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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CEO 리더십 - 카네기

by 휴리스틱31 2021.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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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리더십 - 카네기

 

강철왕 카네기

 

사장님, 강철 1톤에 대해서 지불되는 전체의 액수는 공정하다고 우리들의 의견은 일치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봉급 산정 방법이 좋지 못합니다. 만약 사장님이 제 일을 맡는다고 한다면 얼마나 받아야 한다고···.” 그러자 갑자기 사장이 가로막고 나섰다. “잠깐, 잠깐 빌리, 그렇게는 안 된다네. 나는 누구의 것이건 남의 일을 뺏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는다네. 남의 일을 빼앗는 것은 숙련공 사이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위반이거든.” 이러한 동문서답 식의 갑작스런 조크가 회의석상의 분위기를 백팔십도 바꾸어 놓았고 어려운 봉급 얘기는 쉽사리 잘 풀려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숙련공에 비유하면서 재치 있게 회의를 이끌어 나간 사장이 바로 숱한 화제를 몰고 다녔고 처세술로도 유명한 앤드류 카네기이다.

종업원들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금전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안고 있는 어려운 점을 그들이 처해 있는 시각에서 잘 이해해 주고 존중해 주며 공정하게 대해 주는 것이다. ‘내 종업원의 우정만큼 훌륭한 배당을 가져다주는 투자는 없다고 생각했던 카네기. 그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긍정적인 노사관계 정립에 매우 중요한 비전이자 도전이 된다. 카네기의 그러한 경영철학이 지금으로부터 무려 100여 년 전 시대의 착상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자못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의 반은 부를 축적하고, 나머지 반은 부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신념으로 원칙을 고수한 카네기의 리더십을 살펴본다.

 

 

 

 

 

 

 

완벽한 성장배경

 

앤드류 카네기는 스코틀랜드 뎀퍼린시의 변두리에 사는 카네기가에서 태어났는데, 이름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지혜가 풍부하며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로 뎀퍼린시의 기업가들과 연합하여 대학을 설립하였다. 외할아버지인 토머스 모리슨은 훌륭한 웅변가였으며 <프레기술>이라는 잡지의 발행인이었고 지방 좌익 급진당의 당수이기도 했다. 외삼촌인 베리 모리슨은 도덕성이 풍부하고 준법정신이 강했으며 철저한 급진주의자여서 공중 집회의 권리를 옹호하다 구속되기도 했다. 또한 숙부인 로다는 화술의 대가였다. 이러한 모든 카네기가의 사람들이 카네기의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한 인간이 자라난 곳의 환경은 그 사람의 성장에 잠재적인 자극을 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카네기가 태어난 뎀퍼린시는 11세기의 말콤가부아 왕과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 왕비 마거릿이 쌓아올린 스코틀랜드의 웨스트인스트라고 불리는 성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구에서 3마일 정도 떨어진 북쪽의 고지에 위치해 있어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남쪽은 에든버러, 북쪽은 오치루스의 산봉우리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 환경에서 자란 카네기는 시, 노래, 소설 등과 함께 역사와 전설에 심취해서 희망과 풍부한 정서를 향유하는 축복을 받고 자랐다. 게다가 뎀퍼린시 자체가 급진적인 사고가 팽배해 있는 도시였으므로 그에게 음으로 양으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터전도 제공한 셈이다. 이러한 그의 성장 배경은 역경을 딛고 성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잡고 있는 많은 기업인들과는 자못 대조적인 모습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그의 마음이 이러한 주어진 환경에 대한 감사함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감사하는 마음, 그것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베푸는 넉넉함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발견하는 재능

 

카네기가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 중의 하나로 그가 종종 술회하는 유년 시절의 얘기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카네기는 친구들을 설득해 봉사팀을 만들어서 그가 기르고 있는 토끼의 먹이를 조달하도록 했다. 그에 대한 대가로 토끼가 새끼를 나면 친구들의 이름을 토끼에게 붙여주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토요일은 학교에 가지 않았으므로 그의 친구들은 거의 하루종일 토끼 먹이를 뜯기에 바빴다. 그가 훗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일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불리한 거래를 맺었는데도 모두 여름 내내 열심히 민들레나 클로버를 뜯어다 주었다. 대가치고는 참으로 희한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노동에 대해 이처럼 형편없는 보수는 아직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당시에는 나에게 그밖에 그들에게 줄 물건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 푼의 돈도 없었다. 이 계획이 나의 내부에 있던 조직력을 최초로 발휘한 것이고 이것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 훗날 나의 성공의 토대가 되었다는 생각에서 나는 이 기억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라고 회상했다.

그가 유년시절의 이 스토리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가 무엇에 초점을 두고 있는가는 잘 보여주고 있다. 카네기의 성공담은 그가 남보다 능력이 있다는 데 있지 않고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선택하는 재능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누구라고 지녔으면 하는 귀중한 능력이다. "나는 증기기관에 대하여 아무런 지식도 없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훨씬 복잡한 기계인 인간을 알려고 노력했다."고 그는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라는 매우 중요한 자원을 다루는 기술을 터득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기업가나 리더들이 첫 번째로 꼽는 것이 인간경영이고 그들 중에서도 그 방면에 가장 으뜸인 카네기가 아닌가.

