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영

리더십 CEO - 콘라드 힐튼

by 휴리스틱31 2021. 5. 4.
728x90

리더십 CEO - 콘라드 힐튼

 

힐튼호텔의 콘라드 힐튼

 

변호사 : “당신은 무디엑도 빚을 지고 있소. 소오튼에게 빚이 있고, 엘파에서는 마시어스에게서 땅을 빌리고 있습니다. 코니, 부채가 100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천년이 걸려도 변제하지 못할 겁니다. 그만 포기하세요. 알겠습니까?”

힐튼 : “그럼 아직 남아 있는 유일한 것마저 잃어버려야 합니까? 신용까지를? 신용은 나의 생명이오. 파산할 수는 없소. 그렇게 하면 신뢰를 버리고 희망을 잃는 일이오. 만일 이것들을 잃는다면 나는 죽은거나 마찬가지요. 나는 그것을 알고 있소.”

 

위의 짧은 대화는 힐튼의 일기에 나오는 얘기이다. 대공황 뒤, 집도 절도 없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변호사는 파산선고를 할 것을 권유하였다. “안 됩니다. 내가 파산을 선언한다면 나를 믿어 준 나의 친구들을 기만하는 것이오!”라고 그는 반박하였다. 힐튼은 파산을 개인적인 치욕의 낙인이며 패배를 자인하는 것으로 여겼으며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배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부전자전

 

콘라드 니콜슨 힐튼은 1865년 여덟아이 중 장남이자 둘째로 태어났다. 힐튼의 경영스타일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 오거스티스 힐튼은 '모든 인간 자신이 본인의 성공과 행복에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음식이나 공기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곤란에 직면하였을 때 찾아갈 수 있었던 피난차거 이었다. 말하자면 일벌레였었던 셈이다.

힐튼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상점에서 일을 하면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에서부터 흥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배웠다. 외상거래를 어떻게 하는가, 노련한 손님들을 어떻게 다루고 장사를 어떻게 하는가를 배웠으며, 언제 어떻게 이야기를 결론짓느냐, 언제 어떻게 밀고 나가야 하는가, 그리고 흥정에 있어서 절대로 초조, 신경질, 불안 등을 보이면 안 된다는 등의 교훈을 습득해 나갔다. 이것들이 훗날 오래도록 그의 생활에 절대 필요한 생활철학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독립시켜 주지 않았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힐튼은 완전한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어떠한 모습을 갖게 되는가도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런 일이 영향을 미쳐서인지는 몰라도 그가 사람을 채용할 때는 그 사람에게 일을 맡겨 보고서 그 결정이 옳았나를 확실히 파악해 보는 방법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힐튼에게 의식이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의 어머니 메리 로우파스 힐튼은 깊은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기도는 생활의 일부분이며 생명의 근원이고 교육의 힘은 크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었다. 힐튼도 어머니의 충고와 신앙에 영향을 받아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항상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았다. 한때 하나님에게서 떠나 방황하던 시절,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우리 인생에 필요하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얼마 전, 인터넷에 미국의 성공적인 경영자의 성장 시절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가 나온 적이 있었다. 설문 중의 하나가 청년기까지 양친이 모두 살아 있었는가, 하는 것이 있었는데 85%가 그러했다는 응답이었다. 특히 리더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영 세계에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일면을 얘기해 준다. 힐튼도 그러한 면에서는 절대적인 부모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힐튼이 살아있다면 부모가 오랫동안 살아계신다는 자체가 복이고 행운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우리 시대를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큰 배를 타고 싶으면 큰 바다로

 

군복무를 마치고 31세가 된 힐튼은 '무엇인가 이룩해야 되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현실은 그리 쉽지 않았다. 열세 살에 사무원, 장사, 증권 대리인, 정치가, 은행원, 군인 등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18년 동안 쌓은 갖가지 일에 대한 경험뿐이었다. 수중의 돈은 단돈 50달러였다.

