타내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있다는 등의 설교조의 지시도 그의 편지의 단골 메뉴였다.

그러나 캔들러의 자녀 교육 스타일은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고 다소 자기 중심적인 편협한 면도 보여준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자녀들에게 오늘 속달 우편으로 선전물을 보내겠으니 옥스퍼드의 소다수 매장에 배포하도록 해라. 또한 빈병을 조사하여 코카콜라 대신에 와인 코카를 제공하고 있는 곳으로 의심되는 약국을 몰래 조사하라는 등 이런저런 형태로 자기 사업을 도울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열정적인 성공 의지가 그를 사로잡았던 시기였다고 볼 수도 있다. 많은 것을 동시에 이루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전국적인 음료로

 

재미있는 것은 그의 꼼꼼하고 철저한 성격이 코카콜라의 사업에는 적격이었다는 사실이다. 철도망의 중심지였던 애틀랜타의 지리적인 위치도 코카콜라의 판매에 대단히 유리하게 작용했다. 1895년 말, 캔들러는 주주들에게 코카콜라는 이제 미국의 모든 주에서 판매되고 애용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하기에 이른다. 불과 창립한지 4년만에 이룬 결과이며 미대륙의 크기와 당시의 교통 사정을 생각해 보면 대단한 성공이 아닐 수 없다.

캔들러가 코카콜라를 고객에게 적접 판매하기만 했다면 이러한 획기적인 성공은 거둘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는 직접 판매해서 자기의 사업을 늘리거나 판매원을 증원하기보다는 유통업자나 탄산수 매장의 경영자들에게 그 이익을 함께 나누는 길을 택했다. 어느 지역에서나 중개업자 - 대개는 제약의 도매업자 -를 찾아내어 장기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구축했다. 1895년 원액의 도매값은 갤런당 평균 1달러 29센트였는데, 캔들러는 자기의 이익을 30센트로 억제하고 대신 중개업자나 소매업자가 상당한 마진을 얹어서 이익을 낼 수 있도록 했다. 그러한 판매정책 덕분에 많은 지역에 경쟁자보다는 후원자가 즐비하게 되었으며 그들은 한결같이 코카콜라 선전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본인들의 수입과 직결되었기 때문이었다. 단기적인 이익을 과감히 포기한 캔들러의 선택이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1899, 코카콜라사의 지방 순회 세일즈맨들은 전 미국을 철도로 돌면서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청량음료의 판매가 아직은 계절의 영향을 받고 있어서 그들 대부분은 겨울 동안은 면화 구입업에 종사했다. ‘코카콜라맨으로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젊은 세일즈맨들이 지방 순회에 나가면 많은 유혹이 따라 다니게 마련이다. 그래서 세일즈맨과 농가의 딸에 관한 진한 핑크빛 소문과 농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캔들러는 그러한 세일즈맨들에게 도덕성을 특히 강조했다. 그들이 지방 순회에 나가기 전에 그들에게 코카콜라의 신조를 심어주기 위하여 단기간이나마 제조부에서 일을 시켜 원료의 순수성과 비밀 처방의 존엄성, 그리고 제품의 우수성 등을 강조했다. 그의 그러한 노력이 주효해서 코카콜라맨들은 신사라는 평을 들을 수 있었다. 세일즈맨들은 초기의 기독교 전도사들처럼 잔감과 소문, 무관심의 벽에 부딪히곤 했지만 마치 순고자들처럼 어떤 고난에 처했어도 그 신념을 관철시켰다. 캔들러는 코카콜라맨들에게 우리들이 파는 것은 세계 최고의 제품이며, 회사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회사임을 믿게 만들었다. 이런 강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세일즈맨들은 온갖 장애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감정적인 성격은 약점인가?

 

100여년 애틀랜타의 한 소다수 판매대에서 첫선을 보인이래, 코카콜라사는 이제 세계적인 대기업이 되었고 코카콜라는 이제 세계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가장 친숙한 상표로 자리 잡았다. 유엔 가입국보다도 많은 세계 195개 나라에서 500억 달러라는 엄청난 판매수량을 자랑하는 기업 코카콜라는 자사의 주주들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고, 미국 남부 지역에서는 수많은 백만장자를 만들어 냈다. 또한 본사 소재지인 애틀랜타를 세계적 수준의 도시로 변모시켜 1996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다. 회사는 제삼세계, 특히 10억 이상의 잠재적 소비자가 거주하는 중국에서 급속한 시장 확대를 통하여 이제까지의 성과를 훨씬 능가하게 될 21세기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오늘날의 토대는 에이서 캔들러가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키가 작은 캔들러는 일종의 나폴레옹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어서 기병대 제복을 입는 것을 좋아했고, 항상 자식들이나 부하 세일즈맨들에게 남자답게 행동하라고 설교했다. 캔들러는 결코 다부진 체구는 아니었으나, 때때로 짜증을 심하게 내서 사원 모두는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다.

업무에 관한 한 깐깐하고 냉정하게 곧은 태도를 지키는 것으로 유명해서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광고비에 대해 까다롭게 다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마음이 여린 사무원들은 눈물이 핑핑 돌 정도입니다. 그게 바로 광고비 예산안을 검토할 때의 에이서 삼촌 모습이었지요.”라고 캔들러의 조카 중 하나인 윌러드가 무료 시음에 관한 광고비 예산안을 검토할 때의 일화를 소개할 정도이다. 이러한 까다롭고 개성 있는 행동으로 인해서 그는 존경할 만한 타고난 사업가라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캔들러는 자기가 세운 목표를 향해서 정력적으로 매진한 경영인이었다. 사업에 성공하고 나서도 그는 사생활에서도 성실하다는 평판을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그는 버릇처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생활 신조 일어나 일하라!’를 마음속에 되새기곤 했다. 그는 도착한 우편물의 편지 봉투의 모서리를 뜯어서 펼쳐 가지고 모아 두었다가 메모지로 사용할 정도로 검소했다. 기업 경영인으로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캔들러는 부를 축적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나는 절대로 돈을 지니고 있지 안습니다. 돈이란 쌓아두라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나는 내 자신과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올바르게 활용하려고 노력합니다.”라고 형에게 고백한 적도 있다. 캔들러의 견해에 따르면 돈은 정당하게 벌어서 유용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믿고 있을때 에이서 캔들러는 극도로 감정적인 상태가 되곤 했다. 원리주의 감리교 신도였던 에이서는 신앙부흥집회에 나가면 너무 흥분한 나머지 몸이 상할 정도였다. 그러한 배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자신의 사업의 확장과 부의 축적에 대한 인내심 있는 큰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카페인 문제로 동료와 크게 다툰 후 그는 자신의 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고 경영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감정적인 ASU을 갖고 있었던 캔들러, 아마 그것이 그가 가지고 있었던 약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리더는 따스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감정적인 모습은 큰 조직을 이끌고 가기에는 약점이 된다. 캔들러의 모습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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