카네기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마나고 그러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원칙을 정해 놓고 의사결정을 하였다. 한번은 스코트라는 인물이 카네기에게 보증을 서 달라고 요구했다. 카네기는 한 마디로 거절하고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설명했다. “사업가로서 여러 가지 부딪히게 되는 문제 중에서도 사업상의 계약 서류에 보증을 서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자신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해서 양심적으로 대답할 수 있다면 쉽게 타개할 수 있다.

첫째는, 이 보증을 섬으로써 부담하게 될지도 모르는 최고의 액수를 불편 없이 갚아줄 만한 재정적인 여유가 있는가이다. 둘째는 보증을 서 주는 친구를 위해서 그만한 돈을 버릴 만한 각오가 되어 있는가이다. 이 두가지 질문에 대답하고 나서 그렇게 한다면 상관없다. 만약 첫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긍정적이었다면 보증을 설 적이 아니고 요구한 만큼의 금액을 당장 그 사람에게 주어 버릴 일이다. 자기 이름을 빌려주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어서, 현명한 사람은 자기 이름을 소중하게 여기는 법이다.” 카네기는 이처럼 빈틈없는 성격에 대원칙을 정해 놓고 그것을 근거로 판단하고 행동했다.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

 

카네기는 어릴 때 전보 배달에서부터 시작해서 제철 사업을 할 때까지 수많은 직장을 다녔고 사업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실업계에서는 '철부지 애송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카네기는 도전적이었다. 그는 업무를 빨리 익혔고 성장속도 또한 빨랐기 때문에 젊은 애송이 시절에 이미 몇 백만 달러를 거래하고 있었다. 그러한 카네기가 마음속에 품고 자기 발전에 사용하고 있었던 철학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울 기회가 있으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시험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카네기는 순간순간의 기회를 잘 포착하여 성공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직장을 옮길 때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할 때 그의 이러한 능력이 발휘되었다. 철도회사에서 일할 시절에, 남북전쟁 때문에 태평양 연안의 철도가 문제가 되자 국회는 선로 건설의 장려 법안을 제정하였다. 공사는 오하이오에서 착수하여 마침내는 샌프란시스코까지 연장할 계획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카네기는 회사에 캘리포니아 선로에 침대차 배급의 계약을 맺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띄웠다. 그 결과 침대차 사업이 빠르게 발전하여 수요를 충당하지 못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카네기의 독특함은 단연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에 있다. 그가 아직 어렸을 때의 이야기이다. 전보 배달부를 하기 위해서 면접시험을 쳤다. 면접관이 "언제부터 일을 할 수 있느냐?"라고 묻자, "지금부터 당장 시작할 수 있다."고 그는 대답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즉시 포착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카네기는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킹스톤 교량 제작소 운영 당시 그의 경영방침에도 잘 나타나 있다. "공사를 할 때 가장 좋은 자재를 충분하게 사용하라. 작업을 엄격하게 검사해서 가장 안전한 것을 만들라." 최고의 품질을 선사해서 한 번 찾아온 공사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물씬 풍긴다. "기회를 그 자리에서 포착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카네기는 외치고 있다. 기회를 잡는데 게으른 사람들에게 근대 최고의 경영자가 주는 경고이다.

 

 

 

 

 

 

 

한 가지 일에 정통한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

 

카네기는 공업계에서 거성이었지만 금융계에 대한 유혹에 자주 빠지곤 했다. 그가 해외에서 여러 차례 거둔 성공으로 인해서 그러한 유혹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는 공업을 시종일관 본업으로 간직했다. 무엇이든 구체적인 것을 만들어서 그것을 팔고 싶어했으며 다른 분야에서 얻은 이익은 언제나 피츠버그의 공장을 확장하는 데 투자하였다.

펜실베니아철도회사 시절의 친구들과 서부 여러 곳의 철도 건설에도 투자했었으나 그 사업에서 차례차례 손을 떼어 "하나의 광주리에 모든 알을 담아서는 안 된다."는 격언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 좋은 알을 하나의 광주리에 담아두고 그 광주리를 소중하게 지키기로 한 것이다. '무슨 사업이든지 성공하려면 오직 그 사업에 정통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그의 소신은 어떤 일에서나 눈부신 성공에 이르게 하는 핵심요소를 스스로 완전히 습득하는 것이었다. 정력을 여러 가지 분야에 분산시키는 것을 카네기는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성공한 사람들은 어느 누구나 하나를 택해서 끝까지 거기에 종사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강철공장에 전력투구하여 제1인자가 되려고 결심했다.