젊은 시절 은행가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직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시절이다. “어머니, 모든 것은 지금부터라고 생각합니다.” 고향을 떠나서 내 사업을 하겠다고 힐튼은 어려운 입을 열었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34년동안 반려였던 남편을 잃은 처지이고 장남인 그가 오랜 군대 생활에서 겨우 집에 돌아온 시기였다. 그러나 모친은 단호히 말하였다. “너는 너의 신천지를 찾아내야 한다.” 집안 일이 걱정이 되어 주저하는 빛을 보이는 아들에게 그녀는 다시 말하였다. “너의 아버지의 친구 분이었던 어떤 위대한 개척자가 일찍이 큰 배를 타고 싶으면 큰 바다로 가라고 한 말이 있다. 코니야 알겠느냐?” 이런 대목이 참 어려운 장면이다.

당장의 아픔을 뒤로 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가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경우 현실을 뒤로 하는 아픔을 절실히 느끼는 마음이라면 감히 미래를 향해서 가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나 그 아픔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면 다시 한번 심사숙고를 할 것을 권한다. 그 아픔의 정도가 미래에 놓여 있는 불확실성을 헤쳐나가는 힘으로 환원된다는 경험에서이다.

힐튼은 곧 언젠가는 뉴멕시코에 힐튼 은행의 체인을 만들고 말겠다는 꿈을 지니고 알버쿠키시로 출발한다. 그러나 알버쿠키는 기존 상권들이 형성되어 있어서 별반 새로운 기회가 없어 보였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갈까?’하는 회의감도 들었지만 친구 아버지의 권유를 받고 텍사스 행을 결심한다. “나는 꿈을 좇고 있었습니다. 커다란 꿈을···그런데 그 꿈의 일부가 갑자기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석유가 있는 곳에는 생동력이 있다. 석유의 땅인 텍사스에서 개척자가 되어 텍사스 은행 체인을 개척하자!’하는 신념이 생겼습니다.” 텍사스로 떠나던 당시를 회상하는 힐튼의 말이다.

 

 

 

 

 

 

 

부자가 되는 방법

 

의외로 힐튼이 텍사스에서 기반을 잡은 것은 호텔 사업이었다. 그의 첫 호텔은 모오블리 호텔이었는데 그곳은 식당과 객실을 갖추고 있었지만 늘 객실이 부족한 편이었다. 힐튼은 이때 두가지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한가지는 모오블리 노인이 다시 호텔에 돌아와서는 손님을 툭툭 찌르면서 테이블 위에 재우고는 손님이 양해만 해 준다면 테이블 위에라도 돈을 내고 자겠다고 했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또 한가지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샌안토리오에서 산 LC스미스의 12구경 구너총을 휘두르면서 너는 80파운드를 벌 기회를 놓쳤다. 같은 운임을 내고 못 한 통을 더 부칠 수 있단 말이다. 그렇게 일을 하면 부자가 되기는 글렀다.”고 호통을 치는 꿈이었다. 힐튼은 아침이 되자마자, 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는 작업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침대가 돈을 벌어준다. 시스코에는 우리 호텔의 손님들의 식욕을 채워 줄 값싼 음식점이 얼마든지 있다.” 그는 목수를 불러서는 식당을 없애고 거기다가 객실을 여러 개 만들었다. 그리고 큰 탁자를 절반으로 잘라내 신문, 담배 같은 것을 파는 자판기를 놓았다. 로비 한족 구석에는 그때까지 거기 있었던 종려나무 화분을 없애고, 선물을 파는 조그만 가게를 내게 하였다. 현몽 덕분에 시설 개조 몇 주만에 회계장부가 놀랍도록 좋아졌으니 단단히 꿈덕을 본 셈이다.

아마 많은 분들도 꿈에 대한 이상한 경험을 하였을 것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모 교수님은 지구물리학을 전공했는데 대학원 시절 논문 아이디어를 곧잘 꿈에서 얻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함께 공부하던 시절 그분이 가끔 꿈 잘꾸면 몇 개 건지는데···.”하는 얘기를 해서 당시는 웃어 넘겼는데 속된 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평소 그만큼 몰두해 있다는 얘기이다.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나도 꿈이 현실이 된 경우는 여러 번 있다. 놀라운 것은 정확히 숫자를 맞혀 내기도 했다는 것인데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이다. 힐튼의 현몽은 그에게 사업에 대한 영감을 주었고 그는 과감하게 추진했다. 열정적인 관심이 가져다주는 선물이었던 셈이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증권은 신앙

 

비교적 순탄했던 힐튼이 처음으로 어두운 골짜기를 걸어가지 않으면 안될 시기를 만난다. 바로 미국 전체가 대공황에 빠진 시기였다. 그는 이 기간을 지나면서 겸손이라는 단어를 배울 수 있었고 모든 물질적인 것이 파괴되었을 때 신앙이야말로 유일하게 믿을 만한 보증수표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어떤 때는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저축한 돈을 나의 손에 안겨주었다, 어떤 때는 강력한 비즈니스의 경쟁 상대가 한쪽 손으로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가 싶더니 다른 한쪽으로 그것을 돌려주었다. 또한 어떤 때는 사업으로서 생명을 건 약속을 한 사람이 깨뜨리니까, 다른 일곱 사람이 나타나서 그것을 보상해 주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들을 내가 현명한 덕분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나의 기도에 대하여 절대자가 허락한 것들이다. 나 자신은 모자 속에서 한 마리의 토끼조차 끄집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대공황 동안은 내가 토끼를 바랄 때는 어디선가 토끼가 나타난 듯했다." 힐튼이 한 간증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그는 주장한다. "만일 기도가 오랫동안의 습관이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만일 기도한 적이 없다면 지금이 기도를 시작하기 좋은 기회이다.

인생에는 완전히 파멸되어 도망갈 곳조차 없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벽이 사방에서 무너져 나를 짓뭉개 버리려고 할 때마다 눈앞을 비춰주는 빛이 항상 있었다. 나는 항상 그 빛을 기도 가운데서 볼 수 있었다."

아마 종교를 갖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어려운 중에 희망을 보게 만들며 그 때마다 누군가 자기를 도와준 것 같은 느낌을 흔히 받는다. 일이 잘 풀렸을 때 마음이 넉넉해지는 이유가 그런 현실에 대한 내적인 감사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보통 학교에서 대학입시 시험을 채점하게 되면 세 번내지 네 번 확인하고 검토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신중을 기하면서 처리하여도 최종 감사를 하다보면 어떤 경우는 불리하게 또 어떤 경우는 유리하게 채점이 되어 있는 경우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그때마다 교수들이 농으로 이 친구는 부모님이 아마 절에서 만 배를 했는 모양이야.” 하면서 보이지 않는 힘과 정성에 대해서 한마디씩 하게 마련이다.

우리 모두 과거를 돌이켜 보면 정말 아슬아슬한 기로가 여러 번 있었음을 인정할 것이다. 물론 아쉬운 면을 많이 느끼는 사람도 있을 터이고 많이 감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힐튼은 그러한 그의 성공을 자신의 성취라기보다는 누군가의 도움에 의해서 가능했다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었다. 성공한 자가 교만에서 탈피하는 유일한 방법이 얼마나 내가 감사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면 자신이 얼마만큼 교만한지를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자네를 믿으니까!

 

힐튼호텔이 확장되어 갈 무렵, 힐튼은 당시 돈으로 100만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근사한 호텔을 짓는 것을 계획하고는 자금을 마련해서 공사에 착수하였다. 공사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자금이 계속 부족해서 큰 곤란을 겪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자금 독촉은 빗발치고 공사는 지체되는 어려운 지경에 다다랐다. 공사를 포기할 각오를 하고 힐튼은 친구 하리 사이겔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하리, 이제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어 보이네.”

그렇지도 않아.”

라고 하리가 말하면서 그는 수표장을 꺼내어 5만 달러의 수표를 썼다.

하리 내겐 담보를 할 아무것도 없는 줄 잘 알잖나?”라고 힐튼은 말했다.

내가 그런 걸 요구하는 줄아나?”

만일 내가 실패한다면 원금도 쥐뿔도 다 달아난단 말이야

자네를 믿으니까

힐튼은 이때의 경험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었다고 한다. 물론, 훗날 힐튼은 빚을 갚았을 뿐만 아니라 평생 하리 사이겔을 형제처럼 생각하고 살았다. 신앙심이 신실했던 그는 모두가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함께 일할 수 있는 나라에 태어났다는 데 감사한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과의 관계에 깊은 신뢰를 쌓고자 하는 소망을 마음속에 품게 되었다. “1930년대의 초기, 우리는 모두 불황 속에 있었다. 돈이 핍박한 정도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텍사스와 뉴멕시코에서 자기의 돈을 내어 도와주기도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나신의 신앙을 믿고 미국을 믿는 것처럼, 형제애야 말로 미즈니스, 국가, 그리고 전 세계에 영원한 평화를 확립하는 기초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이것은 힐튼이 당시를 생각하며 한 고백이다.