카네기는 평생의 업으로 결정한 사업에 시간과 정열을 전부 쏟아 넣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본의 마지막 한 푼까지도 투입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우리 속담에도 이러한 상황을 비유한 표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막상 이것저것 일이 잘 풀리게 되면 욕심이 생기어 새로운 일을 벌이게 되고 또 일이 잘 안 되면 심지가 깊지 못해서 바꾸는 통에 카네기가 지적한 일을 지키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카네기는 기업인이면서도 영국 철강협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가 회장으로까지 추대되었다. 영국 국민이 아닌 사람이 회장이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미국에 살기 때문에 그 맡은 바 소임을 다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퇴하였으나, 결국은 이 영광된 자리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의 전문성을 확인시켜 주는 면류관이었다. 훗날 사람들이 그에게 '강철왕'이라는 닉네임을 붙여줄 정도로 철강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 우물만 파겠다'는 그의 철학에 전적으로 기인한다.

 

 

 

 

 

 

 

미래를 보는 안목

 

19세기 말의 철강산업은 성장기에 있었으며 산업 발전의 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제철에 화학 재료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용광로 기술자들은 억세고 거친 외국인이었으며 용광로의 상태를 경험이나 감각으로 진단하는 비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카네기는 원료 공급원의 확실성과 제품의 품질향상을 위해 화학 물질을 이용한 과학적인 방법을 시도하였다.

최초로 용광로 사업에 화학자를 고용한 선구자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그의 회사는 저가의 원료를 사용하여 고품질의 강철을 생산하게 됨으로써 많은 이익을 남김과 동시에 과학적 경영을 하게 되었다. 이 비결을 발견한 덕분에 1872년 용광로를 건설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이것은 최초의 실험적인 용광로로서 경제적인 측면을 중시한 사업이었다.

기술적인 축적으로 인해 카네기는 다른 동업자들이 사용할 수 없다고 돌보지 않는 이름도 없는 산에서 채석된 광물을 사들였다. 그리고 품질이 우수하다고 호평을 받아 아주 비싸게 사들인 산을 도리어 전적으로 무시해 버렸다. 유명한 미주리의 파일럿 노프 철광은 그 좋은 본보기이다. 말하자면 비싼 광석보다는 일반 광석에 더 많은 이익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그가 기술적인 면에서 남보다 앞설 수 있었던 이유는 미래를 보는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안목은 그의 책사랑과 무관하지 않다.

카네기는 지식을 스스로 찾는 사고를 지녔었다. 카네기는 전보배달부 시절에 제임스 앤더슨 장군이 공개한 400권의 책으로 인해 문학에 취미를 갖게 되었고, 후에 은혜에 대한 보답 의미에서 앤더슨 장군의 기념비를 세워 주었을 정도이다. 이러한 지식을 축적하려는 노력과 문학적인 사고가 새로운 시각에서 사업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그는 새롭게 떠오르는 착상을 추진하기에 충분한 도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돈은 어떻게 써야 하나

 

우리는 매월 토요일 오후에 반드시 피츠버그로 가서 다음 달에 필요한 물건을 모두 도매값으로 사들이기 때문에 3분의 1정도는 절약이 됩니다. 만약 사장님이 1개월이 아니라 2주마다 급료를 주신다면 이런 사람들에게 급료를 1할이나 혹은 그 이상 올려준거나 다름없이 고마운 일일 겁니다.” 한 젊은 직원이 사장인 카네기에 한 제안이다. “에드워드 군, 자네 말대로 하겠네.” 카네기는 이 사건을 계기로 부의 공평한 분배와 사회에 대한 공헌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의 저서인 ()의 복음에서 주장한 부의 분배 사업을 실천하기 시작했으며 분배 정책의 시작은 자기 공장 내의 근로자에게 먼저 돌아갔다. 400만 달러를 안전사고를 위한 이재민 구제 및 부조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연금 기증을 하였고 사내의 도서관 및 회관 등의 유지비를 지원하였다. 전쟁에 참여한 벹랑들을 위해 봉사하거나 이들을 구하려다 생명을 잃은 사람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베테랑 기금도 설정하였다. 또한 은퇴한 교수들에 대한 연금으로서 카네기 장학 기금 1,500만 달러를 내놓았다. 열과 성의를 다한 유명한 노교수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처럼 그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결코 없었다.

지역 발전에도 그가 기여한 바는 대단히 크다. 도서관 기증을 시작으로 해서 박물관, 공업학교, 대학교 등을 포함해서 많은 건물들을 피츠버그시에 세워 주었다. 또한, 워싱턴에 카네기 협회를 창설하였다. 이 협회는 연구, 조사 및 발명 등을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하도록 장려하고, 또 응용연구를 통해 인류 발전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 협회에서는 아주 많은 업적을 낳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할 만한 일은 놋쇠와 나무로 만든 요트로 바다를 항해하여 기존의 잘못된 항해 지도를 정정하여 세계여러 나라에 커다란 도움을 준 것이다. 이러한 카네기의 부의 사회 환원이 그를 근대 최고의 기업인으로 존경하게 만드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인 것은 당연하다.

사활을 걸고 어렵게 번 돈을 어떻게 써야 된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새벽 곰탕 장사를 수십 년 해서 모은 돈을 대학에 기증하는 할머니가 있는 반면 그와 반대되는 행동으로 빈축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가 다 자신의 판단이고 결단이다. 다만, 오늘날 우리들의 뇌리 속에 남아 있는 카네기의 명성과 사회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그이 족적을 되새겨 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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