인간을 신뢰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신뢰하지 못하는 데에서 우리는 추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이 있다. 인간적인 신뢰를 통해서 쌓아올린 성공이야말로 진정으로 많은 사람들을 함께 행복으로 이끄는 성취일 것이다.

 

 

 

 

 

 

 

이상주의자의 승리

 

1942, 남미에 있는 나라인 푸에리토리코의 한 도시에 힐튼을 개점하였을 때, 힐튼은 그의 꿈이 성취되었음을 즐기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만약 비즈니스가 국경을 넘지 않는다면 군대가 넘을 것이다'라는 책 내용이 순간적으로 지나갔다.

국가의 국경의 의미가 희석되어 있고 항공기들이 국경 같은 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이 넘나드는 시기에 호텔 같은 것으로 국경을 넘나들겠다는 발상이 별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에 승리하던 날, 힐튼은 젊은이들이 얻은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빛과 용기가 이 세대에 주어지기를 기도드린 뒤,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인 호텔이 전 세계 사람들이 서로의 이해를 위한 장소로 쓰이는 광경을 상상하였다.

서로가 의견을 교환하고, 함께 일을 하고, 함께 웃고, 마음을 터놓고 놀았던 사람들은 의심과 적의를 서서히 해소해 간다는 것을 그는 잘 파악하고 있었다. 호텔은 그런 목적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으며, 그러한 판단에서 언젠가는 그도 세계 평화를 위하여 다소나마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힐튼 호텔은 그러한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세계로의 확장은 우연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힐튼호텔은 우선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미국인에 의하여 운영되는 호텔을 건설함으로써 호텔이 미국 정부의 해외 원조 계획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호텔들은 무역과 여행을 촉진하고 원조가 필요한 국가에 미국의 달러를 가져갈 수도 있으며 국제 친선 도모에 훌륭한 역할을 하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한 힐튼에게 다행스럽게도 좋은 기회가 왔다. 푸에리토리코 정보가 미국의 호텔 경영자 7명에게 푸에리토리코에 그들의 자본으로 호텔을 세우는데, 그곳에 시설을 갖추어 운영을 맡을 생각이 있느냐고 편지를 보내었다. 힐튼은 즉시 스페인어로 정성껏 자기의 생각하던 바를 다음과 같은 것을 골자로 해서 정성껏 적어 보냈다.

푸에리토리코 측에서 시설 및 가구 같은 것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그 대신 우리는 건축 디자인 컨설턴트를 파견하겠다. 또한 우리는 운영 자본을 가지고 가서 경영을 하여 전 세계에 광고를 하고 판매촉진 전략을 세우겠다. 이익의 3분의 2를 소유주에게 배당하고 3분의 1을 우리가 갖는다는 장기 비율 임대계약과 계약 갱신의 우선권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호텔을 운영하고 싶다. 우리는 또 푸에리토리코 사람을 많이 고용하여 미국에 불러서 미국 호텔에서 일하면서 훈련을 시키고 싶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호텔경영의 최고의 노하우르 터득할 것이다.

푸에리토리코에 최고의 호텔경영 노하우를 전수해 주겠다는 힐튼의 전략은 적중했고 이것을 시작으로 이제 힐튼은 세계 주요 도시 어떤 곳이든 쉽사리 볼 수 있는 호텔이 되었다. 힐튼은 호텔을 단순히 돈벌이로 보지 않고 전 세계 사람들이 서로의 이해를 보다 깊게 하기 위한 장소로 생각하였다.

호텔을 통하여 인류의 화합이라는 것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 힐튼의 리더다운 안목에서 그의 비전을 통한 강력한 리더십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상주의자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상주의가 실제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 추진력 또한 격찬할 만하다. 자신의 일에서 사회를 위한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고 깨닫는 것,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직접 그것을 실천하는 3박자를 모두 갖추는 것은 실제로 매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728x90

댓글